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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요한복음 4장 16-24절
참된 예배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의 수가 성에 들어가신 내용을 살폈습니다. 바리새인과의 마찰을 피하기 위하여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려고 할 때 굳이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 성을 일부러 가셨는데, 그 이유가 뭔가? 그곳에 영원 전에 택하신 하나님의 백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가 성 야곱의 우물이라는 곳에서 한 여자와 만나셨고, 그곳에서 물이 매개체가 되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여자에게 영혼을 거듭나게 하고, 또한 소성시키시는 성령을 주고자 하셨습니다. 그 성령을 무엇으로 빗대어 말씀하셨느냐? 생수라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가 예수님의 말씀에 대하여 깨달았는가?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봤지만 10절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비록 물을 먼저 구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셨지만, 그런 물을 구하면서 무엇을 주고자 하셨는가? 세상이 줄 수 없는 그런 생수를 주고자 하셨던 겁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렇게 반응할 뿐입니다. 11절과 12절입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이 뭐냐? 육신을 위한 물 일 뿐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느냐? 13절과 14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 지금 예수님께서 주고자 하시는 물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여자가 요구하는 물과는 다른 물인 겁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러한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뭐라고 하느냐? 15절을 보시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주여’라고 말하면서 존중을 보이고는 있지만, 여전히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육신을 위하여 물을 구하고 있는 겁니다. 더 이상 목마르지 않을 수 있는 물, 그래서 더 이상 물 길으러 오지도 않을 수 있는 물, 그러한 물을 달라고 요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이러한 물이 있었는가? 없었습니다. 이런 물이 있다는 말도 없었습니다. 만약 그런 물이 있었다면 그 물을 얻기 위하여 또 다른 전쟁의 역사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육신을 위하는 그런 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했습니다.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단지 이 세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그런 물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여자는 그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았는지, 알지 못했는지 드러나 있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마치 그런 물이 있는 것처럼 그런 물을 달라고 요구할 뿐이었습니다. 어쩌면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자명하기 때문에 그것을 달라는 이 말은 어떤 면에서 조롱이 섞인 말로도 이해를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여자에게 예수님은 다른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면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얼핏 보면 뜬금없이 말씀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17절과 18절을 보시면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러니까 여자에게는 남편 다섯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한 남자가 있기 때문에 여섯 번째 어떤 남자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계속해서 남자가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예수님께서 그녀의 숨겨진 내용을 들춰내고 계신 것이고, 어떤 면에서는 이것이 그녀의 부끄러운 삶의 모습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실 때 그녀는 남편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 남자가 있지만 그를 남편으로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정상적인 결혼 생활의 모습이 아니거나, 혹은 지금 살고 있는 그 남자를 남편으로 여기지 않고 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남편을 불러 오라고 말씀하시는 이 내용은 결코 뜬금없는 그런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칼빈은 이 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말을 그 여자가 조롱거리로 받아들이는 것을 보고 그 병원에 적절한 치료책을 적용했다. 그녀의 죄를 책망하심으로 그녀의 양심을 때렸던 것이다.” 예수님 편에서는 계속해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고자 하시지만 여자 쪽에서는 계속해서 믿지 못 하겠다는 반응을 보일 때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뭐냐? 어떤 면에서 그녀의 부끄러운 모습을 들춰내고 계신 겁니다. 칼빈은 계속해서 이렇게 주석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주님의 자비와 사랑을 보여 주는 훌륭한 본보기다-그 여자가 자원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오려 하지 않자, 주님께서는 거의 강제적으로 그녀를 인도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완악한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즉 성경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완악함은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이끌어 굴복시키지 않으면 결코 스스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을 만큼 완악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자극을 받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않는 그런 완악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인생들 가운데 역사하셔서 그들의 완악함을 꺾으시는데, 무엇으로 꺾으시느냐? 그들의 죄를 들추어냄으로 그 완악함을 꺾으십니다. 그들 스스로의 죄와 비참함을 목격하게 함으로 그 마음이 낮아지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전적으로 타락할 뿐만 아니라 전적으로 무능하여서 스스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일은 없다고 말합니다. 