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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蒙(몽)
(山水蒙 ; 艮上坎下)
[傳] 蒙은 序卦에 屯者는 盈也요 屯者는 物之始生也니 物生必蒙이라 故受之以蒙하니 蒙者는 蒙也니 物之穉也라 하니라 屯者는 物之始生이니 物始生穉小하여 蒙昧未發하니 蒙所以次屯也라 爲卦艮上坎下하니 艮은 爲山 爲止요 坎은 爲水 爲險이라 山下有險하니 遇險而止하여 莫知所之가 蒙之象也라 水는 必行之物이로되 始出하여 未有所之라 故로 爲蒙이니 及其進則爲亨義라
[程頤의 설명] 몽괘(蒙卦)는 <서괘전(序卦傳)>에 “둔(屯)은 가득함이요, 둔(屯)은 물건이 처음 생겨난 것이니, 물건이 나면 반드시 어리다. 그러므로 몽괘(蒙卦)로 받았으니, 몽(蒙)은 어림이니, 물건이 어린 것이다.” 하였다. 둔(屯)은 물건이 처음 생겨난 것이다. 물건이 처음 나와 어려서 몽매하여 개발되지 못했으니, 몽괘(蒙卦)가 이 때문에 둔괘(屯卦)의 다음이 된 것이다. 괘(卦)됨이 간(艮)이 위에 있고 감(坎)이 아래에 있으니, 간(艮)은 산(山)이 되고 그침이 되며, 감(坎)은 물이 되고 험함이 된다. 산(山) 아래에 험함이 있으니, 험함을 만나 그쳐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것이 몽(蒙)의 상(象)이다. 물은 반드시 가는 물건이나 처음 나와서 갈 바가 없으므로 몽(蒙)이 된 것이니, 나아감에 미치면 형통하는 뜻이 된다.
蒙은 亨이니 匪我求童蒙이라 童蒙求我니 初筮어든 告하고 再三이면 瀆이라 瀆則不告이니 利貞하니라
몽(蒙)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童蒙)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童蒙)이 나에게 구함이니, 처음 묻거든 고해 주고 두 번 세 번 물으면 너저분하다. 너저분하면 고해주지 않을 것이니, 똑바름이 이롭다.
[傳] 蒙은 有開發之理하니 亨之義也요 卦才時中하니 乃致亨之道라 六五爲蒙之主요 而九二는 發蒙者也니 我는 謂二也라 二非蒙主로되 五旣順巽於二하니 二乃發蒙者也라 故로 主二而言이라 匪我求童蒙童蒙求我는 五居尊位하여 有柔順之德하고 而方在童蒙하여 與二爲正應而中德又同하니 能用二之道하여 以發其蒙也요 二以剛中之德으로 在下하여 爲君所信嚮하니 當以道自守하여 待君至誠求己而後應之면 則能用其道니 匪我求於童蒙이요 乃童蒙來求於我라 筮는 占決也라 初筮告는 謂至誠一意以求己則告之요 再三則 瀆慢矣라 故로 不告也라 發蒙之道는 利以貞正이요 又二雖剛中이나 然居陰이라 故로 宜有戒하니라
[程頤의 설명] 몽(蒙)은 개발하는 이치가 있으니 형통하는 뜻이요, 괘(卦)의 재주가 시중(時中;때에 맞음)을 하니 형통함을 이루는 도(道)이다. 육오(六五;다섯번째 음효)는 몽괘(蒙卦)의 주체이고 구이(九二;두번째 양효)는 몽(蒙)을 개발하는 자이니, 아(我)는 이(二 ;두번째 효)를 이른다. 이(二)는 몽괘(蒙卦)의 주체가 아니나 오(五)가 이미 이(二)에게 순손(順巽;순하고 공손)하니, 이(二)는 바로 몽매함을 개발해주는 자이다. 그러므로 이(二)를 위주로 하여 말하였다. ‘비아구동몽 동몽아구(匪我求童蒙童蒙求我)’는 오(五)가 높은 자리에 있어서 유순한 덕이 있고 동몽(童蒙)의 때에 있어서 이(二)와 정응(正應; 바르게 응함)이 되며 중덕(中德; 효의 가운데 있음)이 또 같으니, 능히 이(二)의 도(道)를 써서 그 몽매함을 개발하는 것이다. 이(二)는 강중(剛中 ;양효이고 가운데임)의 덕으로 아래에 있어서 군주가 신임하고 향하는 바가 되었으니, 마땅히 도(道)로써 스스로 지켜 군주가 지성으로 자기를 구하기를 기다린 뒤에 응하면 (군주가) 능히 그 도(道)를 쓸 수 있을 것이니, 이는 내가 동몽(童蒙)에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동몽(童蒙)이 와서 나에게 구하는 것이다. 서(筮)는 점을 쳐서 결단함이다. ‘처음 점을 쳐서 고하는 것’은 지극한 정성과 한결같은 뜻으로 나에게 구하면 알려 주고, 두 번 세 번 자꾸 물으면 불경(不敬)함이 되므로 알려주지 않는 것이다. 몽(蒙)을 개발하는 도(道)는 곧고 바름이 이롭고, 이(二)가 비록 강중(剛中)이나 음(陰)에 거하였으므로 (음효에 싸여있음) 경계가 있는 것이다.
