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실패를 돕는 자(助失敗者)
마가복음 9장
전도관(傳道館). 상동교회. 중앙교회. 서강교회
冒死而後得生, 排暗而後得明, 排難而後得樂, 皆宗敎之賜物也. 佛則厭世而避之, 儒者傾者覆之, 楊子拔一毫而利天下不爲, 此何誤也? 主則不然, 有積極的性質, 冒萬死而往, 至於成功乃已也. 今弟子等긔도而失敗, 醫病而失敗者, 其實由弟子等驕傲而成也. 故有過失而致之則當受救主之責, 而使之悔改可, 而只曰我忍爾幾時也. 吾等之過失主不忍之則無一人生存也. 故主忍弟子之過失, 而使之呼兒醫病, 使兒之父不落心也. 不責弟子, 不問病兒, 使失敗者得救, 豈非幸也? 故人當失敗時, 徒悲傷落望無益也. 當更思其敗由何在, 醫對病人先察病理何在而後投藥可也. 人間萬事總在于神之攝理也. 成亦天敗亦天也. 今人不察, 成則歸己, 敗則怨天, 此時弟子等失敗, 若不問于主則失敗而已也. 然失敗而心憂, 乃問于主, 使之醫病, 由此觀之, 主助失敗者使不落心也. 如吾等計失敗, 不必怨天, 又不必尤人, 靜而思之, 索其原因可也. 夫心不靜則不察也, 譬如風簸浪飜, 不能見水中之月也. 여호수아敗于艾城, 推究其原因所在, 終得亞干而治之, 요나之船飄于水中, 乃抽票得요나之罪, 吾等失敗不思其原因, 妄動妄行, 反觸神怒, 奈何故, 弟子失敗問由於主, 故不至終敗也. 吾人失敗常常推究, 原因在人故, 怨人尤人, 口有惡言, 家叛親離, 家內紛亂, 敎會紛爭, 失敗而已也. 終無回陽之道也. 且人心易蠱, 不察甚矣. 蠱者使物促腐敗也, 非成也. 人反以成看之, 終蠱終敗也. 然靜而思之, 我與神有何損失而致此失敗也? 進伏于閤門之前, 謹俟嚴譴, 一時神怒震疊, 使我至劍死, 口不發惡, 終必伸雪, 我首得成矣. 古人謂柔能勝强是也. 今世如病兒不自由, 病入瞽盲, 經濟政治法律敎育軍事皆病的狀態也. 誰能醫之? 生命奄奄, 此兒不染罪惡, 此病由何而生也? 有一人携瞽人而至, 主問曰此兒之瞽目父母之罪乎, 此兒之罪乎? 主曰非父母之罪, 非此兒之罪也. 神欲顯其奇能也云. 誠哉是言也! 今日世人之瞽盲, 果誰之罪乎? 或怨祖先, 或怨隣人, 如此推測, 皆不可也. 只可推究其原何在也. 靜而思之, 當改法易轍可也. 失路者前使之示雲柱火柱到曠野矣. 今人不察, 但椎胸痛哭, 只呼無可奈三者. 且病兒之父落心甚矣. 加之以酒, 謗怨責瀆不已, 實無所益. 夏甲爲其子渴死痛哭, 不知在目前失敗, 痛哭不可, 悲痛亦不可, 憂歎亦不可矣. 當思其原何在也. 且何以得救也? 死生之門, 苦樂之種也. 此理甚眞, 我何不信也? 一敗兵家常事也, 此何足愁? 成吉思汗戰敗沒落, 見厠壁蟻苦力攀上, 乃更收拾大勝云. 勇之事可足證矣. 摩西敗於血氣, 逃至西乃山, 靜而思之, 靜能生慧. 野球時擊뽈, 選手若不沈黙而妄動則一不中球. 失敗失敗矣. 過則改, 善則加勉, 惡大砲善一丸必不能敵, 故用力必倍可矣. 今人若不追究悔改則失敗, 但失敗已也. 今亦不晩, 主爲我成功之母, 生命之泉, 不依何如, 不飮何如也? 譬如植物, 在巖石上之樹移于溪邊, 比他樹尤茁, 發葉結實榮歸上帝矣. 勿恨地少, 勿悔人寡, 地偏人寡皆不關, 但與神接與不接已也. 今欲救失敗者, 果主義乎,政治乎,法律乎,敎育乎,戰爭乎,經濟乎, 皆非救援之道也. 淺見薄識何足以知之? 余曾聞독수리의物語, 鷙鳥常常飛翔于蒼空之中矣. 一日誤被獵者射落, 鷙在平地暗思曰, 彼空是我放心遊娛之處, 而反思地上之物而下來, 誤被創傷, 眼光閃閃, 兩翼翩翩, 欲一振飛而復上蒼空云. 信者當如독수리之勇敢. 奮飛活躍, 不撓不屈, 發見生命一直向往, 雖天下不易, 有此生命者, 不淫不奢, 不偶不飮酒, 不貪財, 皆害之生命故也. 有此生命者, 主必不棄. 雖在失敗之中, 主必扶護更起, 如彼得之溺海, 主來拯之曰, 少信者乎, 何疑也? 信與知合而爲一, 且信行合而爲一, 信而不行則是未信也. 信而至於行則謂之信. 主佑此信行兼備之人, 使不落莫也. 嗚呼! 今日朝鮮人, 欲誰依乎? 主曰受苦負重者來吾, 人之負可謂重矣. 誰與相議也? 與主相議, 使之輕重也.
