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글쓰기-조이럭 클럽
2019. 10. 24 그래도
* 이기적으로 살기
연일 등짝이 아프다. 누워도 살이 욱신거린다. 모로 누워봐도 마찬가지다. 제발 무리하게 일을 벌이지 말라는 남편의 당부도 당부지만 지난 추석연휴를 급성 편도선염으로 진땅 고생을 한 뒤로는 몸을 아끼게 된다.
꿈의 재봉틀도 그림의 떡처럼 바라만 본다.
몇 번이나 돌린 빨래들도 제자리를 찾아 들어 앉지 못하고 거실에 오름처럼 솟아 있다.
눈이 뻑뻑하고 침침해서 글자도 잘 안 보이는 지경이어서 거금을 주고 산양삼 농축액을 샀다.
‘그래. 이기적인 것이 가장 이타적이야.’
지나친 지출이 조금 민망해서 스스로 면제부를 준다. 정말이지 산양삼 농축액은 녹용보다 약빨이 좋다. 뻑뻑하던 눈알이 동서남북으로 부드럽게 구른다.
‘일단은 내가 살아야지. 내가 건강해야 가족들에게 뭐라도 챙겨서 해줄 수 있는 거지.’
남편 챙기는 건 뒷전이고 나부터 한 포 쭈욱- 짜서 먹었다. 며칠째 연달아 먹었더니 눈뜨기도 보드랍고 등짝도 덜 아프다. 살 것 같다.
몸이 수월해지니 이내 딴 생각이 난다.
영화를 보고 싶다. 나스타샤 킨스키 주연의 오래된 영화 ‘파리, 텍사스’
로사언니랑 같이 스크린으로 보면 언니는 또 나에게 말하겠지.
‘어디서 이렇게 좋은 영화를 골랐어?’
그런데 이번에는 생각만으로 멈췄다.
이번 주에 초점을 맞춰야 할 일은 후배 딸의 결혼식 준비다.
* 조이럭 클럽
세윤이에게 카톡이 왔다
“이모, 그림책 선물, 고마워요. 그리고 이모, 작년 언니 결혼식 때처럼 이번에 제 결혼식에도 예쁜 한복 입고 와 주세요. 토요일에 뵐게요.”
무슨 웨딩홀 이름도 왜 이리 어렵게 짓는지 원.
“보테가마지오 갤러리아포레 G층 PM 6시 30분”이란다.
진주 공설운동장에서 낮 12시 30분에 버스 두 대가 출발한단다.
지난번 지 언니 결혼식에도 예단음식, 폐백음식, 답례봉투 꾸미기, 이바지 음식을 나랑 언니가 했다. 이번에도 세윤이는 날보고 해 달라고 한다.
시댁이 좀 갖춘 집안이라 그런지 거기서 보내온 예물과 음식들을 본 후 간 큰 세윤이도 바짝 쫄은 폼이다. 후배도 경악하며 유독 신경을 쓴다. 폐백 상에 구색 맞춰 올릴 과일 케익에 넣을 청포도도 샤인 머스켓으로 바꾸라고 하는 걸 보면.
나는 근무기간이라 이번에는 예단음식은 전문 예단집에서 맞추라고 했다. 그 대신 폐백음식과 답례음식봉투는 지난 번 큰 딸애처럼 준비해서 서울로 가지고 올라가기로 했다.
대구 서문시장 혼수방에서 청홍 비단실과 비단주머니, 청홍 보자기도 주문하고 견과류도 시켰다.
잔뜩 긴장한 후배는 부산 깡통시장에서 답례 종이가방부터 수입과자를 종류별로 시켜 우리집으로 택배를 보내왔다. 음료도 자연드림과 정관장에서 시키고. 그런데 생각 없이 일본산 과자가 반 정도나 된다.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생수도 에비앙으로 넣으려니 롯데마트에도 개수가 모자라 내 마음대로 삼다수로 넣었다.
서울까지 그 먼 길을 함께 해 주시는 것만 해도 예사 마음이 아니라며 지난해처럼 갈 때도 만 원, 올 때도 만 원을 넣어 준단다.
밥도 주고, 오만 거 다 주는데 무슨 돈까지 두 번이나 주냐니까 오고가며 휴게소에서 따뜻한 차라도 한 잔씩 드시며 이야기 나누라고 그런단다.
이재에 밝고, 재테크도 잘하지만 평소에는 참 알뜰한 후배가 이럴 때는 아낌없이 푼다.
어제는 퇴근하고 답례봉투를 꾸미기 시작했다. 손이 모자라 칠십 줄의 남편 손까지 빌렸다.
어떤 과자는 개수가 모자라 전화를 했더니 전화를 안 받는다. 집전화로 했더니 친정업마가 배구하러 갔다고 한다. 지난 주말은 골프하러 가고 없더니.
