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유배문학,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 거제도 귀양살이 중에 아우와 작별하다> 고영화(高永和)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귀양살이 중에 아우와 작별하며’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1520년 기묘사화에 연류되어 거제도로 유배된 송재(松齋) 한충(韓忠 1486~1521)의 작품이다. 이 글은 그와 함께 동행하며 또 거제 배소에서 함께 지낸 친 동생(아우)이 고향 집으로 되돌아가는 비통한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3편의 한시(漢詩)이다. 여기서 사제(舍弟)는 친동생으로, 남에게 자기 아우를 겸손하게 일컫는 말이다. 그는 1513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승승장구(乘勝長驅)했으나 결국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1년 2개월만에 풀려났으나 이내 살해되었다. 그는 말년에 형제들과 집안이 무탈하길 바랐으나 결국 훈구파에게 화를 당하고 말았다.
○ 한충(韓忠)의 문집 송재집(松齋集)』은 1889年刊, 7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고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송재집(松齋集)』 권1(卷之一)에 수록되어 있다. 한충(韓忠)은 1520년 충청도수군절도사로 재임중에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그가 평소에 조광조(趙光祖)와 교유하였다 하여 거제도로 유배되었다. 그는 거제시 수양동 수월리로 귀양 와, 1521년 이른 봄에 복권되어 서울로 돌아갔다가 다시 구금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면회 온 아우와 함게 지내다가 돌아갈 때 오양역까지 따라갔다가, 전송한 후에 돌아와서 이별의 아픔과 비통함을 담아 지은 시이다. 당시 수월리 한충의 배소가 수월사(水月寺)와 가까이 있었던 모양이다.
○ 그리고 그는 거제도 귀양살이 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컸다. 언제 사약이 내려올지 무서워했다. 그래서 늘 ‘오늘도 무탈한 하루’이길 소망했다. 아무 일도 없는 평범한 하루의 소중함을 느끼며 살았다. 한충(韓忠)의 거제도 배소는 거제시 수양동 수월 마을이었다. 임진왜란 전까지는 수월리에 사찰 수월사(水月寺)가 존속했다. 기록에 따르면 절에는 범종이 입구에 매달려 있었고 수월 마을 서쪽 편과 하천 하류 사이에 불당과 범종이 위치했다. 여기는 이전에 김세필(金世弼 1473~1533) 선생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1504년부터 1506년까지 약 2년 동안 수월리에서 귀양살이를 했던 곳이다.
● 다음 소개하는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모두 3편이다. 송재(松齋) 한충(韓忠 1486~1521)이 동생과 얼마나 헤어지기가 힘들었으면, 그의 거제유배문학 12편 중에 같은 제목의 시를 3편이나 남겼을까? 귀양길에 함께 거제도로 동행했던 동생이 이제는 고향 집으로 돌아간단다. 그래서 견내량의 역참 오양역까지 함께 가서 배웅하며 돌아와 3편의 한시를 짓게 된다.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거제 유배(謫巨濟) 때, 아우와 이별하며(別舍弟)’라는 뜻이다. 그는 이 시편을 통해 어버이 생각에도 눈물이 떨어지고 아우와의 이별에도 남몰래 옷깃을 적신다며 비통한 심정을 드러내었다.
○ 첫 번째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覃’ 운목(韻目)의 칠언절구(七言絶句)로 압운자는 ‘諳’, ‘甘’, ‘南’ 자(字)이다. 두 번째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칠언율시(七言律詩) 2수(首)다. 먼저 첫수(首)는 ‘歌’ 운목(韻目)의 압운자는 ‘跎’, ‘波’, ‘何’, ‘多’, ‘過’ 자(字)이고 둘째 수(首)는 ‘寒’ 운목(韻目)의 압운자는 ‘關’, ‘酸’, ‘冠’, ‘寒’, ‘殘’ 자(字)다. 세 번째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侵’ 운목(韻目)의 칠언율시(七言律詩)로 압운자는 ‘吼’, ‘陰’, ‘吟’, ‘心’, ‘襟’ 자(字)이다.
(1)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 / 한충(韓忠 1486~1521) 通津一路世嘗諳 나루로 통하는 바로 뻗은 길로 일찍이 큰소리로 세상에 알린다. 風味東西異苦甘 고상한 음식 맛도 쓰기도 하고 달기도 하구나 (형제의 다름) 只有江雲無彼此 오직 강과 구름이 피차가 없어야만 하는데 (형제의 우애) 朝朝之北又之南 매일 아침마다 북쪽인지 또 다시 남쪽인지.
(2)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 / 한충(韓忠 1486~1521) 天涯心事已蹉跎 먼 변방에서 마음에 생각하는 일들은 이미 다 어긋나고 獨立津頭水自波 나루에 홀로 서니 물결이 절로 일어나네. 千里家園君且去 천리 길 고향으로 그대 그만 가보시게 孤城風日我如何 고립된 성의 바람과 볕에서 나는 어찌하리오. 寒空帆影乘秋疾 맑고 차가운 하늘 아래 돛의 그림자는 괴로운 가을바람 타고 遠樹蟬聲向暮多 먼 나무 매미 소리에 날은 저물어 가구나 回首沙汀同釣處 바닷가 모래톱에서 머리를 돌이켜 함께 낚시터로 가보니 月明誰與更經過 달빛은 밝은데 시간이 다시 지나면 누구와 함께하랴. 其二 君歸幾日到鄕關 그대 돌아가고 고향에 이른 지 며칠이나 되었던고. 把酒論心骨已酸 술잔 들고 마음을 살펴보니 뼈가 이미 시큰하다 榮辱紛紜同捕影 세상의 영화와 치욕은 다 헛수고며 시끄러울 뿐이고 功名容易莫彈冠 세상의 공명은 아주 쉬우니 관복을 자랑 말라. 烏楊驛路靑楓暮 사등 오양역 길, 푸른 단풍에 날이 저물고 水月寺鍾白露寒 수월사 범종은 흰 이슬에 차구나 從此只應煩夢想 이로부터 다만 꿈같이 헛된 생각에 번거롭기만 한데 可堪孤館壁燈殘 외로운 객사 벽에 걸린 등불, 어찌 능히 감당 할 수 있으랴.