[本義] 艮亦三畫卦之名이니 一陽이 止於二陰之上이라 故로 其德이 爲止요 其象이 爲山이라 蒙은 昧也니 物生之初에 蒙昧未明也라 其卦以坎遇艮하니 山下有險은 蒙之地也요 內險外止는 蒙之意也라 故로 其名爲蒙이라 亨以下는 占辭也니 九二는 內卦之主로 以剛居中하니 能發人之蒙者요 而與六五로 陰陽相應이라 故로 遇此卦者는 有亨道也라 我는 二也요 童蒙은 幼穉而蒙昧니 謂五也라 筮者明이면 則人當求我而其亨在人이요 筮者暗이면 則我當求人而亨在我니 人求我者는 當視其可否而應之요 我求人者는 當致其精一而扣之며 而明者之養蒙과 與蒙者之自養이 又皆利於以正也라
[朱熹의 본 뜻] 간(艮;☶) 또한 3획괘의 이름이니, 한 양(陽)이 두 음(陰)의 위에 멈춰 있다. 그러므로 그 덕이 그침이 되고 그 상(象;형상)이 산이 된다. 몽(蒙)은 몽매함이니, 물건이 난 초기에 몽매하여 밝지 못한 것이다. 이 괘(卦)는 감(坎; ☵)으로서 간(艮; ☶)을 만났으니, 산 아래에 험함이 있음은 몽(蒙)의 처지요, 안은 험하고 밖은 그침은 몽(蒙)의 뜻이다. 그러므로 그 이름이 몽(蒙)이 된 것이다. 형(亨) 이하(以下)는 점괘의 내용이다. 구이(九二; 둘째 양효)는 내괘(內卦)의 주체로 강(剛;양)으로써 중(中; 소괘의 가운데)에 거하였으니, 남의 몽매함을 개발해 줄 수 있는 자이며, 육오(六五;다섯번째 음효)와 더불어 음양이 서로 응하므로 이 괘를 만난 자는 형통할 도(道)가 있는 것이다. 아(我)는 이(二)요, 동몽(童蒙)은 유치하고 몽매한 자이니, 오(五)를 이른다. 점치는 자가 지혜가 밝으면 남이 마땅히 나에게 구하여 그 형통함이 남에게 있을 것이요, 점치는 자가 지혜가 어두우면 내가 마땅히 남에게 구하여 형통함이 나에게 있을 것이니, 남이 나에게 구할 경우에는 마땅히 (구하는 사람의) 가부를 보아 응할 것이요, 내가 남에게 구할 경우에는 마땅히 정일(精一)함을 지극히 하여 물을 것이며, 밝은 자가 몽매한 자를 길러줌과 몽매한 자가 스스로 기름이 또 모두 정도(正道)를 씀이 이로운 것이다.
象曰 蒙은 山下有險하고 險而止 蒙이라
<상전>에 말하기를, “몽(蒙)은 산 아래에 험함이 있고 험하고 그친 것이 몽(蒙)이다
[本義] 以卦象卦德으로 釋卦名하니 有兩義라
[朱熹의 본 뜻] 괘의 형상과 괘의 덕으로 괘의 이름을 해석하였으니 두 가지 뜻이 있다.
