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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中心의 여주
여강의 노래
여주 아리랑
아리 아리 아리 아라리요
신륵모종 마암어등 학동모연 연탄귀범
여주팔경 여주팔경
춤추는 아리 아리랑
황포돛배 한가로이
저녁노을 타오르면
시인묵객 시 한수에
팔수장림 춤을 추네
아리랑 아리 아리랑
봉미산 신륵사의 저녁종소리
마암벽 돌고 돌아 맴돌아 돌고
네온불빛 출렁이는 은모래 벌엔
아낙네들 물레소리
흘러 흘러서 든다
아리 아리 좋구나
좋다 여주 아리랑
아리 아리 아리 아라리요
양도낙안 팔수장림 이릉두견 파사과우
여주팔경 여주팔경
춤추는 아리 아리랑
개나리꽃 물 안개꽃
새벽 여울 눈부신데
다가올 듯 사라질듯
어부들의 놋소리
아리랑 아리 아리랑
청심루 강변로에 기러기 떼는
그리워 돌고 돌아 맴돌아 돌고
네온불빛 출렁이는 은모래 벌엔
도공들의 물레 소리
흘러 흘러서 든다
아리 아리 좋구나
좋다 여주 아리랑
아리 아리 좋구나 좋다 여주 아리랑
여강길 1코스
2019년3월1일 금요일 미세먼지 나쁨
07시
동서울터미널 매표소에 이르니 불광 모임의 김헌영 총무와 원의연 사장의 마중을 받는데 오늘은 여강길 1코스 “옛나루터 길”을 걷기로 하고 7시30분 여주행 버스를 탔다(요금 6500냥)
• 오늘 걷는 길
여주버스터미널-마암-영월루-강변유원지-이호대교-금은모래강변공원-한강문화원-강천보-무어장군추모비-부라우나루터-우만리나루터-흔암리선사주거지-아홉사리과거길-소무산자락-아홉사리-도리마을회관
※ 여주 이야기 1
이릉(二陵)에 세종대왕과 효종이 잠들고 명성황후의 생가가 있고 고려 말의 대문장가인 삼호 이규보선생의 고향이며 이색선생과 나옹선사가 신륵사에서 生을 마감했고 고려 말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한 번쯤은 스치면서 “천년의 울림 여강의 노래”를 불렀다 단종대왕은 귀양길에 창덕궁 앞 영도교에서 정순왕후와 생이별하고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금사면 이포나루에서 가마로 환승하여 청령포로 갔으며 근래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소설가인 류주현(1921년6월3일~1982년5월26일)의 고향으로 장편 대하소설과 역사소설로 성공하였고 작품에 장편 “大院君”과 “조선 총독부”등이 있다.
이규보 선생이 고향인 황려에 들어가면서 시를 읊었는데 지금의 여주는 당시에는 황려라 불렀다
初入黃驪- 李奎報
跨驪才度嶺: 나귀를 타고 겨우 고개를 넘으니
縣枕碧江頭: 고을은 무른 강 머리를 베고 있구나
水國移蓬島: 수국은 봉도를 옮겨놓은 듯하고
人家住沃州: 사람들이 사는 집 옥주에 있는 것 같네
※ 여주이야기 2
• 여주(驪州)의 지명유래
여주 지역은 처음 삼한시대에 馬韓 땅에 속했다가 삼국이 생기면서 백제 땅에 속했다가 그 후 고구려가 세를 확장하면서 고구려 영역에 편입되어 고구려 장수왕 63년(서기 475) 여주에 대한 지명의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는 지명으로 기록이 되었다. 骨內斤縣은 누런내가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 당시 골내근현을 통과하던 여강 지역은 점동면의 삼합리에서부터 도리, 처리, 흔암리, 우만리, 단현리, 연라리, 상리, 하리, 왕대리, 백사리까지 강변으로 다른 강의 유역과는 달리 전혀 평야를 형성하지 않고 모두 강변이 가파랐다. 따라서 그 옛날 홍수가 나면 물이 누런색(누런 내: 黃川)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고 지금도 여주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은 홍수 철에는 물이 누런색이다. 따라서 깊은 골짜기에 누런색의 내(川)가 흐르는 마을이란 뜻으로 지어진 순수한 우리말을 한자로 음을 표기 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는 것이다