(3)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 / 한충(韓忠 1486~1521) 청구풍아를 살펴보니 이렇게 벗과 이별하는 게 맞는 건지 알 수 없다.(按靑丘風雅 云別友人 未知孰是) 有海風常吼 바닷바람이 항상 울부짓 듯 불어오고 多山晝亦陰 수많은 산은 낮에도 그늘지지만 寧知同井客 마을 사람들이 어찌 이내 객의 마음을 알까? 共作異鄕吟 함께 쓰는 글로 타향에서 신음한다. 幾下思親淚 바라건대 어버이 생각에 눈물 떨어지고 空懸報主心 쓸쓸히 주군(임금)의 마음에 보답하노라 惟君知此意 다만 주군이 나의 이 뜻을 알아줄까? 臨別暗沾襟 헤어질 즈음 눈물이 남몰래 옷깃을 적신다. [주] 청구풍아(靑丘風雅) : 조선 전기의 학자 김종직(金宗直:1431~92)이 편찬한 시선집, 필사본. 7권 1책. 신라말에서부터 조선 초기에 이르는 126인의 한시 517수를 실었다. 각 시의 고사(故事)나 난해한 구절 등에 편자의 해석을 붙였다.
○ [한충(韓忠 1486~1521)의 거제도 귀양살이] 한충(韓忠 1486~1521)은 기개가 호방(豪放)하였고 글을 잘 하였으며 음률을 좋아하였다. 하지만 당인으로 몰려서 거제도로 귀양 갔다가 또 풀려났으나, 곧 곤장을 맞고 36세의 일기로 옥중에서 죽었던 불우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거제도에서 아우와의 이별이 서러워서 3편의 한시를 남긴 속 깊은 형이었다. 게다가 해풍의 짠맛에 길들어져 그 향기가 매혹적인 거제도 유자(柚子)를 맛보고 노란 금빛의 유혹에 감히 고개를 돌릴 수 없다고 말했다.
거제도로 유배와 1520년 가을 거제시 수양배소에서 유자를 처음 먹어 본 한충(韓忠)은 그 맛에 감탄하여 장문의 오언고시 <식유(食柚)> 한시(漢詩)를 남겼다. 그는 소동파의 식감시(食柑詩)를 인용해 말하길, “한 쌍의 비단 보자기로 진귀한 물건 나누어 주지 않았는데, 숲 아래에서 먼저 맛보니 쫓겨난 신하 부끄럽네(一雙羅帖未分珍 林下先嘗怪逐臣)”라고 하였다. 옛날 궁중에서 가까운 신하들에게 귤이나 밀감을 하사하게 되면 황색 비단 보자기(羅帖)에 싸서 주었는바, 아직 궁중에서 하사하기 전에 귀양 온 자신이 먼저 먹게 되어 부끄럽다고 말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또한 그는 “남쪽 큰 바다엔 사철나무인 귤과 유자가 많아 맛좋은 과실이 가지마다 누렇게 처져 열린다. 한번 보기만 해도 병든 눈이 낫는다.”고 칭송했다.
◉ [한충(韓忠, 1486~1521)의 인품과, 그리고 별사제(別舍弟)] 조선중기의 문신 한충(韓忠, 1486~1521)의 자는 서경(恕卿), 호는 송재(松齋)이다. 그는 아우와 거제도 견내량 오양역에서 ‘아우와 이별을(別舍弟)’ 애통해하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렀다. “슬프고도 슬프도다.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悽悽復惻惻 之子去何之)” 결국 「적거제별사제(謫巨濟別舍弟)」는 천 리 먼 변방에 유배온 형이 돌아가는 아우를 전송하며, 비통한 이별의 심정을 노래한 <별사제(別舍弟)>라고 할 수 있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평소에 조광조의 일파라 하여 장 1백대의 형벌을 받고 거제도로 유배당하였다. 거제유배기간은 1519년 12월부터 1521년 초까지이며, 그의 거제도 배소는 같은 기묘명현인 십청헌 김세필이 갑자사화 때 유배와 거주했던 거제시 수양동 수월리 바닷가 제산마을이다. 1521년(중종 16) 중종의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신사무옥(辛巳誣獄)에 연루되어 1521년(중종 16)에 형장(刑杖)을 맞다가 옥중에서 죽었다. 그는 율려(律呂)․음양(陰陽)․천문․지리․복서(卜筮)에 능하였고, 당시 사람들에게 재주와 기국(器局)이 있고, 또 기절(氣節)도 많은 사람이라는 평을 받았으며, 이장곤(李長坤, 1474~1519)은 한충에게 준 시에서 “나의 벗 한서경(韓恕卿)은 기개가 바다를 가르는 매 같도다.” 라고 하여 그의 기개를 칭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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