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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엽 목사님 말씀책의 내용과 100% 동일하게 옮겨 적었습니다. 마음을 다해 정독 하신다면
말씀의 주인이신 성영님께서 반드시 영의 귀와 눈을 열어 듣고 보게 하실 것입니다. 샬롬!
제 16 장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0.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
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16.가인이 여호와의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더니 17. 아내와 동침하니 그가 잉태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18.에녹이 이랏을 낳았고
이랏은 므후야엘을 낳았고 므후야엘은 므드사엘을 낳았고 므드사엘은 라멕을 낳았더라 19.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 20.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하여 육축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21. 그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22.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동철로 각양 날카로운 기계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이었더라 23.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25. 아담이 다시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의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26.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4:10-26)
창세기 4장에 들어와 아벨과 가인 이 두 사람을 통해 우리가 보게된 것은 인간에게 난 두 길입니다.
한 사람은 하늘의 생명 길이었고 또 한 사람은 죽음을 향하여 가는 세상 길임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 다 환경은 같았지만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서로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맞히었으므로
영생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자기에게 맞추었으므로 하나님과 단절되어 사망으로 들어
갔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사람을 보면서 우리 각자 자기를 보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세상은 너무나 급속도로 변하고 있고, 점점 더 급속하게 변화될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속엔 세상으로 꽉 들어차다 못해 철철 흘러넘치는 때가 되었습니다. 그처럼 인간이 돌이킬 수 없는
세속적인 것으로 삶의 뜻이 되고, 목적이 되어 그 세상을 더욱 굳게 세워서 견고케 하려는 데
열심을 내는 것으로 똘똘 뭉쳐가고 있습니다. 또한, 함께 발맞춰 서로서로 힘을 모으고 뜻을 맞추고
세상에서 행복하고 즐겁게 살자고 하는 온갖 이름들을 가진 세속적인 모임들도 얼마나 많이 생겨
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만큼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가기가 아주 어려운 때가 되었다는 말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 때문에 오셨는데 안식하기를 목말라 헤매는 영혼을 찾아 오셨는데 세상 문명
발전은 윤택함과 함께 생활에 편리함을 가져다 주면서 한편으로는 사람들의 마음을 세상으로 꽁꽁
묶어놓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영혼이 가진 죄의식과 죽음의 두려움이 마비되고 안식을 찾는
영의 감각도 마비가 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영혼의 구원을 얻는 것이 아주 어려운 때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16세기 말경에 영국의 기독교가 성경적이지 않은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모여 그 본토에서 떠나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 죽기도 했고 그 고생 끝에 정착한 곳이 미국
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청교도라고 불렀어요. 기독교를 토대로 세워진 독립국가로 이후에 큰 성장을
이루어서 전 세계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복음의 국가요 복음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미국이 세상 문화들로 얼마나 복음을 대적하고 깊이 타락해 버렸는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오
히려 세속적인 문화를 세계 곳곳으로 흘러들어 가게 하는 곳도 바로 미국이에요. 미국의 3대 민주
주의 원칙이 첫째, 종족 차별하지 않는다. 즉 세계와 우호적 관계가 되어 서로 돕고 잘살자 하는
것이고 둘째, 종교 자유가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까 온갖 문화들과 종교들이 생겨났습
니다. 그래서 말씀드린 것처럼 복음이 영의 생명을 살리는 영적인 것으로 들어갈 수 없는 때가 돼
버렸습니다. 그리고 여자 남자 성차별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성적인 문란과 타락에 대해서
말하지 않아도 잘 알잖습니까? 얼마나 문란하고 음란하고 타락한 나라가 되었는지 이제는 극에
달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대통령이 진화론을 교과서에 넣어서 아이들에게 그것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러니
인간 조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것이 아니고 영이 없는 짐승이라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으니 여러분이 머리 굴려서 생각해 보십시오. 짐승의 영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짐승의 영이 누구
예요? 사단의 영들이라고 했잖아요? 인간이 하나님께 지음을 받은 것을 거부하고 진화론을 받아들인
그것은 바로 사단에게서 났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명은 끝없이 발달해 가는
데도 점점 짐승처럼 되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성적인 문란과 타락 온갖 범죄와 마약이 판을 치고
나체족이니 동성애자니 이렇게 인간 조상이 짐승이라고 해 놓으니까 정말 인간이 짐승처럼 돼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아주 악한 때가 되었습니다. 점점 더 극에 달해
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미국뿐입니까? 이것이 사단의 나라가 돼 버린 온 세상의 형편
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에 대하여 자기
영혼의 문제에 대하여 깨달아 볼 감각이 없게 돼 버렸습니다. 알아들어야 할 영의 귀가 없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런 세상 물질문명과 문화, 그 같은 것들을 삶의 가치로 여기고
마음이 거기에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시는 그런 세속적인
것들에 목마름을 가지고 마음이 그것을 좇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갈 수 없는 가인입니다.