죽음을 무릅쓰고 나간 뒤에 살 수가 있고, 어둠을 물리친 뒤에 밝음을 얻고, 곤란을 헤쳐나간 뒤에 즐거움이 있으니, 이게 다 종교에서 준 것들입니다.
불교는 세상을 싫어하는 염세사상으로 세상을 피하고, 유교는 ‘기울어진 것은 엎어버리라’(傾者覆之)고 하였고, 양자[楊子]는 ‘나의 털 하나라도 뽑는 것 같이 작은 손해를 본 뒤에 천하가 다 이익이 된다고 하여도 나는 하지 않겠다’(拔一毫而利天下不爲)고 하였으니 이게 얼마나 잘못 된 일입니까? 주님께서는 그렇지 아니하여 ‘적극적인 성품을 가지고 만 번의 죽음도 무릅쓰고 나아가서 성공을 이루고 난 뒤에 그치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기도를 하여도 실패하고, 병을 고치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것은 그 실상은 제자들이 교만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실이 있어서 그렇게 되었다면 마땅히 구주의 책망을 받아 회개를 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참으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과실을 주님께서 참아주지 않으면 한 사람도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제자들의 과실을 참고 어린 아이를 불러 병을 고쳐주시어 그 아이의 아버지로 하여금 낙심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았으며 실패한 자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하였으니 이 어찌 다행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람들은 실패할 때를 당하여 그냥 슬퍼하고 상심하여 희망을 잃는 것은 도움이 안 됩니다. 마땅히 그 실패의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의원이 병자를 상대할 때 먼저 병의 근원이 어디 있는가를 살핀 뒤에 투약을 하여야 합니다. 인간 만사는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 달려 있습니다. 성공도 하늘이 주시고 실패도 하늘이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살펴보지 않고 성공은 자기에게 돌리고 실패하면 하늘을 원망합니다. 이때 제자들의 실패를 만일 주님에게 묻지 않았더라면 그냥 실패한 것뿐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한 뒤에 근심이 되어 바로 주님께 묻고 병을 고쳐달라고 하였으니 이런 것을 가지고 볼 것 같으면 주님은 실패자를 도와 낙심하지 않도록 하십니다.
만일 우리들의 계획이 실패하면 하늘을 원망할 필요도 없고, 또 남을 원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조용히 생각해 보아 그 원인을 찾는 것이 옳습니다. 대체로 마음이 고요하지 않으면 살피지 못합니다. 비유하여 보면 바람이 불어와서 물결이 일어나면 물속에 비친 달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여호수아가 아이성에서 실패하고 그 원인의 소재를 찾아본 결과 마침내 아간을 찾아 다스렸습니다. 요나가 탄 배가 물 가운데 표류하였는데 이에 표를 뽑아 요나의 죄인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실패를 하면 그 원인은 생각지 않고 망령되게 함부로 행동하여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이 실패하자 그 원인을 주님께 물었으므로 마침내 실패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실패는 늘 원인을 찾아서 그 원인이 사람에게 있으면 그 사람을 원망하고 허물하여 입으로 몹쓸 말을 하니 집안이나 친척이 떠나게 되어 집안에 분란이 생기고, 교회에 분란이 생기어 실패가 따를 뿐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좋은 때로 돌아오는 방도가 없게 됩니다. 인심은 미혹하기 쉬우니 잘 살피지 않은 것이 심하기 때문입니다. 미혹한다는 것은 물질을 부패하기 쉽게 합니다. 성공한 것이 아닌데 사람들은 도리어 성공으로 보게 되면 결국 미혹되어 끝내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나 고요히 생각하여 ‘내가 하나님에게 무슨 잘못을 하여 이러한 실패를 하였는가?’하고 하나님의 문 앞에 나아가서 엎드려 삼가 엄중한 질책을 기다리게 되면 한 때 하나님의 진노가 겹쳐 나로 하여금 칼에 찔려 죽게 되더라도 내 입에서 나쁜 말이 나오지 않으면 마침내 원통함을 펴고 내 머리는 그냥 남게 되는 것입니다. 옛사람이 이른바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병든 아이와 같이 부자유하여 졌습니다. 병은 골수 속에 깊숙이 들어가서 경제·정치·법률·교육·군사가 다 병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누가 능히 그것을 고치겠습니까? 생명이 가물가물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죄악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이 병을 어디서부터 살려야 할까요? 어떤 사람이 눈먼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주님이 묻기를 ‘이 아이가 눈이 먼 것은 부모의 죄 때문인가, 이 아이의 죄 때문인가?’하고는 주님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이 아이의 죄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이한 능력을 드러내 보려고 한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이 말은 참으로 진실한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이 골수에 병이 든 것은 과연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어떤 이는 조상들을 원망하고, 어떤 이는 이웃을 원망합니다. 이렇게 추측하는 것은 다 불가합니다. 다만 그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조용히 생각하여 볼 때 마땅히 법을 고치고 가던 길을 바꾸어야 합니다. 길 잃은 자에게 앞에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을 보여 주어 광야에 이르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오늘 날 사람들은 잘 살펴보지도 않고 다만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오로지 ‘다 안 돼[無可奈]’하는 석 자만을 부르짖습니다. 또한 병든 아이의 아버지는 낙심만 심하여 술을 마시고, 비방하고 헐뜯고 나무라기를 마지않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로 도움 될 것이 없습니다. 하갈이 그 자식이 목말라 죽게 되는 것을 보고 통곡하였는데, 목전에 실패가 있는 것을 모르고, 통곡하는 것도 불가하며, 비통하는 것도 역시 불가하며, 한탄하는 것도 역시 불가합니다. 마땅히 그 원인이 어디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또한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는가를 생각하여야 합니다.
