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제도 고대국가 독로국(瀆盧國), 독로(瀆盧)인가? 두로(dúLú)인가?>
고전학자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차례 : 1. 거제도 독로국(瀆盧國) 개요
2. 거제도 독로국 비정설에 대한 각종 논거
3. ‘瀆盧國’을 “독로(dok-ro)로 읽을 것인지, 두로(dúLú)로 읽을 것인가
4. 거제시 아주동(鵝洲洞)과 농소리 고분 출토 유물
5. 마무리 결어
1. 거제도 독로국(瀆盧國) 개요
거제도는 고대 한국∙중국∙일본 등의 동아시아 해상교통로의 요충지(要衝地)로써 다양한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넘쳐나는 곳이었다. 특히 거제도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일본과의 무역은 기원전부터 이어온, 거제도를 경유한 해상로(海上路)를 이용했다. 또한 일본으로 간 수많은 한반도 도래인들의 항해(航海)의 기착지 역할을 수행한 곳이었다.
고대 2000년 전, 전남 해안과 사천 통영 쪽에서 오는 선박은 남부면 다대포에서, 웅천 김해 부산에서 출항한 선박은 거제도의 북부 장목면 농소리나 대금리를 거쳐 동남쪽 지세포⋅아주동(옥포) 등지에서 배를 정박한 후에 해상의 일기를 살핀 후, 편서풍과 쓰시마 난류(쿠로시오 지류)를 타고 대마도 해안에 이르는 바닷길이었다.
먼저 ‘독로국(瀆盧國)’이 등장하는 기록을 살펴보겠다. 약1800년 前, 그 옛날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변진에 독로라는 나라가 있는데 왜와 접하고 있다(弁辰瀆盧國 其瀆盧國與倭接界)”는 기록이 전한다. 당시 진수는 위략(魏略)이라는 역사서를 참고로 기록했다고 한다.[위(魏)나라 220~265] 초기 삼한시대 변진(弁辰)의 12개 나라 중에 거제도에 독로국(瀆盧國)이 있었다. 그 당시 거제도는 고인돌 청동기시대 족장사회를 거쳐, 초기 철기시대 군장사회(君長社會)였던 변진(弁辰)의 독로국(瀆盧國)이라는 고대국가가 위치하고 있었다. 비록 국가의 틀을 갖추지 못한, 자유로운 무역지구였으나 우리 거제도에 역사시대가 시작된 의미 있는 사회였다.
또 덧붙여 ’왜와 경계(접하고)에 있다.‘라는 뜻은 고대인의 관점에선 일본과 가장 가까운 독로국(두로국)은 단순 거리가 아닌 해류와 조류, 편서풍을 이용한 현실적이고 실제 사용되고 있었던 교류지역을 말한다. 또한 ’왜와 경계하고 있다‘는 말은 왜국으로 가는, 가장 가까운 경유지(기착지)라는 뜻이다. 사실 고대에는 바다와 섬에 대한 영토 의식이 희박한 시절이니만큼 거제도에 대한 우리 역사기록 자체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 지금에 이르러 매우 아쉽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강연을 통해 각종 독로국 거제도 비정설과 더불어 그 논거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리고 거제지역 고분 출토 유물과 유구에 대한 설명과 거제도 고대국가 ‘瀆盧國’을 “독로(dok-ro)로 읽을 것인지, 두로(dúLú)로 읽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보겠다.
2. 거제도 독로국 비정설에 대한 논거
1) 독로국 거제도 비정설 첫 번째 주장
먼저 고대에는 항해 기술이 발전하지 못해 해류나 바람을 타고 항해 길에 올랐다. 약 2천년 전에는 나침판도 항해술에 아직 이용하지 못했던 시기인지라, 주로 낮에 해류와 편서풍, 계절풍을 타고 망망대해를 건넜다. 밤에는 별자리를 보고 방향을 잡기도 했는데 흐린 날이면 낭패를 겪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초기 일본으로 향하는 사절단 일행은 거제도 항구에서 일기를 살핀 후, 새벽에 출발하여 편서풍과 쓰시마 난류를 타고 해가 지기 전에 대마도 북부 해안에 도착했다고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대한해협 편서풍은 평균적으로 수평면 3.7m/sec, 해수면 쓰시마 난류 0.75m/sec(1.5노트) 정도라고 한다. 그래서 現김해 도심지에서 출발하여 대마도까지 하루 만에 도착하지 못하는 일이 빈번해 거제도를 경유해서 가게 된 것이다. 45도 정도 부는 바람에 45도 정도 0.5m/sec 해류를 타면 10hour 만에 대한해협을 쉽게 건너갈 수 있다. 4노트=2m/sec – 10시간만에 72Km
결론적으로 노와 돛을 이용해 4노트=2m/sec 속력으로 10시간만에 72Km 정도 도달하는 속력으로 건너 갔답니다. 새벽에 출발해 오후 4시 이전에 쓰시마 북단에 도착하곤 대마도인들의 안내를 받아 대마도주가 사는 마을까지 해안을 따라 이동했던 겁니다.