가인의 믿음, 하늘의 믿음이 아니라 땅의 믿음입니다. 가인이 하나님 계신 것을 알았고 믿었지만
하나님께 들어가길 원했지만 땅의 믿음이었기 때문에 하늘로 들어 갈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믿는다는 사람들치고 천국 들어가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의 것
육의 것을 위한 믿음이면 하늘이 무너져도 천국 들어가지 못합니다. 아벨이 양치는 자였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맞힌 삶이었음을 보여준 것이요 그러므로 제물을 드릴 때도 예수님을 상징한 어린양
으로 피 흘리고 생명을 취하여, 즉 하늘의 것을 내드렸으므로 하나님께 들어가는 자가 되었고
가인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자기에게 맞추었으므로 하나님께 나올 때도 자기의 좋은 것 자기의
노력한 최고의 것을 가지고 나왔으나 하늘에 들어갈 수 없었다는 것 분명히 보았지 않습니까?
오늘날 세상은 인간이 존중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해서 종교의 자유가
있습니다. 그래서 국가가 종교 탄압을 한다거나 핍박을 해서 믿지 못하는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믿음이 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핍박도 아니고 교회생활에 열심내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가인처럼 땅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가인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것
같이 탐스러워 보인 그것을 위해 거기에서 만족을 얻으려 했던 육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인과 똑같이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어보려고 좇아가고, 좇아가다가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말씀의 뜻대로 믿음이 돼야 할 그 믿음도 세상 것을 좇아가기 위해 믿는
것이 되었고 그것에 맞는 메시지가 들리기를 원한 것입니다. 세상을 함께 따라가려는 것에 믿음이
되었습니다. 세상에 맞추어 살려는 것에다 믿음을 두었으니 하나님과는 어둠의 벽이 세워져
있습니다. 바로 죄로 가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만일에 자기의 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보기 흉측해서 보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사람들로 하여금 세상의 매력을 느끼게 하는 것들로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잡아 끌어
들이고, 당기고 있는데 오늘날 교회들도 하늘의 것을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세상
것으로 바꾸어 말해줌으로써 사람들 마음이 여전히 세상에 머물고 세상을 따라가도록 하고 있습
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아십시오. 교회가 믿음을 말하고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그 속에는 또 세상을
포장하여 그것을 좇아가도록 노골적이지 않게 은근히 마음을 부추겨 넣어주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명예심과 명성과 물질 욕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교회가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예수님 믿어 세상에서 잘되고 그 잘된 것으로 예수님을 전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과는 상관없이 현세적인 육의 것들이 잘된 것 가지고 '봐라! 내가 예수 믿고 이렇게
잘되지 않았느냐? 나에게 복 주신 분 보고 예수님 계신 것 믿을 수 있지 않느냐? 그러니 너희도
예수 믿어라'하는 쪽으로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 되었고 세상적인 것이 잘돼야 그것이 믿음의 복을
받은 것인 냥 착각에 빠졌습니다. 교회가 오히려 망할 길로 이끌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 부자 되기를 애쓰는 자, 물질을 붙들기 원하는 자들에게 오히려 분명한 예를
보이셨습니다. 영생 얻기 위해 나온 부자 청년에게 '네가 온전하려면 먼저 네 재물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을 것이다, 네가 온전하려면 네가 영생 얻기 원한다면 네가
온전해야 할 텐데' 온전한 것이 뭡니까? 자기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인임을 깨닫는 것이 온전한
것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온전한 데로 나갈 수가 있습니다.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면 온전할 수
없습니다. 열 번 죽었다 깨어난다 해도 온전해질 수 없습니다. 양심으로 온전하면 온전한 것입니까?
세상 행위로 완벽하다고 온전합니까?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죄 범하고 하나님을 떠나 자기가
주인 되어 살아온 죄인임을 깨달아야만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것이 영생에 들어가는 첫걸음
입니다. 그래서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
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깨닫게 하시는 보화, 예수님이 영생을 주시는 분임을 보게 되는 보화
그 모든 것을 깨닫게 하실 것이라 하신 것으로 인간의 물질 욕심은 하늘의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마19:16-30).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세속적인 것들로 자기 삶에 포장을 잘 씌워서 예수님을 전하
려고 하기 때문에 믿음의 표적이 잘못 되었습니다. 세상 것 잘된 것으로 복음전하는 것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열심히 빌고 기도하면 복 준다 좋은 일하면 집안이 잘된다 또 좋은 데 간다
하는 세상이 말하는 그런 샤머니즘적인 땅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붙들고 세상에 안주하고
그것을 목말라 하라고 가르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같이 가인의 길, 즉 지옥 길로 나간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값을 치르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시려는 뜻을 가지셨다는 것을
끊임없이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창조 때도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신약시대 믿는 자들에게도 끊임
없이 말씀하여 이르신 것은 하늘의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구하고 찾고 사모하고 바라는 것은 땅이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주시는 하늘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육체로 오시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가를
듣고 알았을 때는 이런 세상의 물질 문명의 것들을 붙들려고 좇아가던 것을 감각적이고 화려한
것들을 좋아하여 좇아가던 것을 다 깨끗이 내려놓아 버리고 포기해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인지 믿음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를 성경 전체가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한 신앙의 주관을
가지고 선을 확실히 긋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이 시대는 그 결단이 너무나 요구됩니다.