蒙亨은 以亨行이니 時中也요 匪我求童蒙 童蒙求我는, 志應也요 [本義] 以亨行하여
‘몽형(蒙亨)’은 형통함으로써 행함이니, 때를 얻었고 중도(中道)에 맞기 때문이요, 내가 동몽(童蒙)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童蒙)이 나에게 구함은 뜻이 응함이요 [本義] 형통함으로써 행하여
[傳] 山下有險하니 內險하여 不可處하고 外止하여 莫能進하여 未知所爲라 故로 爲昏蒙之義라 蒙亨以亨行時中也는 蒙之能亨은 以亨道行也라 所謂亨道는 時中也니 時는 謂得君之應이요 中은 謂處得其中이니 得中則時也라 匪我求童蒙童蒙求我志應也는 二以剛明之賢으로 處於下하고 五以童蒙居上하니 非是二求於五요 盖五之志應於二也라 賢者在下하니 豈可自進以求於君이리오 苟自求之면 必无能信用之理라 古之人이 所以必待人君致敬盡禮而後往者는 非欲自爲尊大라 蓋其尊德樂道不如是면 不足與有爲也일새니라
[程頤의 설명] 산 아래에 험함이 있으니, 안은 험하여 처할 수 없고 밖은 그쳐서 나아갈 수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므로 혼몽(昏蒙)의 뜻이 된다. ‘蒙亨以亨行時中也’는 몽(蒙)이 형통함은 형통할 도(道)로써 행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형통할 도(道)라는 것은 시중(時中 ; 때가 맞음)이니 시(時)는 군주의 응함을 얻은 것을 이르고, 중(中)은 처함이 중간을 얻은 것을 이르니, 중(中)을 얻으면 때에 맞는다. ‘匪我求童蒙童蒙求我志應也’는 이(二)가 강명(剛明)의 현자로서 아래에 처하였고 오(五)가 동몽(童蒙)으로서 위에 거하였으니, 이는 이(二)가 오(五)를 구하는 것이 아니요 오(五)의 뜻이 이(二)에 응한 것이다. 현자(賢者)가 아래에 있으니, 어찌 스스로 나아가 군주에게 써주기를 구하겠는가? 만약 스스로 등용해 주기를 구한다면 반드시 군주가 신용할 리가 없다. 옛사람이 반드시 임금이 공경을 지극히 하고 예를 극진히 하기를 기다린 뒤에야 간 까닭은 스스로 존대하게 하려고 함이 아니라, 임금이 덕을 높이고 도(道)를 즐거워함이 이와 같지 않으면 더불어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初筮告는 以剛中也요 再三瀆 瀆則不告는 瀆蒙也일새니
처음 묻거든 알려줌은 강중(剛中)하기 때문이요 재삼 물으면 너저분함이니, 너저분하면 알려주지 않음은 몽(蒙)을 너저분하게 하기 때문이니,
[傳] 初筮는 謂誠一而來하여 求決其蒙이니 則當以剛中之道로 告而開發之요 再三은 煩數也니 來筮之意煩數하여 不能誠一이면 則瀆慢矣니 不當告也라 告之라도 必不能信受요 徒爲煩瀆이라 故로 曰瀆蒙也니 求者 告者 皆煩瀆矣라
[程頤의 설명] ‘처음 점침’은 정성스럽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와서 그 몽매함을 결단해 주기를 구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면 마땅히 강중(剛中)한 도(道)로써 고하여 개발시켜 주어야 된다. ‘재삼’은 번거롭게 자주 함이니, 와서 묻는 뜻이 번삭하여 정성스럽고 한결같지 못하면 너저분하게 되니, 고해 주지 말아야 한다. 고해 주더라도 반드시 믿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한갓 너저분함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너저분함’이라 하였으니, 구하는 자와 고해 주는 자가 모두 너저분해지게 된다.
蒙以養正이 聖功也라
어릴 때에 바름을 기름이 성인이 되는 공부이다.”
[傳] 卦辭曰利貞이라하니 彖은 復伸其義하여 以明不止爲戒於二요 實養蒙之道也라 未發之謂蒙이니 以純一未發之蒙而養其正은 乃作聖之功也라 發而後禁이면 則扞格而難勝이니 養正於蒙은 學之至善也라 蒙之六爻에 二陽은 爲治蒙者요 四陰은 皆處蒙者也라
[程頤의 설명] 괘사(卦辭)에 ‘정(貞)함이 이롭다.’ 하였으니, <단전(彖傳)>은 다시 그 뜻을 부연하여 다만 이(二)를 경계한 것일 뿐만이 아니요 실로 몽(蒙)을 기르는 도(道)임을 밝힌 것이다. 아직 개발되지 않음을 몽(蒙)이라 하니, 순일(純一)하고 개발되지 않은 몽(蒙)으로서 바름을 기름이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개발된 뒤에 금하면 거부하여 감당하기 어려우니, 어릴 때에 바름을 기르는 것이 배움에 지극히 좋은 것이다. 몽(蒙)의 여섯 효(爻) 가운데 두 양(陽)은 몽(蒙)을 다스리는 자가 되고, 네 음(陰)은 모두 몽(蒙)에 처한 자이다.
[本義] 以卦體로 釋卦辭也라 九二以可亨之道로 發人之蒙하고 而又得其時之中하니 謂如下文所指之事는 皆以亨行而當其可也라 志應者는 二는 剛明이요 五는 柔暗이라 故二不求五而五求二하여 其志自相應也라 以剛中者는 以剛而中이라 故로 能告而有節也라 瀆은 筮者二三이면 則問者固瀆而告者亦瀆矣라 蒙以養正은 乃作聖之功이니 所以釋利貞之義也라
[朱熹의 본 뜻] 괘체(卦體)로써 괘사(卦辭)를 해석하였다. 구이(九二 ;두번째 양효)가 형통할 수 있는 도(道)로 남의 몽매함을 개발시키고 또 그 때의 알맞음을 얻었으니, 하문(下文)에서 가리킨 바의 일은 모두 형통할 도로써 행하여 그 가(可)함이 마땅한 것이다. ‘지응(志應)’은 이(二)는 (양이므로) 강명(剛明)하고 오(五)는 (음이므로) 유암(柔暗)하다. 그러므로 이(二)가 오(五)에게 구하지 않고 오(五)가 이(二)에게 구하여 그 뜻이 서로 응하는 것이다. ‘이강중(以剛中)’은 강(剛)하고 중도(中道)에 맞기 때문에 능히 고해 줌에 절도가 있는 것이다. ‘독(瀆)’은 점치는 자가 두 번 세 번 치면 묻는 자도 진실로 너저분하고 고해 주는 자도 너저분하다. 어릴 때에 바름을 기름이 바로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니, 이는 ‘이정(利貞)’의 뜻을 해석한 것이다.
