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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 다행이다!
- 기슬렌로망 글, 톰샴프 그림, 이세진 옮김 -
2019. 02. 백란주
느낌표는 어떤 감정이든 어느 정도의 안정기를 느끼게 해주는 듯하다. 포기할 것은 포기해 버린, 거름종이를 거친 감정 같다. 남아있는 감정들에 대한 받아들임도 될 수 있고 이루어낸 것에 대한 성취감일 수도 있다. 물음표가 주는 기대, 설렘은 없을지도 느낌표가 주는 아늑함이 있다. (될까? 될 거야!)
온점이 주는 단호함보다 때론 더 단호함을 느끼게 하는 카리스마도 있다. (안 돼. 안 돼!)
작은따옴표가 주는 생각그물보다 더 다양한 감정을 실어다 준다. (그랬구나!)
느낌표가 주는 넉넉함과 함께 ‘휴, 다행이다!’ 는 얼마만큼의 안도감일지, 제목에서 나의 미각을 자극했다. 아이들처럼 나쁜 일을 했는데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하는 걸까.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내게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할까. 섣부른 추측을 하며 도서관에서 집으로 동행을 요구하는 물음표를 던졌다. 다행스럽게 집으로 발걸음을 할 수 있었다. 만약 누군가의 ‘예약대출’이 되었더라면 못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휴, 다행이다!
도토리 한 알, 커다란 떡갈나무에서 똑 떨어져 떼구르르 콩콩!
휴, 다행이다! 조약돌에 딱 걸렸네.
〈선택〉
어떤 상황으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상황은 달라지는 느낌이다. 떡갈나무에서 떨어진 것, 어쩌면 경쟁사회에서 탈락이거나 자멸일 수 있지만 도토리의 선택일 수도 있다. 같은 상황이더라도 내가 어떻게 수용하고 견디는지에 따라 과정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선택되어짐이 아닌 선택할 수 있다는 것. 휴, 다행이다!
다람쥐 한 마리, 도토리를 덥석 집어 땅속에 꽁꽁 숨겨놓고는
휴, 다행이다! 까맣게 잊어버렸네.
〈망각〉
차라투스트라는 어린아이가 행복 할 수 있음이 망각 때문이라고 한다. 잊어버릴 줄 알아야 새로운 행위를 시작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망각처럼 괜찮은 묘약이 없을지 모른다. 무언가를 자꾸 떠올리면 그 상황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질 못한다. 때로는 과감하게 잊어버림이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조차도 잊어버리고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것은 망각이 아니라 은폐일 것이다.
잊어버리고 새로운 놀이에 몰두할 수 있는 것. 휴, 다행이다!
까만 어둠 속에서 도토리 싹이 머리를 쏘옥 내밀었는데…….
휴, 다행이다! 달팽이가 못 보고 그냥 지나쳤네.
〈지나침〉
달팽이가 못 본 것일까. 안 본척한 것일까. 우리는 상대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어쩌면 이미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 고백할 기회를 주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 잘못했을 때, 시간이 지난 후 사실에 대해 말할 때 그때서야 아이들은 알면서 지나쳐 준 것을 알게 된다. 도토리 싹이 머리를 내밀었을 때 숲이 보호색이 되어 달팽이로부터 지켜 주었을 것이다. 세상은 다수의 너그러움이 소수를, 약자를 보호하는 것처럼 우리도 숲의 건강함을 닮아간다.
때로는 너그럽게 못 본 척 지나쳐 준다는 것. 휴, 다행이다!
무더운 여름날, 목이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데…….
휴, 다행이다! 먹구름이 비를 함빡 머금고 있네
〈어리석음〉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던 일들이 중요한 대상으로 떠오를 때 그때서야 존재에 대한 깊이를 알게 되는 어리석음을 느낄 때가 있다. 먹구름이 몰려올 때의 날씨는 기분이 좋지 않다. 메마른 날씨가 주는 유혹은 목마름으로 향하는 가뭄이 있다는 것을 잊고 지낸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유혹에서 허우적거리는 방황을 일깨워 주는 먹구름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일상에서 존재에 대한 귀함을 모르고 지냈던 것들, 소소한 일상이 주는 감사함을 지나쳤던 것들을 통해 나약하고 이기적임을 인정하게 되는 먹구름의 깊은 속내를 그때서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어리석음을 깨닫게 한 것. 휴, 다행이다!
커다란 사슴이 떡갈나무 쪽으로 살금살금 다가와…….
휴, 다행이다! 이파리만 뜯어 먹고 그냥 가네.
〈양심〉
어떤 분이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측은한 얼굴로 차비를 빌려달라고 한다. 계좌로 송금하겠다며 전화번호 메모까지 건네며 죄송한데 밥 한 끼 먹을 돈까지 빌려주면 안 되겠냐고 한다. 그게 무어라고. 객지에 여행 와서 겪을 그 곤란함을 상상하며 상대의 도움보다 넉넉하게 돈을 건넸다.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진심으로 꾹꾹 눌러 썼다고 믿었던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없는 번호라고 한다. 그렇구나. 그래도 그만큼만 건넸으니 다행이다. 보이스피싱처럼 무작정 당함이 아니라 얼굴을 보고 했으니 양심상 차비, 밥값 정도의 호의로 건넸으니 그 사람의 가슴에 양심이 한 발짝 들어갔기를 바랄뿐이다.