결단 없으면 예수님 바로 믿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증거는 아담이 자기 실체를 본 것처럼 자기 실체를 봐야 하고 가인을 통해 자신이
어떤 처지에 있는지 눈을 열어 봐야 하고 율법을 통해 영 죽을 죄인인 것을 봐야 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죄 범하고 떠난 영벌에 들어갈 죄인인 자기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주셔서 영생 얻게 되었다는 이 구원의 기쁨, 예수님 때문에 사망에서 건지신 그 행복,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신 그 기쁨, 천국을 소유한 그 기쁨 때문에 간증하고 복음을 전하는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믿음은 시대와 상관없습니다. 환경과도 상관없습니다. 물질
과도 상관없습니다. 진짜 믿음은 세상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창조 때나 이스라엘 역사
때나 오늘날에나 믿음은 세상을 초월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허전하고 괴로운 마음 좀 위로가 될까 해서 몸에 질병을 치료받고
싶어서 뭔가 의지하고 싶어서 집안이 잘되고 싶어서 자식이 잘되고 가정이 편안하고 무엇이든지 잘
풀리는 복을 받고 싶어서 예수님을 믿겠다고 나오는 이유들이 돼 있습니다. 또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이 뭡니까? 세상에 지치고 위로가 필요한 자기에게 삶의 소망을 좀 심어주고 힘내서 살아가도록
활력소가 될 말이나 해 주는 곳이 교회인 줄 알고 있습니다.(이것이 교회가 할 역할인 것처럼 비친
연고로), 살려다 보니 힘든 일이 많아서 위로 좀 얻고 의지가 될까 하여 교회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 제게 와서 말씀을 들으면 여기 예수님의 교회가 말입니다. 무슨 목사가 그런 쪽에 힘이
되는 말은 전혀 안하고 만날 죄 소리나 하고 영이 어떻고 생명이 어떻고 알아듣지 못할 소리나 하는
것이냐 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아십시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오는 곳
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바라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를 듣고 그 말씀
대로 살고자 함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적인 위로의 말이나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믿는다는
사람들이 만일에 하나님에게서 여전히 그런 밑빠진 독에 물 붓는 것과 같은 위로나 원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직 하나님과 죄의 관계에 있습니다. 종교인일 뿐입니다. 만일에 인간적 위로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면 다 샤머니즘이요 종교인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도 그런 인간적인 위로를
위해 오신 것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는 이 단 위에서만큼은 사람의 위로나 하면서 비위 맞추는
인간의 말을 전함으로써 죄짓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음 되기 원했다면 예수님을 믿는 일과 믿음에 대해서 지금까지 듣게 된 말씀으로
깨달아 능력을 갖추어 나감으로써 바라던 세상을 내려놓게 될 것이요, 자기가 그렇게 목마름을 가진
인간적인 것들이 다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깨달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는 동안에 고난이 있는 것도
믿음 안에서는 다 뜻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 넉넉히 이기며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게 될 것
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참으로 믿기 원한 것이면 영혼의 것을 위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돼야
할 것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을 믿으러 나올 때 어떤 모양으로 나왔든지 이제 모두 하나님의 뜻대로
믿는 그 믿음으로 모아져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 들어갈 수 없게 됐음을 알고 낙심하여 분을 품고 안색이 변하여
있는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이미 자기를 돌아볼 지각이 없는 가인이, 자기와 제물을 받지 않으신
하나님과 또 아벨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분을 품게 되니 즉시 사단이 그의 마음에 충동질하기를
'봐라, 네가 무엇을 잘못했느냐? 너 잘못한 것 없잖느냐? 너는 정성을 다했고 최선을 다했는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실 이유가 없는데 받지 않으신 것은 하나님이 너는 미워하고 아벨만 사랑한다는
증거지 않느냐? 그러니 그것이 하나님이겠느냐? 네가 아벨을 죽이면 아벨이 없어지면 하나님이
아벨 대신에 너를 들이실 것이니 아벨을 죽여라, 아벨을 죽이는 것이 네가 사는 길이다'하고 속삭인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와서 여자를 유혹하던 사단은 이렇게 또 다시 가인을 찾아와 가인을 속이며
살인하라고 충동질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네 마음에 품고 있는 죄의 소욕을 다스
려라, 사단이 죄짓도록 네게 충동질하고 있으니 너는 죄를 단호히 다스리라'하셨습니다. 가인이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가인에게 충고하셨지만 가인은
