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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 장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요14:1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0)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 너무나 기대되고 흥분되고 기쁨에 벅차지 않습니까? 예수님
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시고 나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내 안에 계신
이 관계를 말씀하셨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적이 일어난 일입니까? 너무나 어마어마한 큰 이적이
우리에게 일어났습니다. 캄캄한 중에 헤매고 다니다 그대로 유황불 못으로 들어갈 우리에게 밝은 햇
빛과 같은 빛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더니 이 같은 삼위의 하나님과 엄청난 복된 관계를
이루게 하셨으니, 이 엄청난 이적이 우리에게 일어났으니 이것을 어떻게 말로 설명하고 표현하겠습
니까? 그러면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하셨으니
여러분이 예수님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예수님 안에 계신 것을 믿습니까? 참으로 믿습니까?
그러면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하셨으니 여러분이 예수님을 진
짜 믿는다면 믿는다는 진짜 증거는 뭐예요? 자기는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은 자기 안에 와계신
것을 자기가 자기 안에서 아는 것이지 않겠습니까? "너희가 알리라"하셨으니 이 관계가 되었음을
자기가 아는 것이지 않으냐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 것을 너무나 확실히 아는 사람
입니다. 예수님께서 내 안에 오셔서 나로 더불어 먹고 나는 예수님으로 더불어 먹는 관계가 되었음
을 너무나 잘 아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실제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리는 것
이지만, 듣는 여러분은 또한 성영님에 의해 자기의 실제가 돼야 합니다. 그 관계의 믿음이 돼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요14:20의 이 한 절 말씀이 하나님의 전 뜻으로 완성된 것을 말하는 구절이기도
합니다. '그날에는'한 것은 어느 날입니까? 오순절에 성영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것을 말합니다(행
2장). 예수님의 영이신 성영님이 오시면 그같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시고 또 너희가 예수님 안
에 있고 예수님이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 영적인 관계가
보혜사 성영님이 오셔서 사람 안에 오시면 예수님이 아버지 안에 계신 것을 눈으로 보듯 다 알게
되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과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신 것을 확실히 본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사람인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니,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가 또 어디 안에 있는 것이 됩니까? 아
버지 안에 있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하셨으니 그러면 우리
가 참으로 예수님을 믿은 예수님의 사람이면 말씀대로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을 아는 것일까요? 모르는 것일까요? 안다고 하셨으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요,
구원받은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안에 오신 성영님으로 아는 것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말씀이 여러분의 것으로,
기쁘고 '아멘'이 절로 복창 되는 말씀으로 아주 친한 것이 되어 "그렇습니다 예수님! 이 관계를 이
루어주셔서 영광되게 하셨으니 감사일뿐입니다"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는 말씀이 돼야 하는 것입니
다. 우리는 모두 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여러분의 예수님이 맞습니까? 그
러면 예수님을 믿는 여러분은 자기의 믿는 예수님에 대해 어느 만큼 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이 예
수님의 말씀이 여러분에게 이루어진 관계가 되었으므로 아멘의 기쁜 감격으로 예수님께 대답이
되었습니까?
이제는 여러분이 예수님을 자기 안에서 알기 때문에 믿는다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기
안에서 알지 못하면 어떻게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눈으로 보지 못한 그분을 믿는 것인
데, 믿을 만한 분이라는 것을 자기가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믿는 것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것은 경
우에 따라선 순교도 해야 하고 예수님과 함께 고난을 받으며 가야 하는 협착한 길이라 하는 것인데
믿을 수 없다면 어떻게 죽음도 각오하고 고난받겠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내 생명이 되신 분, 하나
님이시며 내 구주이신 분, 우리 안에서 분명히 믿는 분이기에 좁고 협착한 길을 기꺼이 기쁘게 따
르는 것입니다.