후배에게 남편이 바닥에 앉아 답례봉투를 꾸미는 사진을 보내며
“야, 정작 혼주는 날이면 날마다 골프에 배구까지 하러 가고, 칠십 노인 인 윤선생은 너거 딸 답례봉투 꾸미고 이기 말이 되는 소리가?‘
라고 문자를 보냈다.
전화가 왔다. 웃음소리가 유리창을 깰 정도다.
“엉가, 우짜노? 미안타. 내가 우째 주몬 좋것노?”
한 수 더 뜨는 건 지난해 큰 딸 보낼 때처럼 이번에도 관광차 한 대는 또 윤선생 보고 사회 겸 안내를 부탁한다. 남편은
“내 나이가 그럴 연식은 아닌데.”
라고 말한다.
지난해 혼사 때 남편이 크게 말한 것도 없는데 우리 버스를 탔던 사람이 먼 길 인데도 남편 덕분에 무척 유쾌하고 즐겁게 다녀왔다고 했다면서 또 하란다.
남편과 나는 버스 두 대분의 답례봉투를 꾸몄다. 무릎팍이 쑤신다며 엄살을 부리 길래 술상까지 차려 입막음을 했다.
사탕모양의 치즈, 흑사탕, 젤리, 모나카, 와사비 콩, 쿠키를 작은 셀로판 투명봉투에 각을 잡아넣고 접착 테이프 껍질을 벗겨 봉했다.
생수, 음료, 롱스틱 롤과자와 푸팅을 각이진 두꺼운 종이가방에 세워 넣었다.
토요일 새벽, 방앗간에서 메로 친 듯 한 쑥 찰떡과 컵 과일 셋트만 만들어 넣기만 하면 답례봉투는 끝이다.
이런 소소한 일들은 조이럭 클럽이나 아메리칸 퀼트 모임 같아 행복하고 좋다.
이 두 영화는 몇 번을 보아도 좋을 영화다.
한 사람의 성인으로 새로운 가정을 이룰 누군가의 딸에게 한 뜸 한 뜸 손을 보태 조화로운 퀼트이불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의 이야기, ‘아메리칸 퀼트는 딸을 시집보낼 때 온 일가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모여 바느질을 하며 덕담을 이어가고, 음식을 준비하던 우리 조상들의 풍습처럼 정겹고 따스하다.
1940년대 가난과 핍박과 멸시를 피해 중국에서 샌프린시스코로 이민 온 4명의 어머니들, 그녀들의 장성한 4명의 미국 태생 딸의 이야기를 웨인 왕 감독이 옴니버스 형태로 만든 영화 조이럭 클럽.
이 영화는 준의 어머니가 멤버였던 마작 모임인 '조이 럭 클럽(喜福)'에 처음으로 참석한 준, 세 명의 어머니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여덟 모녀의 삶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영화는 허공을 내려 앉는 깃털 하나와 함께 나래이션으로 시작된다.
엄마가 불행해고 험난했던 과거를 뒤로하고 딸을 바라보며 온 마음을 다해 달아주고자 했던 깃털 하나는 바로 ‘희망’이라는 날개였지 않을까?.
어머니들은 하나같이 딸들에게 말한다.
“나처럼 살면 안 된다.” 가 아니라 “너는 나와 같은 삶을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중국에서 넘어온 네 명의 어머니는 배타적인 낯선 땅에서 그들만의 공간을 만든 것이 Joy Luck Club이라는 마작 모임이다. 매주 만나 서로가 서로를 지지하고 공감하며 함께 한다. 책갈피처럼.
나는 후배 딸의 결혼식을 준비하며 그런 마음으로 흡족하고 행복했다. 어릴 때부터 봐 왔던 꼬맹이가 어느새 자라 성년이 되었다. 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른 목소리를 내고 살아가는 걸 지켜보는 게 기쁘고 대견하다. 그 아이들을 위해서라면 이까짓 손품이 문제겠는가? 대추를 실에 엮고, 솔잎을 따서 잣을 박고, 구절판에 색감 좋게 음식을 꾸며 차리는 일이 놀이처럼 즐겁다.
지 엄마 보고
“무조건 미옥이모가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하고, 이모가 해 주는 거면 안 봐도 되니까 그냥 그대로 들고 오면 된다.”는 입도 야문 세윤이!”
부모와 자기의 의견이 상충될 땐 한 마디도 안지고 지 부모 말문을 막히게 하던 똑순이다.
나는 아이들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지인의 딸들도 그렇지만 제자들도 그렇다. 그래서 덕담처럼 음식을 만들고,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일이 기쁘고 보람되다.
누군가를 항구히 지켜 봐 주는 눈길이, 손길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든든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