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구원을 얻는 생활(得救의 生活)
요한복음 17:15
홍제원교회
或曰歸依基督則享天國之福, 一入天國則生活安全, 誘惑絶無, 嫉妬又無, 戰爭不見, 惡戰苦鬪又無, 一入天國有如此之逸樂也. 故信主也, 此等福樂非不無也, 而所當知者, 非可如是徒受者也. 且非可如是徒享也. 主使人知受之有法, 享之亦有法何也? 多經苦難而受之, 多知苦難而享之, 是受眞受也, 是享眞享也. 不經苦而受之者, 不貴其樂也, 不知苦而享之者, 不久其樂也. 苦而後知甘, 危而後知安, 人若知此理則不憎流汗, 而夏日必勤勉, 冬日必勤讀也. 十指不動而食者謂之盜, 榟人不汗血者亦謂之盜也. 皆不經苦而得也. 古之時野人必養君子, 君子必治野人, 所謂君子者不知農而食, 不知商而財, 故長安之人, 出野見野禾, 問之曰是何物? 答曰살나무云, 此等人所謂君子也. 得治野人, 在高位而治國, 國何以不亡也? 不知馳馬而爲軍部大臣者此也. 一大官至西人球場, 見庭球曰 何不使僕爲之, 而何乃自苦如此云. 是等皆所謂君子也. 豈不寒心乎? 或曰人之生不能免惡, 世人皆惡, 我何能獨善乎, 世人皆醉我何能獨醒乎? 一死徒無事, 必離世而後能免惡, 而或入深山而守獨善, 不然不願在世投水, 或自縊者多, 皆爲惡所誘致而然也. 今日魔誘甚多, 靑年殞身滅命者不遑枚擧, 然主則不然, 人之自殞爲罪甚大, 我之命受之於天, 不可自由, 禮記檀弓曰 溺水死者自値, 死不弔云亦此意. 受之於天而自絶者, 得罪於天故主禁之. 何必離世而後必禁惡也? 人之生世如舟用水, 水雖險舟能利用, 舟涉之, 世雖惡, 人能利用, 涉之. 不必厭世, 又不必潔世也. 世之所滔滔如海, 人易溺之故必愼勿溺云也. 彼不附世, 世必惡之, 逼近繼至故人易陷惡. 故主祈之曰 使彼勿陷惡焉, 不陷惡之道何也? 人之生有肉有靈, 從肉而生者不能不陷, 從靈而生者不必陷也. 肉生與靈生相異也. 所謂靈者不隨肉而死, 不隨肉而生也. 肉雖滅靈自在, 吾等居肉之時, 必兼靈生可也. 肉病而後死, 靈罪而後死. 世之帝王能殺人之肉而不能殺人之靈也. 天下可奪人靈不可奪也. 靈生者主必保佑, 使不陷惡, 肉生者主不能保佑, 從魔故也. 倡無神論不爲神不畏天, 其心如覂駕之馬, 奔竄傷人也. 主能保佑者, 야곱 是也. 主不能保佑者, 에셔是也. 蕩子離父, 父不能保子, 子得專意放蕩, 至食豆穀, 痛哭生悔至父, 是足證其父之不能保子也. 人若從肉而生則神卽離去, 亦不能保肉也. 故主求父曰保全使不離去.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리스도에 귀의하면 천국의 복을 누릴 것이며, 한번 천국에 들어가면 생활이 안전하여 유혹도 절대로 없고, 질투도 없으니, 한번 천국에 들어가면 이러한 일락(逸樂)을 누릴 수 있으므로 주님을 믿는다’고 합니다. 이러한 행복과 일락이 없지는 않겠지마는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이와 같은 복락을 그냥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이것들을 그냥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것을 받는데도 방법이 있고, 누리는데도 역시 방법이 있다고 한 것은 무엇입니까? 많은 고난을 겪고 난 뒤에 그것을 받아야 하고, 많은 고난이 있음을 알고 그것을 누려야 이것이 참된 받음이고 이것이 참된 누림이라고 하였습니다. 괴로움을 겪지 않고 받은 자는 그 낙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고통을 모르고 그것을 누린 자는 그 낙을 오래 간직하지 못합니다.