만일에 자기가 자기 안에서 알고 믿는 예수님이 아니면, 어떤 모습들로 나타나는지 아십니까? 예를
들어 어느 누가 자기 교회 목사 따라서 신앙생활을 아주 잘합니다.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뭐 맛
있는 것만 봐도 목사님 생각나고, 좋은 것만 있어도 목사님 갖다 드리고 싶고, 그래서 귀하다는 것
은 다 가져다가 대접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자기에게 눈길을 안 주고 다른 사람을 가까이하고 친해
보이듯 하니 목사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자기도 안 먹고 정성으로 갖다 먹
여주던 것을 도로 빼앗고 싶을 정도로 섭섭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바로 이 같은 모습들이 예수
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목사를 믿고 목사를 따랐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그
렇기에 예수님을 아는 바 없고 예수님을 믿는 바 없는데, 만일 어떤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믿음
때문에 죽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을 위해 죽음은 두고라도 자신의 구원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성경은 오직 예수님을 말씀하려고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예수님을 모르면 성경 모르는 것입
니다. 아브라함의 삶을 이야기하고, 모세의 삶을 이야기하고, 성경에 등장하는 온갖 인물들과 뭐
요셉이 총리가 됐고 나라를 구했고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구했고 야곱이 큰 떼를 이뤄 부자가 됐고
별소리 다 알고 말해도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않거나 모르면 성경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까 예수님 모르고 전도하면 또 자기 같은 사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르고 주의 종하면 예수
님의 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섬기도록 자기를 따르도록 자기 양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붙들고 늘어지는 것이 이런 데서 나오는 것입니다. 예수님 모르고 성경 가르치면 그 속에서
철학이 나와요. 정치 얘기나 하고 정치 가르치고 윤리 도덕, 인간의 계명으로 만들어 가르치는 것
입니다. 사람의 도리 가르치고 사람을 섬기도록 하는 것입니다.
부부간에 싸우지 말고 사랑하고 잘살아라. 며느리는 시어머니 공경 잘해라. 시어머니는 며느리 좀
대우해주고 시집살이시키지 마라. 이런 인간의 도리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으러
나와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잘 배우고 관계를 이뤄가야 하는데 그런 가르침을 받지 못해 예수님을
모르니, 자기 목사에게 딱 꽂혀버립니다. 그 목사가 지금 성영의 뜻대로 바른말을 하느냐? 하지 않
느냐? 하는 것은 전혀 모릅니다.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왠지 목사가 하나님 하고 가까운 것
같고, 신비한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목사를 믿는 것이 하나님 잘 믿는 것같이 돼 버
리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를 신처럼 대우하고 떠받들고 그 교회에서 떠나면 저주받을 줄로 알고 떠
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자기 안에서 모르고 자기 안에 계시지 않으니 예수님(주님)을 믿는다는 것이 교
회 안에서 하나의 명예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집사님이세요? 권사님이세요? 하면 자랑스럽게 그
렇다고 대답합니다. 지금 집사로 권사로 직분 받아 하나님을 잘 섬기는 본이 되어 예수님을 드러냄
으로써,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고 있느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것이냐? 하는
것은 관계없습니다. 그냥 자기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말하기를 자기가
이사를 여기저기 다니다 보니 집사를 못 땄다고 했습니다. 직장생활 하느라 교회일 열심히 못 해서
권사를 못 받았다고 했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이 자기의 출석 교회에서 권사 직을 받기 위해서 권사는 얼마, 장로는 얼마라고
정해놓은 규정을 따라 돈을 내야 한다고, 그 금액이 기백 만 원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
니다. 도대체 교회가 직분을 줄 때 왜 돈을 받는지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물론 감사헌금이라는
명목을 내세우지만, 직분을 돈 주고 사는 것과 같은 생각밖엔 들지 않습니다. 이 양반이 생활이 어
려워서 근근히 살아가는 입장인데 교회 생활 오래되다 보니 권사라는 위치에서 교인들에게 인정을
받고 또 어른 노릇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게 되니 기어코 돈을 내고 권사 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돈을 벌어서 갚느라고 잘 보이지 않는 눈에 돋보기를 쓰고 부업을 하여 일생 갚아나가는 겁니