혹 외적 증거로서 말씀이 들려질 수 있지만, 그런 외적 증거로서도 사람의 마음을 돌이키지는 못 합니다. 무엇이 반드시 필요한가? 내적 증거로서의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시되, 그 말씀이 그들 마음 가운데 뿌리를 내리도록 역사하셔야지만 그때서야 구원의 은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위하여 먼저 무엇을 보게 하시느냐? 그들의 죄를 보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목적이 자기 백성들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마1:21), 자신의 죄를 깨닫지 않고는 그리스도께로 나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편을 불러 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무익한 말씀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오늘 본문 16절 이하 18절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더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지난 시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잠시 언급했습니다. 길 가시다가 피곤하셔서 우물 곁에 그대로 앉으시면서 쉬신 예수님(6), 또한 오랫동안 이동해 오셨기 때문에 목이 마를 만큼 갈증을 느끼신 예수님(7), 심지어 제자들이 먹을 것을 구하러 동네에 들어갔는데, 그것을 통해서는 양식을 먹어야 할 만큼 배가 고프신 예수님도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8). 그러나 예수님은 참 인간임과 동시에 참 하나님이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육신을 취하신 이후 이 여자를 한번이라도 만난 적이 있었는가? 없으셨습니다.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지만 예수님은 이 여자의 모든 것을 다 아셨습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다는 것도 아셨고, 또한 지금도 남편이 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여자의 경우 남편을 없다고 대답하자 그 모든 것을 다 드러내실 정도로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을 주신다, 또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주신다는 것이 결코 헛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시는데(마19:26),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신 겁니다.
어쨌든 이런 예수님께서 여자의 부끄러운 가정사를 끄집어내셨고, 그 일을 통하여 이후 예수님과 여자와의 대화가 좀 더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어떤 사람들은 남편을 묻는 질문에 대해 뜬금없이 선지자로 부르는 것은 여자의 과거를 숨기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후 하나님을 예배하는 문제, 즉 영적인 문제에 대해 질문하기 때문에 자신을 숨길 목적으로 대화의 주제를 바꾸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의 깊은 영적인 문제를 꺼내도 좋을만한 분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실제로 여자가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당신’이라고 불렀습니다(9). 그리고는 존중의 의미로서 ‘주여’라고 불렀습니다(11). 그러나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 ‘선지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리스도’로 생각하고 있지는 않지만, 조금씩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묻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20절을 보시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그동안은 끊임없이 육적인 일로서 반응했습니다. 예수님 편에서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는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에 대해 말씀하셨지만 여자는 이 땅에 있는 물을 끊임없이 요구했을 뿐이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요구하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조롱꺼리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예배에 대해 질문까지 하게 됩니다. 육적으로 반응하던 여자가 이제는 영적인 질문을 하게 된 것입니다.
특히 여기 보면 여자가 예배와 관련해 질문하면서 어디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에 초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 어디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내가 보니 당신은 선지자이신데, 어디서 예배드려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지금 여자가 말하고 있는 산은 다름 아닌 그리심 산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수가 성이라는 위치가 세겜 지역이라고 말했었는데, 이 세겜 지역 근처에 그리심 산이라는 곳이 있습니다(삿9:7 참조). 그리고 신명기에 보면 이 그리심 산에서 축복을 선포하고 반대편에 있는 에발산에서 저주를 선포하라는 내용이 나오는데(신11:29), 바로 축복을 선포했던 산이 여자가 말하고 있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이 그리심 산에 성전을 짓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지난주에도 잠시 언급을 했지만 북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 갔을 때 사마리아에 거주하게 된 여러 민족들이 어떤 일로 인하여 죽게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가 여호와 경외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율법의 예식을 채택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긴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왕하17:24-28). 그러나 종교는 그들 사이에서 여러 가지 부패와 결함을 양산하게 되었는데, 바로 각 민족이 각기 자기의 신상들을 만들어 사마리아 사람이 지은 여러 산당들에 두었던 것입니다(왕하17:29). 바로 이러한 계기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하여 상종하지 않는 일이 있었던 것인데, 이후 역사 안에서 어떤 일이 있게 되었느냐? 대제사장 요한의 아들이며 야두스의 형제인 마낫세가 그리심 산 위에 성전을 건립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하여 유대인과 사마리안이의 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고 하는데, 그런 배경이 20절 가운데 들어 있는 겁니다(칼빈주석 참고). 아니 이미 9절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상종하지 않는다고 할 때 이런 역사적 배경이 다 들어 있었던 겁니다.
