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에냐프스키(Wieniawski,Henyk :1835~1880폴란드) 폴란드의 루블린 출생,바이올리니스트·작곡가. 19세기의 가장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한 사람으로8세 때 파리 국립음악원에 입학하여 파리음악원에서 마자르(Massart)를 사사,러시아 황제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임명13세 때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데뷔한 후, A.루빈스타인 등과 세계 연주여행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1860년 페테르스부르크의 궁정 바이올니스트가 되었으며, 1862~67년 페테르스부르크 교수로 재직하였고, 1874~77년 비외탕의 후임으로 브뤼셀 왕립음악원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 스타카토기법 등의 연주법 발전에 기여하였다.
그는 전아하고 섬세한 연주를 하여 기교적인 프랑스-벨기에파의 바이올니스트로 명성을 얻었으나,그의 정서의 기반은 폴란드적 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서 연주여행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작품은 기교적이고 폴란드 민요의 아름다움을 살린 것이 많다. 대표작품으로《모스크바의 추억(Souvenir de Moscou, Op.6)》,《전설Legende Op.17》등의 소품과《바이올린 협주곡D단조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No.2 in D minor, Op.22》,《바이올린 협주곡F단조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No.1 in F minor, Op.14》,《폴로네즈'라장조' Polonaise No.1 In D,Op.4》 《'연습곡 카프리스a단조 작품18-4 Caprice In A Minor Op.18》 ■ 일대기 바이올린의 낭만주의자 비에니아프스키 폴란드의 루블린 출생 비에니아프스키(1835~1880)는 온통 피아니스트로 가득한 유명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10세를 전후하여 그는 이미 동생 조제프 비에니아프스키와 함께 연주여행을 다녔는데,그의 신동으로서의 연주여행은8년 이상 계속됐다.이 시기에 비에니아프스키는 혹평가 세로프로부터“이들 형제는 어릴 때 잠시 스쳐가는 신동이며,비르투오조적인 재주 뿐이다”라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그는 자신의 작곡을 통해서 이런 혹평들이 틀렸음을 증명했다. 13세부터 작곡을 시작한 비에니아프스키는5년 후 자신의 작품번호14번의 곡들을 출판한다.이중에서 화려하고 낭만적인 콘체르토1번은 그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다.
그 후 그는 실내악 음악가로서 또 독주회 연주자로서 빈번히 연주하게 되는데 24세 때부터 피아니스트 안톤 루빈스타인과 짝을 이뤄 연주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런던에서는 베토벤 콰르텟 소사이어티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1860년에 러시아의 음악 발전을 위해 루빈스타인이 그를 데리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가게 된다.그곳에서 12년 동안 러시아 황제의 솔로 바이올리니스트로서,러시안 뮤직 소사이어티의 리더로서,또한 상트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의 교수로서 열성적인 활동을 했다. 비슷하게도 비외탕이 걸었던 길을 그도 따랐던 것이다.이 활동은 러시안 바이올린 악파에 지대한 발전을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비에니아프스키 자신의 음악 해석과 작곡에도 도움을 주었다. 1862년에는 콘체르토2번을 초연하게 되는데,악평을 하기로 유명한 꾸이마저도 “며칠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1악장 알레그로의 신선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감탄할 정도로 훌륭한 곡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생애의 여러 기간 동안 계속되는 연주여행에 시달렸다. 러시아에서 돌아온 직후인 1872년 또 세계연주여행을 떠났는데,첫해에 북미에서만 215회에 다다를 정도의 무리한 연주 스케줄로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는1875년 유럽으로 다시 돌아와서 비외탕을 대신하여 2년간 브뤼셀 음악원의 교수로 있으면서도 연주활동을 계속했으며,독일 연주 때는 사라사테와 라이벌이 되기도 했다. 1878년에 건강이 다시 크게 악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에서 열린 연주회에서 자신의 콘체르토2번을 연주하다 무대에서 쓰러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그가 무대 뒤로 실려나간 사이 청중석에 있던 절친한 친구 요아힘이 비에니아프스키의 바이올린을 들고 올라와 “내 친구의 콘체르토는 연주할 수 없지만 대신 바흐의 샤콘느를 들려드리겠습니다”하며 연주했다. 연주가 끝난 후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무대로 나온 비에니아프스키와 포옹했다는 에피소드는 유명하다.그의 건강은 같은 해 모스크바에서 크로이처 소나타1악장만을 연주하고 멈추어야만 할 정도 좋지 않았다.그렇지만 몸 상태가 조금이라도 좋아지기만 하면 그는 변함없이 대단하고도 놀라운 연주를 들려주었다.무대를 사랑한 비에니아프스키는 결국 이듬해 러시아 오데사에서 연주 도중 병원으로 실려 갔다.