象曰 山下出泉이 蒙이니 君子以하여 果行하며 育德하나니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산 아래에서 샘물이 나옴이 몽(蒙)이니, 군자가 보고서 행실을 과단성있게 하여 덕을 기른다.”고 하였다.
[傳] 山下出泉하니 出而遇險하여 未有所之 蒙之象也니 若人蒙穉하여 未知所適也라 君子觀蒙之象하여 以果行育德하니 觀其出而未能通行이면 則以하여 果決其所行하고 觀其始出而未有所向이면 則以하여 養育其明德也라
[程頤의 설명] 산 아래에서 샘물이 나오는데, 험함을 만나 갈 바가 없는 것이 몽(蒙)의 상(象)이니, 마치 사람이 몽매하고 어려서 갈 바를 모르는 것과 같다. 군자가 몽(蒙)의 상(象)을 관찰하여 행실을 과단성있게 하고 덕을 기르니, 샘물이 나와서 통행하지 못함을 보면 이로써 그 행하는 바를 과단성있게 하고 처음 나와서 행하는 바가 없음을 보면 이로써 그 밝은 덕을 기르는 것이다.
[本義] 泉은 水之始出者니 必行而有漸也라
샘은 물이 처음 나온 것이니, 반드시 흘러가되 점점(적셔감)이 있는 것이다.
初六은 發蒙하되 利用刑人하여 用說(脫)桎梏이니 以往이면 吝하리라
[本義] 發蒙이니 利用刑人하고
초육(初六; 첫 음효)은 몽매함을 개발하되 사람을 형벌하여 몽매한 질곡을 벗겨줌이 이로우니 그대로 가면 부끄러우니라.
[朱熹의 본 뜻] 몽매함을 개발할지니, 사람을 형벌하고 질곡을 벗겨줌이 이로우니
[傳] 初以陰暗居下하니 下民之蒙也니 爻言發之之道하니라 發下民之蒙엔 當明刑禁以示之하여 使之知畏然後에 從而教導之라 自古聖王爲治에 設刑罰以齊其衆하고 明敎化以善其俗하여 刑罰立而後敎化行하니 雖聖人尙德而不尙刑이나 未嘗偏廢也라 故로 爲政之始는 立法居先이라 治蒙之初에 威之以刑者는 所以說(탈)去其昏蒙之桎梏이니 桎梏은 謂拘束也라 不去其昏蒙之桎梏이면 則善敎无由而入이라 旣以刑禁率之면 雖使心未能喩라도 亦當畏威以從하여 不敢肆其昏蒙之欲이나 然後에 漸能知善道而革其非心이면 則可以移風易俗矣라 苟專用刑以爲治면 則蒙雖畏而終不能發이요 苟免而无恥니 治化不可得而成矣라 故로 以往則可吝이라
초(初 ;첫효)는 음암(陰暗)으로서 아래에 거하였으니, 하민(下民)의 몽매한 자이니, 효(爻)에서는 이것을 개발하는 도(道)를 말하였다. 하민(下民)의 몽매함을 개발함에는 마땅히 형벌과 금령(禁令)을 밝혀 보여주어서 그들로 하여금 두려워할 줄을 알게 한 뒤에 따라서 가르치고 인도하여야 한다. 예로부터 성왕(聖王)이 정치를 할 때에는 형벌을 만들어 백성들을 통일시키고 교화를 밝혀 풍속을 선하게 하여 형벌이 세워진 뒤에 교화가 행해졌으니, 비록 성인(聖人)은 덕을 숭상하고 형벌을 숭상하지 않으나 일찍이 어느 한 쪽을 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정치하는 초기에는 법을 세움이 우선인 것이다. 몽매함을 다스리는 초기에 형벌로써 위엄을 보이는 것은 그 혼몽한 질곡을 벗겨버리기 위한 것이니, 질곡은 구속함을 이른다. 혼몽한 질곡을 제거하지 않으면 선(善)한 가르침이 들어갈 길이 없다. 이미 형벌과 금령으로 통솔하면 비록 가령 마음은 깨우치지 못하더라도 또한 마땅히 위엄을 두려워하여 따라서 감히 그 혼몽한 욕심을 부리지 못할 것이니, 그런 뒤에 점점 선한 도(道)를 알아서 나쁜 마음을 고치게 하면 풍속을 바꿀 수 있다. 만일 오로지 형벌만 사용하여 정치를 하려 하면 몽매한 자가 비록 두려워하나 끝내 몽매함을 개발하지 못할 것이요, 구차히 형벌만 면하려 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서 다스림과 교화를 이룰 수 없다. 그러므로 그대로 가면 부끄러운 것이다.
