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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림의 시간, 돌봄의 정신
<산림문학> 봄호를 읽고 -
권대근
문학평론가,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타성에 젖지 말고 탄성으로 살아라. 타성은 영혼을 갉아먹지만 탄성은 영혼을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 습관에 물들어 살지 말고 습작하면서 살아라. 습관은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지만 습작은 현실을 반성하고 미래를 성찰하게 만든다.
- 유영만
I.
수필창작이란 닫힘에서 열림으로 가는 과정이다. 열림의 경향은 요즘 들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열지 않고서는 어떤 것도 맞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마음을 먼저 열어야 상대를 맞이할 수 있다. 오감을 활짝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삼라만상이 다 나에게 속삭이고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지는 법이다.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지 않고서는 내면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다. 지금은 확실히 봄의 막바지다. 창밖 벚나무의 흰 꽃이 다 떨어져 나갔다. 하나의 자연이 움직이는 데는 우주의 모든 기운이 다 관여한다. 수필은 자연에 자아를 위탁하면서 자연을 통해 삶의 원리를 채굴한다. 사물은 보는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고 양자물리학은 말한다. 피어나는 식물의 생명은 각자의 소리와 움직임을 가지고 있으며, 세계의 일부로서 인간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 따스한 햇살이 방안에 빗금을 긋고 있는 사이, 평자는 새로운 계절이 나비춤을 추며 걸어오는 것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싱그러움과 편안함을 안겨주는 <산림문학>이란 녹색 제호의 책을 펼친다.
수필은 사실을 바탕으로 해서 직조된다. 수필가가 그려내는 세계는 다양하다. 그러나 사물이나 사람, 사건을 소재로 하는 수필만큼 강한 힘을 발휘하는 작품도 없을 것이다. 동양의 관계론적 사유는 자연과 인간을 엮기에 좋은 토대가 된다.‘사람’은 그 자체가 부분이지만 종합된 하나의 ‘세계’이며 ‘시대’이고 ‘자연’이자 ‘우주’이기 때문이다. <산림문학> 여름호의 계간평 대상으로 네 편을 뽑았다. 이번 평에서 집중적으로 조명할 작품은 ‘열림과 돌봄’의 관점에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과의 관계를 다룬 작품이다. 모든 문학이 다 그러하듯이 수필 또한 사람의 사람다움을 위하여 존재한다. 이는 수필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다. 집중조명을 받게 될 작품은 서기홍의 <함께 나누고픈 학교 숲>, 이병철의 <강원도 한달살이에서 돌아와>, 한태천의 <마지막 수업>, 홍만희의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다. 네 작품은 비평의 관점을 충족시키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들이 그려내는 사건에 진입하는 건 우리와 연결된 자연과 관계를 다시 맺는 일이 될 것이다.
II.
자연은 가장 가까운 벗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이 상례다. 자연을 미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방식은 조선시대 문사들이 즐겨 쓰던 방법이다. 자연과 멀어져 있는 생활 공간은 자연스럽게 작가를 자연 속으로 밀어 넣는다. 서기홍은 새해 벽두부터 아침산책을 하기로 한 결심을 잘 지키고 사는 분이다. 자연 속에서 생명을 가지는 무수한 소품들은 어쩌면 퇴임 이후 시공의 공백을 메워주는 매개로 안성맞춤이기에 서기홍은 외출의 결과로 얻은 자연과의 교감을 숲을 소재로 해서 수필화했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은 삶의 근원이며 인간이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영원한 요람이다. 서기홍은 산책의 자리에서 깃발처럼 펄럭이는 숲에 대한 기억을 ‘이 숲, 구석구석 많은 추억이 서려 있어 오늘도 숲속 나무마다 눈길을 주며 돌아다닌다’는 말로 자신의 숲에 대한 애착을 의미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 문학적 성과는 사라진 다람쥐 한 마리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는 데서 나온다. 루카치의 말처럼 수필은 삶의 사소한 것까지 말할 수 있는 것이다.“요즘 부쩍 개체 수가 많아진 고양이에게 화를 당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 숲에 공존했던 다람쥐 모습이 눈에 아롱거리며 애처로움이 느껴진다.”는 서기홍이 작고 힘없는 생명들에 대해 보이는 걱정이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준다.