다. 직분이 자기 마음에 명예가 돼 있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자기 마음에서 예수님 모르면 이같이
직분이 명예가 되어서 자기 마음에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바로 알고 예수님의 말씀으로 살게 되면 자연적으로 윤리 도덕의 사람이 되는 것입
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예수님으로 살도록 하는 것에 초점이 돼야 합니다. 도덕적인 사람이 돼서
예수님을 잘 믿으라가 아니에요. 어느 날 성영님께서 너는 오직 예수님만 자랑하고 말하라고 하셨
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알려는 열심을 가져야 하고 예수님으로 살려는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 알기를 힘써야 합니다. 저도 예수님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밤새도록이라도 예수
님 이야기하라면 할 수 있습니다. 왜냐? 예수님 이야기하는 것이 제게는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말하면 성영님이 기뻐하시니 그 기쁨 때문에 육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우리가 성영님으로 충만하여 영적인 사람이 되면 늘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있으니 정말 행복합니
다. 제가 과거에 예수님을 잘 모르고 천국도 지옥도 듣기는 하지만 크게 와 닿지는 않아 지옥 간
다는 것도 천국도 잘 몰랐습니다. 그러니 제게 오로지 소망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세상 것이었습니
다. 세상 사는 것에 마음이 다 쏠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 귀는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말
이 많이 들렸습니다.
그리고 그 복 좀 받으려고 나름 열심히 교회생활했습니다. 설교 또한 예수님은 희미하고 복에 대해
서는 크고 하니까 제가 도무지 육체를 위한 것에서, 자아를 죽음에 내줘야 하는 것에서 나올 힘이
없는 것입니다. 나도 알지 못하는 중에 말씀으로 힘을 얻지 못하니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의 터널에
서 뺑뺑이 돌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헤매고 다녔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세상과 육체의 것에다
소망을 두었을 때는, 하나님께서 절대로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 것을
제가 무엇으로 알 수 있었냐면 심영에 평안이 도무지 없었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말씀 들을 때는
행복한데 돌아서면 한없이 구렁으로 떨어지고 마음이 그렇게 곤고할 수가 없었습니다. 환경 때문에
마음의 곤고함이 더 컸습니다.
지금의 믿음은 아니지요 그때 저의 처한 환경이나 어려움이나 정신적 고통이 지금의 믿음이었다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너무 어두웠고 생명이 없으니 빛이 없으니 영적으로 캄캄한 어둠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곤고하고 고통을 받았던 것이지 지금 믿음이었다면 그런 것은 내게 문제 될 것이 아
니지요. 지금은 주시면 먹고 주시지 않으면 아버지가 나 부르시려는가 보다 합니다. 죽이시면 죽고
살리시면 사는 것이지 이제는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더 급하십니다. 내게서 돈 떨어
지는 것 원치를 않으십니다. 아버지께서 절대로 원치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이 같으신 아버지를
아십니까? 이렇게 좋은 아버지를!
그런데 영적 성장을 이루고 아버지 편에 서버리니까 이제 사람들에게 비판을 받는 겁니다. 처음에
여러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불행을 겪는 겁니다. 그래서 아! 아버지께서 자기의
보증하시는 말씀은 반드시 지키시는구나, 제가 그것을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편으론 삼위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행복에 취해 사는 반면에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신앙과 말씀에 대한 이야
기가 통하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배척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고 할까요? 저렇게 믿음 생활하면 안
되는데 싶어서 말씀을 이야기하고 믿음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소 닭 보듯이 하고 딴짓을 하며 세
상 이야기로 말문을 막아버립니다. 어디서든지 배척을 당하는 신세였습니다. 지금이야 여러분하고
이야기해도, 말씀을 나눠도 얼마든지 통하니 아주 기쁘지요. 그런데 그때 당시엔 통하는 믿음이
없으니 그 점에는 쓸쓸했었습니다. 참 마음이 슬플 때가 많았습니다. 정말 좋으신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아버지에 관해서 얘기하려고 입 벌리면 듣지 않으려고 엉뚱한 말들을 늘어놓아 버립니다.