[本義] 以陰居下는 蒙之甚也니 占者遇此면 當發其蒙이라 然發之之道는 當痛懲而暫舍之하여 以觀其後니 若遂往而不舍면 則致羞吝矣니 戒占者當如是也라
[朱熹의 본 뜻] 음(陰)으로써 아래에 있음은 몽매함이 심한 것이니, 점치는 자가 이러한 경우를 만나면 마땅히 그 몽매함을 개발하여야 한다. 그러나 개발하는 도(道)는 마땅히 통렬히 징계하되 잠시 놓아두어서 그 뒤를 살펴보아야 하니, 만일 그대로 가고 놓아두지 않으면 부끄러움에 이르게 된다. 점치는 자에게 마땅히 이와 같이 할 것을 경계한 것이다.
象曰 利用刑人은 以正法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사람을 형벌함이 이로움은 법을 바로잡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傳] 治蒙之始에 立其防限하고 明其罪罰은 正其法也니 使之由之하여 漸至於化야라 或疑發蒙之初에 遽用刑人은 无乃不敎而誅乎아 하니 不知立法制刑이 乃所以敎也라 蓋後之論刑者는 不復知敎化在其中矣니라
[程頤의 설명] 몽매함을 다스리는 초기에 금지하는 한계를 세우고 죄와 벌을 밝힘은 그 법을 바로잡는 것이니, 그로 하여금 이것을 따르게 하여 저점 교화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혹자는 “몽매함을 개발하는 초기에 갑자기 사람을 형벌함은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데, 이는 법을 세우고 형벌을 만드는 것이 바로 가르치는 것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뒤에 형벌을 논하는 자들은 교화가 그 가운데 들어 있음을 다시 알지 못하였다.
[本義] 發蒙之初엔 法不可不正이니 懲戒는 所以正法也라
[朱熹의 본 뜻] 몽매함을 개발하는 초기에는 법을 바로잡지 않을 수 없으니, 징계함은 법을 바로잡는 것이다.
九二는 包蒙이면 吉하고 納婦면 吉하리니 子克家로다
[本義] 包蒙이니 吉하고 納婦니 吉하고 子克家니라
구이(九二; 두 번째 양효)는 몽매함을 포용해 주면 길하고 부인의 말을 받아들이면 길할 것이니, 자식이 집안 일을 잘 하도다.
[朱熹의 본 뜻] 구이(九二)는 몽매함을 포용함이니 길하고, 부인의 말을 받아들임이니 길하고, 자식이 집안 일을 잘 하는 것이다.
[傳] 包는 含容也라 二居蒙之世하여 有剛明之才하고 而與六五之君相應하여 中德又同하니 當時之任者也라 必廣其含容하여 哀矜昏愚면 則能發天下之蒙하고 成治蒙之功하여 其道廣하고 其施博하리니 如是則吉也라 卦唯二陽爻어늘 上九는 剛而過하고 唯九二 有剛中之德而應於五하여 用於時而獨明者也니 苟恃其明하여 專於自任이면 則其德不弘이라 故로 雖婦人之柔闇이라도 尙當納其所善이면 則其明廣矣라 又以諸爻皆陰이라 故로 云婦라 堯舜之聖은 天下所莫及也로되 尙曰 淸問下民 取人爲善也라하니 二能包納이면 則克濟其君之事하여 猶子能治其家也라 五旣陰柔라 故로 發蒙之功이 皆在於二라 以家言之하면 五는 父也요 二는 子也니 二能主蒙之功하니 乃人子克治其家也라
[程頤의 설명] 포(包)는 포용이다. 이(二;두번째 효)는 몽매한 세상에 처하여 강명(剛明;양효임)한 재질이 있고 육오(六五 ; 다섯째 음효)의 군주와 서로 응하며 (아래 효와 위 효의 가운데로 서로 응함) 중덕(中德:가운데)이 또 같으니, 시대의 임무를 담당한 자이다. 반드시 포용력을 넓혀 혼몽한 자들을 가엾게 여기면 천하의 몽매함을 개발하고 몽매함을 다스리는 공을 이루어서 그 도(道)가 넓고 그 베품이 넓을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길하다. 괘(卦)에 오직 두 양효(陽爻)가 있는데 상구(上九 ; 맨위의 양효)는 강(剛 ;양)으로서 (이미) 지났고, 오직 구이(九二; 두 번째 양효)만이 강중(剛中; 양이며 가운데)의 덕이 있으며 오(五 ;군주의 자리)와 응하여 당시에 쓰여지고 홀로 밝은 자이니, 만일 그 밝음을 믿고서 자임하기를 오로지하면 그 덕(德)이 크지 못하다. 그러므로 비록 유약하고 어두운 부인의 말이라도 오히려 그의 좋은 점을 받아들이면 그 밝음이 넓은 것이다. 또 여러 효(爻)가 모두 음이므로 부인이라고 말하였다. 요순(堯舜)같은 성인(聖人)은 천하가 미칠 수 없는 분인데도 오히여 하민(下民)에게 잘 묻고 남에게서 취하여 선(善)을 행하셨다고 하였으니, 이(二)가 포용하고 받아들이면 능히 군주의 일을 이루어서 마치 자식이 집안을 잘 다스리는 것과 같이 할 것이다. 오(五)가 이미 음유(陰柔)이기 때문에 몽매함을 개발하는 공이 모두 이(二)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집안으로써 말하면 오(五)는 아버지이고 이(二)는 자식이니, 이(二)가 몽매함을 개발하는 공을 주관하니, 바로 자식이 집안 일을 잘 다스리는 것이다.