[ 참고 : 그 당시에는 거제도를 ‘사도도(沙都嶋, すなとしま)’라 일컬었으며, 그 뜻은 "바닷가 모래가 많은 고을 섬(沙等)"이라는 뜻이다. 또 다른 일본서기에는 ‘가라시마(加羅島)’라고도 언급되어 있다. 청동기시대 거제도 고인돌의 숫자를 고려하면 독로국(瀆盧國)의 인구는 약5000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 기원 전 5세기부터 시작 된, 최초로 일본으로 간 도래인, 이후 백제의 무역, 김해 가야국의 일본 항해길, 몽고의 일본정벌, 조선의 대마도 정벌 모두, 거제도 해상을 경유해서 대마도로 향했다. 실제 고대에는 부산에서 대마도로 건너가기가 어려웠다. 반면 고려말기부터는 가끔씩 부산포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연중 동해로 흐르는 대한해협의 쓰시마 난류와 편서풍으로 인해, 대마도로 못 가고 동해 시네마현과 돗토리현으로 빠져 나갔다고 한다. 이는 항해술이 발달되기 이전인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
여몽정벌군의 일본 침략과 여말선초(麗末鮮初) 3차례 대마도 정벌(東征)이 모두 거제도 해상을 이용했던 계기로 인해, 15세기 거제도는 최전방 해안의 수군진영이 섬을 빙 둘러 구축되었고, 거제 지세포 항구는 수군진영과 더불어, 계해조약(癸亥條約)의 체결로 대마도 왜선들이 문인(文引)을 확인하고 어세(漁稅)를 납부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거제도는 서기 1500년 전까지 통신사(사절단)의 ‘대마도 항해 길’의 출항지(出港地)나 기착지(寄着地)로 이용되어 왔다.
○ 또 이 당시 거제도는 동아시아의 활발한 해상무역의 중심에 있었으며, 뚜렷한 국가의식이나 영토 경계가 없었던 시기인지라, 언어 또한 거제도과 일본 대마도 큐우슈우(九州) 북부지방은 같았을 것이다. 덧붙여 ‘倭’라는 한자어는 당시 우리나라 남부 해안지방과 일본 큐슈 지역에 거주하며 무역하던 해상민족이다. 또한 ‘倭‘ 단어 자체가 ’벼농사를 짓는 모계사회(人+禾+女) 사람들(여성 군장사회)‘을 의미한다.
[ 참고 : 특히 거제도는 사천시 늑도, 남해도와 같이 당시 활발한 해상무역의 뱃길에 위치한 관계로 다른 변한 지역과 달리 고상가옥이나 문신, 바다의 해신을 믿는 등 개방적인 남방계 해양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 <부산지역 동래 독로국(瀆盧國) 비정설>
사실 거제도 독로국 비정설(比定說)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동안 수세기 전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수백 년 동안 수많은 학자나 지역의 식자들이 주장해왔던 학설이었다. 그런데 근대에 이르러 부산지역 대학 교수와 사학자들은 당시 삼한시대 변진의 거칠산국(居漆山國)', ‘내산국(萊山國) 또는 '장산국(萇山國), 독로국(瀆盧國) 등 고대 국가들이 전부 동래지역 고대국가라고 주장한다. 현재 부산광역시 규모가 크다보니 이에 걸 맞는 고대국가를 끼워 맞추기를 원하고 있는듯하다.
이분들의 주장에 의하면, 동래지역 고분에서 철기나 왜계(倭系) 유물이 출토되어 이를 주장했다거나, ‘독로’를 음독하면 ‘독내’ 또는 ‘동래’가 되어 그 미칭으로 ‘동래’가 쓰인 것으로 본다는 견해는 객관성을 잃은 억지 주장일 뿐이다. 해상 무역의 기착지 역할을 했던 독로국이 존속하던 기원전 1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의 역사가 아니라, 4세기 이후의 동래가 금관가야의 가야권역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다거나 제철 시설이 발굴되었다거나 등, 비정설과는 아무 관련 없는 예를 들어 독로국 비정설을 주장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예이다.
