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고 이준경의 묘역으로 이동했다
먼저 맞은 곳은 사당이다
동고 이준경의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원길(原吉), 호는 동고(東皐)·남당(南堂)·홍련거사(紅蓮居士)·연방노인(蓮坊老人). 서울 출신. 이극감(李克堪)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이세좌(李世佐)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이며, 어머니는 상서원판관 신승연(申承演)의 딸이다.
이준경의 집안은 대대로 명문인 광주 이씨였다. 학문이 깊었고 관직에 오른 이도 부지기수였다. 그런 그의 집안에 큰 화가 미쳤으니, 바로 연산군 대에 일어난 갑자사화이다.
이준경의 할아버지 이세좌는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가 사사될 때 약사발을 들고 갔던 봉약관(奉藥官)이었다. 연산군은 1504년 폐비 윤씨와 관련된 이를 모두 치죄했다. 이세좌는 귀양 가는 중에 자결을 강요받았고, 이세좌의 친인척과 이준경의 아버지 이수정을 포함한 아들 4명도 연좌되어 처형되었다.
창졸간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잃은 이준경 역시 연좌되어 여섯 살의 나이에 형 이윤경과 유모를 따라 괴산으로 귀양을 가야 했다. 그러다가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이준경 형제는 귀양에서 풀려났다.
사당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면 묘역이 나온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이 묘역을 찾지 못해 현재가 있단다
갈 곳이 없었던 이준경은 어머니 손에 이끌려 형과 함께 외가에 얹혀살게 되었다. 외할아버지 신승연(申承演)은 다행히 참화를 면했고, 적자인 아들도 없어서 이준경 형제가 의탁할 만했다.
시아버지와 남편을 잃는 화를 당하고도 꿋꿋하게 버티며 아들 형제를 가르친 어머니의 덕으로 이준경은 학문을 벗하며 바르게 성장했다. 그는 열여섯 살 때부터 사촌 형인 이연경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이준경은 이연경에게 배울 때 조광조의 도학에 대해 듣고 영향을 받았다.
이준경 신도비이다
이준경이 관직에 들어선 때는 기묘사화 이후 개혁정치에 실패한 중종이 훈구 세력과 척신들에게 휘둘리며 정국이 혼미한 때였다. 시시콜콜 도학의 정치 이념을 들이대며 훈구파를 몰아세우던 사림파를 눈엣가시로 여긴 훈구파는 기묘사화 이후에도 종종 옥사를 일으켰다. 사림이었던 이준경 역시 그 와중에 권신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견제를 받아 파직을 당하기도 했다.
옆에 아들 이덕열의 신도비도 있다 이준경 영의정 재임 시절 아들이 홍문관 관리 후보로 올라오자 "내 아들이라서 누구보다 실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잘 안다"며 명단에서 빼버린 일화가 있다. 다들 인정한 훌륭한 인재인데 너무 일찍 고관에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공과 사를 엄중히 해 공평함을 추구하는 모습이다 아들 이덕열은 그의 사촌형제 이유경(李有慶)의 양자로 보냈다.
이렇게 선대에 사화의 잔인함을 몸소 체험했던 이준경은 자중하며 독서와 수양으로 성리학에 매진함으로써 김안로가 제거된 후 다시 등용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혼란한 시기를 견디며 신중하게 때를 기다린 것이다. 사화의 환란 속에서 성리학의 도를 제대로 깨달았던 것이다
중종은 폭정을 일삼은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이 됐다. 그러나 그는 훈구 세력과 개혁정치를 꿈꾸는 사림파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정국을 혼돈에 빠뜨리는 데 일조한 용군(庸君)이었다. 중종과 같은 용군은 이랬다저랬다 해 충신도 간신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중종은 처음에 훈구파의 말을 듣고 기묘사화와 안처겸(安處謙)의 난으로 사림들을 어육(魚肉)으로 만들었다. 그런 중종을 이준경은 바른 길로 가도록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
이준경은 이황, 이언적과 같은 도학자들과 함께 중종에게 솔선수범해서 도학을 공부하라고 계속 압력을 가해 도학을 왕의 상투 끝에 올려놓은 격을 이루어냈다.