숲에는 다람쥐와 청설모 등 동물이 살고, 꾀꼬리와 산까치 물까치, 박새, 후루티, 딱따구리 등 많은 새가 모여드는 생명의 안식처다. 그중에 꾀꼬리 울음은 여자의 목소리같이 매끈하고 감칠맛이 있다. 팽나무 우두머리에서 뻐꾸기가 꼬리를 끄덕이며 일고여덟 번을 능청스럽게 울다가 다른 나무로 후루룩 날아가서 또 그렇게 운다. 물까치 대여섯 마리가 무리 지어 머리 위로 날며, 화가 났는지 꽤애액 꽥 꽥 꽥, 혼을 뺄 듯이 운다. 그들의 영역에 적이 출현했다는 경계의 신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 숲에는 지난해 봄, 겨울을 견딘 나무마다 연녹색 잎이 눈부시던 날, 다람쥐 한 마리가 눈길이 마주치면 상수리나무로 후다닥 올라갔다 한참 지나면 옆에 키 작은 소나무에서 머리를 쏙 내밀고 까만 눈을 깜박거리며 재롱을 부리더니, 올해는 보이지 않았다. 요즘 부쩍 개체 수가 많아진 고양이에게 화를 당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이 숲에 공존했던 다람쥐 모습이 눈에 아롱거리며 애처로움이 느껴진다.
서기홍, <함께 나누고픈 학교 숲> 중에서 -
아침마다 산책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은 자연을 거스리지 않고 살고 싶어하는 서기홍의 에코필리아다. 서구에서는 주로 자연을 도전과 정복의 대상으로 인식했던 데 비해 동양에서는 자연을 어디까지나 신뢰와 조화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편이다. 자연은 한마디로 질서의 융합체다. 선명한 지향점을 향해 나름의 운행을 반복하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 안에는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삶의 모범이 되는 실천덕목이 내재되어 있다. 그것은 절대자인 주체가 불완전한 인간을 향해 전하는 메시지라 볼 수 있다. “오늘도 내일도 이 숲속에 그림자 앞세우고 마음 속에서는 푸르고 울창한 숲을 가꾸며 그 안에서 편안한 휴식을 얻고 건강한 생각으로” 살아가리라는 서기홍의 다짐은 산림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와 일치한다. 서기홍의 수필적 지향이 일상의 현실을 단순히 기록하는 데서 더 나아가 자연의 숨소리와 그의 맥박, 의도를 점철해 가는 발견과 깨달음으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이 수필의 문학성을 더하는 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년시절, 학창시절 기억과 추억은 서기홍의 삶을 구축하는 데 매우 중요한 그림자 형상으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의 무의식 속에 영원히 살아있는 숲은 영혼의 안식처요, 그 안의 절대적 존재로서 그의 순수한 삶을 맹물 같이 투명하게 채색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열망 중의 하나는 자연을 삶의 주변으로 끌어들여 동행을 이루는 일이다. 산과 들을 자기 주변으로 끌어들여 함께 살고 싶은 욕망 때문에 사람은 저마다 집 안 한 모퉁이에 작은 화단을 만들기도 하고, 산 속 깊은 곳에 머물고 싶은 욕망 때문에 화초를 기르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연을 떠나서는 한 순간도 안정을 찾을 수 없다. 사람이 곧 자연이다. 이병철의 <강원도 한달살이에서 돌아와>는 ‘여유가 있어야 여생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자연과 동행이 되고자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 작가가 이 작품을 통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연에의 귀의, 참다운 인간미의 회복이다.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 ‘메멘토 모리’라는 말 대신에 “여행객임을 잊지 마라”라고 말하고 싶다는 그는 새 생명의 기지개와 만나며 희망의 기대감을 갖는 작가다. “깊게 보기, 주위 머물기”라는 자신의 만트라가 자연 속 서정적 자아 상태로 빠져들게 해서 이런 좋은 글이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닐까. 작가의 생태적 세계관을 보여주는 이 작품의 묘미는 길손으로 살아가는 작가가 펼치는 미니멀 라이프를 엿보는 데 있다.