한시간반 만에 여주터미널에 도착하여 근처에 있는 뼈다귀 감자탕 집을 찾아들어 아침식사를 하는데 식당에는 “뼈다귀 감자탕” 유래문이 있는데 감자탕의 감자는 돼지 척추뼈에 붙어 있는 고기를 “감자” 라고 하면서 삼국시대부터 남녀노소의 보양식으로 먹었다고 되어 있다
터미널에서 동쪽을 향하여 건물 사이로 빠져나가서 통행량이 많은 도로 곁을 걸으면 여주군 선거관리위원회 옆에 한국국토정보사 건물이 있고 방향지시목이 있고 여주초등학교 앞을 지나면 멀리 영월루가 보이고 곧 사거리가 나온 다(사거리: 여주역 시청 신륵사 강천보) 횡단보도를 건너 여주공원으로 들어가면 여주군 6.25 참전비가 보이고 마암(馬巖) 안내문이 있다
70m를 강변으로 내려가면 바위들이 얼기설기 엉켰고 담벽락 같은 바위에 “馬巖”이라고 글자가 새겨져 있고 마암에는 驪興閔氏의 시조가 탄생하였다는 설화가 있다
※ 여주팔경
제1경 神勒暮鍾: 신륵사에서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제2경 馬巖漁燈: 마암 앞 강에서 고기 잡이 배들의 등불풍경
제3경 鶴洞暮煙: 강 건너 학동에서 저녘 밥 짓는 연기
제4경 燕灘歸帆: 강 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제5경 洋島落雁: 양섬에 기러기 떼가 내리는 모습
제6경 八數長林: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진경
제7경 二陵杜鵑: 英陵과 寧陵에서 들리는 두견새 우는 소리
제8경 婆娑過雨: 파사성에서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 驪州馬巖
馬巖은 여주팔경중 馬巖魚燈으로 이 바위에서 麗州地名의 由來가 되는 黃馬와 驪馬가 솟았다고 하여 마암 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 地域의 地名도 黃驪라 불리워져 왔는데 즉 여주의 지명은 골내근현- 황효- 황려- 여흥- 여주- 로 變遷 하여 왔는데 황려 지명은 이 마암 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이 고장 出身 대문호 이규보의 한시중에 두 마리 말이 奇異하게 물가에서 나왔다 하여 이 때문에 고을 이름이 黃驪라네 라고 읆은 內容이 있어 그 歷史性이 높은 遺蹟으로 이 고장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 한다. 또한 여주의 代表的인 성씨 驢興民氏 의 始祖가 誕生했다는 이야기가 傳 해지고 驪州市를 代表하는 自然景觀 遺蹟 이라고 말 한다.
• 마암(馬巖) 전설
옛날 한 漁翁)이 여강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낚싯대를 물에 담그고 물 건너편의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을 빼앗기고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런데 멀리서 손짓하며 달려오는 한 여인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무척 다급한 듯 사공을 부르고 있었다. 마침 사공이 없던 터라 어옹은 낚시를 거두고 배에 올랐다.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여인의 비명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뒤쪽에서 험상궂은 사나이가 달려오고 있는 것이었다. 어옹이 재빠르게 건너가 그녀를 배에 태우려 할 때 뇌성벽력이 치며 바람이 불었다. 그와 함께 어디서인지 누런 말과 검은 말이 나타났다. 여인은 재빠르게 黃馬에 오르고 뒤이어 달려온 사나이는 여마(驪馬)에 올랐다.
하늘엔 자욱한 물보라가 일고 어옹은 흔들리는 배를 잡기에 여념이 없었다. 잠시 후 바람은 멎고 물결이 가라앉자 그 광경에 놀란 어옹이 말들이 떠난 자리를 바라보니 여인과 사나이는 보이지 않고 커다란 바위의 자태만이 우뚝 서 있을 뿐이었다. 이때부터 그 바위를 黃馬와 驪馬가 나왔다 하여 馬巖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이 고장의 지명도 黃驪라고 불렀다고 한다.
