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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19
사도행전 1장 9-11절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으로 첫 번째 내용이 사흘 만에 죽은 자가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를 믿는 자들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가? 첫 번째는 우리를 위해 얻으신 의에 참여하게 하십니다. 이 의를 얻기 위해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마치 죄인처럼 우리를 위해, 우리를 대신해 죽으셨는데, 죽으시기만 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심으로 이 의를 얻으셨습니다. 두 번째는 그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 역시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습니다. 이때 새로운 생명으로 살리심을 받는다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가 아니라 산 자로 있기 때문에 모든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새 생명을 받았기 때문에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모든 것이 그의 영광을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의 복된 부활에 대한 확실한 보증이 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인생이 죽음을 향해 가지만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역시 부활할 것을 확신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자의 죽음은 부활의 확실성에 근거해서 잔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신분으로 두 번째 내용은 하늘에 올라가셨다는 것인데, 여기에 대해서는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6문부터 49문까지 설명합니다. 우선 46문부터 보겠습니다.
46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사‘라는 말을 그대는 어떻게 이해합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땅으로부터 하늘로 취하여지셨고(행1:9, 마26:64, 막16:19, 눅24:51),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속 계시며(히7:25, 4:14, 9:24, 롬8:34, 엡4:10, 골3:1),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뜻입니다(행1:11, 막24:30)
우선 오늘 본문만 보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땅으로부터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사실과,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길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다시금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씀합니다. 사도행전 1장 9절에서 11절입니다. “이 말씀을 마치시고 그들이 보는데 올려져 가시니 구름이 그를 가리어 보이지 않게 하더라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 옷 입은 두 사람이 그들 곁에 서서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또한 우리를 위해 살아나시고 난 뒤 사도행전의 증거에 의하면 40일 동안 사도들에게 보이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저들에게 사명을 주시는데, 사도행전 1장 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는 저들이 보는데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할 때 주께서 승천하심으로 아담 때문에 닫혔던 천국 길을 여셨다(기독교강요, 1559, 2권 16장 16)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지상에서 이루실 모든 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승천하신 것이고,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모든 사역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택하신 백성들이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달리 표현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위로 올라가심으로 그분 안에 있는 자들을 위로 끌어올리시고자 하시는 것이고, 동일한 의미에서 땅에 결코 매여 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하늘로 올라가신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금 이 땅에 내려오실 것인데, 왜 내려오시는가에 대해서는 어이지는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그가 땅에서부터 하늘로 올라갔다고 할 때 하늘은 어디를 말하는 것인가? 성경에서 하늘이라는 표현은 보통 세 가지 중 하나로 사용이 됩니다. 첫 번째는 마태복음 6장 26절의 말씀처럼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라고 할 때 공중이라는 의미로 사용됩니다. 두 번째는 눈에 보이는 하늘의 영역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편 8편 3절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쉽게 말하면 달과 별들이 있는 장소를 하늘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축복받은 자들의 장소라는 의미에서도 사용되는데, 소위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곳, 낙원(눅23:43) 혹은 아브라함의 품(눅16:22), 셋째 하늘(고후12:2), 하늘의 예루살렘(히12:22), 새 하늘과 새 땅(계21:1)이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이곳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계와 눈에 보이는 하늘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공중 위의 하늘, 하늘 위의 하늘, 과학에서는 우주라고 하는 공간만 해도 너무나도 광활해서 사람으로서는 다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너머, 그 밖을 어떻게 우리가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고 하셨고,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2). 뿐만 아니라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마25:34)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곳이 축복받은 자들의 장소요,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자기 자신을 직접적으로 영광스럽게 드러내실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신 장소가 세 번째 영역입니다.
이곳은 아무렇게나 왕래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닌데, 누가복음 16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땅에서 천국에 간다는 것도 불가능하지만 지옥에 있는 자들이 천국에 간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즉 이 하늘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땅, 그리고 그 위에 있는 하늘, 하늘 위의 하늘과 구별된 장소인 것이고, 지옥과도 구별된 장소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것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할 때 그의 인성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은 예수님의 인성이 하늘로 올라가신 이후 그의 인성이 이 땅에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6장 11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죽으시기 전이지만 죽으시고 난 뒤, 그리고 부활하시고 난 뒤 승천하신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승천 이후, 그리고 다시금 재림하실 때까지 그 사이에 인성이 우리와 함께 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결코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와 관련해 가톨릭의 화체설이나 루터파의 공재설은 결코 성경의 가르침이라 할 수 없습니다. 화체설은 무엇입니까?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가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한다고 생각하는 교리입니다. 공재설은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는 떡과 포도주 그대로 있지만 거기에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본체가 떡과 포도주 안에, 떡과 포도주와 함께 연합된다는 교리입니다. 두 교리는 다 인성의 임재를 말한다는 데 같은 음성을 내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은 그의 인성이 하늘로 올라가셨다는 것이요, 우리가 두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로 그리고 하늘 위의 하늘로, 그리고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 너머로까지 올라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그가 다시금 재림하셔서 심판하기까지는 인성이 다시 내려오실 일은 없다는 의미에서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이것을 사도행전 3장 20절과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 만물을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그가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신 것은 모든 만물의 회복이 될 때까지라는 것입니다. 그전에 인성이 오시는 법이 있는가? 없습니다.