생활이 어떻고 요새 무엇이 유행이고, 뭐 자식이 어떻고 등등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열심히 주
워섬기는 겁니다. 건강식품이 어떻고 무슨 음식이 어떻고, 예수님 이야기 듣지 않으려고 화제를
돌려버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제가 가장 기쁘고 좋을 때가 언제냐? 하면 누가 예수님에 관해서 관심을 가지고 알려고 할
때입니다. 그럴 때는 아주 너무 기쁘고 좋아서 그 사람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습니다. 내가
그를 찾아가서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말 안 해도 그를 사랑의 대상으로 두고 '아버지 그를 사
랑합니다. 아버지께서 기억하시고 사랑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기도가 마음에서 절로 된다
는 말입니다. 제가 과거에는 내 의지를 다른 사람을 기도해줄 대상으로 알고 무조건 기도를 했지만
지금은 그런 기도 하지 않습니다. 마음에 동함이 일어나는 사람만 기도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목사가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느냐? 안 해주느냐? 따질 것 없습니다. 성영님께서 마음에 불러일으켜
주시면, 마땅하다면 기도가 되는 것이니, 성영님께서 자기를 위해 기도하실 수 있는 자가 되면 당
연히 기도하게 하시지 않겠습니까? 정말 우리들은 영적으로 수준 높은 성도, 참으로 예수님을 사랑
하는 성도, 그래서 예수님께서 약속하시고 말씀하신 그 모든 복을 소유하는 성도가 되기를 진심으
로 바랍니다.
그래서 성서가 쓰인 목적이 뭐냐?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눅24:27에 모
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하셨습니다. 요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성경이 예수님 자신에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데 성경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요일2:14에 사도 요한이 아이
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니 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써서 보낸 대상들이 다
아버지를 알았고 태초부터 계신 이, 즉 세상에 보내기로 언약하신 그분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글
을 썼다고 했습니다. 자,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려면 먼저 성경이 왜 쓰였는지를 알아야 하
겠지요? 그리고 성경에서 누구를 알아야 해요? 아버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에 창조주로서의 아버
지를 알고, 그다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아버지를 알아야 합니다.
요17:3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셨
으니 영생은 누구를 아는 것이라고요? 예수님을 보내신 참 하나님과 그 예수님을 아는 것, 그러면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알아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일생 해야 하는
일이 성경으로 예수님을 아는 일입니다. 알기 위해 힘쓰고 알려고 하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요
14:17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
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그러
면 진리의 영이 누굽니까? 성영님이시지요? 세상은 능히 받지도 보지도 알지도 못한다. 그러나 너
희는 안다 하셨으니 여러분 성영님 아십니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말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자기 속에 오셨음으로써 관계로 아는 것입니까? 이제 내 안에 와계신 것으로 아는 것입니
까? 성영님이 하시는 일과 성영님을 모르면 그는 여전히 세상 사람입니다. 자기 안에 오신 성영님
과 관계로 알지 못하면 믿지 않는 세상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쓰인 목적이 분명히 있는데 그 목적이 원수 사랑하는 것부터 하라는 것이 아니라,
구제부터 가서 하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전한다고 뛰어다니는 것부터 하라는 것이 아니라 먼저
무엇부터 알아야 하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성영님을 알
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님을 알라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쓰인 목적이요, 우리가
먼저 알아야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을 알 때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영님을
알면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삼위일체가 다 들어있는 것이요, 다 들어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하면 그 안에 누가 같이 계세요? 아버지와 성영님이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불러도 거기에는 아버지가 계시고 성영님도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러
면 아버지를 부르면 거기에 또 누가 같이 계시는 것입니까? 예수님과 성영님이 계시는 것입니다.