馬巖: 말바위란 순수한 우리말로 크다는 뜻과 산이라는 두 가지의 뜻이 있다
그리고 이규보, 이색, 서거정, 최숙정, 김상헌, 정약용, 김창협등 당대의 詩人墨客들이 마암을 찾아와서 詩와 풍류를 즐기던 名所 였다고 傳해지고 있다. 現在는 평평한 바위면 에 “마암(馬巖)“이라 큰 글씨가 새겨져 있으며 위쪽으로 여주목사를 역임한 이인응 과 좌측에 庚午 十月 日角. 그리고 우측에 여주군수를 지낸 신현태 라는 새겨진 글씨가 있다
驪江迷懷(여강에 빠진 마음)- 牧隱 李穡(1328~1396)
天地無涯生有涯: 천지는 끝없고 인생은 유한하니
浩然歸志欲何之: 호연히 돌아갈 마음 어디로 가야 하나
驪江一曲山如畵: 여강 굽이굽이 산은 그림처럼 아름다워
半似丹靑半似詩: 반은 단청 같고 절반은 시 같구나
마암에서 되돌아 영월루로 갔다 공원에는 등나무 쉼터와 구부러진 소나무들
이 각양각색의 모양을 자랑하고 현충탑과 선정비와 공적비가 즐비하고 현충
탑이 있다
• 迎月樓(경기도 문화재자료 재37호)
위치: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상리
영월루 입구에는 비석거리가 있고 그 윗 쪽에는 1958년에 이건된 여주 창리 삼층석탑(보물 제91호)과 여주 하리 삼층석탑(보물 제92호)이 있다.
영월공원에서 빠져나오면 투썬폴리스 앞을 걷다가 좌틀하면 4대강 국토종주 자전거길이 있고 다리를 건너면 SunValley Water Park가 보인 다 본격적인 트레킹이 시작되었는데-
제2 금은교를 지나면 강변유원지로 캠핑장이 있고 신륵사가 보이고 신륵사를 왕복하는 황톳배가 있다 “驪江晩泊”표식을 볼 수 있는데 “해질무렵 여강에 배를 대다" 뜻으로 한강에서 132Km 란 다 광할한 벌판 같은 강변유원지를 걸으려면 전방으로 다리들이 보이고 스치는 길에는-
• 이선영조난추모비
• 현대동산
• 돌무더기 를 지나서 이호대교 밑을 걷는 다
• 梨湖大橋(Ihodaegyo(Way Bridge)
경기도 여주시 여흥동(연양동)에서 여주시 강천면을 잇는 길이 910m, 왕복 4차선의 교량이다. 1995년 중반에 착공해 1998년 6월에 준공됐으며, 42번 국도가 이 다리를 지나간다. 다리의 이름은 여주시 강천면 '이호리'가 이 다리의 시점이라 하여 이호대교라 하였으며, 여흥동(연양동) 사람들은 연양 교차로를 통해, 강천면 사람들은 이호 교차로를 통해 이 다리와 42번 국도를 함께 이용할 수 있다(출처: 나무위키)
신광한(申光漢 1484~1555)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으로 梨湖十六詠을 읊었는데 그중에 梨湖月艇(이호의 달과 고깃배)의 詩
湖水澄明百頃秋: 호수의 가을물은 맑아서백 이랑인데
一篙撑放小漁舟: 작은 고깃배 풀어 상앗대로 저어 간다네
天中月色罇中酒: 하늘 가운데 달빛이 술항아리 비추는데
瀉盡騷人今古愁: 시인은 고금의 시름을 모두 쏟아낸다네
(출처: 천년의 울림 여강의 노래)
금은모래공원에 한강문화관이 나왔다 김 총무가 음료수를 마시라하여 이층에 있는 매점으로 올라가 켄 커피를 선택하고 안내를 찾아가서 “한강 명품보이야기”와 “한강문화관”의 팜프렛을 챙겼고 강천보 다리 위로 올라가서 자전거길를 밟아 보고 다시 내려왔다
• 강천보(康川洑, Gangcheonbo)
경기도 여주시 단현동과 강천면에 있는 남한강의 보로서 4대강 정비 사업과정에서 부설되었다
