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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으로 비탄한 예루살렘
예레미야 애가 1장 1-11절
우리나라에서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당했던 성범죄를 고발하고 그 심각성을 알리는 캠페인입니다. 성폭력 가해자들의 실명이 공개되면서 유명한 정치인, 연예인, 문학가, 연극영화계 심지어는 종교계까지도 추잡한 민낯을 들어냅니다. 그들은 잘못된 행동으로 그 동안 쌓아왔던 모든 것을 파괴시켰습니다. 과연 이 가해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모두는 자신의 잘못된 행동이 들어난다면, 대부분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울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서 있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한 때 모든 성 가운데서 여왕처럼 칭송을 받았던 예루살렘이 순식간에 과부와 노예처럼 변해 버렸습니다.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특히 성전에는 매일 찬송 소리가 가득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성과 성전은 바벨론 침략으로 완전히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광경을 보며 탄식하면서 작성한 시가 본 예레미야애가입니다. 이렇게 예루살렘 성이 파괴된 이유를 하나님 앞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겨서 하나님의 은혜를 내려주시길 간구합니다.
멸망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1-4)
예레미야 애가는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고 철저히 파괴되고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황폐하게 된 것을 소개하며 시작합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고 시온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적들이 오히려 승승장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돌봐주시길 간구합니다.
1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2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3유다는 환난과 많은 고난 가운데에 사로잡혀 갔도다 그가 열국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쉴 곳을 얻지 못함이여 그를 핍박하는 모든 자들이 궁지에서 그를 뒤따라 잡았도다 4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1-4)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슬프다’라는 ‘에카(הכיא)’로 시작하는데, 이 단어는 장송곡을 부를 때 사용하는 형식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애가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장송곡(葬送曲)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을 때는 철옹성 같았던 성에서 완전히 파괴되어 황폐된 성으로 변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단지 선지자뿐만 아니라 자녀로서 이스라엘을 본 하나님의 슬픈 마음일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 성은 인간의 교만과 자기만족의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성읍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⑴ 과거와 대조되는 예루살렘(1)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현재의 모습을 보고 과거를 회상하고 있습니다. 활기차던 예루살렘 성은 적막한 외로운 도시가 되었습니다. 황폐해진 예루살렘을 보고 선지자의 첫마디는 ‘슬프다’였습니다. 예루살렘의 변화는 먼저 그 많던 예루살렘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전쟁으로 죽거나 포로 끌려가서 쓸쓸하고 적막한 성이 되었습니다. 또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하고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이 이제는 남편 잃은 과부처럼 부모 없는 고아처럼 연약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주처럼 존경받고 영화를 누리던 성이 이방나라에 조공을 받쳐야 하는 노예와 같이 비천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선지자는 번성하고 화려했던 과거 모습을 생각할 때 현재 적막하고 초라한 모습은 더욱 비참하게 느껴졌습니다.