[本義] 九二 以陽剛으로 爲內卦之主하여 統治群陰하니 當發蒙之任者라 然所治旣廣하고 物性不齊하니 不可一槪取必이어늘 而爻之德이 剛而不過하니 爲能有所包容之象이요 又以陽受陰하니 爲納婦之象이요 又居下位而能任上事하니 爲子克家之象이라 故로 占者有其德而當其事면 則如是而吉也라
[朱熹의 본 뜻] 구이(九二)는 양강(陽剛)으로서 내괘(內卦;아랫괘)의 주체가 되어 여러 음(陰)을 통치하니, 몽매함을 개발하는 임무를 맡은 자이다. 그러나 다스리는 바가 이미 넓고 물건의 성질이 똑같지 않으니, 일괄적으로 기필할 수가 없다. 그런데 효(爻)의 덕(德)이 강(剛)하되 과(過)하지 않으니 (양효이고 그 효용이 상구(上九)처럼 지나지 않았음) 능히 포용하는 바가 있는 상(象;형상)이 되고, 또 양(陽)으로서 음(陰)을 받아들이니 부인의 말을 받아들이는 상(象;형상)이 되고, 또 아래 자리에 있으면서 위사람의 일을 맡으니 자식이 집안을 다스리는 상(象;형상)이 된다. 그러므로 점치는 자가 이러한 덕(德)이 있으면서 이러한 일을 맡으면 이와 같이 길할 것이다.
象曰 子克家는 剛柔接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자식이 집안 일을 잘 다스림은 강유(剛柔)가 접(接)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傳] 子而克治其家者는 父之信任이 專也요 二能主蒙之功者는 五之信任이 專也일세라 二與五剛柔之情相接이라 故로 得行其剛中之道하고 成發蒙之功하니 苟非上下之情相接이면 則二雖剛中이나 安能尸其事乎아
[程頤의 설명] 자식이 집안 일을 잘 다스리는 것은 아버지의 신임이 전일하기 때문이요, 이(二)기 몽매함을 개발하는 공을 주관하는 것은 오(五)의 신임이 전일하기 때문이다. 이(二)와 오(五)는 강유(剛柔;양과 음)의 정(情)이 서로 접하므로 강중(剛中; 양이면서 가운데)의 도(道)를 행하여 몽매함을 개발하는 공을 이룰 수 있으니, 만일 상하(上下)의 정(情)이 서로 접한 것이 아니라면 이(二)가 비록 강중(剛中)이나 어떻게 그 일을 주관하겠는가?
[本義] 指二五之應이라
[朱熹의 본 뜻] 이(二)와 오(五)의 응함을 가리킨 것이다.
六三은 勿用取女니 見金夫하고 不有躬하니 无攸利하니라
육삼(六三 ;세번째 음효)은 여자를 취함에 쓰지 말 것이니, 금부(金夫; 돈 많은 지아비)를 보고 몸을 두지 못하니, 이로운 바가 없다.
[傳] 三以陰柔로 處蒙闇하여 不中不正하니 女之妄動者也라 正應在上이어늘 不能遠從하고 近見九二爲群蒙所歸하여 得時之盛이라 故로 捨其正應而從之하니 是는 女之見金夫也라 女之從人은 當由正禮어늘 乃見人之多金하고 說而從之면 不能保有其身者也니 无所往而利矣니라
[程頤의 설명] 삼(三)은 음유(陰柔)로서 몽매함에 처하여 중정(中正; 가운데이고 양은 양자리 음은 음자리에 있음)하지 못하니, 여자로서 망동(妄動)하는 자이다. 정응(正應; 上九와 바르게 응함)이 위에 있는데 멀리 가서 따르지 못하고, 구이(九二)가 여러 몽(蒙)이 귀의하는 바가 되어 당시에 뜻을 얻음이 성함을 가까이에서 보았다. 그러므로 그 정응(正應)을 버리고 구이(九二)를 따르니, 이는 여자가 금부(金夫;돈 많은 사내)를 본 것이다. 여자가 사람은 쫓음은 마땅히 올라른 예절을 따라야 하는데, 사람이 돈이 많은 것을 보고 기뻐하여 쫓는다면 이는 그 몸을 지키지 못한 자이니, 가는 곳마다 이로움이 없는 것이다.