강천보 다리를 지나면 추모비가 있는데 추모비는 6.25 전쟁 때 주한 미군 9군단장으로 남한강 도하 작전중 헬기에서 추락하여 사고를 당했는데 그는 메인 주에서 출생하여 56세를 일기로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미 육군 소장 브라이언트 에드워드 무어(Bryant Edward Moore) 장군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기 위하여 여주 한강변에 세웠다
음식점 風流亭을 지나면 부라우나루터가 나온 다
• 브라우나루터
여주읍 단현리와 남한강 건너편의 강천면 가야리 지역을 연결하던 나루터로 나루 주변의 바위들이 붉은 색을 띄어 붉은바위-붉바우-브라우라는 명칭이 생겼다하고 주로 강천면 주민들이 여주장을 이용하기 위해 나루를 이용했지만 가끔 소금배가 정박하기도 했다 1975년 폐쇄 되었지만 풍경이 뛰어나 나루터에서 남한강의 시원한 풍경을 볼 수 있다
나루터에서 빠져나오면 여주스마트타운 공사장으로 유도표식이 전주에 하나 붙어 있을 뿐으로 강변을 향하여 마을을 통과하여야 하고 우만리나루터는 2.7Km다
• 우만리나루터
우만리와 강천면 가야리를 연결하던 우만리나루터는 주민들의 휴식처로 우만리 사람들이 강건너에서 땔감을 구하고 원주 소장수들은 여주장과 장호원장을 다녔으나 1972년전 까지는 음력 정월 보름날 남한강의 3곳의 강물로 밥을 지어 날이 밝기 전 용왕신을 배부르게 하여 액땜을 했다는데 앞에는 수령 300년 된 커다란 느티나무는 보호수다 1972년 홍수로 나루는 사라졌지만 느티나무는 거친 풍파를 이겨내며 세월을 이야기하고 있다
장승과 휴식할 수 있는 넓직한 돌과 상수원 보호지역 안내문 그리고 작으마한 그네 등이 있다 남한강교 (2차선 아스팔트 포장도로)밑에서 철제게단(68개)를 올라 횡단보도를 건너 입산한 다
• 南漢江橋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총연장 540m의 남한강의 다리이다. 영동고속도로를 구성하는 고속도로 교량으로, 여주 나들목과 문막 나들목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행할 길이 폐쇄되었으니 화살표 방향을 따라가라는 안내문이 있고 화살표 바향을 따라가면 선사1길로, 주택가로 들어서면 강변정원마을- 우만1동이고 흔암리 선사유적지 가는 길이다 언덕에 올라 새마을회관 앞에 흔암리 선사주거지가 표석이 있고 전방으로 우람한 소무산이 버티고 있고 길은 아홉사리과거길이다
• 흔암리
선사주거지의 마을로 “화재 없는 안전 마을”로 여주소방서에서 지정하였고
마을 옆으로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아름답고 깨끗한 마을로 강에 큰 바위가 있다고 하여 과거에는 흔바우라고 불려졌고 경기도 기념물 제155호인 청동기시대 선사유적지가 있다.
또 흔암리는 정월대보름이 되면 전통민속놀이인 쌍용거줄다리기를 재현하고 있다. 1989년 전국민속문화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는 쌍용거줄다리는 흔암리 앞 강가에서 재앙과 액운을 소멸하고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련된 전통민속놀이이다.
