「그대 창밖에서」
오늘은 정말 오랜만에 예술의 전당에서 있었던 「MBC가을맞이 가곡의 밤」에 다녀왔다. 가곡의 밤이 태어난 지 올해로 벌써 40주년이라고 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일기장을 보니 내가 처음 우리 가곡을 접한 것은 1976년이었고, 처음으로 가곡의 밤에 간 것도 1976년이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간 것은 「1998년 신년가곡의 밤」이었으니 벌써 십년도 넘었나보다. 물론 서초구민회관에서 있었던 「테너 엄정행 가곡의 밤」에 가본 적도 있었지만.
모처럼 예술의 전당에 가보니 가곡의 밤에 온 사람들은 대개는 50~60대였다. 간혹 젊은 사람들도 있고, 60~70대 어르신들도 계셨지만 그래도 50~60대가 많은 것은 70년대 가곡의 밤이 크게 호응을 얻었을 때를 추억하는 세대가 바로 우리들 세대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이윽고 불이 꺼지고, 성악가들이 차례로 가곡을 불러주었다. 「솟대」, 「그대 있음에」, 「못잊어」, 「그대 창밖에서」, 「산노을」, 「그리운 금강산」, 「고향의 노래」, 「향수」, 「내 맘의 강물」. 그리고 공연이 끝나갈 무렵 원로성악가로 불리는 테너 엄정행, 박인수, 소프라노 이규도, 백남옥, 곽신형, 바리톤 박수길, 김성길님 등이 나와 3곡의 가곡을 합창하였다.
아, 거기 우리들이 맑고 고운 그의 음성을 듣고 열광하던 테너 엄정행이 있었다. 언제까지나 영원한 청년일 것 같던 그 분도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때문에 독창을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분의 상기된 얼굴에는 청년 시절 우리가 보았던 우리 가곡에의 열정이 가득하였다. 나는 아직도 그 분의 「목련화」를 듣고 가슴 설레던 느낌이 그대로인데, 세월은 그 분에게도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래도 행복하였다. 목소리에 조금 힘이 없으면 어떤가. 그 대신 삶의 무게와 연륜이 묻어나서 더 좋은 것 같지 않은가. 나는 생각했다. 세월이 더 흐른 후에라도, 머리가 온통 백발이 되어서라도 가곡의 밤이 열리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가곡을 듣고 싶다고. 늙은 노신사가 되어 여위고 메마른 아내의 손을 잡고 공연장에 앉아 음악을 듣다보면 그래도 우리 인생은 아름다웠노라고 회상할 수 있지 않을까.
어느새 나는 가을밤, 이슬이 내리고 풀벌레 소리가 들려오는 어느 달빛 고요한 언덕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몸도 마음도 촉촉하게 이슬에 젖은 채 시리도록 푸른 달빛을 보며 옛 생각에 사로잡히던 그 순간은 그래서 시공을 뛰어넘어 70년대 그 어느 시점으로 돌아간 듯하였다.
세상의 어느 노래도 우리 가곡만큼 우리 민족의 정서와 삶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한 음악은 없을 것이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아간 시인과 음악가들이 만든 시와 곡은 또 얼마나 아름다운지. 얼마나 그리웠으면 그토록 전율이 가슴을 휘젓고 가는 걸까. 얼마나 아름다운 선율이면 그렇게도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일까.
그 속에 내 어린 시절에 보던 고향의 별들이 있었고, 도시의 버스차창 밖으로 내리던 함박눈이 보였다. 그 속에 종로서적에서 퇴근시간에 듣던 가곡 「산노을」도 있었고, 화사한 봄날 꽃이 지던 밤의 들뜸과 설렘도 있었으며, 어느 가을밤 잠 못이루며 듣던 애절한 선율 「그대 창밖에서」도 있었다.
「그리운 마음」이 듣고 싶었지만 그 곡은 없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날은 왠지 테너 김영환이 부르던 「그대 창밖에서」라는 아련하고 애절한 가곡이 귓가에 남았다.
그대 그리워 노래하네.
휘영청 밝은 달빛아래
애절한 나의 노래 듣는가.
두견새 혼자 울어 예는 밤
이 마음 저 밤새와 같이
이 밤 허비며 사랑노래 부르네.
괴로운 내 가슴속엔 한 떨기 장미
오, 내 사랑 말해다오
애타는 이 마음 어이해 들어 주오
저 달이 지도록 나 그대 창가 밑에
서성이면서 기다리네.
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박화목시, 임긍수곡)
집에 와서도 그 노래는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왜 우리는 이런 노래를 잊고 산 것일까. 우리도 아직은 이런 애절한 사랑노래를 듣고 부르고 싶다. 가을밤이 깊어간다. 이 밤 어느 시인이 또다시 사랑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2011. 9. 23.)
첫댓글
작가 님
가곡의 일지로 책을 한권매셔도요
잘 보고 갑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