결국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가인의 짧고 어두운 생각은 사단의 말처럼 아벨이 없으면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 주시리라 생각하고 또한 자기가 아벨을 죽여도 하나님이 모르실 거로 생각하고 아벨을
쳐 죽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어두운 약점이 뭐냐 '하나님이 설마 이런 것까지 아시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 폐부까지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전지를 자기 육의 눈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이 어둠으로 들어간 가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구원은 한 번이라 했습니까? 두 번이라 했습니까? 구원은 한 번입니다. 구원을
잃으면 두 번 다시없습니다. 가인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끝났습니다. 사단이 가인의 귀에 하나님께로
들어가게 된다고 속삭인 말처럼 하나님이 가인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 아벨의 피의 호소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또다시 가인 앞에 심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가인의 영혼은 죄악의 두려움이
진을 쳤고 그 두려움 속에 갇힌 고통 하는 영이 돼 버렸습니다. 그에게서 터져 나오는 호소가 무엇
입니까? 13절에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입니다. 이것이 영의 호소입니다. 죄로
욱여쌈을 당한 영의 호소입니다. 이때의 사람은 영의 뛰어난 감각을 가졌습니다.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영이 겪는 고통을 그대로 호소했습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 하나가 잘려도 그 아픈 것을 온몸으로 느끼잖습니까? 손가락 잘렸으니 손가락만
아프면 좋을 텐데 그 아픔이 신경 세포들을 통해 온몸으로 번져 들어오면서 온몸이 느끼는 겁니다.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저는 이것 또한 경험으로 압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아픔을 온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바로 그 같은 고통, 영혼에 가진 두려움의 호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인간 영의 고통이요, 호소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내 영혼이 겪는 고통이요 호소였구나'를
알아듣는 것이 돼야 합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예수님을 왜 믿습니까? 이런 자기의 영적
상태를 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앎으로써 믿는 믿음인가? 묻는 겁니다. 자신을 한번 들여다보십
시오. 자기가 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건지 자기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날 사람들이 영이 가진 죄의식과 형벌에 처했다는 두려움의 고통이 마비되어 감각이 없다시피
되었지만 그래도 나타나는 것은 죄지으면 벌 받는다는 의식입니다. 죄짓고 나면 양심에서 '벌 받지
않을까?'하는 죄책감과 두려움이 올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말하잖습니까? 힘든
고통을 만나면 '내가 무슨 죄를 많이 지었기에!....,'하고 탄식을 하잖습니까? 이것이 바로 죄를
지으면 벌 받을 것이라는 그 죄의식과 죄책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자기가 구원받은 그 은혜가 어떤 것인지, 감각 없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죄라고 말씀
하시는 것들을 다스리지 않고 그 죄의 소원을 따라 죄를 짓고 사는 것이면 그것은 그가 구원이
없거나 또는 그와 동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의 빛이 비취니 죄를 지으면 벌이 따른다는 것을 양심이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영님이 양심에 말씀의 빛을 비추어 죄를 지적하심이 있을 때는 그 죄에서 속속히 나와야
성장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요 또한 그 인도하심에 속속히 순종할 때에 그 영이 비로소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것이 죄인지 전혀 몰랐던 것 죄로 여겨지지 않았던
것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 보니 먹는 것 입는 것 보는 것 쓰는 것 이런 등등이
하나님과 원수 된 세상이요 육체의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영님
께서 그런 죄의 것들에 대한 감각을 주시고 빛을 주실 때에 그 모든 것들에서 깨끗이 하여야 구원
안에 들어가는 것이요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신 자는
죄가 싫어집니다. 점차 죄가 싫은 것으로 드러납니다. 죄가 얼마나 더럽고 추한 것인지 누가 열심히
안 가르쳐 줘도 구원받은 영이면 그 영에 오신 성영님께서 자기 양심에다 열심히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감각이 분명하게 있는 것입니다. 이때는 죄지으라고 떠다밀어도 죄짓지 않습니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죄에 민감하여 짓지 않게 됩니다.