쓴 것을 맛본 뒤에 단 것을 알게 되고, 위험을 겪은 뒤에 편안함을 압니다. 사람들이 이 이치를 알면 땀 흘리는 노력을 싫어하지 않아서 여름에도 반드시 애써 노력할 것이고, 겨울에도 애써 독서할 것입니다. 열 손 가락 까딱하지 않고 먹는 자를 도둑이라고 합니다. 목수도 땀 흘리지 않으면 이것도 역시 도둑이라고 이릅니다. 이는 모두 고통을 겪지 않고 얻었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들에서 농사짓는 사람인 야인이 정치하는 사람인 군자(君子)를 길러내고, 그 군자는 반드시 그 야인을 다스렸습니다. 그런데 요즈음 이른바 정치가인 군자라는 사람들은 농사를 모르고 밥을 먹으며, 장사하는 일을 모르면서 재물을 모읍니다. 그렇기 때문에 서울 사람들이 들판에 나가서 벼를 보고 ‘이게 무어냐’고 묻게 되고, 또 그것에 답하는 사람은 ‘그것은 쌀 나무’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이른바 정치하는 군자로서 야인들을 다스리게 되고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니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습니까?
말을 타고 달릴 줄 모르는 사람이 군부대신(軍部大臣, 국방장관)이 된 자가 그런 사람입니다. 어떤 높은 관리가 서양 사람들의 공치는 장소인 축구장에 들어가서 테니스[정구庭球]를 하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왜 종을 시켜서 하지 않고 저렇게 직접 애를 먹느냐’라고 하였답니다. 이런 사람이 이른바 군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어찌 한심하지 않습니까?
어떤 이는 말하기를 ‘사람이 살아가자면 악한 일을 면할 수는 없는데, 세상 사람이 다 악한 데 나 혼자 어떻게 선할 수가 있는가, 세상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혼자서 어떻게 깨어 있느냐’고 합니다. 한번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버리니 반드시 세상을 떠난 뒤라야 악을 면할 수 있다고도 하고, 혹은 깊은 산 속에 들어가서 홀로 선(善)을 지키려고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세상에 살기 싫다고 물에 몸을 던진다든지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는 자도 많습니다. 이게 모두 악의 유혹에 홀린바 되어 그러는 것입니다.
오늘날 마귀의 유혹이 매우 많아서 청년들이 몸을 버리고 목숨을 잃는 자를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죄가 매우 크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목숨은 하늘에서 받은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하여서는 아니 됩니다.
유교의 경전인 <예기(禮記)> 단궁편(檀弓篇)에는 ‘물에 빠져 죽은 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조문을 하지 않는다’(溺水死者自値 死不弔)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그러한 뜻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하늘에서 받은 것인데 스스로 끊었다면 하늘에 죄를 얻은 것이므로 주께서 금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상을 떠난 뒤에 악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세상에 살아가는 것은 마치 배가 물에서 이용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이 아무리 위험하여도 배는 능히 이용하여 그 물을 건넙니다. 세상이 비록 험하여도 사람이 능히 이용하여 그 세상을 살아나가야 합니다. 세상을 싫어하거나 세상을 살아가는데 고결한 체할 필요도 없습니다. 세상의 물결은 바다처럼 험난하여 사람이 빠지기 쉬운 고로 반드시 조심하여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아부하지 않으나 세상이 그를 악하게 만들려고 가까운 곳에서 계속 핍박하므로 사람들은 악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기도하시기를 ‘악에서 구원하옵소서’고 하셨습니다.
악에 빠지지 않는 방도는 무엇입니까? 사람의 생명에는 육(肉)이 있고, 영(靈)이 있습니다. 육을 좇아 사는 사람은 빠지지 않을 수 없지만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반드시 빠지는 것은 아닙니다.
육생(肉生)과 영생(靈生)은 서로 다릅니다. 이른바 영이라고 하는 것은 육을 따라 죽지 않고, 육을 따라 살지도 않습니다. 육이 비록 없어져도 영은 스스로 있습니다. 우리가 육에 의지해 살 때에 반드시 영을 겸하여 살아야 합니다. 육은 병든 이후에 죽으나, 영은 죄를 진 이후에 죽습니다. 세상의 제왕들도 사람의 육체는 죽일 수 있지만 사람의 영혼은 죽일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을 빼앗을 수는 있어도 사람의 영혼은 빼앗을 수가 없습니다.
영으로 사는 자는 주께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하시지만, 육으로 사는 자는 주님께서 도울 수 없습니다. 마귀를 따르기 때문입니다. 무신론을 주창하는 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그 마음은 멍에를 벗어놓은 말과 같아서 함부로 달려 나가 사람을 상하게 합니다. 주께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는 야곱이 바로 그 사람이었고, 도움을 줄 수 없는 자는 에서가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방탕한 자식이 아버지를 떠나면 아버지가 그 자식을 도울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 전적으로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콩밥을 먹는 감옥 생활을 하게 되어 뉘우쳐 통곡하고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것을 보면 이는 아버지가 그 자식을 돕지 못한 충분한 증거입니다. 사람이 만일 육을 따라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가게 되므로 역시 그 육을 보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아버지께 구하여 말하기를 ‘보존하여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