여유餘裕가 없는 삶은 죽은 삶이다. 여유가 곧 존재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다시 단순 소박한 삶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삶의 방식을 바꾸고 있는 것은 그래야 더 많이 존재하기, 삶을 더 많이 감사와 기쁨으로 즐길 수 있다는 것을, 그래야 이 지구 행성에서 함께 살아갈 수 있음을 몸으로 깨닫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집으로 돌아와 쌓여있는 것들의 더미 속에 다시 묻히고 있다. 몇 년 동안을 이제는 버리고 비워야지 하면서 엄두를 내지 못해 여태까지 미루어 왔던 것들이다. 누군가의 말이었던가. 소유의 무게가 곧 삶의 무게라고. 더 늦기 전에 하나씩이라도 치워야겠다. 치울 힘이 없어지기 전에 치우지 않으면 남은 이들에게 더 큰 짐이 될 것이니. 겨울 채비를 위해 자신을 비우는 저 나무들처럼 이제는 서둘러야 하리라.
이병철, <강원도 한 달살이에서 돌아와> 중에서 -
‘소유한다는 것은 동시에 소유당한다는 것이다’란 사고는 자연 속에서 자연의 순리대로 살아가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작가는 여유가 있는 삶을 통해서 이미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인지 깨달았다고 보겠다. 이처럼 이병철의 수필세계의 한 축에는 자연친화적 서정의 푸른 축제가 항상 열리고 있다. 이병철은 꽃을 바라보는 데 만족하지 않고 그것에 자기 삶을 대입시켜 승화를 시도한 사람이다. 비움의 축제가 우리에게도 평화로운 안식을 안겨주기에 ‘버림’과 ‘비움’을 기반으로 가볍게 축조된 그의 삶 자체가 감동이 된다.한마디로삶의 여유가 담긴 가슴 따뜻한 글이다. ‘한달살이’가 요즘 유행하고 있다. 퇴직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해보고 싶은 경험이기에 이런 체험을 수필화해서 성공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이 작품의 성공적 요인은 작가가 삶의 진리에 대해 관념적으로 해설을 하는 게 아니라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얻은 철학적인 깨달음을 표달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소유의 무게가 곧 삶의 무게라고. 더 늦기 전에 하나씩이라도 치워야겠다. 치울 힘이 없어지기 전에 치우지 않으면 남은 이들에게 더 큰 짐이 될 것이니. 겨울 채비를 위해 자신을 비우는 저 나무들처럼 이제는 서둘러야 하리라.”라는 주제의 함축적인 무게가 가슴을 찡하게 울려오는 데서 이 작품의 강점을 찾을 수 있다. 이 작품은 비움이 부족한 우리 시대의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진정한 비움의 가치를 되짚어주고 있어 감동을 준다. 다 좋지만 글의 형식을 이루는 문단의 질서가 흐트러져 문단 완결성이 부족한 게 흠이라면 흠이다.
한태천의 <마지막 수업>은 수필의 제목이 단연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수업’을 수식하는 ‘마지막’이란 형용사 때문이다. 어떤 수필이든 제목이 ‘마지막 ~’으로 된 것은 절반은 성공한다. 음식의 맛이 손끝에서 나오듯이 언어예술이기도 한 수필의 맛 또한 손맛에서 나온다. ‘마지막’이란 어휘에서 오는 상상과 연상 미학은 수필에 있어서 감동을 창출하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쾌미는 수미상관적 기법이 전해주는 구도의 안정성이다. 작가는 자신의‘마지막 수업’이 진짜 ‘마지막 수업’이 아니라는 걸 <모리의 마지막 수업>으로 잘 활용함으로써 수필의 주제의식을 문학적으로 의미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수필의 처음과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마지막’이란 어휘가 주는 의미 그리고 분위기는 교육자로 한 평생을 교단에 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정년을 맞는 작가의 생활철학과 가치관을 충분히 연상하게 한다. ‘마지막’이라는 말의 후광효과와 이미지를 잘 활용해서 독자에게 감동을 안겨주도록 설계한 부분에서 이 글의 가치가 빛난다고 하겠다. 이 작품의 문학적 매력은 ‘하늘을 향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라고 외치며, 고향으로 향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처럼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리라.’는 다짐에서 나온다.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솔직한 서술을 통해 한 편의 휴먼 드라마처럼 이 수필에 감동하게 되는 것은 문학성에 더하여지는 한태천의 따뜻한 삶 사랑이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처럼 나라말을 쓸 수 없는 아픔을 담은 ‘마지막 수업’이 아니어서. 생의 마지막을 기록한 『모리의 마지막 수업』 같은 진짜 ‘마지막 수업’도 아니어서. 아픔도 슬픔도 아닌 그냥 스쳐 가는 ‘마지막 수업’이라서. 마음에서만의 마지막 수업이라서. 참으로 다행이다. 아직은 『모리의 마지막 수업』 같은 그 한 번이 남아 있으니. 그 수업을 할 때는 20대에 내 수업을 들었던 그 학생들이 ‘역시 교수님이십니다.’라고 말하도록 더 지성인답게 살아가리라. 집 주변에 꾀꼬리 깃털 같은 황국화를 더 많이 심으리라. 국화 향기보다 더 은은한 사람의 내음을 풍기리라. 새로운 삶에 대한 꿈과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에 임하리라. 하늘을 향해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이 뜨겠지.”라고 외치며, 고향으로 향하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인공처럼 힘찬 발걸음을 내디디리라.