⑵ 철저하게 배신당한 예루살렘(2)
이처럼 번성하고 화려했던 예루살렘이 철저히 파괴된 모습을 목도했습니다. 선지자는 낮은 물론이고 밤새도록 통곡하며 뺨에 눈물 마를 날이 없었습니다. 더 비참한 것은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위로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친구이던 주변 나라들이 예루살렘을 배반해서 원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라고 소개합니다. 이스라엘과 동맹 관계를 맺고 서로 돕기로 약속하면서 왕래하던 주변 나라들, 즉 애굽을 비롯해서 에돔이나 모압, 그리고 암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려울 때는 이스라엘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하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바벨론에 협력해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재촉했습니다. 하나님 대신 인간의 동맹을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배신을 당했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는 도움은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괴롭히는 대적이 되었습니다. 이런 처지를 살피면서 선지자는 밤에 안식을 누려야할 시간까지도 밤새도록 눈물로 지새웁니다. 인생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건강과 부를 잃은 것도 아니라 주위에 위로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위로는 힘든 일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줍니다. 고통과 아픔을 공유하고 함께 나눌 위로자가 있다는 것은 재기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40:1)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⑶ 포로로 끌려간 예루살렘(3)
예루살렘이 함락되면서 예루살렘에 살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 삶은 ‘유다가 쉴 곳을 얻지 못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속으로 하나님의 도성을 이루고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가운데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제 약속의 기업을 잃고 포로가 되어 이방 민족에게 온갖 핍박을 당하며 살아간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공주와 같던 이스라엘이 포로가 되고 과부와 고아 같은 상황을 볼 때, 충격적이고 그 고통으로 육체는 편히 쉴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어딘가에 살고 있었지만 살만한 곳이나 쉴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포로이며 이주민이며 떠돌이 생활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서도 몇몇 사람들 외에 고달픈 생활은 계속해야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도망치기도 했지만, 추적자들이 그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 앞에서 편안하게 숨어 지낸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에 황무한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울며 탄식하면서 슬픈 시를 썼습니다. 다른 탄식시를 보면,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찬양이 마지막에 등장합니다. 예레미야애가에서는 시편보다 덜 두드러지게 나오지만 절망만 하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도 나타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과 싸우시는 ‘전사(戰士)’로 나타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들과 전쟁하시기 위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대적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격파하시고 언약궤를 가져가버린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더 나가서 자기 백성에서 고난을 가져다준 바벨론 같은 대리인들에게도 징벌을 내리실 것입니다. 예레미야애가를 살펴보면서 우리들이 붙잡는 너무 값싼 희망을 경계해야 할 것을 가르칩니다. 무슨 악한 일을 행하든지, 하나님께서 눈감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아무 일 없던 것처럼 대하지 않으심을 알아야 합니다. 한 때 신실했었다고 모든 것이 용서되고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들은 항상 오늘을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합니다. 과거에 이룬 업적으로 하나님께 사죄를 요청할 수 없습니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인 겸비한 마음으로 섬기지 않으면,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본 서가 보여줍니다.
⑷ 절기가 없어 황폐한 예루살렘(4)
예루살렘은 하나님께 드린 많은 제사로 풍성한 영광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에 멸망당했습니다. 하나님께 사랑받던 이스라엘은 이방 민족들에게 사로잡혀 갔습니다. 예전 명성과는 전혀 다르게 볼품없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과거의 명성은 살아지고 이제 황폐하고 쓸쓸한 성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기로 인해 대부분 1년에 세 번씩 예루살렘에 올라 왔습니다. 그 시기에는 예루살렘 거리마다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순례자들이 가득했습니다. 예루살렘의 도로는 하나님께 절기의 제사하러가며 기뻐하는 행렬로 가득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절기를 지키려는 사람들조차도 사라진 적막한 도시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도 곤고를 받았도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으니 제사장도 할 일이 없어지고, 제사 예식을 수종을 들며 춤추던 처녀들도 일들이 없어진 마찬가지였습니다. 성에서 점점 기쁨은 살아지고 근심으로 가득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스라엘을 향해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외쳤습니다(이사야서 1:11-17). 혹시 죄악을 즐기면서 현재 명성을 누리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그 마지막이 그렇게 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라 할지라도 죄를 모른척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징벌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고 기다리시지만 죄의 문제를 그냥 넘어가지만 않으십니다. 혹시 하나님께 감추고 있는 죄가 있다면 지금 돌이키고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심판 받아서 황폐해진 예루살렘(5-7)
하나님께 사랑 받고 풍성했던 예루살렘이 이렇게 비참함과 끔찍한 고통을 겪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입니다. 죄를 통해 얻는 잠시 달콤함보다 비참한 결과를 생각하고 죄를 멀리하시길 바랍니다. 범죄는 생각한 것보다 비참한 결과를 낳기 때문입니다.