• 아홉사리 과거길
흔암리와 도리를 연결하는 오솔길로 좁고 험해 아홉구비를 돌아간다고 해서 아홉사리이다 경상도와 충청도에서 과거를 보러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있지만 사용하지 않아 자연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현재 39종의 식물이 서식이 확인되었다 경상도 지역의 과객들이 문경을 거쳐 서울로 갔는데 이유는 “좋은 소식을 듣는 다”는 뜻 때문이었다 죽령은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은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이유로 선비들은 문경을 선호했다고 한다
내리막길을 걸으면 아홉사리 과거길이고 걷다가 우틀 하면 은천흔암뜰이고 예수치유교회로 들어갔다가 소무산(249.2m) 산자락으로 붙어서 유도표식 따라 진행하면 송전탑이 나오고 사면을 치고 올라 내리막을 걸으면 아홉사리 고개가 나온 다(택지 개발로 우회)
소무산 옆 아홉사리는 다른 이름으로 고살래고개라고도 하는데 나라 안에는 부여를 비롯하여 몇 개의 아홉사리재가 있다 계곡에는 꽁꽁얼은 얼음이 아직도 풀리지 않았고 구비구비 아홉사리를 통과하려면-체력 소모가 크고
• 나무로 만든 다리
• 나무로 만든 계단
• 나무로 만든 의자 가 있다
체력이 바닥나면서 산자락에서 벗어나니 여강길 1코스 안내도가 있고 도리마을회관 가는 길은 시멘트 포장길이다
산자락에서 모처럼 주저앉으니 김 총무가 삶은 달걀 2개씩 배급하면서 라면을 끓였고 원 사장은 후식으로 사과와 방울 토마토를 준비하였다 최고의 라면 맛을 보고 씨멘트로 포장된 흰색길을 따라서 도리마을 회관을 찾아갔다
• 道里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으로 태백에서 시작된 남한
강과 안성에서 흘러온 청미천이 만나는 곳에 아담한 자연마을로는 큰말, 새
마을, 사장골 등이 있다. 큰말은 원래 있던 되래마을이 남한강 수운으로 큰
마을을 이루고 번창하였으므로 불리게 된 이름이다.
강변 경작지에서는 지금도 선사시대 주거지와 유물들이 발견되곤 한다. 마을
동쪽의 신선바위와 서쪽의 아홉사리 길은 한양과 충주를 이어주던 중요 길
목이자 절경을 간직한 곳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찬탄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여흥 민씨들의 집성촌인 도리는 50여호 남짓한 작은 마을이
지만 느티나무 가지마다 매미소리 요란하고 푸른 들판 가득 벼와 감자와 옥
수수가 영글며 맑은 강에선 피라미와 매자가 뛰노는 푸근한 곳이다
도리는 향골마을 이라면서 넝넘들이 있다
• 미풍양속
마을회관을 찾아가는데 회관 앞 느티나무 아래에서 중년들 대여섯이 술판
을 벌리고 있다가 우리들과 시선이 마주치더니 “술 한잔 하세요” 라고 좌장이 부른 다
몇 해 전까지도 들에서 일을 하다가 참 때가 되면 논둑이거나 밭둑에 일군들이 모여 앉았을 때 행여 지나가는 길손이 보이면 “과객 양반 이리오슈~
같이 나누어 먹읍시다” 라고 모셨는데 오늘 모처럼만에 道里에서 정겨운 말을 들었다
마을버스는 점동면 마을들을 순환하여 여주터미널에 도착하니 16시40분으로 서울행은 17시20분에 있는데 올 때보다 20분이 빠르다
• 마치면서
선비들이 여강(황려강)의 “천년의 울림 여강의 노래”를 여주박물관에서 발
행했지만 여주아리랑을 비롯하여 “여주 가남풍년가(문희)” “여주팔경(최연숙)” “여주 신륵사(V.A) ”내고향 여주(선수현 임부희) “여주의 노래(유덜영 작사 김동진 작곡) 가 있고 북한강가에서 여강칠우(바응서 서양갑 심우영 박치인 형제 이경준)들이 ”무륜“ 정자에서 술을 마시면서 서자로 태어난 울분을 달래다가 큰 사건을 저질렀다
귀가하면 여주아리랑을 비롯하여 여주노래들을 들어보면서 다음 코스를 걸을 때는 여주는 도자기로 유명하니 도자기 박물관도 찾아보고 여주쌀밥 집을 찾아서 식단을 차려야 하겠다
수많은 여강 시중에 羅湜(1498연산군4~1546명종1)의 驪江의 詩를 옮겨 보
는 것으로 여강길 1코스를 걸은 소감을 맺는 다
※ 여강- 羅湜
日暮蒼江上: 푸른 강 위로 해 저무는데
천寒水自波: 날은 차갑고 물결 절로 인다
孤舟宜早泊: 외딴배 일찍 대야 하는데
風浪野應多: 밤이라 그런지 바람이 이는 물결 더욱 거세구나
• 여주 여강길
남한강을 따라가는 여강 길은 경기 여주에서 강원 원주를 넘어갔다 다시
여주로 오는 총 55km로 문화관광부의 스토리가 있는 문화 생태 탐방로 중
하나이며 크게 4개의 코스로 특히 여강길은 강을 따라 많은 나루터의 흔적
들이 있으며 또한 신륵사 등 역사 유적지가 있어 자연과 사람이 어우러지는
그런 길이다.