14절에 가인이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했습니다. 제사의 실패로 하나님과 관계가 깨지니 하나님께 들어갈 수 없게 되었고 의로운 자를
살인하여 죄악을 행하였으므로 사단을 자기 안으로 받아들인 전적 타락, 전적 부패한 자가 되어
스스로 하나님 존전에 한순간도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쫓아내시온즉 하는 것은 하나님이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가인 스스로 한순간도 하나님 앞애 있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잠시라도 지체할 수 없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는 것처럼 떠나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이같이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가인과 그 후손, 인류)의 영혼은 죄와 죽음이
들어와 하나님에 대하여 전적으로 죽은 자가 되었고 하나님과 원수 관계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깨져버렸다고 했잖습니까? 이것이 인간의 영, 혼, 육이 겪는
삼중의 고통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인을 찾아오셔서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지만, 형제를 죽이는
죄를 범하여 남의 의로운 생명까지 취한 죄악을 행하였으므로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이 되있습니다.
그러니까 영과 혼과 육, 전인이 죄(사단)와 하나, 한 몸이 돼 버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서
떠나 사는 인간의 처참한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백 퍼센트 죄라고 말씀드렸잖습니까? 인간은
백 퍼센트 죄인입니다.
14절 하반 절에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했어요. 이제 하나님 앞에서 쫓겨난
가인과 그 후손, 모든 인류는 영이 가진 죄와 죽음에 의해 누가 나를 죽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과
공포감으로 마음이 쫓기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불안과 두려움에 쫓기는 마음이 되었습니다.
광야를 홀로 유리하는 자같이 되었습니다. 빛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캄캄함 속에 혼자 헤매는 것과
같은, 길 잃은 유리방황하는 자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등진 인간은 이제 영도 혼도
육도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단에게 온전히 구속된 상태,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가인의 길로 나간 인간의 전적 타락이요, 전적 무능이요, 그러므로
이제 사단의 속성으로 길들고 자라 탐욕의 노예가 되고 음욕의 노예가 되고 교만의 노예가 되어
자아도취에 빠지고 불의하고 더럽고 가증하고 이기적이고 물고 뜯고 죽이는 처참한 어둠과 죽음의
지옥을 가진 영혼이 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세상적인 것들로 육체의 것들로 만족을 얻으므로
그 영의 고통을 마비시키고자 주력해 왔기 때문에 오늘날은 감각이 없다시피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말씀드리는 것은 자신이 처한 그 같은 영혼의 상태를 추상적으로만 안다고 하지 말고
죄인이라고 하니까 '아, 선악과 따 먹고 죄짓고 하나님을 떠난 삶을 살았다는 것 수없이 듣는
말이니 그런가 보다.....,'하는 이런 귀신들이 실컷 비웃을 추상적인 것으로 알고 있는 그래서
죄인인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성영님께 의지해서 내가 죄인인 것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가인과 가인의 후예들이 무엇인가를 통해서 자기를 즐겁게 하여 평안해져 보려고 두려움
에서 벗어나 보려고, 자신들을 즐겁고 기쁘게 해 줄 것들을 만들고 개발하고, 개발하고 만들고
끊임없이 개발하는 것에 전력투구한 것입니다. 20, 22절에 그것을 말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인간
문화들이 생겨나고 이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일, 곧 세상을 세우기 위하여 끝없이 발명하므로
세속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이렇게 세속 문화를 발달시키고 개발의 노력을 쉼 없이 하는
것은 인간 속애 있는 두려움과 불안과 죄의식으로 쫓기는 것을 마비케 하는데 큰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현대 문화들은 현대인들의 영혼에 가진 두려움의 감각을 마비시키는 것에 역할을 잘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나와서도 자기 기분에 맞는 말하기 원하고 교회가 기분 전환
하는 곳인 줄 알고 코미디 프로가 되기 원하고 교양강좌 프로가 되기 원하는 겁니다. 도덕 좀
가르쳐 주기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에게도 교회가 세상 지식을 넣어주는 공부에 유익을
주는 곳이냐 안 주는 곳이냐 유익이 되는 교회가 좋다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가 세상
지식을 가르치는 곳입니까? 안 그래도 세상 지식은 인간 속에 너무 높아서 그 지식을 좇는 데 전력
투구하여 쌓은 바벨탑이 되었고 자기를 높이고 그 지식 가지고 하나님 말씀 대적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데 하나님 대적하는 바벨탑을 교회에게 원한다는 것이 가당키나 하는 것입니까? 교회가
세상 지식이나 쌓게 하는 곳인 줄 아는 것이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할 소리인가 말입니다. 귀신의
가르침을 원하는 귀신의 족속들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자신을 안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시설이 갖춰져 있느냐? 안 갖춰져 있느냐?
교회가 어느 정도 문화 수준을 갖춘 시설이 돼 있어야지 어떻게 내가 초라한 교회를 나가느냐?