사화가 빈번한 혼돈의 시기에서도 사림이었던 이준경은 여러 왕을 거치며 조정에서 크게 쓰였다. 정승의 자리에 오른 것은 그 자신이 매사에 신중하게 처신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무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여기에 인재를 등용할 때도 치우침 없이 공평함을 잃지 않는 강직함과 인재를 보는 혜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사림으로서의 본심은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오르면서 비로소 나타났다. 문정왕후가 죽자 척신 윤원형을 축출하는 한편 조광조를 신원해 문묘(文廟,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사당. 우리나라에는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한 18인의 명현들이 배향되어 있다)에 배향하고, 도교의 색채가 짙은 소격서(昭格署)를 혁파하는 등 성리학적 이념에 기반을 둔 정치가 정착되도록 노력했다.
명종 대에는 권신 이기(李芑)의 인사 청탁을 들어주지 않아 미움을 받았다고 한다.
이준경이 병조 판서로 있을 때, 이기가 무인들의 뇌물을 많이 받고, 병사(兵使), 수사(水使) 및 첨사(僉使), 만호(萬戶) 등의 자리가 비면 그들의 명단을 적어 정청(政廳)으로 보내어 이들을 주의(注擬)하게 했다. 그러나 이준경이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이기가 앙심을 품고 이준경을 무고해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이준경은 병조 판서 시절 휘하에 있던 장수 방진(方震)이 사윗감으로 이순신(李舜臣)을 고민하고 있을 때 적극적으로 이순신을 추천했다고도 한다. 인재를 보는 눈이 가히 남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방계인 선조(하성군 이균)를 추대한 일은 이준경이 인물을 보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음을 보여 준다. 명종의 아들이 일찍 죽어 후계자가 없자 조카들 중에서 정하기로 했는데, 명종이 하성군을 총애하니 하성군을 후계로 삼게 되었다.
실록에 따르면 훗날 명종이 승하하고 하성군을 상주로 모셔올 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가 몰려들어 수레 뒤를 따랐다.
이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이 한 두루마리나 되었는데, 어떤 자가 이들을 녹공(錄功)하자고 했지만, 이준경은 말하기를 “예전에 결정된 일인데 신하가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 하고 재촉해 불태워 버리게 했다. 이준경의 강직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높은 식견을 지니고 재물을 탐하지 않던 청빈한 삶은 이준경에게 탁월한 혜안을 선물했다. 이는 특히 그가 죽기 전에 왕에게 올렸다는 유차(遺箚)에서 잘 알 수 있다.
여기에서 특히 눈여겨볼 부분이 넷째의 붕당에 관련한 문제 제기이다.
혹자는 과거 이기와의 나쁜 감정에서 이기의 손인 이율곡을 나쁘게 보았다고 폄하하는데 그의 혜안은 붕당의 폐해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율곡 이이와 정철 등 신진 사류들은 이를 자신들에 대한 비판으로 생각했다.
이때 유성룡 등이 이준경을 옹호하였으므로 훗날 영남 유림들의 추앙을 받아 그 자손 이인좌가 충청도와 영남을 기반으로 무신란을 일으키기도 했다고 전한다.
어쨋든 이 몇 년 후 동인과 서인으로 당이 갈라지고 당쟁이 격화되면서 이준경의 말이 현실로 드러나고 말았다. 그리고 그동안의 사화와는 비교도 안 될 조선후기 피를 부르는 환국의 정치가 되풀이되다가 결국 세도정치라는 망국의 정치로 이 나라를 몰아넣었다
혼돈의 시기에는 누구나 흔들리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준경은 중용과 신중함으로 어려운 시기를 이겨내고 마침내 자신의 성리학적 정치 이념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과 같이 어지럽고 자신의 사리사욕에 따라 무리를 짓는 이들이 본받아야 할 또 하나의 재상 표본이라 할 것이다.
<출처> 다음백과 이성무의 재상열전-청아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