[本義] 六三은 陰柔로 不中不正하니 女之見金夫而不能有其身之象也라 占者遇之면 則其取女에 必得如是之人하리니 无所利矣라 金夫는 蓋以金賂己而挑之니 若魯秋胡之爲者라
[朱熹의 본 뜻] 육삼(六三 ;세번째 음효)은 음유(陰柔)로서 중정(中正)하지 못하니, 여자로서 금부(金夫)를 보고 그 몸을 두지못하는 상(象)이라. 점치는 자가 이 괘를 만나면 여자를 취함에 반드시 이와 같은 사람을 얻을 것이니 이로운 바가 없다. 금부(金夫)는 금을 자기에게 주어서 괴는 것이니 노(魯)나라 추호(秋胡)의 행위와 같은 것이다.
象曰 勿用取女는 行이 不順也라
[本義] 行不順(愼)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여자를 취하지 말라는 것은 행실이 순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朱熹의 본 뜻] 행실을 삼가지 않기 때문이다.
[傳] 女之如此는 其行이 邪僻不順하니 不可取也라
[程頤의 설명] 여자가 이와 같으면 그 행실이 사악하고 편벽되어 순하지 못하니, 취해서는 안된다.
[本義] 順은 當作愼이니 蓋順愼은 古字通用이라 荀子에 順墨을 作愼墨하며 且行不愼이 於經意에 尤親切하니 今當從之니라
[朱熹의 본 뜻] ‘순(順)’은 마땅히 ‘신(愼)’이 되어야 하니, 순(順)과 신(愼)은 옛글자에 토용되었다. <순자(荀子)> ‘유효(儒效)’에 ‘순묵(順墨)’을 ‘신묵(愼墨)’으로 썼으며, 또 ‘행실을 삼가지 않는다’는 뜻이 또 <역경(易經)>의 뜻에 더욱 가까우니, 이제 마땅히 이것을 따라야 한다.
六四는 困蒙이니 吝하도다
육사(六四)는 몽(蒙)에 곤궁함이니 부끄럽도다.
[傳] 四以陰柔而蒙闇하고 无剛明之親援하여 无由自發其蒙하니 困於昏蒙者也니 其可吝甚矣라 吝은 不足也니 謂可少也라
[程頤의 설명] 사(四 ;네번째 음효)는 음유(陰柔)로서 몽매하고 강명(剛明;양효)한 이가 가까이에서 원조해 줌이 없어서 스스로 몽매함을 개발할 길이 없으니, 혼몽함에 곤궁한 자이니, 부끄러울 만함이 심하다. 인(吝)은 부족함이니, 하찮게 여길 만함을 이른다.
[本義] 旣遠於陽하고 又无正應하니 爲困於蒙之象이니 占者如是면 可羞吝也라 能求剛明之德而親近之면 則可免矣리라
[朱熹의 본 뜻] 이미 양(陽)과 멀고 또 정응(正應; 상괘와 하괘의 같은 자리가 음양으로 응함)이 없으니 몸매함에 곤궁한 상(象)이다. 점치는 자가 이와 같으면 부끄러울 만하다. 강명(剛明)한 덕이 있는 자를 구하여 친근히 하면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象曰 困蒙之吝은 獨遠實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곤몽(困蒙)이 부끄러움은 홀로 실(實;陽)과 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傳] 蒙之時에 陽剛은 爲發蒙者어늘 四陰柔而最遠於剛하니 乃愚蒙之人而不比近賢者니 无由得明矣라 故로 困於蒙이라 可羞吝者는 以其獨遠於賢明之人也니 不能親賢하여 以致困은 可吝之甚也라 實은 謂陽剛也라
[程頤의 설명] 몽(蒙)의 때에 양강(陽剛)은 몽매함을 개발하는 자인데, 사(四)는 음유(陰柔)로서 강(剛)과 가장 머니, 이는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이 현자(賢者)를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니, 밝음을 얻을 수가 없으므로 몽(蒙)에 곤궁한 것이다. 부끄러울 만한 것은 홀로 현명한 사람과 멀기 때문이니, 현자(賢者)를 친근히 하지 못하여 곤궁함에 이름은 부끄러울 만함이 심한 것이다. 실(實)은 양강(陽剛)을 이른다.
[本義] 實은 叶韻去聲이라
[朱熹의 본 뜻] 실(實)은 협운(叶韻;문자의 운을 임시로 다르게 읽음)에 거성(去聲)이다.
六五는 童蒙이니 吉하니라
육오(六五; 다섯 번째 음효)는 동몽(童蒙)이니 길하다.