적어도 내 수준에는 맞아야지...,' 이런 수치스런 말들로 하나님 앞에 죄를 쌓고 있습니다. 외부
적인 것들 교회 시설, 교회 크기, 교인 수가 많은가 적은가 이런 겉치레에 치우친 오만한 소리들을
합니다. 교회가 물질 만능이 되기 원하고 세속적이기 원하는 죄의 속성으로 넘쳐나고 오늘날 목사
들도 그걸 맞춰주는 설교하느라 시설을 갖춰주느라 분투하고 있습니다. 아주 꼴값들을 합니다.
자기가 벌거벗은 자로 하나님 앞에 설까 두려워하여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는 영적 눈을 열어달라고
기도하는 겸손을 가지고 자신을 봄으로써 날마다 자기를 성찰하고 성영님 의지하여 믿음을 성장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 믿음의 도리이겠거늘 그런데 인간 자기가 어떤 처지에 처해있는지 영혼의 고통을
세속적인 것으로 마비시키고 지금 자신이 가인인 줄도 모르고 잘난척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분수도 모르는 교만한 어리석음으로 믿는다 말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한번 맞서 보자고
하는 사단의 속성을 가진 죄의 태도들로 믿는다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정말 말씀 전하는 것이 사실 아주 힘듭니다. 시대를 맞추는, 사람에게 맞추는 말씀을
말하지 않기 때문에 저의 모든 말씀이 사람들에게는 부딪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그래서
제가 말씀 전하기가 마음이 많이 힘들고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맞출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고자 하는, 살아야 하는 영혼들을 살려내야 하므로, 그것이 성영님께서
주신 저의 일이기에 저는 하나님께 맞출 수밖에는 없습니다. 마음이 힘들지라도 사람에게 맞출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자기 영혼이 처한 분수도 모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도 재미있는 설교를 찾고
코미디 위주의 설교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기분 즐겁고 재미
위주로 듣기 원한다면 교회까지 올 것 뭐 있습니까? TV 앞에 앉아서 코미디 프로나 보면 되고 그런
설교들 들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뜻을 말할 때 인간에게 맞출 수는 없고 또 자기는
말씀과 코드가 맞지 않으니 TV가 제일 맞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말씀을 듣고 자기가 누구인가, 자기
실체 자기 정체를 자기 영혼으로 알고 하나님의 뜻을 가진 진짜 믿음이 되어야지 어디 교회 와서
세상을 찾습니까?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 가지고 바른 믿음 되게 해주려고 분별시켜 주려고 저도
말씀을 전했으면 그 태도가 되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목사가 너무 냉정한 것 같다,
사랑이 없는 것 같다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두 가지, 즉 구원과 세상을 충족시켜 주기 위한 것이면 그 교회는 가인이요 백
퍼센트 지옥자식들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을 주는 곳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맞출 수
없습니다. 정말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이 누구인지 가인의 길에서 살아온 백 퍼센트
죄 덩어리로 지옥 가는 존재였음을 깨닫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세워 놓은 하나님,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찾지 말고 가인에게 처한 영적 상태가 곧 자기에게 처한 영적 상태인 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다음 14절에 가인이,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을 떠나 가면 하나님이 나를
보호해 줄 수 없으니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여러분!
이것은 육체가 죽는, 목숨이 죽는 죽음을 말하는 것 아닙니다. 육체의 목숨이 죽는 것 때문에 제가
여기서 이 말씀 전할 필요는 추호도 없습니다. 영혼이 저주받았으므로 불못에 던져져 영원히 고통
받게 되었다는 그 영혼의 고통입니다.
11절에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절에 네가 밭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다시는 하나님께 돌아올 길이 없게 되었다는 의미)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13절에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14절에 주께서 오늘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한 이것은, 이제 가인의 영과 혼과 육이 온전히 저주받았으므로
육체 안에 있을 때도, 육체를 떠났어도 영원히 고통하게 되었다는 영혼이 겪어야 할 고통을 말하는
것이요 죽게 된 그 영혼의 호소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인했지만 죽고 싶지 않습니다. 살고
싶습니다. 죽음이 두렵습니다.'하고 살기를 원하는, 두려움에서 놓이기 원하는 그 영의 욕구, 영의
고통을 가인이 호소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의 그 영의 호소를 하나님이 들으셨습니다.
그러니까 15절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않다 가인을 죽인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만나는 누구에게든지 죽임을 면케 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사랑의 하나님이십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이 사단에게 속하는 것을 원치 않으셨고 죽음으로 넣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살기를 원하는 그 영혼의 고통 속에다 이제 살기를 원하는
영혼은 살려주시겠다는 구원의 뜻을 넣으셨습니다.