마담 폰 메크(von Meck,차이코프스키의 후원자)의 집에서 요양하는 비에니아프스키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 친구들은 벼원과 보험비를 마련하기 위해 음악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그의 연주와 작곡 스타일은 프랑스 악파의 영향 위에 그의 열정적인 슬라브 기질이 더해진 것이었다.그의 연주는 기교적인 패시지들을 불같이 해치워 버리고는 그다음 순간에는 듣는 이를 울게 만들어 버리는 서정적인 흡인력을 가지고 있었다.그의 음색에 있어 서정적이면서도 열정적인 특징은 그 특유의 높은 긴장도를 가진 비브라토에서 오는 것이었다.그는 보잉에 있어서도 특별했다.그의 보잉은“굳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했는데 그것은 후세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오른 팔꿈치를 높이 들고 두 번째 손가락으로 활을 눌러서 내는 보잉 스타일은 당대에는 전통에 위배되는 특이한 것이었다.오늘날에는 이것을 ‘러시안 보잉’(Russian bow grip)이라고 부르지만,그 보잉의 창시자는 바로 비에니아프스키이다.작곡에 있어서 그는 파가니니적 초절기교에 낭만적 향기 그리고 슬라브적인 색채를 더했다.그가 작곡한 조국의 폴란드 춤곡들(마주르카·폴로네이즈)에도 역시 이러한 색채가 가득 차 있다. 비에니아프스키의 두개의 콘체르토는 상당히 다른 면모를 가지고 있는데, 1번은 다소 과장된 기교로 표현된 곡이며 사라사테에게 헌정된2번은 서정적인 흐름과 표현으로 가득 차 지금까지도 바이올린 레퍼토리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그는 에튀드도 많이 작곡했는데,에꼴 모데르네와 이튀드 카프리스는 파가니니 카프리스에 버금갈 만큼 훌륭하다.
■ 작품 ①모스크바의 추억《Souvenir de Moscou, Op.6》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모은곡으로.모스크바에서 지냈던 많은 날들 을 추억하는 뜻에서 러시아의 민요《빨간 사라판》을 소재로 하였으며 그 감미롭고 향수어린 선율이 매우 인상적이다.
②바이올린 협주곡 제2번D단조《Concerto for Violin and Orchestra No.2 in D minor, Op.22》 2번은 완숙기의 작품에 속하며(1873,나이38세)그의 경력과 명성이 최고에 달하던 때이기도 했습니다.당시의 악단에는 바이올린의 명수들이 다수 활동 하고 있었던 때여서 바이올린의 기교적,색채적 가능성이 다양한 문화권(스페인,프랑스,이탈리아,폴란드 등)의 작곡가들에 의해서 추구되면서 화려함이 극치에 다다르는 때입니다.사라사태,파가니니,요아힘 등의 전설적 명 연주가 겸 작곡가들이 이때 활동하던 사람들입니다.낭만적 서정성과 정열적인 선율적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 1악장:알레그로 모데라토:비교적 긴 오케스트라Introduction에 이어서 독주 바이올린이 비로소 모습을 나타냅니다.약간은 침울한 듯한 북구적인 정서가 돋보이는 악장. 2악장 로망스-안단테 논 트로포:독주 바이올린 선율의 아름다움이 특히 돋보이는 부분.단독으로도 자주 연주되고 주제 선율도 인상적이다. 3악장 알레그로 콘 푸오코-->알레그로 모데라토: '집시풍으로'라는 지시가 붙어 있습니다. 폴란드 출신인 그로서는 집시 계통의 음악도 간접적으로나마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으로 알 려져 있습니다.기교적으로는 완숙함이 상당한 경지를 보입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점진적으로 분방하고 열정적인 음악으로 몰아가는 악장이다.
③ <전설Legende Op.17> 1859년에 비에니아프스키 런던에 있을 때 이사벨라 햄프턴이란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그런데 그녀의 아버지는 비에니아프스키의 청혼을 거절했습니다.그러자 절망한 비에니아프스키는 그의 방으로 돌아가서 비애에 젖은 상태에서G단조의 이<傳說曲>을 작곡했다고 한다.그는 이사벨라의 어머니에게 그날 저녁 음악회의 초대장을 보내서 햄프턴 가족들이 왔고,그녀 의 아버지는 그의 새 음악을 듣고는 부드러워지면서, "단지,진실된 사랑만이 자네가 오늘 밤 우리에게 말한 그런 기막힌 곡으로 표현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자네를 사위로 부르겠네."이렇게해서 그들은 결혼했고,슬하에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다고 한다 ④ 스케르초 타란텔라(Scherzo Tarantella,Op.16 9/8, 6/8박자의 빠른 이탈리아의 무곡으로서 이이름은 이탈리아 남부의 지명 타란토에서 혹은 독거미 타란툴라에 물렸을 때 이춤을 추면 낫는다는 전설에서 생겼다고 알려져 있다. ⑤ 화려한 폴로네이즈1번,Op.4 (5: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