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부원군의 장자로 호는 우계 또는 해월정이다.
고려 공민왕(1356)쌍성을 수복하여 호군이 되시고,공민 임인년에 이방실과 함께 서경(평양)회복에 대공을 세웠으며,다음해에 김용을 토벌하여 2등공신이 되고,임자년에 판사로서 가주난동을 진압하여 만호가되어 함주 북청의 왜적을 격퇴하고,봉익대부에 승진,1375년(우왕)에 밀직부사로서 동북면 원수로,정사년에 신주,옹진,문화 등에 누차에 걸쳐 왜구를토벌하였다.
다음해에 판밀직으로 화포로 수군을 훈련,다음해에 강릉도 도원수겸 부윤,다음해에 상원수로 왜적을 격퇴,계해년에 문하찬성사로 동북면 체찰사,을축년에 4도 도지휘사,무진년에 삼사좌사,다음해에 판의덕부사로 승진하여 순성익위협찬보리공신삼중대광(정1품)용성부원군삼사좌사겸판소부시사를 역임하셨다.
고려가 망하자 조선태조 이성계가 처남인데도 불구하고 양양으로 은퇴하여 불사이군의 절의를 지켜 유림이 충현사,동명서원(강원 양양읍 조산리 소재)을 세워 모시고 조선왕조에서는 증좌정승 시호 양렬공을 하사하였다.
묘는 개풍군 흥교면 사곳리이다.
배우자는 하동정씨와 정화공주 두분이시다.
<출처> 다음카페-한양조씨대종회
다음은 다음백과 내용이다
본관은 한양(漢陽).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돈(暾)이고, 부인은 환조(桓祖 : 李成桂의 아버지인 李子春)의 맏딸인 정화공주(貞和公主)이다. 1356년(공민왕 5) 아버지와 함께 동북면병마사 유인우(柳仁雨)를 도와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를 수복하는 데 공을 세워 호군(護軍)이 되었고,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경성을 수복하는 데 공이 있어 1363년 2등공신에 책록되었다.
1372년 가주(家州)에서 관리가 살해된 사건이 발생하자 판사(判事)로서 평정했다. 이해에 만호가 되어 함주(咸州)·북청에서 왜구를 대파하여 봉익대부(奉翊大夫)로 승진했다. 이후 밀직부사가 되었는데, 1375년(우왕 1) 공민왕 때 역모를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숨어 있던 충혜왕의 서자(庶子) 석기(釋器)를 체포하여 왕으로부터 안마(鞍馬)를 하사받았다. 1377년 왜선(倭船) 45척이 신주(信州)·옹진(甕津)·문화 지방에 침입하자 나세·심덕부(沈德符) 등과 함께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듬해 판밀직(判密直)으로 화포를 사용하여 수군을 훈련시켰으며, 1379년 왜구가 강릉도에 침입하자 강릉도원수가 되어 격퇴했다. 이듬해 강릉도상원수가 되었고, 1382년에도 왜구 30여 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다. 1383년 문하찬성사로 동북면도체찰사가 되어 명나라의 변경 침범에 대비했다. 1385년 왜구가 교주도에 침입하자 사도도지휘사(四道都指揮使)·교주도원수가 되어 물리쳤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 가담하여 삼사좌사(三司左使)가 된 후 강화 및 여흥군(驪興郡)에 유폐된 우왕을 찾아가 의대(衣帶)를 전하고 잔치를 베푸는 직임을 맡기도 했다. 1389년(공양왕 1) 판의덕부사(判懿德府事)가 되었고, 이듬해 회군공신(回軍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조선 개국 후인 1393년(태조 2) 용원부원군(龍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야인(野人)과 왜구의 정벌에 무공이 컸으므로 여러 대에 걸쳐 왕의 총애를 받았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