한태천, <마지막 수업> 중에서
좋은 수필은 가볍거나 무거운 삶의 문제를 현장과 연결해서, 깊은 사유로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야 한다. “마지막 수업을 준비할 때는 마지막이 온 것 같았는데, 막상 마지막 수업을 하고 난 후에는 마지막 같은 기분이 들지 않는다.”로 시작하는 이 수필 역시 주요 키워드는 ‘마지막’이란 말이고, 자신이 주동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수필을 읽으면 바로 ‘수필은 정의 문학이다.’라는 정의가 가슴에 와닿는다. 문학의 행위는 맺힌 삶을 풀어가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모습이다. 발단부 문장에서부터 눈길을 끌어낸 것이 전략적으로 성공한 것 같다. 수필이 발단의 예술임을 무엇보다도 잘 인식하고 있는 탓이다. 수필이 회고적 그리움에만 젖어 노년의 문학, 황혼의 문학으로 불려지고 있는 이때, 작가가 감동적인 소재에 눈길을 두고 이를 포착해 낸다는 것은 미래문학으로서의 수필적 가치를 고양하는 일이다. ‘마지막’을 역설적인 미학으로 승화시켜내는 작가의 손맛을 보는 것만으로 감동을 경험할 수 있어 좋다. 이 작품 속에 흐르는 일관된 그림자 심상은 교육자로서의 자신감이다. 이 글은 수필의 본령이 인간 구원에 있다는 허드슨의 정의를 잘 충족시키는 것 같다. 한 직장에 대한 애정이 인간적인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수필을 관통하는 인상은 건강함이라 할 수 있겠다.
홍만희 하면, ’어머니‘가 떠오른다. ’어머니의 작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머니에 관한 수필을 많이 써내고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만큼 고귀한 것도 이 세상에는 없다. 무조건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연민의 다른 말일 수도 있고, 공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그리움일 수 있다. 어머니의 건강을 소중히 여기며 사는 홍만희의 수필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맛에는 혈연의 소중함뿐만 아니라 진한 효성의 향기도 있다. “순간, ‘만희야’ 하며 나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집 앞 개울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힘껏 뛰어가서 어머니 품에 안긴다. 어머니는 내 머리를 껴안고 ‘어서 밥 먹어야지’ 하신다. 이런 나의 어린 날의 기억이 잠깐 스쳤다. 식구들이 밥상에 둘러앉아 저녁 식사를 한다. 이렇게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끝이 없다.”는 진술에는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잘 드러나 있다. 어머니는 곧 그에게 세상을 살아가는 힘으로 작용한다. 모성에 대한 이러한 문학적 형상화가 이 수필의 향기를 낸다고 하겠다. 어느 자식이든 모든 인간에게 그리움의 대상은 어머니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뱃속은 모든 이들의 영원한 본향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한국전쟁을 소환하면서 가족이란 인연의 끈을 통해 실존적 의미를 확인하기도 한다.
어머니 하면 병원에 다니시던 기억이 먼저 떠오른다. 어깨와 척추 수술을 몇 차례하고, 근자에 시술까지 하였으나 여전히 통증을 호소한다. 고통스러워 하실 때마다 내가 아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이가 연로하시니 감내해야 할 통과의례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하다. 정신과 진료까지 정기적으로 받으러 다닌다. 재작년에 어머니와 강릉으로 여행한 기억도 뚜렷하다. 상봉역에서 강릉행 KTX를 타고 간 여행이다. 승용차로 먼 거리 이동은 힘들어하시니 기차로 여행을 했다. 강릉역에서 승용차를 렌탈 하여 사천을 둘러보았고, 경포대 해변을 걸었다. 어머니의 존재가 없었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지금 어머니의 지워지지 않은 기억으로 번민한 지난 시간은 내 성찰의 매듭이다.