때문에 여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예수님께 무엇이 옳은지 알고자 했습니다.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습니까? 아니면 유대인들이 말하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크게 두 가지 사항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여자는 ‘우리 조상들’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전통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전통이 다 좋지 않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통의 뿌리가 어디인지를 살펴봤을 때 그 뿌리가 좋지 못하다면 우리는 그런 전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 여자가 예배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북이스라엘의 예배의 뿌리는 지난주에 잠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도 아닙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남유다로 향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따라 고안해 낸 인간적인 방법일 뿐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수 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런 예배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전통이라고 하면서 내세운다면 어떻게 참된 예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명하시거나 제정하시지 않은 전통에 대해 그것이 진리를 막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다음으로 여자는 그리심 산,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통해 장소를 중요시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존재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같은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했을 때도 이런 말을 했던 것입니다. 열왕기상 8장 27절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께서는 분명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12:11).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친히 예루살렘으로 인도하셔서 그곳에 성전을 건축하게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에서부터 진실은 뭐냐? 하나님은 장소에 구애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보면 이런 말씀이 있는데도 사람들은 장소를 매우 중요시 합니다. 물론 장소가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장소나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사람들은 예배드리는 장소, 특히 그 크기에 너무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도시가 생기게 되면 일단 교회당을 크게 짓고 거기서 성도를 불러 모으려고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합니다. 큰 교회, 그리고 잘 꾸며진 예배당이면 사람들이 몰려온다는 심리를 이용하여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장소 때문에 예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어떻게 주님을 용납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바로 그런 분에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여자에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21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신이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에 대해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음은 분명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또한 종국에는 이 여자에게 그런 믿음을 주실 것이지만, 예수님은 진리의 내용으로 이 여자를 초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즉 예수님께서는 두 장소 가운데 어디서 예배드리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 여자에게 두 장소를 다 거절하고 계십니다. 왜 그런가? 이후 말씀을 보면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23절에서는 그 때가 바로 “이 때라”고 말씀하심으로 이제부터는 어떤 장소에서 드리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으시고, 받지 않으시고 하는 그런 부분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2절을 보시면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즉 사마리아인들의 예배 형식에 대해서는 정죄하신 반면, 유대인들에게는 구원을 언급하실 정도로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북이스라엘의 경우를 보면 여로보암이 첫 번째 왕으로 있을 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면 백성들의 마음이 다시금 다윗 집안으로 향할까 하여 하나님께서 명하지도 않는 예배 처소를 마련했습니다. 심지어 거기에 금송아지 형상을 만들어 놔두게 되었는데, 이런 점에서 북이스라엘의 예배는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는 예배, 하나님 보시기에 거짓된 예배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뭐라고 말씀하고 계시느냐?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즉 북이스라엘의 예배는 한 마디로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이란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있는지 몰라도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명하시지도 않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 받으실만한 그런 예배는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리러 나왔지만 하나님 지식 없이 드리는 모든 예배는 거짓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확실한 지식이 없다면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유령이나 귀신일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말씀이 없이 자기의 의사에 따라 인도함을 받을 때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좋은 의도는 여기에서 공격을 면할 수가 없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좋은 의도면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좀 더 나아가 효과만 좋으면 그것이 본질이라고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않았는데, 좋은 의도라는 것 때문에 그리고 효과가 있다는 것 때문에 열린 예배다 뭐다 해서 이런 방법, 저런 방법으로 예배의 틀과 내용을 바꿉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명한 적이 없는 예배 방식, 하나님께서 제정하시지 않은 예배 방식은 모두 거짓된 예배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것 자체로서만 본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드려야 할 예배는 어떤 예배냐? 하나님의 명령을 따른 예배,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예배, 바로 그 예배 방식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역사 안에서는 그런 고민으로 나온 것 중의 하나가 웨스트민스터 예배모범인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면서 예배하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칼빈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이 아닌 유령이나 귀신에게 드리는 예배와 다를 바 없습니다. 때문에 근본적으로는 예배가 신앙 없이 드려지는 일은 결코 없습니다. 신앙을 가지지 못한 채 예배드리는 장소에는 나올 수 있지만, 예배드리는 장소에 나왔다고 해서 그 예배를 받으시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까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자들, 그러나 영원 전에 택하신 자들이 예배드리는 장소에 나왔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가 참된 믿음을 소유하게 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그런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그리스도와 결부되어 있지 못하다면 아무리 예배드리는 장소에 나왔다 할지라도 그리스도가 없는 이상,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는 이상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는 아닌 것입니다.