'아버지!'하면 그 속에 예수님도 성영님도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영님' 부르면 거기에
는 또 누가 같이 계실까요? 바로 아버지도 예수님도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이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부를 때 아버지도 성영님도 같이 계시는
것을 알고 부르는 믿음이 돼야 하는 것입니다. 알아듣습니까? 그래서 삼위의 하나님이라 하고, 하
나님은 삼위일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에 대해서 이것부터 분명히 알고 세워지는
믿음이 돼야 하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뭐나 된 것처럼 하나님 일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귀신
에게 붙들려서 쓰임 받는 일이 될 뿐 '성영님'하면 삼위일체가 다 들어있는 것이요, '하나님'해도
'아버지'해도 삼위일체가 다 들어있는 것이니 그래서 너희가 아버지를 알아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라, 성영님을 알아라, 그러면 이 셋은 따로따로 계신 것이 아니라 삼위로 계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라는 것은 이웃집 사람의 얼굴을 봐
서 안다는 정도, 예수님이 구주이신 것을 안다는 이런 정도의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웃집
사람을 아는 것과 같은 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경험으로 아는 관계를 말합니다. 제가
서두에 설명해 드렸던 것, 그것을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를 경험하고 예수님을 경험하고 성영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 안에 예수님이 내 안에 오셔서 함께 먹고 자고 일어나는 관계입
니다. 실제로 경험하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이성 간의 경험과 같다. 부부간의 경험과 같다
고 말하는 겁니다. 부부는 살다 보면 서로를 너무나도 잘 알아버립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께서 나를 아시는 그 관계이면 이 세상 사는 것 뭐 염려입니까? 내가 예
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 관계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계신 보좌 우편,
그곳에 이미 함께 들어가 있으니 목숨의 죽음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혈과 육의 자아가 죽
기 위해서 왔습니다. 지음을 받은 혈과 육의 자아는 죽고 영으로 사는,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자아로 사는 자 되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명이 내게 오시는 것은, 혈과
육 즉, 옛사람 자아가 죽어야 하기에 예수님 십자가의 죽으심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여 온전히 죽음
에 넣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자 되어 이제 쇠하여가는 육체를 벗으면 새로운 몸
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계기로 인해서 자기가 육
체에서 나와 자기 육체의 모습을 보았다는 겁니다. 그것을 육체이탈이라고 하더군요, 육체는 큰 고
통을 겪어야 하는 상황인데 그 육체에서 빠져나온 자기는 너무너무 편안하고 자기 육체 옆에 앉은
가족들은 울고불고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죽는 것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헌것을 벗어야 새것을 입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이 신비가 예수님이 내 안에 오신 우리 영혼
에 있게 되었습니다. 이 엄청난 신영한 신비가 우리 영혼에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같은 신비한 영혼의 몸으로 온전케 하려고 예수님 아는 일과 예수님과 함께하는 믿음이 되는 일
에 열심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살겠습니까? 아니지
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달걀이 부화하여 병아리가 되기 위해서는 껍질이 필
요합니까, 안 필요합니까? 껍질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화된 후에도 필요합니까? 필요치
않습니다.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거나 땅에 묻어버립니다. 생명을 품은 씨앗들도 흙에 뿌리면 생명
이 겉껍질을 똟고 싹이 터서 올라와 껍질은 쓸모없게 되고 싹터 올라온 그곳에서 새로운 열매를 맺
습니다. 그것처럼 우리 육체 또한 새로운 부활의 몸을 입기 위해 있는 겉껍데기이니 육체의 죽는
것에 두려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 알고 보니 죽음 뒤에 오는 이 엄청난 영광을 위해 이렇게 멋진 준비를 하셨구나!"를 생각한다
면 죽음에 대해서 자유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성영님께서는 우리가 이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
다. 이 믿음이면 세상도 관심 두지 않을 수 있어요. 세상의 소문이 흉흉해도 거기에 관심 두지 않
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예수님의 기쁨이 있으니 무슨 삶에 두려움이 있을 것이며 무슨 안타까
움이 있을 것이며, 미움이 있고 속상한 것이 있고 삐죽할 것이 있고 싸움할 것이 있고 그러니 뭘
육체의 삶에 연연하겠습니까? 제가 영적인 세계를 점점 알게 되면서 삼위 하나님과 관계를 이루게
되니 너무 기쁨에 겨워서 사는데 남편과는 두 아들로 인해 다툼이 있는 겁니다. 정말 다툼이 싫은
데 해야 했습니다. 진짜 다투는 것이 너무 싫은데 내 맘을 너무 힘들게 하고 불안하게 했습니다.
