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언 그는 19세기 전반기의 가장 중요한 이탈리아 오페라의 작곡가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의 일대기는 링크로 걸고, 작곡가로서의 롯시니보다 사적 생활인 결혼과 음악보다도 더 좋아했던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저 한다.
● 작곡가 롯시니 ■ 두 번의 결혼과 부자가 된 경위 1815년에 나폴리에 있는 성 카를로극장(Teatro di San Carlo)의 지배인 바르바이아(Domenico Barbaia(1777~1841)의 초청으로 음악감독을 맡게되었다. 이 때 바르바이아의 부인은 스페인의 드라마틱 소프라노인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1785~1845)였는데, 롯시니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나폴리를 떠나 빈 으로 가는 도중에 결혼한다. 그 당시 롯시니의 경제상태는 그렇게 좋지 않았는데, 그 것은 오페라 1곡을 상연하게 하는 작곡가가 그 상연의 일부를 맡고 받아가는 주역가수보다도 보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르바이아는 롯시니의 경제형편을 개선하기 위해 작곡료를 더 지불하는 대신(그런 일을 하면 가수들의 노여움을 산다) 에 ‘성 카를로 극장’의 로비에서 도박장을 열고 있는 높은 이윤의 회사에서 이익 배당을 갖도록 해주었다. 물론 이후 1824년에 파리로 건너가서 이탈리아오페라극장을 음악감독을 맡고 받게된 프랑스정부 연금도 큰 보탬이 되었다.
첫째 부인 콜브란이 나이가 들어 가수로의 활동도 시원찮고 권태로워 지자 15년간 동거해 오던 프랑스의 고급창부인 올랭프 펠리시에(Olympe Pélissier,1799~1878)와 결혼한다. 물론 결혼 생활은 유지되었으나 신통치 못했다.
■ 37세에 오페라계에서 은퇴 롯시니는 <세비야의 이발사(1816)>를 비롯하여 은퇴 직전에 쓴 <윌리엄텔(1829)>을 비롯한 39개의 오페라를 작곡하여 희가극‘오페라 부파’와 ‘오페라 세리아’의 작곡가로써 중요한 역할을 했다. 즉 오페라의 형식과 리듬에 생기를 불어 넣었으며 음악이 드라마를 규정하여 틀을 꾸며 나가는 방법으로 새바람을 일으켰다. 물론 은퇴 후에 10년에 걸처 작곡한 대작 <슬픔의 성모(Stabat Mater ,1842년)>을 만들기도 했다. 은퇴 이유는 건강상(몸이 비대해짐)의 문제도 있었지만 1848년 유럽 전역에 퍼진 혁명으로 중단된 프랑스정부연금을 다시 받는 일에 전념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거기에 구태여 다른 이유를 댄다면 바로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입니다. 돈도 이미 충분히 벌었고 음악 활동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한 그는 앞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남은 인생을 살겠다고 선언하고 미련 없이 모든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 만찬의 밤 모임 매주 토요일마다 로시니의 저택에서는 ‘요리와 음악의 밤’이 열렸다고 한다. 로시니의 친구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유명 인사들이 참석하는 행사였는데, 최고급 재료로 준비된 저녁 식사와 식사 후 작은 음악회까지 이어지는 흥겨운 자리였다. 클라라 슈만(슈만 부인), 슈만, 리스트, 생상스, 베르디 등도 단골로 방문하는 손님이었고, 기분이 좋은 날이면 리스트는 즉석에서 피아노 연주를 선사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모임이 무려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그가 좋아하던 요리는 지금도 이어져 “롯시니 스테이크(Tournedos Rossini)”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그맣고 예쁘장한 소고기 안심(필레살) <출처 : 음악의 유산, 중앙일보사,pp.35~53)> Wikipedia(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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