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사기 7:15-25 기드온이 그 꿈과 해몽하는 말을 듣고 경배하며 이스라엘 진영으로 돌아와 이르되 일어나라 여호와께서 미디안과 그 모든 진영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느니라 하고 16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어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17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만 보고 내가 하는 대로 하되 내가 그 진영 근처에 이르러서 내가 하는 대로 너희도 그리하여 18 나와 나를 따르는 자가 다 나팔을 불거든 너희도 모든 진영 주위에서 나팔을 불며 이르기를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 하라 하니라 19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백 명이 이경 초에 진영 근처에 이른즉 바로 파수꾼들을 교대한 때라 그들이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항아리를 부수니라 20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왼손에 횃불을 들고 오른손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이르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 하고 21 각기 제자리에 서서 그 진영을 에워싸매 그 온 진영의 군사들이 뛰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22 삼백 명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와께서 그 온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게 하시므로 적군이 도망하여 스레라의 벧 싯다에 이르고 또 답밧에 가까운 아벨므홀라의 경계에 이르렀으며 23 이스라엘 사람들은 납달리와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부터 부름을 받고 미디안을 추격하였더라 24 기드온이 사자들을 보내서 에브라임 온 산지로 두루 다니게 하여 이르기를 내려와서 미디안을 치고 그들을 앞질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라 하매 이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다 모여 벧 바라와 요단 강에 이르는 수로를 점령하고 25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
나팔과 항아리의 싸움
“미래는 숫자의 신이 지배할 것이다. 앞으로는 더 많은 숫자의 군대, 더 많은 숫자의 무기, 더 많은 숫자의 황금을 준비한 나라만이 살아남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피타고라스가 한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은 늘 숫자를 중요시해왔습니다. 과거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습니다. 숫자를 거의 절대시합니다. 앞으로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드온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런 숫자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엎으실 싸움을 준비해놓았습니다. 바로 미디안 연합군과의 전쟁입니다. 고대 전쟁만큼 숫자가 절대적인 싸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전쟁을 위해 모인 이스라엘의 군사들을 두 차례에 걸쳐서 돌려보냅니다. 처음에는 32,000 명의 군사 중 22,000 명을 돌려보내고 10,000 명으로 줄입니다. 그 다음은 10,000 명 중에 9,700 명을 돌려보내고 300 명의 숫자로 줄여서 십 수만 명의 미디안과 싸우라고 합니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이 많은 숫자로 싸워서 이기면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수로 이겼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 전쟁을 통해서 오고 오는 세대의 모든 주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전쟁은 수의 싸움과 무기의 싸움이 아님을 분명히 알려주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숫자가 많으냐, 얼마나 무기가 좋으냐, 얼마나 많이 배웠느냐, 얼마나 돈이 많은가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 싸움에 나와 함께하시느냐, 아니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내 힘과 숫자의 힘만 믿고 내 욕심을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냐의 문제입니다. 그 전쟁이 무엇을 위한 전쟁이며, 그 전쟁에 나가는 우리가 누구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우리는 기드온과 삼백 명의 이스라엘 군사를 들어서 싸우시는 하나님의 전쟁을 통해 이 시대와 우리의 가치관에 만연되어 있는 피타고라스의 이론, 숫자의 이론을 허물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숫자의 힘을 하나님처럼 믿어서는 안 됩니다. 학력을 무시할 수 없지만 학력을 믿어서도 안 되고, 돈이 필요하지만 돈의 힘을 믿어서도 안 되고, 눈에 보이는 힘이 분명히 영향력이 있지만, 그 힘을 믿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자기 삶에 개입되지 못하게 하는 미련한 선택과 결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과 그의 300 군사가 미디안과 싸우게 하는 방식을 보십시오. 싸우러 나가는 군인이 칼과 창이 아니라 나팔과 횃불과 항아리만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라는 구호만 들고 나갑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지금 전쟁 중입니다. 이들은 물 뜨러 가려고 모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빈 항아리는 왜 들고 갑니까? 밤에 꼭꼭 숨어서 게릴라전을 펼쳐도 목숨을 부지할까 말까인데 나팔을 불고 횃불을 들어서 자신들의 위치를 노출 시키고 있습니다. 죽으려고 작정한 말이 안 되는 전략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이렇게 싸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기드온과 그의 군사들은 순종합니다.
나팔과 횃불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극명한 상징입니다. 나팔은 분명한 진리의 선포를 뜻하고, 횃불은 말없이 진리를 비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둘 다 진리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숫자가 아니라 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진리의 터에 세워진 집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진리가 내 삶 속에 선포되지 않고 횃불로 비춰지지 않으면 헤맬 수밖에 없습니다. 진리를 제쳐놓고 숫자의 놀음만 하고 있다면 그 숫자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인생이 길이 아닌 곳으로 가고 있고 진리가 아닌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도 돈만 많으면 안심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숫자에만 신경을 써서 죄를 설교하지 않고 진리를 선포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비위만 맞추고 있다면 그게 정당할까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다 괜찮은 것입니까?