다만 때때로 하나님께서 어떤 자들에게 참된 믿음을 주셨지만, 그 믿음이 너무 작거나 얕은 경우 인식하는 부분에 있어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의 경우는 참된 믿음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만 참된 믿음이 아닌 자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사람들이 이와 같은 부류라 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사람 편에서 무조건 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쨌든 본문을 통해 드러난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 하나님에 대한 지식 없이 드리는 예배,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않고 제정하시지도 않았는데 드리는 예배는 결코 참된 예배라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마리아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거절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반면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는 어떠한가? 분명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을 통하여 하나님을 예배하라고 하셨고, 거기에 순종했다면 순종했다는 차원에서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예배의 형식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남유다의 역사도 보면 끊임없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선지자들의 질타를 받아왔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한다.”는 말씀은 단순히 북이스라엘과는 다른 참된 믿음을 가졌다. 혹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겼다는 그런 의미라기보다는 이후에 나오는 말씀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는 말씀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어디에 있는가? 다윗과 솔로몬을 이은 그 언약의 말씀이 어디에 있는가? 바로 남유다 쪽에 있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마리아에는 참되고 바른 것이 있지 않지만, 참되고 바른 것을 누구에게 알리셨느냐 하면 남유다를 통해 알리셨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이 로마서에 있는데, 로마서 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롬3:1-2) 이방인과 비교했을 때 유대인의 나음은 하나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그 사실에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의 약속, 언약의 말씀, 그리고 그것을 통하여 정당한 예배형식이 어디 있느냐? 북이스라엘이 아니라 남유다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1절에서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라고 하시면서 두 장소 다 거절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성전과 제사장 제도와 기타 외적인 의식에 관한 율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가 되기 때문입니다(칼빈). 그동안은 그런 명령이 남유다를 통해 지속되어 오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로는 그 모든 것이 폐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소위 율법 안에 의식법과 재판법과 도덕법이 있는데, 예배와 관련된 의식법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되기 때문에 사마리아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이후로는 예루살렘 성전도 거절이 된다는 것을 알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시는 것이 23절과 24절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이 때라”는 것은 더 이상 구약의 형식은 남아 있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예배의 본질은 어디 있느냐?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데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신약에서부터가 아니라 구약에서부터 예배의 본질은 영과 진리였습니다. 다만 그것을 의식법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했기 때문에 어떤 면에서는 의식법이 더 부각이 되는 것처럼 있었지만, 그 본질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마침이 되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는 그런 모든 의식법이 폐지가 되는데, 그것을 통해 더욱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뭐냐?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일이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냐? 영과 진리로 드리는 것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 이것이 참된 예배인 것입니다.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보면 개역한글성경이 ‘신령과 진정으로’ 번역해 놓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참된 방식과 관련해서 신자의 태도로 말할 때가 많았습니다. 물론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성경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런 마음을 가지고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마음이 없는 예배, 그것은 형식적인 예배밖에 되지 않으며 그런 형식적인 예배를 하나님께서는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그런 태도 이전에 예배의 본질이란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바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는 것, 이것이 참된 예배라는 것입니다.