1코스- 옛나루터 길
2코스- 세물머리길
3코스- 바위늪구비길
4코스- 5일장터길
5코스- 대왕릉숲길 14.38Km
• 국토부가 발표한 한강 8경
제1경 양평 두물지구
제2경 양평 교평지구
제3경 여주 이포보
제4경 여주 천남·가산지구
제5경 여주 연양지구
제6경 여주 단양쑥부쟁이
제7경 충주 능암리섬
제8경 충주 탄금대
한강8경중 제 3, 4, 5, 6경이 여주 지역이다 제2 금은교를 건너면 강변유원지가 나오고 신륵사를 왕복하는 세종호라는 황톳배가 보인 다
여주시의 市花는 개나리 시조는 백로 시목은 은행나무이며 캐릭터는 “성군 세종대왕”과 “쌀” 그리고 “도자기”이며 여주에는 남한강 따라 즐기는 맛 기행을 할 수 있다
영월루에서
천년의 울림
영월루에 올라
이릉의
두견새 울음을 듣고
신륵사를 바라보니
저녘 종소리 들리는 듯
목은 李穡선생도
한숨지었던
강물은
여전히 흐른 다
길손이야
가야할 길 멀어
옛나루터
스치려면 배도 고플 거
아홉사리
과거길도 스치고
道里마을
정자에서
술판 벌리는 사나이들
좌장인듯
“어르신 술 한 모금 하세요”
부르는 소리
마다 할 수 없어서 끼어든 다 2019년3월1일 미세먼지 나쁜 날에
자료 1
• 여주 여강길
1코스- 옛나루터 길
위치: 경기도 여주시 여주읍 점동면
여주역-영월공원-한강물관리관-강천보-부라우니나루터-우만리나
루터-흥암리나루터-아홉사리과거길-도리마을회관 15.6Km
2코스- 세물머리길
위치: 경기도 여주시 점동면 원주시 강천면
도리마을회관-청미천갈림목-중궁이봉-청미천제방길-삼합교-소너미고개-남
한강대교-개치나루터-흥창원-섬강교-해돋이길갈림목-자산(닷둔리)-굴암양
수장-강천매운탕(강천리종점) 14.05km
3코스- 바위늪구비길
위치: 경기도 여주시 강천면
강천교버스정류장-오감천교-대순진리회-이호삼거리-금당천교-한양관앞-노
인요양원-신륵사-신륵사버스정류소 15.01Km
4코스- 5일장터길
위치: 경기도 여주시 오학동
신륵사버스정류장-04코스시점-여주마암-여주대교-여주시청-여주장터-대로
사-효종대왕릉-세종대왕릉-세종대왕릉역 13.66Km
5코스- 대왕릉숲길 14.38Km
위치: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세종대왕릉역-세종대왕릉-효종대왕릉-황포돛배선착장-양섬-소양천-여주역
자료 2
• 여주 8경
1. 神勒暮鍾
신륵사에 울려 퍼지는 저녁 종소리 신륵사는 여주읍 천송리에 있는 전통사찰로, 낮고 부드러운 곡선의 鳳尾 山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절 앞으로는 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 이 유유한 자태로 흐르고 있는 아름다운 사찰이다. 신라 진평왕 때 원효 대사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다.
神勒이라는 사찰 이름에 대해서는 신기한 미륵(혹은 나옹선사, 혹은 인당 대사)이 신기한 굴레(勒)로 인간에게 피해를 주는 龍馬를 막았다는 전설 에 의한 것이라고 전한다.
신륵사가 유명해진 시기는 고려 말부터이며, 1376년(고려 우왕 2)에 나 옹선사가 신륵사에서 입적했다.