아직은 양심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 휴, 다행이다!
쌩쌩 거센 바람이 휘몰아칠 때 흔들흔들 휘청휘청…….
휴, 다행이다! 떡갈나무 가지가 하나도 부러지지 않았네.
〈공감〉
파도를 견디기 위해서는 파도와 맞서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함께 타고 넘어야 하듯이 떡갈나무 가지는 바람의 방향에 동조하며 바람이 토해내는 울분에 공감했을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향했고 그로 인해 꺾이지 않았을 것이다. 상대방의 이야기에 감정의 추임새(공감)가 느껴질 때 그 관계는 쉽사리 부러지지 않는다. 자신의 감정에만 충실해 타인의 감정만을 바람결로 내몰 때 그 가지는 작은 바람에도 상처를 입게 된다. 쌩쌩 거센 바람이 휘몰아 칠 때 함께 흔들리며 휘청거림은 서로의 믿음에서 나오는 공감이며 함께 파도를 넘는 태도이다. 아이들에 대한 작은 몸짓, 단어 하나가 아이들에게는 생각 밖의 회오리바람이 될 수 있다. 아이들에게 다가갈 때는 아주 작은 바람, 약한 바람 소리에도 귀 기울이며 함께 그 바람을 타야할 것 같다.
함께 바람을 느끼며 탈 수 있는 마음자락이 있다는 것. 휴, 다행이다!
춥디추운 겨울날, 온 세상에 흰 눈이 소복소복…….
휴, 다행이다! 다른 나무가 크리스마스트리로 뽑혀 갔네.
〈과유불급〉
넘침은 모자람보다 못하다고 했다. 지나침은 주변의 거리를 멀어지게 만들기도 한다. ‘시샘’이라는 불투명의 감정이 스며들어 ‘관심’이라는 또 다른 얼굴로 둔갑한 자신을 모를 때가 있다. good이면 될 것들을 기어이 excellent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 될 때 결과마저 최고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때로는 보통의 삶이 더 최고의 경지가 될 수도 있다. 적당한 거리가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좋은 관계, good의 거리가 되기 때문이다.
‘적당함’이란 온기를 느끼게 하는 것. 휴, 다행이다!
앗, 어쩌나? 숲속에 불길이 빨갛게 번졌는데…….
휴, 다행이다! 떡갈나무에는 불꽃이 옮겨 붙지 않았네.
〈내로남불〉
상대차선의 흐름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 정체가 될 때, 그 차선의 상황에 대한 이유는 열외가 된다. 내가 가고 있는 도로의 상황 흐름이 ‘원활함’으로 인지되는 순간 통쾌함, 짜릿함을 품게 되는 이 붉은 기운은 상대방 운전자들의 가슴속에 불길을 부채질하는 행위임을 안다. 그 짜릿함을 느낀 후에야 정신을 차려본다. ‘혹, 사고라도 났을까? 곧 풀리겠지…’ 그러면서도 속으로 으흐흐흐, 흉물스러운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내로남불, 역시 사람은 내 일인 경우와 타인의 경우에서 체감하는 온도의 차는 엄격하다.
그럼에도 상대차선 정체가 사고로 인함이 아니기를 바라는 아주 작은 배려가 숨어있다는 것. 휴, 다행이다!
나무꾼들이 숲으로 우글우글 몰려와 나무를 베어가려 분필로 표시를 했지만…….
휴, 다행이다! 떡갈나무에는 아무 표시도 남기지 않았네.
〈운칠기삼〉
기준을 넘어선다는 것은 여러 가지의 조건이 합해졌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내가 가진 재능만으로 누군가의 선택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고 나의 실력이 월등하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법도 없다. 선택당하는 피동적인 관계에서 상대방의 기호는 기준이 될 수도 있다. 그 변수를 운이라 말하며 때로는 실력을 넘어서는 호감이라는 이름으로 피동자의 탈락을 위로하기도 한다.
스스로 실력보다 운이 좋은 사람? 운이 나쁜 사람? 이라 믿는 것. 휴, 다행이다!
들판에 씨앗을 뿌리는 날, 농부들이 밭을 일구러 나왔다가…….
휴, 다행이다! 떡갈나무는 그대로 두었다네.
〈안목〉
처렴상정處染常淨. 더러운 곳에 있어도 항상 깨끗하다는 의미로 연꽃에 비유한다. 본질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처한 환경만 보고 선입견으로 판단하는 오류를 범할 때가 있다. 때로는 상황이 그 사람을 오히려 돋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어느 곳에 있든, 어떤 상황이든 본질은 변하지 않음을 깨닫지 못했을 때 상황에 휩쓸려버릴 수도 있다. 상대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안목을 지녔을 때는 불필요한 오해도, 서운함도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워올리듯 상대의 진심을 읽을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상대를 진심으로 볼 줄 아는 안목이 필요한 것 같다.