나는 두 아들의 실족된 믿음 문제 때문에, 어떻게 믿음으로 돌아오게 할 것인지 구원 안으로 돌아
오게 해야 할 그 일은 내게 있어 내 목숨을 내놓으라 하면 내놓을 만큼 중요한 일이었기에, 두 아
들에게서 세상의 것으로 잘되기를 바라본 적이 단 1%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성영님께서 주시는
감동을 좇아 행하면서 또한 그 과정에서 성영님께서 나로 믿음의 온전함으로 서게 하시는 영적인
것과 믿음의 훈련을 하고 계셨는데, 남편은 세상 방법에 너무 충실하다 보니 성영님의 역사를 계
속 막고 방해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자기 마음, 자기 기준에 안 든다고 해서 한숨
으로 어둠을 뿌리고 얼굴에 화색 있는 날이 없는 겁니다. 남의 집 자식은......,누구는 몇 살밖에
안 됐는데 무엇이 됐고...하는 등등의 비교하는 일은 그칠 줄 모르고, 비난은 물론이고 저주를 쏟
아내는 것이 아주 습관이 되었습니다.
자식을 자기가 믿음에서 실족하게 했음에도 그 책임 의식이 없었습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는 수십
년을 믿는다 했어도 구원이 없는 남편을 구원받게 해야 했기에, 설득을 하고 사정을 하고 간청도
하고 호소도 하고 다짐도 받고 자식은 내가 알아서 구원으로 들아오게 할 것이니, 사는 일 염려치
말고 차라리 자식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믿음만 바로 세우는 일에 충실해 달라고 그것이
자기에게 복이라고 애원도 했지만, 여전히 반복되다 보니 긴 세월 동안 다투지 않을 수가 없었습
니다. 이것이 자식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이끄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성영님께서 역사하시도
록 좀 제발 지켜봐 주라고, 구원받는 것이 중하지 세상으로 나가 세상 것에 온 마음 다 쓰고 사는
것 나는 원치 않는다고, 권고와 당부를 수 없이 했습니다. 남편으로 인해 들어오는 사단의 끈질긴
곤혹의 시험은 사실 내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고, 고통받는 일이었고 자식이 점점 더 마음을 닫
아 버리는 일이었고, 집안을 어둠의 기운을 드리우고, 성영님의 역사하심을 막는 일이었기에 사단
과의 이 전투에서 내가 능력을 갖추어 승리하는 것은 그 자식의 아비(남편)의 영혼을 사랑하여 끝
가지 품고 긍휼함을 갖는 일이었습니다. 어떤 이유를 빌미 삼아 기어코 영혼을 잡고 놓지 않으려는
사단에게서 남편의 영혼을 건져내야 하기에, 그 영혼을 싸안고 기도하며 긍휼히 여기는 것이 돼야
했습니다. 자식의 영혼을 사랑하니 원수로 행하는 남편의 영혼도 사랑해야 했습니다.