가장 간단한 역사적 사실을 불확실성 기법을 나열하여 주장하는 형태는 학자적 태도가 아니다. 게다가 부산 영도가 대마도와 직선거리가 거제도보다 더 가깝고, 옛 고분이나 철기 유물이 거제도보다 동래가 몇 배나 더 많이 출토되고 있어 주장했다한다(사실 동래지역 유물도 4세기 이후의 가야와 신라시대 것들뿐이다). 이들은 중국어 발음이나 고대 우리말은 물론, 남부지방의 여러 발굴 유적 정황에 따른 역사적 사실을 인지하지 못해 발생한 것이다. 또한 조선중기 이후부터 일본과의 무역과 해상교통을 독점한 부산지역이 고대에도 그랬을 것이라는 추정이 역사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2) 2번째 주장 ‘독로가 독내로 다시 동래’로 음운변화
당시 동래에 독로국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거칠산국(居漆山國)', ‘내산국(萊山國) 또는 '장산국(萇山國)'이 있었음이 우리나라 역사 기록에 뚜렷이 등장한다. 또한 ① 지금부터 1700년 전, 동래의 본래 명칭인 거칠산국을 신라 경덕왕 때 개명된 동래라는 지명과 음운학적으로 서로 연결지울 수가 없다보니, 독로국이 사라진지, 수백 년이 지난 후, 이때 당시 음운을 기준으로 독로가 독내로 다시 동래로 음운이 바뀌었다는 말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분명한 것은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한자어 ’독로‘라는 단어를 1700년 전 변한 가야의 차자어 이두어로 독로라고 읽지 않았다는 것이다. 독로는 중국 진나라의 한자어로, 음차로 표기한 것이다. 또 1400년 전, 그 ’당시 신라 중앙정부와 당시 지역 사람들이‘ 독로라고 읽은 음운이 1600년 전 경덕왕 때, 신라식 한자 표기로 인해 동래로 음역하여 동래군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늘어놓고 있다.
3) 독로국 거제도 비정설 3번째 주장
② 또 다른 예로 <삼국사기 열전 제4 거도(居道) 편>에 “1세기 중후반 탈해 이사금(재위 서기57~80)이 사로국에 재위하고 있을 때 간(干)이란 벼슬을 하고 있던 거도(居道)라는 사람이, 나라의 근심이었던 우시산국(울산)과 거칠산국(동래)을 병합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가 지휘하던 병사들이 1년에 한 번씩 말 타기 훈련을 하면서 두 나라를 속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두 나라를 공격해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당시 동래에는 독로국이 아니라 거칠산국이 있었음을 삼국사기가 증명하고 있다. 1세기 중후반에 사로국 신라가 거칠산국을 병합해 거칠산군으로 격하시켰다고 하니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래에는 본디부터 독로국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기록이 맞다면, 동래 복천동고분이나 연산동 고분은 전부 진한의 사로국, 신라의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독로국’이란 명칭 자체가 오직 중국의 삼국지위지 동이전에만 등장하기도 하고, 또 제 개인적으로, 『삼국사기』가 정확하다면 독로국은 기원 전에 존재했던 고대국가라고 볼 수도 있다.
[ 참고 : 독로국이 존속했던 기원전 1세기 전부터 서기 약300년 전까지 중국에는 한나라와 삼국시대가 펼쳐졌고 일본은 야요이 시대였다. 우리나라의 가야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4세기부터는 일본에는 야마토(4세기~8세기초) 시대가 펼쳐졌다.]
4) 독로국 거제도 비정설 4번째 ‘고대 지명 어원설’ 주장.
서기 2세기 전후 독로(瀆盧)라는 말은 현재 우리말로 읽은 것이지, 당시는 음을 빌려 쓴 ’음차(音借)‘로 표기한 것으로, ’瀆盧‘ 한자어는 예나 지금이나 ’dúLú[두루(두로)]‘라는 중국말로 읽고 있다. 우리나라 ’섬‘이라는 단어는 조선 초기에 처음 등장한 단어이고 고대에는 섬을 ’두루(빙 둘러 있다)‘라고 읽었다. 또한 허재영 건국대 교수의 기고문과 최남선의 <동경통지>에 신라 문무왕 때 거제도에 설치된 ‘상군’(裳郡)에서 치마를 뜻하는 상(裳)은 우리말 두루기이고 또 상(裳)의 속어 ‘두룽이’이와 연관 지어 독로가 곧 거제섬이라고 언급했다. ‘두룽이’의 한자 표기는 ‘독로’(瀆盧)인데 우리말의 ‘도랑’에 해당하는 말이다. 옛날에 도랑은 ‘물길로 통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그래서인지 왕조시대 중국말을 아는 분이나 중국 역사학자, 근대 일본 고고학자 등이, 모두 거제도라고 비정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래가 섬이 아니기 때문이다.