화려하지 않고 수수함으로 머물러도 상대의 진가를 알아보는 안목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 휴, 다행이다!
숲속에 공사가 시작되던 날, 쿵쾅쿵쾅 고막이 찢어질 것 같았지만…….
휴, 다행이다! 떡갈나무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네.
〈안도〉
어떤 사고 속에서 ‘기적’이라 불릴 만큼 상황이 주어진다면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을까. 다행, 뜻밖에 일이 잘되어 운이 좋음. 결국 ‘다행’이란 선택은 내가 다치지 않는 행운을 부르는 부적이 된다. ‘다행, 다행, 다행…’입으로 읊조려본다. 다(多). 많다, 낫다, 더 좋다, 뛰어나다, 아름답게 여기다. 행(幸). 다행, 행복, 운이 좋다, 바라다, 희망하다. 다행을 부르다보니 왠지 계속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 해외토픽뉴스로 전해 듣는 소식에서 우리는 기적이라 말하지만 당사자는 그 상황에서 처음 마주하는 감정이 ‘휴, 다행이다!’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다행이란 단어는 지극히 주관적인 자기애가 드러나는 단어일지도 모르겠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애가 드러난다는 것. 휴, 다행이다!
따사로운 어느 날 아침, 다정한 가족이 숲속으로 와…….
휴, 다행이다! 떡갈나무로 아름다운 정원을 꾸몄네.
〈윤회〉
결국 돌고 돌아 도토리 하나가 떡갈나무가 되고 떡갈나무 열매가 다시 땅으로 떨어져 싹을 틔워 언젠가는 숲의 일원으로 자신의 몫을 다하고 있듯이 지나고 나면 그 과정들은 결과를 말하고 결과는 또 다른 과정을 이끄는 출발선이 된다. 우리는 숲을 떠나 살 수 없고 숲 또한 우리와 더불어 살 때 숲의 기능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나의 공덕만 돋보이려 할 때, 도토리는 무한 경쟁에서 떡갈나무로 성장하지 못할 수 있다. 비록, 조금 볼품없고 약한 떡갈나무로 성장할지라도 떡갈나무는 본연의 자세를 잃지 않고 도토리를 맺고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최고가 되고자함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기에 또 다른 도토리를 잉태할 수 있는 생명력으로 남았을 것이다.
최고의 눈부심보다 최선의 수수함이 숲을 이루며 끊임없이 이어가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 휴, 다행이다!
까르르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나뭇가지에서 울려 퍼질 때…….
커다란 떡갈나무는 참 행복했다네!
〈행복〉
끝말잇기처럼 다행이란 단어는 행복이라는 종착역에 데려다 준다. 내게 주어진 상황들을 애써 힘들게 보지 않고 주어진 현실에서 답을 찾는다면 지금 내게 다가온 힘듦은 어쩌면 나를 견디게 하는 면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너무 평온한 바다를 매일 본다는 것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것 같다. 고요한 일상에서 태풍의 노여움도 만나고 포말의 산화도 느껴보는 것이 살아있음을 일깨워주는 것은 아닐까. 완제품의 행복을 찾아가는 길은 미로 찾기 같다. 때로는 막다른 길을 마주했을 때의 탄식과 함께, 때로는 뚫린 길을 걷는 행운을 만끽하면서 끊임없는 반복을 통해 가는 길이라 생각한다.
양면의 자극을 느낄 수 있음에 그것이 고통만이, 행운만이 아니라는 것을 진심으로 느끼게 한 것. 휴, 다행이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어떤 원인은 결과를 낳게 되지만 그 결과는 다시 새로운 길을 향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삶이란, 산다는 것이란, 살아지는 것이 듯 새옹지마로 여겨진다. 매 순간 일어나는 찰나에 내가 뱉게 되는 ‘휴, 다행이다!’가 나를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를 결제하는 체크카드 같은 선물이다. 선물이 되는 삶, 그럼에도 현재를 즐기며 만족하는 삶이면 언제나 휴, 다행인 삶이 될 것 같다.
들키지 않아서, 일어나지 않아서. 아니 어쩌면 들켰지만 상대가 모른 척 해주어서, 일어났지만 내게는 그렇게 큰 사고가 아니라서 감사한 일인지도 모른다. 휴, 다행이란 단어에서 내게 일어나는 일상 속에 얼마나 큰 행복이 숨어 있는지 숨바꼭질을 시작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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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그림책의 내용과 선생님이 글이 잘 어우러진 탁월한 시도입니다. 제 생각으로, 그림책의 내용에 연결되는 선생님의 글이 또 다른 하나의 글이 되면 더 훌륭한 수필 한 편이 나올 듯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