[傳] 五以柔順으로 居君位하여 下應於二하니 以柔中之德으로 任剛明之才면 足以治天下之蒙이라 故로 吉也라 童은 取未發而資於人也니 爲人君者 苟能至誠任賢하여 以成其功이면 何異乎出於己也리오
[程頤의 설명] 오(五)는 유순함으로서 군위(君位)에 거하여 아래로 구이(九二)와 응하니, 유중(柔中; 음효이고 상괘의 가운데)의 덕이 있으면서 강명(剛明;양효)한 재질에게 맡기면 족히 천하의 몽매함을 다스릴 수 있다. 그러므로 길한 것이다. 동(童)은 아직 개발하지 못하여 남에게 의뢰함을 취한 것이니, 인군(人君)된 자가 진실로 지성으로 현자(賢者)에게 맡겨서 그 공을 이룬다면 자기에게서 나온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本義] 柔中居尊하여 下應九二하니 純一未發하여 以聽於人이라 故로 其象이 爲童蒙이요 而其占이 爲如是則吉也라
[朱熹의 본 뜻] 유중(柔中; 음효이고 상괘의 가운데)으로 높은 자리에 있어서 아래로 구이(九二 ; 두 번째 양효)에 응하니, 순일(純一)하고 개발되지 않아 남을 따른다. 그러므로 그 상(象)은 동몽(童蒙; 어린이)이 되고, 그 점(占)은 이와 같이 하면 길(吉)함이 된다.
象曰 童蒙之吉은 順以巽也일새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동몽(童蒙)의 길(吉)함은 순하고 겸손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傳] 舍己從人은 順從也요 降志下求는 卑巽也니 能如是면 優於天下矣리라
[程頤의 설명]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름은 순종함이요, 뜻을 낮추어 아래로 구함은 겸손함이니, 이와 같이 하면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넉넉할 것이다.
上九는 擊蒙이니 不利爲寇요 利禦寇하니라
상구(上九; 맨 위의 양효)는 몽매함을 쳐야 하니, 침략을 하는 것은 이롭지 않고 침략을 막는 것은 이롭다.
[傳] 九居蒙之終하니 是當蒙極之時라 人之愚蒙旣極하여 如苗民之不率爲寇爲亂者는 當擊伐之나 然九居上하여 剛極而不中이라 故로 戒不利爲寇하니 治人之蒙은 乃禦寇也요 肆爲貪暴는 乃爲寇也라 若舜之征有苗와 周公之誅三監은 禦寇也요 秦皇漢武窮兵誅伐은 爲寇也라
[程頤의 설명] 구(九 ;양효)는 몽(蒙)의 끝에 있으니, 이는 몽(蒙)이 극에 달한 때를 당한 것이다. 사람의 어리석음과 몽매함이 이미 지극하여 묘민(苗民;묘족 백성)처럼 따르지 않고 침략하고 난을 일으키는 자는 마땅히 쳐야 한다. 그러나 구(九)가 맨 위에 있어서 굳셈(양효)이 지극하여 중도(中道)에 맞지 못하므로 침략을 하는 것은 불리하다고 경계하였으니, 남의 몸매함을 다스리는 것은 바로 침략을 막는 것이요, 함부로 탐욕스럽고 포악한 짓을 하는 것은 바로 침략을 하는 것이다. 순임금이 유묘(有苗;오랑캐 종족)를 정벌한 것과 주공이 삼감(三監:무경과 관숙,채숙)을 주벌한 것으로 말하면 침략을 막은 것이요, 진시황과 한무제가 무력을 다 동원하여 주벌한 것은 침략을 한 것이다.
[本義] 以剛居上하여 治蒙過剛이라 故로 爲擊蒙之象이라 然取必太過하고 攻治太深이면 則必反爲之害니 惟捍其外誘하여 以全其眞純이면 則雖過於嚴密이나 乃爲得宜라 故로 戒占者如此하니 凡事皆然이요 不止爲誨人也라
[朱熹의 본 뜻] 강(剛; 양효)으로서 맨 위에 있어서 혼몽함을 다스림이 지나치게 강하다. 그러므로 격몽(擊蒙)의 상(象)이 된 것이다. 그러나 기필(期必)함을 취함이 너무 지나치고 다스림이 너무 심하면 반드시 도리어 해가 될 것이니, 오직 외부의 유혹을 막아서 순진함을 온전히 하면 비록 엄밀함에는 지나치지만 바로 마땅함을 얻음이 된다. 그러므로 점치는 자에게 이와 같이 하라고 경계하였으니, 모든 일이 다 그러한 것이요, 다만 사람을 가르치는 것 뿐만이 아니다.
象曰 利用禦寇는 上下順也라
<상전(象傳)>에 말하기를, “침략을 막음이 이로움은 상하(上下)가 순하기 때문이다.
[傳] 利用禦寇는 上下皆得其順也라 上不爲過暴하고 下得擊去其蒙은 禦寇之義也라
[程頤의 설명] ‘침략을 막음이 이로움’은 위아래가 모두 그 순함을 얻었기 때문이다. 위가 지나치게 포악하지 않고 아래가 몽매함을 쳐서 제거함은 침략을 막는 뜻이다.
[本義] 禦寇以剛이면 上下皆得其道라
[朱熹의 본 뜻] 침략을 막기를 강(剛)함으로써 하면 상하(上下)가 모두 그 도리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