죽음은 삶의 문이고, 고통은 즐거움의 씨입니다. 이 이치는 매우 진실합니다. 내가 어찌 믿지 않겠습니까? 한번 실패는 병가의 상사(兵家常事)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어찌 족히 근심하겠습니까? 칭기스칸이 전쟁에 져서 몰락할 무렵에 변소의 벽에 개미가 죽을 힘을 다하여 올라가는 것을 보고 마침내 패잔병을 수습하여 다시 싸워 크게 이겼다고 합니다. 용감한 일로 가히 증명할 만합니다. 모세는 혈기를 믿다가 실패하여 시내산에 도망하여 조용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조용함은 지혜를 낳을 수 있습니다.
야구에서 때로 볼을 치는데 선수가 만일 조용히 생각하지 않고 함부로 움직이면 공을 하나도 맞추지 못합니다. 실패와 실패뿐입니다. 과실이 있으면 고쳐야 하고, 잘 된 것은 더욱 힘써야 합니다. 악한 대포는 잘 쏜 탄환 하나를 상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배로 힘을 써야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만일 잘못을 추구하여 회개하지 않으면 실패합니다. 다만 실패할 뿐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 성공의 어머니이시요 생명의 샘입니다. 의지하지 않고 어떻게 할 것이며, 마시지 않고 어떻게 하겠습니까? 식물에 비유하여 말하자면 ‘바위 위에 있는 나무를 시냇가로 옮겨 심으면 다른 나무보다 훨씬 싹이 잘 나와 잎이 자라고, 결실을 하여 영광스럽게 하나님께 돌아갈 것입니다. 땅이 적다고 한탄하지 말고, 사람이 적다고 후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땅이 치우쳐 있고 사람이 적게 있는 것은 관계할 것이 못 됩니다. 다만 하나님과 가까이 접하여 있는가 접하지 못하고 있는가에 있을 뿐입니다.
지금 실패를 구원하려고 하는 것은 과연 주의(主義)입니까, 정치입니까, 법률입니까, 교육입니까, 전쟁입니까, 경제입니까? 이는 다 구원의 방도가 아닙니다. 옅은 지식에 모자라는 학식을 가진 자가 어떻게 그것을 알겠습니까?
나는 일찍이 독수리에 대한 일화를 들었습니다. 독수리는 늘 파란 공중에 날아다니었는데 어느 날 사냥꾼의 총에 맞아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독수리는 땅위에 누워 조용히 생각하여 보며 속으로 이르기를 ‘저 공중이 내가 마음 놓고 노니는 곳인데 땅위의 물질을 탐내어 내려왔다가 이렇게 총알을 맞고 상처가 났다. 눈알을 번득이며 두 날개를 펄럭이며 저 창공으로 솟아 올라가고 싶다’고 하였답니다. 믿는 자는 마땅히 독수리 같이 용감하게 떨쳐 날며 활약하고, 흔들리지 않고, 굴하지도 않아야 생명을 발견하고 일직선으로 나아 갈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천하를 준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명을 가진 자는 음탕하지도, 사치하지도 않으며, 우상도 숭배하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재물을 탐내지도 않으니, 이는 다 생명을 해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명을 가진 자를 주님께서 반드시 버리지 않습니다. 아무리 실패한 지경에 있어도 주님은 반드시 붙들어서 다시 일으켜 세울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바다에 빠졌을 때 주님이 오셔서 건져주고 이르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무엇을 의심하느냐?’ 하였습니다. 신앙과 지혜가 합하여 하나가 되고, 또 믿음과 행함이 합하여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믿으면서 행하지 않으면 이는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행동으로 이르게 하는 것을 신앙이라고 이릅니다. 주님은 이와 같이 믿음과 행함을 겸비한 사람을 도와 희망을 잃지 않게 하십니다.
아아! 오늘의 조선 사람은 누구를 의지하려고 합니까? 주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는 다 내게 오라’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짐이 가히 무거울 때, 누구와 상의하겠습니까? 주님과 상의하면,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