◉ 게다가 신라 문무왕 677년에 설치한 상군(裳郡)에서 경덕왕 757년에는 거제군(巨濟郡)으로 처음 개명했는데 신라 군현 명칭 개정이 경덕왕 때를 전후하여 삼한의 이두식, 차자어 표기가 신라 경주의 한자식 표기로 바뀐다. ‘巨濟’는 ‘크게 물을 건너다’는 뜻이다. 제주는 물 건너 고을이라는 뜻이다. ‘거제(巨濟)’를 일본말로 읽으면 ‘きょさい(교사이)’다. 물론 일본말에 ‘きょさい’는 여러 뜻이 있지만, ‘일본식 차자어로 쓴다면’ 도랑(渠)의 경계(끝), 즉 물길의 바다(대한해협) 경계라고 풀이할 수 있다. 독로(瀆盧)의 독자가 도랑 독(瀆)자다. 말은 살아 있는 박물관이란 말이 있다. 그 어떤 유물보다 더 정확한 역사학적 증거다.
○ 지명 어원설로써 거제도 비정설을 주장했던 분들을 소개하면, 청나라 학자 정겸(丁謙)은 물론, 양주동 박사, 조선후기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 낙하생(洛下生) 이학규(李學逵,1770~1835) 선생, 일본인 근대 역사학자 스에마쯔(末松保和, 식민사관)를 비롯한 일본의 모든 역사학자, 또 부산시 근대역사관장 나동욱 교수가 양심선언하며 거제도 비정설을 주장했다.
5) 독로국 거제도 비정설 5번째 ‘기성관(岐城館)의 상량문 문구’
또한 1892년 9월에 기록한 거제군 동헌건물인 기성관(岐城館)의 객사(客舍) 상량문(上梁文)에서, 독로 고도(瀆盧故都) 또는 두로건국(豆盧建國)라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이 뜻은 ‘독로의 옛 나라’ ‘두로국이 건국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거제도 사람들은 예로부터 독로국이 거제도의 고대국가라고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매우 중요하다. 덧붙인다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거제도를 주노(周奴)국 즉 섬놈 나라라고 비하하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주노국의 周자 또한 두루 周자라는 사실이다.(예전에 일본을 왜노국(倭奴國, 왜놈 나라)이라 불렀다) 전남지역 장고고분 또는 일본 고분 전방후원분 주위에는 성곽 밖의 해자처럼 무덤 주위를 ’빙 둘러(周) 도랑(溝)‘을 파서 배수를 원할히 하여 무덤을 보호하고자 만든 도랑을 주구(周溝)라고 부른다. 이런 무덤을 ’주구묘‘라고 한다. ‘물이 빙 둘러 흐른다’는 글자를 두루 주자에 도랑 구자를 썼다.
6) 독로국 거제도 비정설 6번째 ‘고고학적 증거’
이제부터는 현재까지 발굴 유적이나 유물 즉, 고고학적 증거로 말씀 드리겠다. 결론적으로 말해 남해안 지역의 ‘왜계 수장층 고분’이 이를 증명한다. 전남 나주 영동리 고분, 해남 강진고분, 경남 사천 늑도 유적, 경남 거제시 농소리 고분 등이다.
먼저 거제도에 독로국이 존재했던 2000년 전 그 당시, 인근 해상무역 국제지구였던 삼천포 연안의 늑도에는 BC 2세기 중반에서 BC 1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 유물과 유적이 다량 출토되었다. 도끼, 쇠칼, 손칼 등 철기류와 석기류, 온돌시설 등을 비롯해 패총과 무덤유구(토목 건축의 잔존물), 주거지 등과 함께 각종 토기류(중국계 경질토기, 일본계 야요이 토기, 점토대 토기 등), 한(漢)나라 화폐 반량전과 오수전, 한(漢)나라 거울 등 13,000여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지금부터 약 2000년 前, 늑도는 활발한 국제 무역항으로써 외국상인의 집결지였고 뚜렷한 토착세력이 없는 국제무역항이었다. 늑도의 유적을 통해 분명히 알아야할 점은 유물유구가 많이 발굴되었다고 해서 그 땅에 국가가 존재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동래가 아무리 출토되는 유물유구가 많다하여 독로국이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학자로써 식견과 양심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또 당시 ‘야요이 시대의 일본인들이 늑도에서 거주하며 생활한 흔적(거주지터)’들도 남아있기에 ‘지금으로 치면 국제자유무역지구 같은 곳이었다.’고 2001년 발굴조사팀의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천시 늑도 유적은 지금부터 2천년 전에 활발한 국제 해상무역을 증명하는 것으로, 중국 동쪽 해안에서 우리나라 서해안을 거쳐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남해안 뱃길을 따라와 거제도 독로국에 이르렀고 여기서 대한해협을 건너 대마도⋅규슈에 이르는 해상무역의 국제 해로(海路)였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늑도에서 일본으로 가는 가장 빠르고 안전한 항로(航路)가 바로 거제도를 경유해서 가는 바닷길’이었다. 당시 경남의 사천, 마산(합포), 웅천(진해), 김해, 부산포 등에서 출발하는 선박도 반드시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로 건너갔던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당시 고대 동아시아 바닷길(항로)는 모두 해안에 위치했는데 부산시 동래의 복천동, 연산동은 수영강의 중류에 위치한 곳으로 바닷가 항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해야할 것이다.
