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서남의 싸움
효종이 하세한 후에 인조의 계비가 무슨 복을 입어야 가하냐는 문제로 싸움이 생겨 이에 가담한 선배가 희생이 많았다. 부모가 아들 의복을 입는데 장자이면 삼년을 입고 차자 곧 서자이면 일년을 입는 법이다.
효종은 인조의 차자인 고로 그 어머니인 조의 계비가 차자 의복 일년을 입는 것이 마땅하다 송시열이 주장하고 효종이 비록 차자라도 승적하여 왕통을 이었으니 마땅히 장자복 삼년을 입어야 한다고 남인(南人) 허목(許穆)은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양파의 싸움이 격렬하였으며 남인들은 송시열을 역적으로 몰아 공격하였다. 그 후 경신년에 남인이 불궤(不軌)를 꾀한다 하여 허영 허새 등과 그 외 연루자를 주육 하여 일 년 내에 거의 천으로 헤일 수 있도록 참화를 입었으니 이것이 경신(庚申) 대출척(大黜陟)이라 한다.
이때에 남인이 대 참패를 당하였고 그 후 무진년(戊辰年)에 장희빈이 왕에게 사랑을 얻어 아들 경종(景宗)을 낳은 후 정비 민씨(閔氏)를 폐하고 장희빈을 중궁으로 봉할 제 남인들이 장씨와 연락하여 가지고 서인 일파를 다 몰아내고 송시열은 유배한 곧 정읍(井邑)에서 사약(死藥)을 받고 죽었다.
이때 서남(西南) 양파가 업치락 뒤치락 겪고 틀고 싸우기는 국가에 아무 흥망의 관계도 없고 다만 자기네의 사당만 주장하여 세력을 붙으려는 것뿐이요 황실을 끼고 당의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다.
그 후에 왕이 장희빈의 일이 잘못된 줄 알고 또 남인들을 몰아내고 서인을 다시 불러 쓰고 민비를 회복하고 장비를 폐위하는 통에 남인의 세력이 또 꺾어졌다.
조정은 전쟁 마당이요 당원들은 다 전사이다. 이때 남인들은 또 청남(淸南) 탁남(濁南) 두 파로 나뉘었으니 송시열을 공격할 제 완화로 공격하는 탁남이라 하니 허적(許積)이 영수가 되고 급격하게 공격하는 청남이라 하니 허목(許穆)이 영수가 되었다. 정남 허목이 탁남 허적을 공격하되 허적이 귀척을 연락하고 국권을 남용하는 죄를 논란하니 왕이 노하여 돌이켜 탁남 허적을 신용하다가 그 후에 유악(油幄)사건과 그 아들 허견(許堅) 또 허영 허새의 일로 또 실패하였다.
서인(西人)은 공서(功西) 청서(淸西) 공서는 김유 이귀가 영수가 되고 청서는 김상헌이 영수가 되다. 또 낙당(洛黨) 원당(原黨)이 있으니 낙당은 김자점(金自點)이요 원당은 원두표(元斗杓)이고 또 산당(山黨)이 있으니 송시열(宋時烈)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