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음을 다잡고 굳건한 삶을 지켜가는 당신에게
위화의 <원청>을 읽고
2023.4. 향기 영란
영화 <적벽대전>에서 나오는 개미떼보다 더 많아 보이는 수많은 군사들, 6.25전쟁 때 참전하여 사람의 바다로 밀려들었다는 중공군. 값싼 가격으로 저렴하게 밀어부치는 중국 상품들. 공산당 1당 독재로 1가구 1자녀 정책이나 사교육 금지와 같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을 일사불란하게 밀어부쳐버리는 획일성, 대국의 배짱으로 단칼에 내려치는 무역보복들.
나에게 다가오는 중국의 이미지는 거대한 대륙을 포함하여 무엇이든지 크고 많다.
위화의 작품들 속에는 그런 문화적 특질들이 배경으로 녹아들어 있다. 외국의 문학작품들을 읽는 것은 그런 것들까지 함께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는 곤란하다. 그러고 보면, 명성에 비해 다작을 하지 않는 편인 작가 덕분에 나는 그의 작품을 열심히 읽은 축에 속할 수도 있겠다. <허삼관 매혈기>, <인생>, <형제 1,2>, <제 7일>과 산문집 한 권, <원청>까지. 그의 작품은 쉽고 따뜻하고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하다. 그것은 그의 성공의 중요한 이유일 것이다. 가는 가족과 개인을 앞세워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시대적 배경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중요한 방향이긴 하지만 좀처럼 전면에 내세우지는 않는다. <원청>은 배경이 더욱 낯설게 다가왔는데 린샹푸가 살았던 시간의 역사적 맥락을 읽어낼 수가 없어 미로에서 린샹푸의 발뒤꿈치만 열심히 따라 다니는 기분이었다. 린샹푸가 살았던 중국의 북쪽과 샤오메이를 찾아 이동했던 남쪽 지역의 완무당이나 시진 지역 역시 지도를 통해 찾을 수 있는 것의 성질이 아니었다. 또한 전체적인 이야기에서 상당부분 할애하고 있는 토비들의 출현과 그로인해 사람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피해는 그것이 실제 있었던 일이었던 것인지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면 좁은 우리 나라에 살더라도 평생을 걸쳐 다른 지역을 속속들이 알 수 없는데, 거대한 중국 대륙을 제대로 알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동시에 우리 나라 안에서 일어났던 역사적 불행에 관해서도 뒤늦게 이해하게 된 것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작가는 독자들을 그렇게 곤란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사회적 맥락을 모두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이야기를 따라가면 길고 긴 터널을 빠져나갈 수 있다.
린샹푸가 가진 부와 사람됨으로 마땅한 혼처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다소 의아할 수는 있으나 음전하고 과묵한 린샹푸의 기질을 생각하면 그런 상황이 어색하지는 않을 것이다. 린샹푸는 손재주가 있고, 장인들을 찾아가며 가구나 생활용품을 더 잘 만들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배운다. 그런 린샹푸 앞에 어느 날 나타난 샤오메이와 아청으로 인해 그의 삶이 달라진다. 린샹푸와 샤오메이는 짧은 부부생활과 그들 사이에서 딸을 출산한 이후 죽을 때까지 서로 만나지 못한다. 독자들도 책을 끝까지 읽고 나서야 비로소 샤오메이와 아청의 관계와 린샹푸와 샤오메이가 시진에서 그토록 가깝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샤오메이를 만날 수 없었던 상황을 이해할 수 있다. 린샹푸는 갓난 딸을 안고, 언젠가 아청이 말한 원청이라는 곳을 찾아 남쪽의 시진까지 다다른다. 원청이라는 곳은 찾을 수 없었고, 아청과 샤오메이의 말투와 가장 비슷한 시진에서 린샹푸는 천융량 부부의 도움을 받아 정착하게 된다. 샤오메이를 찾는데는 실패했지만, 린샹푸는 목공기술을 발휘하여 천융량과 부를 축적하게 된다.
린샹푸와 천융량의 우정과 신의는 우리들까지 함께 존엄해짐을 느끼게 만든다. 린샹푸의 딸이 토비(土匪)에 납치되자 천융량의 아들 천야오우가 대신 잡혀가고, 천야오우가 토비들에게 한쪽 귀를 잘리고 죽을 고비를 넘겨서 돌아온다. 린바이자가 자신을 대신해서 잡혀가서 돌아온 천야오우에게 연정을 느끼자 천융량은 아들을 두들겨 팬다. 그들을 갈라놓기 위해 결국 가족은 완무당으로 이사를 간다.
이 시기에 중국은 청 말, 중화민국의 초창기로 무법 천지의 세상에서 규율도 체계도 없는 무장강도인 토비(土匪)들이 판을 친다. 그 당시 중국 정세에 무지한 내게 무척 낯선 사람들이었다. 전 인구의 10~20%가 관군이 아닌 비정규군인 토비들이었다고 하니, 중국 내부의 사정이 어떠했을지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시진의 지도자 구이민은 토비들에게 현명하게 대처해 나왔으나 결국 감당해 내지 못하고 마을 수비군을 조직하고 토비와 맞서게 되고, 토비는 계략을 짜서 구이민을 납치한다. 시간이 흘러 린샹푸도 나이가 들고, 딸 린바이자는 중서여숙 학교에 입학하여 기숙생활을 한다. 구이민의 몸값을 들고 토비를 찾아간 린샹푸는 토비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린샹푸의 죽음을 알게 된 천융량은 그를 죽게 만든 장도끼를 찾아내어 복수를 한다.
샤오메이의 이야기 또한 흥미롭다. 샤오메이는 아청의 집안에 민며느리로 들어가 부부가 되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인 샤오메이에게 아청의 어머니는 매우 엄격했고, 샤오메이가 남동생을 돕느라 얼마간의 돈을 주자 그것을 트집잡아 친정으로 내쫓고 만다. 아내를 사랑한 아청은 샤오메이를 찾아가 그 길로 먼 길을 떠나 상하이를 거쳐 린샹푸의 집까지 찾아갔던 것이다. 린샹푸의 집에서 금괴를 가져나온 샤오메이 덕분에 그들은 다시 시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고, 끊임없이 내리는 폭설에 조금은 어이없는 죽음을 맞아 린샹푸와는 재회할 수 없었다.
원청은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작가는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곳이지만 끊임없이 찾아가는 곳, 가장 좋은 작품이란 없지만, 그것을 쓰기 위해 노력하는 일을 원청이라는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 비유한다.
어떠한 조건에서도 굴하지 않고 살아나온 린샹푸, 그 곁에서 함께 우정을 지키며 린샹푸의 딸을 그들의 아들과 함께 친딸처럼 키운 천융량과 그의 아내, 아청과 린샹푸를 함께 사랑했지만, 아청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지 않은 샤오메이. 토비와 아편, 뇌물을 받아먹으며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관군 등 혼란한 나라 안팎의 상황 속에서 삶을 굳건히 잡고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작가는 중국을 지탱해가고 있는 수많은 린샹푸의 삶을 그려내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원청>은 때론 흔들리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굳건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독자들에게 바치는 헌사일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