홍만희, <잊혀지지 않는 기억> 중에서 -
자식들에게 무조건적 사랑을 베풀어 왔으면서도 홍만희의 어머니는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행복하게 사는 일상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삶을 즐기기보다는 수술을 하고 병원에 다니는 모습이 자식으로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내게 한다. ‘어머니의 존재가 없었다면 내가 누구인지를 생각할 여지도 없을 것이다. 지금 어머니의 지워지지 않은 기억으로 번민한 지난 시간은 내 성찰의 매듭이다.’라는 진술에서 우리는 홍만희의 효성을 직감할 수 있다. 모자간의 운명적 인연을 바탕으로 서로 돕고 의지하는 생활을 최고의 가치로 설정하고 있는 작품이다. 자식로서의 위치는 항상 어머니 걱정이다. 그의 글을 읽고 나면, 효문화가 희미해져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작가의 의식이 청결할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대하는 작가의 시선이 너무나 온화하고 맑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홍만희의 글은 한 여름 밤, 범부의 등줄기를 타고 내리는 시원한 찬물처럼 우리에게 청량감을 준다. 일상적이고 단조롭고 무미건조할 수밖에 없는 삶을 투시하는 그의 긍정적인 삶의 태도에는 따스함과 순박함이 병존해 있어서 정감의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홍만희의 수필에 나타나는 하나의 원형은 어머니를 기반으로 하는 돌봄 이미지다. 인간의 원초적 삶의 현장이자 순수 사랑의 본향이라고 할 수 있는 모자 가정이란 울타리를 축으로 해서 따뜻한 돌봄이 작품의 주조적 테마로 자리 잡고 있는 그의 수필 구석구석에는 본래적‘가家’의 향기가 물결치고 있어 감동을 준다.
III.
위에서 다룬 수필의 주제 지향성은 크게 두 방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열림의 시선이다. 더 빨리 성공하고 더 빨리 올라가서 출세하려는 욕망의 열차를 잠시 세우고 나를 되돌아보고 내 주변을 둘러보자는 ‘여유’와 ‘열림’의 시선을 보여준 수필, 다른 하나는 꿈과 희망으로 미래를 수놓은 것이나 아픈 사람에 대한 헌신과 돌봄의 정신이다. 네 작품들은 ‘자연’‘인간’을 재료로 하고 있는 수필들로써, ‘비움’과 ‘사랑’ 등의 주제의식을 우려내었다. 하나같이 자연을 사랑하는 정신과 인간의 건강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현상은 인간을 둘러싼 사회를 그리면서, 작가나 독자를 구원하는 문학의 본질적 특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당연한 결과다. 이들 수필가들은 일상의 생활 속에서 얻은 지혜와 깨달음을 구체적 형상으로 제시하여 자기 발전의 초석으로 삼았다. 그래서 작은 감동을 준다.
조명을 한 네 편 외에도 좋은 수필이 몇 편 더 보인다. 김수원의 <봄이면 생각나는 나라목>은 구국의 영웅 안중근의 입지를 ‘나라목’으로 의미한 수필이고, 이정호의 <서울 파인 에버뉴의 소나무>는 대한민국 소나무 문화의 세계화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가의 성찰이 돋보였던 작품이다. 주원섭의 <3차원 숲을 바라보는 지혜>는 생명이 살아있는 숲을 생태적 관점에서 균형 잡힌 숲으로 바라보자고 애원하고 있어 감동을 준다. 수필은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다. 좋은 수필을 쓰려면, 제재를 잘 선택해야 한다. “습관에 물들어 살지 말고 습작하면서 살아라.” 한 단어로 수필의 핵심과 본질, 정수를 콕 찔러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한 줄로 느낌이 오지 않으면 아직 갈 길이 먼 것이다. 작가는 이제 무엇을 말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말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더 차원 높은 수필을 기대해본다.
권대근
수필가, 번역가, 문학평론가, 월간 <동양문학> 등단 후 <경북신문>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 수필은 사기다 현대수필문예창작론 등 19권, 부산수필문학상, 부산pen문학상 외, 한국문인협회 이사, 사)국제pen한국본부 부산지회장, 사)한국산림문학회 회원,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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