그럼 좀 더 구체적으로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영이란 말은 때에 따라서는 사람의 영혼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말이지만, 여기서는 성령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왜냐하면 뒤에 나오는 진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예배를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특히 참된 예배를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것이라고 할 때 그 근거로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결코 육체를 가지고 계시지도 않으며,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말씀에 비춰보자면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육체적인 방식도, 또한 물질적인 내용으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일차적으로 있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령한 예배는 옛날 의식의 덮개를 벗겨 버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 중에서 신령한 것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진리는 성령 안에 있는 것으로서, 의식은 말하자면 우발적이고 부수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진리가 거짓과 대조되지 않고 외적인 형상과 대조되고 있음에 다시 한 번 유의해야 하겠다. 진리는 신령한 예배의 단순한 본질이다.” 그러므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 앞서 설명한 모든 의식적인 요소를 제거한다는 것으로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의식적인 모든 요소를 제거하기만 하면 다 참된 예배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살핀 바 있는 요한복음 3장의 내용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즉 성령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위로부터 난 자들이 아닌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5)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습니다.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정한 것, 말씀이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만 예배해야 합니다. 그러나 좀 더 궁극적인 의미에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진리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지지 않는 이상 그것은 참된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한다는 것은 이런 모든 것을 다 담고 있는 예배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드려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정해진 것, 그것으로만 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안에 있는 사람들, 성령이 그 가운데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전도라는 명목으로 불신자들 중심으로 드리는 구도자 예배와 같은 것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합당한 모습은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믿지 않는 자들이 예배를 드리는 곳으로 나아올 수는 있습니다. 특히 믿지 않는 자들이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예배하는 곳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들음으로 말미암아 나기 때문입니다(롬10: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도라는 명목 아래 불신자들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그 방식에 있어 옳은 방법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불어 오늘날 교회들을 보면 의식법의 모든 요소들을 폐지하고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는 내용으로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참된 예배의 방식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 보면 찬양에 대한 비중이 매우 높아져 있습니다. 찬양을 통해 사람의 마음을 뜨겁게 만들기도 하고, 또 흥분하게 만들기도 하는 등 그런 분위기를 인위적으로 조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명하신 적이 없다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열린 예배라 하여 꽁트나 드라마, 혹은 영상을 통해 설교를 돕는다는 식으로 행하는 모든 것들, 혹은 목사가 아닌 장로나 집사를 통하여 말씀 시간을 대체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는 아닌 것입니다. 교회 절기와 관련해서도 보면 성경이 명하고 있지 않는 예배로서 성탄절과 부활절 등이 있는데, 이미 주일에 그 모든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수요일은 어떤가? 수요일 자체는 성경이 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문에 지키기 않는다고 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성도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 시간을 정하여 드리고자 한다면 그런 교회의 결정에 적극 참여하여 유익을 얻는 것이 성도의 의무인 것입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육신이기 때문에, 인간이 그의 성품에 맞는 것에 탐닉하는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가운데 피상적인 의식으로 가득찬 것을 여러 가지 발생해 낸다. 우리는 물이 불과 상종하지 않는 것처럼 육신과 도저히 통할 수 없는 하나님과 상대하고 있음을 우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너무나 상이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쁘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싫어하시고 지루해 하신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 마음의 방탕함을 억제하는 데 족할 것이다.”
여러분,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참된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영이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예배하는 것은 결코 참된 예배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여자의 경우 예배는 드리고 있었지만, 알지 못하고 드리는 예배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는 예배를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구약의 모든 의식법을 폐할 날이 왔다고 알리심으로 성령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부터 세상 끝 날까지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구약은 그 사실이 의식법으로 약간 가려졌을 뿐이고, 이제는 그런 의식법이 제거됨으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명한 것으로만 예배의 내용을 삼아야 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에(히11:6) 믿음 안에서 나아가야 합니다. 더불어 그런 믿음과 함께 우리의 모든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것도 우리는 잊으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신 것은 바로 하나님만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우리에게 주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