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영의 묘 / 사도행전 2:26, 시편 16:8-11
영혼에는 무덤이 없고 육체에만 무덤이 있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한번은 무덤에 들어가게 됩니다. 무덤에 들어가는 것은 육신이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은 무덤에 영원히 묻혀있지 않고, 주님이 오실 때 반드시 무덤에서 다시 일어납니다. 따라서 믿는 사람의 무덤은 영적인 무덤이지 육체의 무덤이 아닙니다. 육체의 무덤은 다시 일어날 수 없지만, 영적인 무덤은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살며 기뻐하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다윗 선지자가 미리 예언했고, 오순절에 베드로도 말씀한 내용입니다.
주님을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신 것처럼, 주님을 믿는 사람들도 무덤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주님과 함께 다시 일어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믿는 사람은 주님이 우리 몸을 대신해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죽음을 대신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기에 주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성찬식이 바로 이를 상징하는 예식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가지셨던 생명을 우리도 믿음을 통해 얻게 되었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썩지 않게 하시고, 주님처럼 부활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에 대한 관점이며 썩지 않는 유산입니다.
믿는 사람의 영혼은 무덤에서 잠을 잡니다. 잠자다가 나팔 소리가 날 때 깨어 일어나게 됩니다. 교회에서 공동묘지를 정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 그 산에서 모두가 함께 부활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이겠습니까?
옛날 신라의 문무왕이 사냥을 좋아해서 나라에 큰 폐를 끼쳤습니다. 신하 김후직이 자주 간언하며 정치에 힘쓸 것을 권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습니다. 김후직은 죽을 때 자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왕이 사냥하러 가는 길가에 묻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후 왕이 다시 사냥을 나가려 할 때 "왕은 나가지 마십시오"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소리의 출처를 찾아보니 김후직의 무덤에서 나는 것이었습니다. 왕이 그 말을 듣고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만약 나갔더라면 큰 위험에 처할 뻔했습니다. 백제군이 그 산 아래에 매복해 있었던 것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를 '묘간(墓諫: 무덤의 간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직접 볼 수 없을지 몰라도, 충신들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개성의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피 자국이 있고, 민영환의 집에는 그가 남긴 피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일본의 신도 양은 미국 유학 중에 감리교 연회에 참석하여 일본인들의 영혼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 결과로 많은 후원금을 받아 동지사대학을 설립하고 전도와 교육 사업에 힘썼습니다. 신도 양이 사망한 후, 그의 유해는 학교 근처에 안장되었고, 한식과 추석이면 그 학교 졸업생들이 흰 옷을 입고 그의 무덤 앞에 모여 눈물로 기도를 드립니다.
주시경 선생의 무덤은 고양군 공동묘지에 있습니다. 그곳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묘소를 참배하고, 주변의 잡초 한 포기라도 뽑고 갑니다. 왜일까요? 그는 한글 연구의 선구자이기 때문입니다. 장차 주님이 오실 때, 천사들은 모든 영혼의 무덤을 조사하여 한 사람도 빠짐없이 불러 모을 것입니다. 마치 유월절에 천사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문설주의 피를 확인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봄풀은 해마다 돋아나지만 왕손은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말은 돌아오지 못하는 영혼을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믿는 자들은 모두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나팔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고, 천사가 명령할 것입니다. "마귀야 물러가라, 지옥으로 들어가라. 쇠사슬로 묶어라, 결박하라." 천사들이 떼를 지어 마귀들을 끌고 갈 것입니다. 마치 국군이 입성할 때 공산당원들을 체포하여 떼 지어 끌고 가던 것처럼, 당시 더운 날씨에 윗옷을 벗기고 결박하여 끌고 가던 모습을 보았듯이, 마귀들도 그렇게 결박당할 것입니다. 신도들을 해친 자들도 마찬가지로 결박당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