여기서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마태복음 28장 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는 말씀과 관련해서 질문합니다.
47문. 그렇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약속하신 대로 세상 끝 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 것입니까(마28:20)?
답. 그리스도는 참 사람이시요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그의 인성과 관련해서는 더 이상 땅에 계시지 않으나(히8:4, 마26:11, 요16:28, 17:11, 행3:21), 그의 신성과 위엄과 은혜와 성령과 관련해서는 어느 때도 우리에게서 떠나 계시지 않습니다(요14:17-19, 16:13, 마28:20, 엡4:8,12).
이미 살펴본 바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때가 차매 인성을 취하신 이후 참 하나님임과 동시에 참 사람으로 계십니다. 이 때 두 본성, 다시 말해 신성과 인성은 451년 칼케돈 신조의 고백처럼 혼합이나 전이나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두 본성은 본성 그대로의 특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위격적으로 연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올라가셨다면 그가 이 땅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의 몸이 여기 있으면서 저기 있을 수 있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참 사람만 되시는 게 아니라, 참 하나님이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며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육체로 계시지 않습니다. 또한 물질적인 존재도 아니십니다. 모든 만물을 지으시되 만물보다 크신 분이시며, 그러면서도 만물 안에 계신 분이십니다. 범신론 사상처럼 모든 만물이 신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모든 만물 가운데 계시며 모든 만물 위에 계시며 모든 만물 너머에 계십니다. 간단히 말해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성과 달리 신성은 여기에 있으시면서 저기에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기도하는 소리를 하나님은 들으시면서 내가 있는 곳 반대편에서 기도하는 소리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승천하기에 앞서 사도들에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인성으로 함께 계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신성으로 함께 계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요한복음 16장 7절과 관련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는데, 거기 보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비록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지만 누구를 보내셔서 그들과 함께 하겠다고 하시는가? 보혜사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6절 그리고 요한복음 15장 26절에 의하면 보혜사는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이요,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진리의 성령이십니다.
그런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분리할 수 있는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성령이 계신다는 것은 성자 역시 계시며 성부 역시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성부와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마태복음 28장 20절 말씀과 관련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약속은 그의 위엄과 섭리와 말할 수 없는 은혜에 따라서 성취된다... 그의 인성에 따라서는, 그가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며, 또한 그의 위엄의 임재에 따라서 여기 계신다. 그의 위엄의 임재는 우리에게서 떠나지 않은 것이다. 아니면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위엄에 따라서는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지만, 그의 인성의 임재에 있어서는 ‘나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라는 그의 말씀이 진정 옳다 할 것이다. 교회는 그의 인성의 임재에 있어서는 단 며칠 동안만 그렇게 있었고, 이제는 오직 믿음으로만 그를 감지하며 육체의 눈으로는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칼케돈 신조의 내용도 언급했지만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은 혼합이나 전이나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습니다. 인성은 함께 계시지 않지만 신성은 함께 계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곧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란 질문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실제로 그런 반론이 있어서 이 문제에 대해서 다루게 되는데,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8문입니다.
48문. 그러나 어디든 그리스도의 신성이 있는 것마다 그의 인성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이 두 본성들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닙니까?
답.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성은 제한을 받지 않고 편재(遍在)하므로(행7:49, 사66:1, 렘23:24) 그가 취하신 인성의 영역을 뛰어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성이 이 인성 속에 있고 또한 인격적으로 인성과 연합한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골2:9, 요1:24, 11:15, 마28:6, 골2:9).
계속해서 말씀드리지만 승천하신 이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어디 있습니까? 하늘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은 하늘에 있을 뿐만 아니라 마태복음 28장 20절의 말씀처럼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인성은 하늘에 있고 신성은 우리와 함께 있다면 그것은 곧 분리된 것이 아니냐는 겁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성은 인성의 특성 상 제한되지만 신성은 결코 그런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편재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지만 어디에다 있다는 것입니다. 인성 밖에도 있을 수 있지만 동시에 인성 안에도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성은 하늘에 있지만 신성은 우리와 함께 한다고 할 때 그것이 곧 분리의 개념을 갖는 것은 아닙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의 저자인 우르시누스는 몇몇 반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기도 합니다. “유한한 본성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가 없으나, 무한한 본성은 유한한 본성 속에서도 완전히 존재하며 그 바깥에서도 완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경우도 이와 같다 할 것이다. 유한한 그의 인성은 어느 한 곳에밖에는 있지 못한다. 그러나 무한한 그의 신성은 그의 인성 속에 있으며 그 바깥에도 있고, 또한 어디서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에 따르면, 말씀이 그 자신의 성전 안에 있고 또한 어디든지 있다. 그러나 특별한 방식으로(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그 자신의 성전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보편적인 내용이라면 칼빈의 경우는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에서 인성이 임하는 것이 아니라 신성으로 임한다고 말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절하는데, 왜냐하면 ‘신성으로 인성으로’라는 말 자체가 분리되는 언어의 형태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totus[토투스], totum[토툼]이라는 용어로 사용하여 설명합니다. totus[토투스], totum[토툼]은 ‘전체’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의 주격 단수 남성형과 중성형입니다. 기독교강요 최종판 4권 17장 30절에서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이 합니다. “그리스도는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전체는 어디에나 있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의 중보자는 그 전체가 어디든지 계시므로 항상 그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성찬에서는 특별한 방법으로 자신을 나타내신다. 즉 그리스도 전체가 계시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의 전체가 계시는 것은 아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심판하러 나타나실 때까지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하늘에 계시기 때문이다.”(생명의 말씀사, 번역 수정)
부연하자면 성찬에 임하는 그리스도, 그리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이 분리되지 않는 전 그리스도가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신성으로, 인성으로’라고 말하면 편하겠지만 분리될 수 없는 두 본성에 대하여 의식이 있는 것입니다.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전 그리스도가 임하지만, 그렇다 해서 인성이 임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속한 모든 것이 임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심으로 우리에게 베푸시는 유익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9문입니다.