조선시대에는 예종 원년(1469), 본래 경기도 광주 대모산에 있던 세종의 영릉을 여주군으로 천장하면서 신륵사의 이름을 報恩寺로 바꾸게 하고 세종대왕릉의 願刹로 삼았다.
2. 馬巖漁燈
마암 앞 강가에 고기잡이배의 등불 밝히는 풍경 여주읍 상리, 영월루 바로 아래의 절벽 바위는 예로부터 ‘마암’이라고 불 리던 유서 깊은 곳이다. 여주를 대표하는 貫姓 중의 하나인 여흥 민씨는 마암 바위의 구멍에서 시조가 탄생했다 하여, 이곳을 성지로 여기고 있 다.
또 신라 경덕왕 때 마암 바위 아래의 푸른 물결에서 황룡마와 여룡마(검 은 용마)가 출현하여 고을 이름을 黃驪縣으로 고쳤다고 하니, 가히 여주 를 대표할 만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평평한 바위면을 골라 馬巖이라고 세로로 크게 써서, 배를 타고 오가던 행인들이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하였으나, 지금은 관리소홀로 잡풀이 무성한 실정이다.
마암 글씨의 위쪽과 좌측에서 각각 李寅應과 ‘…十月 日刻)이, 그리고 우 측의 또 다른 바위에서 申鉉泰라는 글씨가 확인되고 있으며, 전후사정으 로 보아 조선 후기에 새겨진 것으로 추정된다.
3. 鶴洞暮煙
강건너 학동에 저녁밥 짓는 연기 학동은 오학리 학동과 현암리 학동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옛날에 많은 학 들이 이 고장에 와서 쉬었다 하여 학동이라 불린다.
4. 燕灘歸帆
제비여울에 돛단배 귀가하는 모습 남한강 양섬 앞으로 제비여울(燕子灘:연자탄)이 흐르고 있다. 이곳은 물살 이 매우 빠른 곳으로 옛날에는 여주팔경중 하나를 차지했다. 임진란 때 제비여울 전투가 치러진 곳이 이곳이다.
5. 洋島落雁
양섬에 기러기떼 내리는 모습 羊島는 여주읍 하리의 아랫동네 북쪽 한강 가운데 있는 섬이다. 조선시대 가축방목지로 이용되었던 섬으로 훗날 양을 길렀다고 하여 양섬이라고 한다. 원래는 벌섬인데 벋은 섬으로 변하고 다시 버들섬으로 변하여 일시 楊島이라 하다가 현재 이름 羊島으로 쓰이게 되었다.
6. 八藪長林
오학리 강변의 무성한 숲이 강에 비치는 전경 팔대 숲은 현암리의 수촌(남한강 옆에 있는 부락) 앞에 있는 숲이다. 길 이가 7리가 되어 바다 같다 하며, 여주 팔경의 하나이다. 정조대왕 때 벌 채가 이루어져 농경지로 개간돼,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7. 二陵杜鵑
영릉과 녕릉에서 두견새 우는 소리 英陵(사적 제195호)은 능서면 왕대리의 세종대왕릉이다. 조선의 제4대 왕 인 世宗과 그 왕비 昭憲王后 沈氏의 合葬陵이다.
1469년(예종 1)에 결국 한강의 수로를 이용하여 여주 서쪽의 北城山으로 遷陵하였다.
寧陵(사적 제195호)은 조선의 제17대 왕인 孝宗과 그 왕비 仁宣王后 張 氏의 雙陵이다. 1659년(효종 10) 健元陵의 서쪽 능선에 병풍석을 갖춰 모셨으나,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 다 하여 英陵의 동쪽 弘濟洞으로 遷葬하였다.
8. 婆娑過雨
파사성에 여름철 소나기 스치는 광경 婆娑山城(사적 제251호)은 대신면 천서리와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상자 포리의 경계에 있는 婆娑山 해발 230.5m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서쪽으 로 발달한 능선을 따라 축조된 삼국시대 이래의 석축 산성이다.
성곽의 전체 둘레는 935.5m이며, 현존하는 성벽의 최대 높이는 6.25m이 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