○ 그리고 늑도 유적에 더하여, 5~6세기 일본 규슈 후쿠오카의 반즈카 고분과 전남 나주 영동리 고분, 전남 해남 고분, 그리고 거제시 농소리 고분의 주인은 모두 왜계 수장세력의 무덤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당시 이들 남방계 해상 세력들이 동아시아 해상무역을 주도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제도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당시 일본(규슈) 지역과 가장 가까운 바닷길의 기착지로 보인다. 반면 동래고분에는 왜계 상업 물품을 제외한, 왜계(일본) 수장층고분이나 해상세력 지배층과 관련된 고분이 발굴되지 못한 이유는 지리적 위치로 볼 때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고로 해로를 통해 왜국과 접한 독로국은 당연히 거제도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 특히 해상 무역로 뱃길의 기착지나 경유지에는 반드시 ‘타국의 집단 거주지가 형성’된다. 아시다시피 조선시대 삼포의 개항과 같이 정기적인 무역을 위해서는 왜인의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지듯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재팬타운(Japantown)’ 같은 것이다. 그러다보니 왜인 집단 거주터나 왜계 수장층 무덤이 발굴되어야만 뱃길의 기착지(경유지)라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무역 항로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로만글래스 같은 유리 제품과 아라비아 제품들이 신라시대 왕릉에서 출토 되듯이, 왜계 토기나 칼 등, 상거래에 의한 상업물품은 이와 무관하다 할 것이다. 이건 상식이다.
○ 또 일본과 거제도와 교류를 증명할 거제도 농소리 고분에서 발견된 왜계 수장층의 유적 및 유물은 고대 거제지역과 일본의 교류 활동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일본계 하지키계 토기(일본고분시대 4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야요이식 토기로부터 발달한 토기)와 무장한 왜인의 무덤(고분)이 이를 증명한다. 아무리 동래 분들이 독로국 비정설을 주장한다고 해도, 전남 영산강유역과 같은 고분 즉, 해상무역 거점 거제도에 ‘왜계 군장 세력의 존재 사실’에 근거한 역사는 바뀔 수가 없다는 점을 명심해야할 것이다.
◉ 지금까지 해상 뱃길의 전남 영산강 유역과 고흥, 장성, 그리고 경남 사천 늑도, 거제시 장목면 능소리 고분에서만 왜계 수장층 무덤이나 왜인 거주터가 발굴되었음은 의미심장한 사실로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왜계 고분들은 변한(가야)-마한-규슈 세력이 남해안 일대에서 역동적인 교류 공간을 펼친 증거물인 것이다.
7) 독로국 거제도 비정설 7번째 ‘과학적 증거’
마지막으로 당시 남해안 해양 교류 세력의 고분들의 유전분석 즉, 과학적 증거를 말씀 드리겠다. 현재 학계에 널리 알려진 희귀 혈액형 Cis-AB형은 한국의 전라남도와 경남 서부해안과 남해도, 그리고 일본의 규슈 북부 일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지금은, 이촌향도 현상과 이민으로 인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 혈액형은 그 당시 해상민족의 분포지역과 무역교류 항로를 알게 해주는 중요한 과학적 증거이다. Cis-AB형 혈액형이란?[설명] 여러분이 텔레비전이나 언론에서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부모의 혈액형에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 자식에게 유전되어 가정불화로 이어진 경우를 말한다. 물론 모든 유전자는 자식이라고 확인되는데 혈액형만 그런 경우다.
Cis-AB형 분포 지도라고 알려진 자료에 나오는 내용은 전남 서남부 해안 지역과 규슈 서북부 해안 지역에서 Cis-AB라는 특이한 혈액형이 발견되었다는 것으로, 그 일대 Cis-AB형 분포 지역을 보면 옛 전라남도 일대 및 경남서부해안 지역의 일부인 것이 이목을 끈다.