49문.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답. 첫째로, 그는 하늘에서 그의 아버지의 임재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십니다(요일2:1, 롬8:34). 둘째로,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있는데 이는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그의 지체들인 우리를 취하여 자기 자신에게로 올리시리라는 확실한 보증입니다(요14:2, 17:24, 20:17, 엡2:6). 셋째로, 그리스도께서 보증으로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고(요14:16, 행2:1,4,33, 고후1:21-22, 5:5),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저 위의 것을 구하고 땅의 것을 구하지 않습니다(골3:1-4).
요리문답은 세 가지를 말하는데, 첫 번째는 그가 하늘에서 그의 아버지의 임재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신다는 데 있습니다. 요리문답 46문에서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땅으로부터 하늘로 취하여지셨고, 장차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시 오신다는 내용 사이에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거기에 계속 계신다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의 유익을 위한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그가 지금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특히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의 영구한 능력과 공로, 그의 희생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버지께 영접받기를 바라시는 그리스도의 신적이며 인간적인 뜻, 그리고 그 아들의 보상을 우리 죄에 대한 충족한 속죄로 인정하시고 그 아들의 뜻을 받아들이시는 성부 하나님의 동의 등이 포함됩니다. 실제로 요한일서 2장 1절에 보면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고 말씀합니다. 성경 기록의 목적 가운데 한 가지가 무엇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앎으로 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그가 지금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도 동일한 뜻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그리스도의 희생이 있는 이상, 그리고 그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시어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해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하는 이상 누구도 우리를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패한 본성을 지니고 있고, 그래서 때로는 아니 자주 죄를 짓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 두 번째는 그리스도가 하늘에 오르신 것처럼 우리도 반드시 하늘에 올라가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지체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때로 그리스도를 몸 된 교회의 머리로, 우리를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 비유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이 곧 우리의 죽음이요, 그의 부활이 곧 우리의 부활이라고도 말씀합니다. 동일한 원리로 그의 승천은 우리의 승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6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그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 안에서 부활했다는 것이고, 또 그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그 안에서 승천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이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편지를 쓸 때 이 편지를 받아보던 자들은 승천한 자들이 아닙니다.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형을 씁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분리할 수 없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늘에 올라가 계신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그가 하늘에 오르신 이상 그와 연합된 우리도 반드시 하늘에 올라갈 뿐 아니라 이미 그와 함께 올라가 있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장차 하늘 시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늘 시민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절과 3절에서는 이렇게도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서는 장차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게 될 것에 대하여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신다고 표현합니다.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단순히 우리가 거할 장소가 준비되지 않았다는 그런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마태복음 25장 34절에서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마지막 심판 이후 모든 택자가 하늘에 거하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일은 앞으로 이루어질 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연합되어 있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늘에 계시다는 것은 그의 지체인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게 된다는 확실한 보증입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유익 세 번째는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말미암아 그가 친히 말씀하신 것처럼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신다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해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12: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성령의 역사와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상 끝 날까지 그의 교회를 모으시고 위로하시고 보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런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계시는 저 위의 것을 구하도록 하기 위함인데, 지난 시간 골로새서 3장에 있는 말씀을 봤지만 다시 한번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골3:1-4)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여기에 있지만 우리의 본향은 결코 이 땅 위에 있지 않습니다. 빌립소서 3장 20절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런 측면에서 히브리서 11장 13절에서는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땅에서의 삶은 잠시 머물다가 가는 곳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요구하느냐? 이 땅의 것을 추구하면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늘에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방금 읽은 말씀에서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 지금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데, 그가 계신 곳에 합당한 것을 찾고 구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을 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 여전히 땅의 것을 구한다면 우리 안에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는가 물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을 주고자 하시는 목적이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오르셨다는 것은 결국 그가 올라가신 것처럼 우리도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을 믿는 것인데, 그때는 영광 가운데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17절은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비록 이 땅에서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지만 영광을 소망하면서 위의 것을 구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