5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 6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그의 모든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7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도다(5-7)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바벨론 침공으로 이스라엘은 그의 자녀들은 바벨론으로 노예로 끌려갔습니다. 여호와께서 떠나시니 시온을 지켜줄 자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딸이었던 이스라엘은 모든 영광이 떠났고, 지도자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사냥꾼 앞에 사슴처럼 자기 혼자 살겠다고 도망했습니다. 버려진 예루살렘은 주변 사람들에게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⑴ 예루살렘의 심판 받은 이유(5)
선지자는 비극적인 상황을 탄식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모든 비국의 원인에 눈을 돌립니다. 예루살렘이 이렇게 황폐하게 된 이유를, ‘그의 죄가 많으므로’(5)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의 맺었던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했습니다. 그것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는 사명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팔아서 우상을 사고, 부자가 되는 걸림돌이 되는 모든 율법들을 제거하고, 탐욕과 탐심에 사로잡혀 정의와 공의는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듭되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많은 죄를 저질러서 그들을 하나님으로부터 벌을 받았습니다.
⑵ 예루살렘의 심판 받은 결과(6-7)
선지자는 이제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운명이 걸려 있음을 소개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생명과 산성 그리고 양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언약의 가치가 점점 퇴색이 되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과 가정 그리고 공동체의 현재와 미래를 이끌어가는 원동력입니다.
① 영광이 떠난 이스라엘(6)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렸던 이스라엘 백성은 순식간에 먹구름이 밀려와서 사면이 깜깜하게 되었습니다. ‘처녀 시온’은 하나님의 정결한 신부로서의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시적 표현입니다. 정결하고 아름답던 신부와 같던 예루살렘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성전이 있는 것으로 영광이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으로 더렵혀졌고 하나님께서는 부정해진 그곳에 더 이상 머무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떠난 예루살렘은 그 모든 영광과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초라하고 삭막한 곳이 되었습니다.
② 비웃을 당하는 예루살렘(7)
말씀을 저버리고 자신만을 위해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불결해지고 낮아집니다. 원수들이 사방에서 공격해 쫒기는 신세와 비웃음 그리고 조롱을 받습니다. 환란을 당한 이스라엘은 언제 웃음소리가 퍼졌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움이 깊어집니다. 하나님과 함께하심으로 큰 영활르 누리며 즐거워하던 때를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신만을 위해 살아왔던 지도자라면 위기에는 더욱 이기적이 될 것입니다. 말씀 안에 거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다 사라집니다. 존경은커녕 예루살렘처럼 사방에서 비웃음과 조롱이 밀물처럼 밀려올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범죄했다면 대가를 지불할 생각해야 합니다. 상황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것을 사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용서하면 자신의 마음은 편해질 것이지만, 피해자들은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해진다고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고 착각하는 것은 진실한 회개와는 먼 것입니다.
기근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8-11)
존경할만한 지도자가 없다는 것은 장차 공동체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 머리된 부모님이 가정을 버리고 자기 욕심만을 위해 살 때, 그 가정은 결코 밝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도자일수록 회개와 자기 비움이 필요합니다. 큰 영향을 주는 만큼 큰 책임이 따릅니다.