○ 게다가 3세기 유적인 전남 영동리 지역의 고분발굴 인골 23구의 유전자 DNA 또한 현대 일본인과 가장 가깝게 일치한다. 이러한 과학적 증거와 남해안 뱃길과 왜계 수장층 고분 발굴 분포 지역 또한 전부 다 일치한다. 게다가 이보다 수세기 전, 고인돌과 세형동검 밀집 분포도 또한 해상 무역로 지역과 일치한다. 동래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해상교류의 가교였던 ‘거제도 독로국 비정설’을 주장하는 것이다.
3. 다음은 거제도 고대국가를 ‘瀆盧國’을 “독로(dok-ro)로 읽을 것인지, 두로(dúLú)로 읽을 것인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는 우리나라에 한자어가 중국어 그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한국말을 적는데 빌려 쓴 한자어’ 즉, 차자어(借字語)와 더불어 ‘한자의 음훈(音訓)을 활용하여 한국어를 표기한’ 이두어(吏讀語)를 사용하였다. 약1800년 前, 서기 3세기 전후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변진에 독로라는 나라가 있는데 왜와 접하고 있다(弁辰瀆盧國 其瀆盧國與倭接)”는 중국말로 쓰여진 기록이다.
그런데 독로(瀆盧)라는 말은 현재 우리말로 읽은 것이다. 이 당시는 우리나라에 한자어가 널리 보급되기 이전의 시기였다.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에 이 당시의 역사 기록이 전해오지 못하는 이유가 되었다. 만일 우리나라 사람들이 독로(瀆盧)라고 표기했다면 음을 빌려 쓴 ’음차(音借)‘였을 것이다. 그런데 ’瀆盧‘ 한자어는 1800년 전 중국인 진수가 표기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중국말로 ’dú-Lú[두루(두로)]‘라고 읽고 있다. 우리나라 ’섬‘이라는 단어는 조선 초기에 처음 등장한 단어이고 고대에는 섬을 ’두루(빙 둘러 있다)‘라고 읽었다.
○ 앞서 말씀 드렸듯이 고대 이 땅의 선조들은 ‘瀆盧’를 두로(dú-Lú)로 읽었을 것이고 현재의 우리는 독로(dok-ro)라고 읽는다. 이 말은 어떤 사람에 따라, 누구의 기준에 따라서, 그 음운을 다르게 소리 내어 발음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1892년 9월에 기록한 거제군 동헌건물인 기성관(岐城館)의 객사(客舍) 상량문(上梁文)에서, 독로 고도(瀆盧故都) 또는 두로건국(豆盧建國)라는 문구가 발견되었다. 이 뜻은 ‘독로의 옛 나라’ ‘두로국이 건국된 곳‘이라는 뜻이다. 이는 100여년 전 우리 거제도 선인들께서는 ’두로(豆盧)‘라고 명확히 읽었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이로부터 개인적인 판단으론 음운 上 읽은 ’두로국(豆盧國)‘이라고 알리고 싶다. ’두로국(瀆盧國)‘ 한자어는 그대로 쓰되 발음은 두로국으로 쓰면 좋겠다.
◉ 참고로, <삼국지 위지 동이전> 마한의 54개 국가 중에 8개국이 독로국의 ‘盧’자를 쓰고 있다. ‘盧’자는 현재는 밥그릇 갈대 등으로 쓰이지만, 2000년 전에는 ‘盧’와 ‘羅’는 ‘땅’ 또는 ‘나라’라는 말로 쓰였다. 예를 들어, 羅자로 쓰인 예는 차차어 우리나라에서 나라(那羅)가 있고 거제도에 조라(助羅) 미조라(彌助羅) 가라(加羅)가 있다. 신라(新羅)=신로(新盧), 진한의 사로국(斯盧國)과 변한의 독로국(瀆盧國)이 있다. 또 고대의 盧자는 어간(단어)에 붙어 쓰는 어미이기도 했다. 도랑 ‘瀆’자 어간에 어미로 ‘盧’자를 붙여 썼다. 고로 독로의 훈독(뜻)은 ‘물길로 통하는 땅(나라)’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독로국(瀆盧國)과 말로국(末盧國), 가라산과 가야산
또한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구야국(김해)에서 바다건너 천여 리를 가면 대마국(對馬國, 대마도)과 그리고 다시 일대국(一大國, 일기도)에 이르고 또 바다를 건너 천여 리를 가면 큐슈의 말로국(末盧國, 現사가현 당진, 가라쓰)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독로국과 말로국이 해로상에 서로 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해에서 출발한 선박이 동래 수영만을 거쳐 대마도로 갔을까? 거제도를 거쳐 대마도로 갔을까?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된다. 참 그리고 큐슈의 말로국(末盧國), 즉 일본 사가현에 진시황의 불로초를 구하려 떠난 서복(서불)이 바다 건너 도착한 기념으로 세운 서복전시관이 있다. 그래서 ‘독로국과 말로국’은 불로초 서복 전설과도 큰 연관이 있다. 만일 독로국이 거제도라면 서복 서불이 거제도를 거쳐 일본 사가현으로 갔다는 전설이 유력해진다. 덧붙여 거제도엔 가라산이 있고 큐슈 가라쯔 후투오카 인근에는 가야산이 있다.