하나님은 기드온과 300 군사들이 진리를 상징하는 나팔과 횃불을 들고 적진에 들어갔을 때 칼 한번 휘두르지 않았는데 적군들이 서로 죽이고 죽는 놀라운 일들을 일으켜주십니다. 숫자를 의지하고 싸웠다면 도무지 맛보지 못할 기적입니다. 하나님은 이 싸움을 통해 기드온과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전쟁이 무엇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고 친히 싸워주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불러 가나안에 심고 자기 백성으로 살게 하실 때는 하나님의 말씀, 그 진리가 이끌어가는 삶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이방 가운데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은 이 부르심의 소망을 잊어버렸습니다. 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이방 나라의 침입을 받고 압제 속에서 고통을 당합니까? 보이는 숫자의 힘을 하나님과 그의 진리보다 더 의지하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미디안의 압제에서 구원하실 때 숫자의 힘이 아니라 진리를 상징하는 나팔과 횃불로 싸우게 하십니다. 진리의 나팔을 불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횃불로 비추듯이 비추고 살면 언제 어디서든, 누구 앞에서든,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지시고 나보다 앞서서 적들과 싸워주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싸움의 구호가 있습니다.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입니다. 미디안 연합군의 군사들을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뜨린 것은 기드온의 군사들이 지른 목소리와 항아리를 깨는 소리가 유달리 컸기 때문이 아닙니다. 십 수만 명이 모인 들판에 고작 삼백 명이 내는 소리가 커봐야 얼마나 크겠습니까? 소리 때문이 아니라 그 작은 소리를 통해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공포와 혼란으로 흔드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일반적인 상식과 분별력과 안정감으로 붙들어 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늘 주시던 일상의 분별력을 잠시 거두어 가시면 사람은 그 즉시 온갖 두려움과 불안함과 공포와 혼란으로 지옥에 빠지고 맙니다. 그 결과 미디안 군사들은 서로를 적군으로 인식하면서 서로 칼로 죽이는 극도의 혼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고작 300명이 “여호와를 위하라. 기드온을 위하라!”고 소리쳤는데, 거기 모인 십 수만 명의 미디안 군사들이 미친 듯이 이상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드온과 300명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나팔을 불고 항아리를 깨뜨려 횃불을 들고 비추는 것은 이제부터 우리가 말하지 않았던 진리를 선포하고 지금까지 우리가 들지 않았던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고 살겠다는 믿음의 결단과 믿음의 선포와도 같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여호와를 위하고 기드온을 위하라는 소리와 함께 진리의 나팔을 불었고 진리의 횃불을 높이 들었습니다. 이 소리에 하나님이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 작은 결단과 헌신을 기뻐하시고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을 우리 눈앞에서 목격하게 하십니다.
이 싸움의 마지막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면 더욱 확실해집니다. 24-25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은 도망치는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잡아 하나는 바위에서 죽이고, 하나는 포도주 틀에서 죽입니다. 기드온에서 포도주 하면 생각하는 것 없습니까? 맞습니다. 바로 미디안의 눈을 피해 타작마당이 아닌 포도주 틀에서 밀을 타작하였던 기드온의 못 나고도 소심한 모습이 생각나죠. 미디안 때문에 두려워 떨고 있는, 주의 백성이 가져야 할 마땅한 정체성을 상실한 그와 이스라엘의 모습을 대변하는 장소와 상황이 바로 포도주 틀 안에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 전쟁을 통하여 기드온과 이스라엘이 그 포도주 틀에서 미디안의 한 방백을 죽이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포도주 틀은 숨어서 밀 이삭을 까는 정체성을 잃어버린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용사로 회복된 기드온과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석은 어떤 장소입니까? 기드온이 여호와의 사자를 시험하던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그 곳에서 불이 나오도록 해서 우상숭배로 가득한 이스라엘의 제사를 회복시켰습니다. 반석에서 미디안의 또 다른 한 방백을 처단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참으로 중요한 신학적 상징이 있는 두 장소, 포도주 틀과 반석에서 미디안을 처리하게 함으로 그들이 제사장 나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은 세상의 기세에 눌려 자신을 보리떡이라고 비하하며 숨어서 밀을 타작하던 겁쟁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큰 용사로 하나님의 전쟁에 주인공들로 쓰임 받는 놀라운 회복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 아름다운 회복이 일어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욕심을 위해 숫자를 불리는 싸움을 걸어놓고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떼를 쓰지 않고, 신자 된 본질과 교회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일에 온 마음을 쓰고 헌신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싸움을 하나님의 전쟁으로 삼으시고 적군의 칼이 여호와와 우리를 위한 칼로 쓰이는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기적의 주인공들, 이 놀라운 승리의 주인공들이 되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답게 사는 정체성의 회복, 교회가 교회답게 회복되는 일을 위해 끊임없이 주의 은혜를 구하여 갱신되는 축복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박홍섭목사 / 한우리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