살리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므로 죄를 지었어도 살인자라 할지라도 그가 죄지었음을 회개하고 그
영혼이 죄 때문에 고통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바라고 살기 원하면 살려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사랑의
뜻을 넣어 놓으셨습니다. 살고 싶다는 영의 소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는
구원의 표를 주시면서 이제 사단을 따라 나간 모든 인간이 죽음을 원치 않고 살기를 원하면, 형벌
에서 구원받기 원하여 하나님께 나와 회개하면 살려주신다는 하나님의 의지를 구원의 표를 주시는
것으로 보이셨습니다. 사단의 길로 악의 길로 나간 인간에게 기회와 소망을 주시는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영이 살기를 원하여 호소하는 영의 소리를 들으셔야
합니다. 여러분! '무조건 나 예수 믿습니다'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자신이 가인과 같은 처지에 처한
영혼인 것을 알고, 그래서 살기를 원하는 그 호소를 하나님이 들으셔야 구원을 주시는 길로 인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요6:44)'인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의 표는 무엇을 상징합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신 관계가 되었으면 이제 사단이 절대로 사망으로 끌고 갈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사망이 끝났
습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생명인 것입니다. 죄 덩어리로 살아가던 우리로 하여금 의로 딱 옷 입혀
버렸으니 죄가 안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이 끌고 갈 수가 없는 거예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입니다.
그다음 25,26에 하나님께서 죽은 아벨 대신 아담과 하와에게 셋이란 아들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여자의 후손이, 사단의 머리를 깰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어코 오셔야 하므로 반드시 그 신앙이 이어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신앙이
존속되기 위해서 그 신앙의 사람, 산 자를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씨'라고 합니다. 하나님
에게서 온, 신앙이 산 자요, 산 자가 '씨'입니다. 신앙의 씨 하늘의 씨 생명의 씨 하나님이 보시는
진짜 신앙의 씨다, 신앙 믿음 산 자가 씨라는 말입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호와여!'하고 불렀다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이름이 가진
뜻 다른 씨, 곧 셋이 태어난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기억하시고 여자의 후손을 보내실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알았다는 뜻입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을 아벨이 죽었
다고 잊으신 것이 아니고 아벨 대신 다른 씨를 주셔서 언약을 확실히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그때의 사람들이 알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선악과 먹은 아담에게서 가인과 아벨 두 아들이 태어났고 두 아들을 통해 선의 길과 악의 길
두 길을 보게 되었고, 창세기 4장에서는 악의 길로 나간 가인의 그 후예들의 족보가 기록된 것이고,
성경에 족보를 기록한 것은 이 족보는 인간 역사에도 사실로 기록된 것이라는 것 인간역사도 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창세기 5장에서는 이제 선의 길,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가진
셋과 그 후예들의 족보를 기록하신 것으로 이같이 인간에게는 육의 길, 영의 길 두 길이 있고 두
종류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네가 하나님을 따르겠느냐 아니면 사단을 따르겠느냐 인간은 이 두 길 중에서 어느 쪽이든
속하게 되었는데 네가 생명을 택하지 않으면 죽음의 길이니 생명을 택하라고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살기를 원하는 자는 살려주신다는 표로 창세기 6장에 가서는 노아의 방주로 보이시고 그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자는 산다는 예표고 그다음 창세기 22장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 하신 하나님께서 수양을 준비하여 이삭 대신 제물이 되게 하시고 이삭은 살리시는 것으로
우리대신 죽기 위해 준비되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예표로 보이셨고 이렇게 살리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체적으로 계속 점진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민수기 35장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안주할 때에 '도피성' 또는
'도망성'이라는 성을 지으라고 명하셨습니다. 사람을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듣고도 그
말씀을 거역하여 계획한 살인이거나 고의로 사람을 죽였다면 살려두지 말고 죽이되, 그러나 우발적
이거나 부주의로 인한 살인이면 그가 살기 원해서 그 성으로 도피하면 죽이지 말고 정당한 재판을
받도록 그를 아무도 죽이지 못하도록 보호하라고 명하시므로 바로 사단에 의하여 그릇 범죄한
우리 인간을 도피성 같은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면 살리신다는 뜻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또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면서 죄 때문에 사망 안에 처한 인간대신 무엇을 죽이라 했습니까?
'어린양을 죽여 피 흘려라, 번제로 드려라, 이것이 너희가 용서받고 살길이다'하시면서 바로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오셔서 그같이 피 흘려주시므로 살리신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를 통해서 살리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살고 싶은 자는 살려주시
겠다는 거예요. 비록 하나님을 버리고 사단을 따라 나갔지만 죽기를 두려워해서 살고 싶어서 예수께
나오는 자는 살려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실체이신 예수님,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
만이 구원의 표요, 구원의 방주요, 살리는 도피성이요, 죽임을 당하는 어린양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도록 먼저 그림자와 같은 모형으로 상징으로 예표로 보이신 것입니다.