또한 일본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삼국지 위지 동이전 왜인조>에 큐슈의 소국, ‘말로국 이도국 왜노국 노국 불미국 투마국’ 등은 모두 연안의 항구도시를 의미하지 나라를 의미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독로국도 거제도 내, 대마도로 향하는 어느 항구도시를 지칭할 수도 있다.
특히 거제도는 늑도나 남해도와 같이 당시 활발한 해상 무역의 뱃길에 위치한 관계로 인해, 여러 문화가 용광로처럼 융해되어 다양성과 역동성이 넘쳐난 곳이었다. 그런고로 거제 독로국은 다른 변한 지역과 달리 고상가옥이나 문신, 해신(海神) 등의 개방적인 남방계 해양문화가 발달한 지역이었다.
4. 거제시 아주동(鵝洲洞)과 농소리 고분 출토 유물
경상남도 거제시에 속한 지명 아주동(鵝洲洞)은 신라 문무왕 17년(677년) 거제섬에 처음 상군(裳郡)을 설치 했을 때 3속현 중에 거로현(巨老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년) 때 아주현(鵝洲縣)으로 고치고, 거제군(巨濟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아주(鵝洲)의 성으로 신(申)·문(文)·갈(葛)·조(曺) 4성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거로(巨老)’는 큰 어른을 뜻한다. 이에 신라에 병합되기 전에는 큰 어른이 다스리는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아주(鵝洲)’는 ‘거위(오리)배가 수없이 몰려드는 물가(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앞서 출토된 유물과 함께 아주동은 약1500년 전에 수많은 해상의 무역선이 대마도(일본)로 오고가던 기착지 였음을 알게 해 준다. 이로부터 추정컨대 그 옛날 독로국(두로국)의 항구 도시(왕도) 후보 중에 하나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하건대,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뱃길에 위치한 아주동에는 언어, 문화, 종교 등의 다양한 종족이 더불어 소통하며 살아갔던 국제자유무역항으로 개방적이고 글로벌한 항구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 1996년 거제시 아주동 고분군 조사 발굴에서 발견된 ‘집자리 유적’은 기둥을 4개 세운 구조로 이루어진 마한 백제 지역 거주지와 동일하였다.
또한 출토 토기는 아라가야계 토기와 전남 마한백제계 토기 그리고 왜계 토기 3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적어도 3개 지역 이상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해안지역이자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으로 가는 뱃길에 위치한 아주동에는 언어, 문화, 종교 등의 다양한 종족이 더불어 소통하며 살아갔던 국제자유무역항으로 개방적인 항구였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동아시아 교역으로 묶어낸 열린 공간이었다. 다국적의 교역인들이 활동하며 거주했던 독특한 공간이었다. 독로국의 큰 어른이 정치적 중립성과 다양한 하이브리드 문화를 관리 통제했음을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가 만나 교류 통합하여 잡거(雜居)했던 교역장(交易場)이었다.
아주동 고분 발굴에는 지석묘가 17기, 삼국시대 횡구식 석실고분(앞트임 돌방무덤) 30기에 청동기 시대 무문토기와 석기, 삼국시대 유개고배, 단각고배, 대부완, 배, 부가구연대, 부장경호 등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다. 왜계 야요이 토기(수구식 토기)는 주로 붉은 빛을 지니고 대체로 무늬가 간결하며 형태나 모양이 다양하다. 또 전남 영산강 지역과 일본 본토에서 발굴되는 옹관묘 또한 이 지역에서 발굴된 것으로 볼 때 왜인 또한 거주하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또한 쇠뿔 모양 손잡이 토기와 구멍 뚫린 시루 모양 항아리는 마한 백제계 토기이다.
또한 거제시 아주동 지역 집자리에서 일본 고분시대(古墳時代, 3세기 후반부터 7세기 말까지의 약 400년) 토기인 하지키계(土師器, 일본의 고분시대인 4세기에 그 이전 시대의 야요이식 토기로부터 발달한 토기) 토기가 발견됐고 뒤이어 농소리 고분군과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 시기 일본과 거제도의 교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됐다.
