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농촌에서 고라니와 같이 살아가기
고라니 울음소리는 특별하다. 좋게 들어주면 여자 테니스 선수인 사라포바가 강하게 공 칠 때 내는 소리와 비슷하고, 나쁘게 들릴 때는 미친 사람이 악쓰는 소리 같다. 고라니는 세계적으로는 멸종위기 종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는 많다. 산 근처의 농촌에는 고라니가 우글거린다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흔하다. 우리 마을이 도고산 자락에 있어 당연히 고라니가 아주 많다. 집 앞 매실 밭 한쪽 풀 많은 곳에 고라니 2마리가 아예 자리 잡고 산다. 아침 일찍 밭에 가면 서로 가끔 마주 쳐 깜짝 놀란 경우가 꽤 있다. 이웃 사람은 산책 중 덤불 속에서 고라니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어 지팡이로 머리를 툭 치니 쏜살같이 도망간 경우도 있다한다.
얼마 전에는 한 밤 중에 고라니 악쓰는 소리가 하도 심해 이층 침실에서 밖을 내다보니 가로등 밑 길에서 동물 2마리가 엉켜있었다. 자세히 보니 한 마리는 고라니이고 다른 한 마리는 개였다. 개가 고라니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었다. 10분 쯤 지나 고라니가 꼼짝 못하고 늘어지니 개는 주변을 돌더니 사라졌다. 들개인지 목줄 풀어진 동네 개인지 모르겠다. 담날 아침에 이곳 토박이인 이웃에게 전화를 해 고라니가 개에 물려 죽었는데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동네에 고라니가 한 마리라도 줄어들어 잘됐다고 하면서 근처에 묻어 버리란다. 귀찮고 문제가 될지 몰라 9시 넘으면 면사무소나 시청에 전화한 다음 처리하려고 생각하고, 아침식사 후 나가보니 고라리가 없어졌다. 누군가 가져간 듯 했다.
대부분 농민들은 농작물을 해치는 고라니를 아주 싫어한다. 그리고 1년여 농촌에 살아본 결과, 고라니는 피해만 주는 것 같았다. 새들은 과일 등에 피해를 주지만 해충을 잡아먹고, 들고양이는 쥐나 뱀을 막아준다. 그러나 고라니는 농작물 등 재산상 피해를 줄뿐 아니라, 고라니 망으로 인해 농촌 경관이 나빠지고 환경에도 좋지 않다. 농민들과 고라니가 같이 살아가려면 생태학자나 동물학자들이 고라니에 대한 연구를 많이 해주어야 한다. 한국생태학회에서 발간된 “한국 고라니(2016)”라는 책을 보니 농민들에 도움이 되는 내용은 거의 없고, 농민들의 이야기나 내 경험과 다른 내용도 꽤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이 고라니가 먹는 것 안 먹는 것 등 먹이활동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앞의 책에서 이에 대한 내용은 아주 짧게 언급되고 내용도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다. 근처 나이 드신 농민과 내 짧은 경험으로 고라니가 잘 먹는 농작물과 잘 먹지 않는 농작물을 구분해 보겠다. 먼저 고라니는 멧돼지와 달리 땅속에 있는 것은 잘 파먹지 않고, 나와 있는 어린 순이나 잎을 주로 따먹는다. 좋아하는 것은 고구마 순, 무, 고추 순, 상치, 콩과 팥 순 등이다. 고라니는 좋아하는 것도 바로심어 따 먹을 때 뿌리 채 뽑히는 것은 먹지 않는다고 한다. 잘 먹지 않는 것은 들깨 파 마늘 양파 감자 등이다. 옥수수 해바라기 등은 먹기보다는 장난(?) 삼아 어린 싹을 뽑아 놓거나 순을 잘라 놓는 경우가 많다. 땅콩은 사람마다 의견이 다른 데 내가 2년간 심어본 결과 고라니 망을 하지 않아도 피해를 보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고라니의 먹이 활동은 상대적인 면이 많은 것 같다.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듯 고라니 마다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다른 것이다. 고라니는 산에 먹을 것이 지천인 여름철에도 농작물에 피해를 준다. 고라니가 산속에 먹을 것이 많은데 위험을 무릅쓰고 농작물을 먹으러 오는 이유는 알기 어렵다. 산에서 먹는 것이 지겨워 색다른 것을 먹으러 오는 것, 즉 외식하러 오는 것이라는 사람도 있다. 겨울에 먹을 것이 없을 때에는 잘 먹지 않던 마늘과 양파도 먹는다고 한다. 앞으로 많은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앞의 책, "한국의 고라니"에는 1년에 유해동물 구제, 수렵과 밀렵, 로드킬 등 인위적 요인에 의해 죽는 고라니 수가 10만에서 15만 정도로 추정된다고 나온다. 예상보다 훨씬 많다. 이 중 상당 부분은 땅에 묻거나 쓰레기로 처리될 것이다. 근처 사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고라니는 재수 없는 동물이고 고기가 맛없어 잡히면, 거의 먹지 않고 묻어 버린다고 한다. 요즘 살처분하여 땅에 묻어버리는 돼지 닭 소가 점점 늘어나는데, 깨끗한 고라니까지 땅에 묻는 것은 환경에도 좋지 않다.
고라니는 한국에서 흔하고 유해동물로 분류되지만, 우리의 특산이기 때문에 보호하고 농민과 같이 살아갈 수 있게 해야 한다. 우선 고라니 피해에 대한 보상 확대와 함께 고라니에 대한 실용적인 조사와 연구가 많아져야 한다. 고라니의 자세한 먹이 활동과 사람이 가까이 할 수 있는 방법 등을 알면 유용할 것이다. 그리고 고라니 고기 요리법도 개발했으면 한다. 관광자원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야생 고라니 고기를 맛 볼 수 있는 나라는 세계에서 한국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야생 고라니 고기를 먹으면 환경 파괴가 심한 집단 가축사육이 조금이라도 줄 수 있다. 농촌 골칫거리의 하나인 고라니를 활용하고 같이 사는 방법을 찾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