가인에게 아무도 죽이지 못하도록 표를 주신 것은 가인은 육체에 있는 동안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도록 했을 뿐이지 그는 영원한 죽음으로 들어갔습니다. 땅에서의 수명은 육체가 쇠할 때까지
살도록 보호하셨지만 가인에게 주신 구원의 표를 통해 보이신 뜻은 그같이 살기 원하여 예수님께
나오는 자는 죽음에서 구원받아 영원한 영생 복락을 얻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대선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은, 인간이 누구를 만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께 믿음의 초점을 둬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을 아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만 알고 하나님만 찾으면 그것은 자기 스스로 신을 하나
만들어 믿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성경 전체가 말씀하는 예수님을 알고 구원받아야 할
자기를 알고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짜 교만은 자기가 죄인임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깨달아보려 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에 대해서 예수님의 피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거부감이 들고 듣기 싫은 겁니다. '뭘 자꾸 죄 죄 그러느냐? 뭘 자꾸 피, 피 그러느냐
하나님의 말씀이 그것밖에 없냐? 우리 마음이 힘 좀 얻고 즐거움이 되는 말 좀하면 안 되느냐!'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의 성공담이나 들려주면서 희망을 얻게 하고 위로가 될 만한
그런 말 좀 하면 안 되느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많은 교회라 하는 곳에사 그런 말 들려주는 데 혼신을 다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죄를 알고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떠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짜 행복의
길이라 하셨습니다. 그 속에 하나님의 엄청난 자유와 기쁨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공하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세상 것이 부족하다고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세상 것 채워
위로나 하려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 아닙니다. 지옥으로 들어갈 그 죄 때문에 오셔서 그 죄를 청산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 전체가 죄를 말하고 예수님의 피 흘림과 죄 용서와 구원하심과 영원한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오신 뜻에 관심 없다면 자기가 얼마나 부패하고 더러운
죄인인지를 깨달을 수는 없는 것이요, 예수님의 피 흘려 죄를 씻어주신 그 용서 받은 기쁨을 알
턱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진리를 경험할 수는 없는 거예요.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감각 없이 하지 말고, 내 죄가 얼마나 더럽고 큰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자기 영혼의
모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남의 죄만 보고 들추고 하는 것은 능력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의 속성입니다. 남의 죄만 보고
들추는 것은 자기 죄는 못 본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보는 눈이 열리는 것이 신앙의 성공입니다.
성영님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해주실 때만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회개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영님이 죄를 깨닫게 하실 때만이 예수님 오신 목적이 분명해지는 것이요, 하나님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출 때마다 할 말 없는 죄인인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의 피가 나에게
얼마나 귀한 줄 알게 되고 깨끗이 용서받는 그 자유 때문에 기뻐 외치고 또 외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구주다!, 나는 예수님으로 살았다!'하는 확신에 찬 그 믿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이요 정말 영혼의 자유를 알고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할 줄 아는 능력이 있는 것
이요, 그런 나에게 어디를 가든지 환경이 열리는 것입니다. 복을 가진 자가 됐기 때문에 어디를
가도 두려워할 것 없고 내 손에 쥔 물질 없어도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우리의 모든 저주와 질고를 지셨다는 것을 확실히 믿기 때문에 건강할 권리가
있음을 아는 것이요 악한 병에 걸릴 일 없다는 확신에 찬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건강을 누려야 합니다. 몸이 피곤하여 아파서 누워 있지 않으면 안 될지라도 '아니다, 예수님이
나에게 건강을 명하셨다 나는 건강한 자다!'하고 벌떡 일어나 버리면 피곤도 아픔도 물러가는
것입니다. 이걸 모르고 '건강하게 해 주세요, 주여 믿습니다, 나 좀 건강케 해주세요'하고만
있으면 예수님께서 '너 뭘 믿느냐? 도대체 뭘 믿어?' '예수님이 건강하게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믿는 건 믿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무슨 병이든지 낫게 해 주세요'하고만 있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나은 줄 믿고 일어나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낫게 해 주실 줄 믿습니다, 낫게 해
주세요' 그것만 붙들고 앉아 있으니까 마귀가 만날 앓는 소리 하게 하고 마음에 근심 걱정 염려
잡념이 떠날 날이 없도록 가지고 노는 것입니다. 네가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은 것을 믿는다면
구원의 길을 걸어가라는 거예요. 좁고 협착한 길 마다하지 말고 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받은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에서도 자유케 하셨고 모든 질병에서도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에게만 나타나는 자유요, 행복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간증하고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가인이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한 이 고통의 호소가 여러분의
영혼이 가졌던 하나님께서 들으신 호소로써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찾으신 것이 되었을 줄로
믿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모든 영광 삼위 되신 하나님께 돌립니다. 아멘!!
제16장 내 죄벌이 너무 중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p365-p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