○ 참고로 장목면 농소리 토고분은 시기가 5세기 말에서 6세기 중엽의 단독고분으로 왜계 수장층 무덤이다. 왜계 철제 갑옷과 석실 고분에 문주석과 지방돌이 붉게 칠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왜계 토기도 함께 출토 되었다. 그리고 농소리 고분뿐만 아니라, 출토되는 우리나라 왜계 고분은 전부 소형 단독 고분인지라, 아마도 무역 실무자나 무역인 또는 왜인 집단 거주지 수장인 것으로 보인다.
농소리 고분 석실 내외부에서 발견된 원통형 토기와 철모(철제 창)·삼지창의 경우 의례 흔적으로 보인다. 이는 일본 후쿠오카의 반즈카 고분(전남 나주 영동리 고분과 동일)에서 발견된 철도자(작은 쇠칼)과 같은 형태로 묻혀있었다.
널리 알려진 ‘아주동 고분 출토 두껑(碗) 토우’는 실생활용보다는 장례, ‘제의용 굽다리 전대 항아리(臺附直口壺) 두껑(碗)’이다. 두껑에는 무덤의 주인으로 알려진 토우를 부착해 장식했고 두껑에다 물방울 모양 원점(원권문)을 빙 둘러 찍어 영혼의 영원성을 기원함은 물론, 둥근 조각이 일컫는 천상계를 빙 둘러 붙였다. 그리고 두껑에 빙 둘러 새긴 거치문(햇살, 삼각집선문)은 새 깃털을 타고 하늘로 승천하거나 또는 부활을 염원한 것이다. 그리고 웃고 있는 토우는 고깔을 쓴 것으로 보아, 변한(가야)계 무덤의 주인이자 이 지방의 유력 수장층이었던 노인을 묘사한 것으로, 죽은 이의 영혼을 저승세계로 잘 인도하고, 죽음이 끝이 아니라 다른 삶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긴 것으로 해석된다. 토기는 두껑에 토우를 부착한 완(碗)은 희귀한 편이기도 하다. 아니 우리 거제도에선 최고의 보물이다. 그러나 경주박물관이나 경남경북 지역 토기를 전시한 박물관에 가보면 ‘굽다리 잔대(臺附直口壺)’ 완(碗, 두껑), 또는 굽다리 잔대 항아리 덮개(有蓋臺附直口壺)의 모습과 판박이 모양으로 일치한다. 두껑 아래 항아리나 접시와 함께 한 유물이라면 더욱 가치가 있었을 듯하다.
5. <마무리 결어>
이상의 여러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듯이, “변진에 독로라는 나라가 있는데 왜(일본)와 경계에 있다“(弁辰瀆盧國 其瀆盧國與倭接界)’는 <삼국지위지동이전> 기록에 부합하는 위치가 바로 거제도라는 사실을 알아봤다. 실제 거제도나 동래나 둘 다 독로국을 증명할 변진시대 유물이 출토된 바는 없다. 실제로 완벽히 증명할 어떠한 기록도 유물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로국이 거제도로 비정하는 것은 지명의 어원(語源) 뿐만 아니라, 그 당시 활발했던 해상무역의 뱃길과 지리적 위치, 그리고 발굴된 일본계 수장층의 고분이나 거주지, 또한 유전학적 증거의 일치로써, 이를 주장하는 것이다.
○ 또 독로(瀆盧)를 중국 서진의 중국어로 읽은 말 ‘두루(瀆盧)’가 ‘섬’을 뜻하는 단어였다. 물길이 통하는 ‘두루(두로)‘를 음차로 표기한 것이 ‘瀆盧’다. 또한 항해술이 발전하지 못했던 고대에는 쓰시마 난류와 편서풍을 타고 대마도로 건너 갈 수 있는 지역은 거제도뿐이었다. 이후 서기 1500년 경에 이르러서야 대다수 부산을 통해 대마도로 건너갈 수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런 연관성도 없는 ‘독로국’을 동래 지역이었다고 주장하는 부산 학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우리 거제도민은 이러한 점을 인식하여 ‘독로국(두로국)’이 거제도 역사였다는 점을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하겠다.
우리 거제도는 독로국이라는 역사시대가 시작된 이후 20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거제도 사람들은 저 멀리 바다를 보고 꿈을 꾸었다. 바다는 멈춤도 없고 막힘도 없다. 그리고 흘러서 짙푸른 바다빛으로 남았다. 바다는 언제나 거제도 사람들에게 세상을 나아가는 길이었다. 지금 우리의 옛 역사를 부산에 빼앗기며 살고 있다. 무슨 ’부산 천년사‘라는 이상한 역사서를 저술하고는 독로국을 마치 자기들 꺼라고 주장한다.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지금 현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여 독로국, 즉 두로국이 우리의 역사였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야겠다. 그 옛날 우리의 옛 독로국을 그리면서 세상을 넓게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