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사로 바라본 신앙고백서 : 서론(3)
율법과 칭의
개혁교회(개신교)는 법정적인 의를 말한다.
법정적 칭의는
“율법은 지고한 하나님의 뜻이며 모든 시대에 요구되는 절대명령이다.
율법은 죄 아래에 있는 인간의 의를 정죄한다.
이는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은 율법을 지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셔서 율법을 지키게 하셨으며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를 믿는 자들에게 전가하여 하나님 앞에 서게 하신다”
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이 옛 언약내용이며 여호와의 옛 통치질서임을 말한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의의 법이다.
이는 언약 당사자에게 의로움은 언약에 신실함이기 때문이다(눅1:6, 빌3:6).
이러한 율법의 의로는 가나안땅에 거할 수 있으나 천국에는 들어가지 못한다(마19:16-30).
이는 율법으로는 죄를 없이 하지 못하고(히10:4,11)
그 아래 있는 자를 온전케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히7:16-19, 10:1).
또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생명의 법이다.
이는 율법이 구약에서 하나님을 알고 섬기도록 주어진 유일한 계시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성경은 관계적인 의를 말한다.
이는 언약은 하나님과 백성과의 관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약적 관계를 따라 신구약 백성의 본질과 의로운 여부가 결정된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율법을 신실하게 행하면 의로운 백성이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거하면 의로운 백성이다.
그러나 구약의 의는 종(머슴)으로서 의로움이고
신약의 의는 아들(자녀)로서 의로움이다.
구원론
개혁교회(개신교)는 율법에 일치하는 존재는 성자뿐이며
성자께서 율법을 지켜서 얻은 의를 믿는 자에게 전가하신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하나님 법정에서 의롭다고 함을 얻는다고 말한다.
이처럼 구원을 받은 후에는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행하여 죄와 싸워서 하나님을 닮으며
육체로 살아갈 동안에는 온전치 못하며 죽을 때에서야 영화에 이르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이 옛 언약내용이며 여호와의 옛 통치질서임을 말한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을 알고 섬기게 하는 생명의 법이고
언약 당사자로서 언약에 신실함으로 얻게 되는 의의 법이다.
따라서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규범이며 지혜이고 상급이다.
그런데 언약이 갱신되면 언약내용인 율법도 변경된다.
사도들이 율법을 정죄하고 믿음을 강조함은 신성과 인성의 의로움 대비가 아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을 바라본 구원 역사적인 대비이며 종말론적인 평가이다.
모세를 통해서 주어진 율법의 의와 아들을 통한 온전한 의의 대비이다.
따라서 구원이란 개인의 변화과정이 아니라 구원역사에 속한 일이다.
이스라엘은 모세에게 속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구원을 받으며
우리는 아들에게 속하여 하나님 아들(자녀)로 구원을 받았다.
이스라엘은 가나안땅에서 휘장으로 가리신 여호와와 함께 살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았다(엡2:6).
하늘에 앉았다고 함은 하나님 보좌에 앉으신 그리스도의 영광과 권세에 참여한다는 말이다.
교회론과 성찬
개혁(개신교)신학은 유형교회와 무형교회로 나누며
무형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완전한 교회임을 말한다.
유형교회 가운데는 가라지가 섞여 있으며 아직 죄와 싸우는 불완전한 교회라고 말한다.
성찬에 대해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식사로 말한다.
그런데 성찬에 대하여 그리스도 인성이 임재하는 방식을 따라 여러 주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의 본질이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임을 말한다.
교회의 근본적인 의미가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이라는 말이다.
왜 하나님께서 각 시대 백성과 함께하시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구원 경륜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 여호와께서는 죄로 인한 장벽이 있는 관계로 동행하시며
신약에서는 온전히 하나가 된 관계로 함께 하신다.
이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구원하셔서
그리스도와 함께 앉은 새 백성으로 완성하기 위함이다(창2:8, 엡2:6).
첫 창조를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온전케 하기 위함이다(계21:1-2).
이는 에덴을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하기 위함이다(계21:2).
출애굽 때의 유월절 식사는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통해서 구현된다.
제사장이 여호와의 단과 상에 제물과 떡을 드리면,
가나안땅에서 생산된 제물과 떡을 죽음과 불을 통과하여 드리면,
그것은 여호와께서 흠향하시는 제물이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제물과 떡을 흠향하신 후에 제사장의 양식으로 내어주신다.
제사장은 여호와 앞 성전에서만 제물과 떡을 먹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한 상에서 먹고 마시는 교제의 생명을 누렸다(고전10:18-21).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예수께서도 제자들과 유월절 식사하신다.
유월절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서는
“받아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라고 말씀하신다(마26:26-28).
이는 사람이 되신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살과 피로 맺으신 언약식이다.
옛 언약 아래에서는 가나안땅의 소산물을 교제의 양식으로 주셨지만,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떡과 음료로 주신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늘의 양식이다.
그래서 교회가 모일 때는 말씀선포와 아울러 항상 성찬을 나눈다.
이처럼 복음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를 집행함으로 그리스도와 생명의 친교가 이루어진다.
이것이 교회의 표지이다.
이러한 표지를 통해서 교회가 하나님과 온전히 하나가 됨이 누린다.
종말론
개혁교회(개신교)는 종말에 대해서 개인의 종말과 역사의 종말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첫 창조의 썩어지는 질서를 극복한 새로운 존재와 세계로 말한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그리스도 나라의 영광과 완성으로 설명한다.
종말은 개인이나 세상의 끝을 가리키지 않는다.
종말론적이라는 말도 구원역사의 마지막 시점,
하나님의 구원역사가 더 이상의 진행이 없이 성취된 시대를 의미한다.
이처럼 구원역사가 마지막에 도달하였으므로 하늘의 질서가 세상에 시행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천상세계와 우리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다.
신앙고백서에서 종말을 언급함은 죽어서 천당을 간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는 세상이 주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거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으므로
우리도 세상을 이긴 바가 되었음을 강조하여
그리스도의 믿음 가운데 굳게 서도록 하기 위함이다.
하늘에 속한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