8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으니 전에 그에게 영광을 돌리던 모든 사람이 그의 벗었음을 보고 업신여김이여 그는 탄식하며 물러가는도다 9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여호와여 원수가 스스로 큰 체하오니 나의 환난을 감찰하소서 10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11그 모든 백성이 생명을 이으려고 보물로 먹을 것들을 바꾸었더니 지금도 탄식하며 양식을 구하나이다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8-11)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존재한 장소였습니다. 날마다 하나님께 제사가 드려지는 거룩하고 경건한 곳이며, 은혜와 진리가 선포되는 곳입니다. 하지만 거룩해야할 곳이 범죄 집단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예루살렘을 가만히 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⑴ 영광이 사라진 예루살렘(8)
황폐해진 예루살렘 성을 보면서 선지자 예레미야는 탄식합니다. 그는 ‘그의 죄가 많으므로’(5)라고 표현했는데, 이제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함으로’(8)라고 합니다.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매일 제사를 드리지만, 가식과 불법 그리고 불의가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점점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큼 죄악이 쌓여졌습니다. 그 결과로 바벨론에 의해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자기보다 못한 주변 나라들이 스스로 큰 체하며 이스라엘을 업신여기니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겠습니까! 환난 당한 예루살렘은 ‘옛날의 즐거움’, 즉 하나님과 함께 했던 영화로운 그 때와 비교하면 매우 초라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영광을 누리던 예루살렘은 죄로 인해 낮아지게 되었습니다. 죄를 지을 때 그 결과를 생각지 못한 예루살렘은 어느 날 갑자기 큰 파멸을 당하고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⑵ 범죄 후 추악한 예루살렘(9)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죄악된 상태는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9)라고 표현합니다. 이 표현은 여인들이 생리 때문에 생리혈이 옷에 묻어 있거나 성폭행을 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이방의 풍습을 좇고 그들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께 ‘음행의 죄를 범함으로 더러워진 것입니다. 이제 예루살렘은 더 이상 하나님께서 거하신 거룩하신 곳이 아닙니다. 영광은 사라지고 부정한 곳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벌써 예루살렘을 떠나신 것입니다. 죄에 물들게 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그 상태가 얼마나 부정하고 역겨운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정한 죄를 온갖 핑계로 합리화하며 심지어는 의로운 행동으로 미화까지 하는 것입니다.
⑶ 약탈을 당한 예루살렘(10)
계속해서 예루살렘이 죄로 인해 촐한 비극적인 결과가 묘사되고 있습니다. 성전은 이방인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떠나버린 예루살렘과 성전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바벨론 군인들이 군화발로 성전을 훼손합니다. 선택받은 백성의 자부심으로 여겨지던 성소가 이방인들에 의해 약탈되는 것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룩한 성소도 텅 비고, 쌓아 놓은 보물도 생명 부지를 위해 탕진됩니다. 선지자는 함부로 적들이 성전 안에 들어가서 성소를 침범하고 성물을 빼앗아갔다고 고발합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의 영광인 하나님의 성전이 짓밟히는 것은 경건한 백성들에게 견딜 수 없는 고통이 되었을 것입니다.
⑷ 기근으로 황폐해진 예루살렘(11)
바벨론은 쉽게 항복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항복시키기 위해 장시간동안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심한 기근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아무리 귀한 것일지라도 양식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 자녀들을 양식과 바꿀 정도로 기근이 극심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황폐해진 예루살렘에서 선지자는 무엇을 느껴졌습니까? ‘나는 비천하오니 여호와여 나를 돌보시옵소서’라고 오직 한 가지만 간구합니다. 환난 중에도 그들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합니다. 자기 죄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 결과를 생각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성전이 짓밟히고 영적 곤경과 양식이 떨어지는 육적인 빈곤을 당합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양식을 구해야 하는 상황을 돌아봐달라고 간절히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한 번 용서해 달라고 구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합니다. 멸망당하기 전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가 현재 한국 교회 상황이라면 너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교회 안에 헌금이나 성도들이 줄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있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져 갔습니다. 이제 예레미야처럼 성도들이 여호와께 돌아가도록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심판의 참상을 목도하는 상황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 한국교회 위에 긍휼을 베푸시고 다시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길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도 잘 살아갈 줄 알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떠났고 그 순간부터 점점 죄악 가운데 빠져 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온 것입니다. 종종 하나님 앞에 범죄로 성공한 사람들을 보면서 부러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들에는 성공한 것 같지만, 예루살렘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심판받은 상태는 처음보다 더 비참할 것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며 경외해야 합니다. 죄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아직까지 끊지 못하는 죄 속에 빠져있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기 전에 빨리 결단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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