사단과의 이 전투는 길고도 긴 것이었기에 때로는 내가 지치기도 했고 어느 순간 육에게 지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는 성영님께서 "능력을 갖추라"라고 명하시니 즉시 회개를 하고
온전한 사랑의 능력을 채워가는 훈련을 나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이 뒷감당하지
못할 말로 자기의 구원을 막는 두려운 말을 간혹 하는 일이 있었기에 그것을 내가 두려워하여 늘
마음이 조바심했었는데 그것도 사단의 흉계임을 알게 되어 속은 것을 회개하고 그런 것에서 두려
움을 깨끗이 버리고, 남편에게 내 태도를 바꿔 극단의 조치를 취하게 되는 일을 몇 번 하게 되었
습니다. 그러자 남편의 그 기세가 점차 힘을 잃게 되고 많이 조심을 하는 일이 나타나게 되어 이제
정말 우리 다투지 말자고, 정말 다투는 것 너무 싫다고 네가 잘했냐? 내가 잘했냐? 그런 것 좀 하
지 말자고 약속을 하고 그런 것에서 그치니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모르겠는 겁니다. 남편이 습관처
럼 하던 한숨을 쉴 때는 왜 한숨을 하느냐? 즉시 회개하라고 그때그때 회개할 것을 이르면 즉시 회
개를 하게 되니 점차 그런 것에서 놓여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남편이 따라주니 집안에서도 친구처
럼 때로는 농담도 하고, 때로는 코미디도 하고 아무튼 정말 친구처럼 대하고 사니 마음이 유쾌하고
좋게 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다투고 싸우는 일에 힘쓰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오병이어의 이적 아시지요? 이 이적이 성경에만 있고 예수님 당시만 있었던 것으로 알면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삶 속에 들어와 계시기만 하면 예수님 안에서 그 이적은 보장되는 것입니
다. 생명의 충만으로 이끄심과 함께 삶을 이끄시며 채우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
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해요" 염려할 것 없습니다. "당장 문제가 닥쳐서 어떻게 할 줄 모르겠어요"
어떻게 할 줄 걱정할 것 없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경험의 관계가 된 믿음이면
걱정할 이유 없습니다. 성영님께 나를 맡겨드리고 오병이어의 이적과 같은 삶으로 이끄실 것을 확
실히 믿는 믿음을 고백하고, 예수님이 평안을 명하셨으니 말씀대로 평안하겠습니다 하고 평안해져
버리면, 그같이 성영님께서 오병이어의 이적과 같이 채우시는 것을 경험할 것이요, 문제 또한 자
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확실한 관계를 이루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염려할 것 없습니다.
제가 오늘 말씀과 관계없는 이야기 좀 할까 합니다. 어느 날 예배 중에 성영님께서 제게 무엇을 말
씀하셨는가 하면 부부가 예수님으로 하나가 되어야 함에도 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
는 것이면 예수님으로 믿음이 하나가 되어 가정이 예수님 중심이 돼야 하는데 각각 자기중심이 되
어서 분쟁하고 덕스럽지 못하고 본이 되지 못하여 가정에 구원이 다 막혔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자녀들의 구원까지 다 막혀버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를 대상으로 하여 말씀하셨던 것인데 제
가 그들에게는 이 말을 안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만을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만은 아닙니다.
부부가 예수님 중심으로 연합하지 않으므로 그 자녀들이 다 구원이 막혔다고 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하는 것입니다. 부부가 오직 예수님으로 기뻐하고 구원을 기뻐하며 예수님을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내는 것이었다면 그의 자녀들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배우면서 자라 예수님 안
으로 들어오는 힘이 되었을 것인데, 믿는다 하면서도 다 자기가 살아서 자기주장대로 행하였으므로
도무지 구원받는 것과는 거리가 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돌아올 힘을 얻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참으로 이것을 여러분이 두려움으로 들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도 부부가 회개하고 회
개함으로써 자기중심, 이기적인 교만을 다 버리고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하나가 되
는 것에 마음과 뜻을 다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잠시 사는 세상을 위해
사는 것이 목적이나 되듯이 두려운 줄 모르고 그렇게 힘을 쓰면서 영원한 복락의 나라를 버리는 용
기들이 좋은 것입니까? 자기 기분, 자기중심, 자기 욕심의 것들을 세우면서 다투고 싸우고 하는 것
들은 이제 좀 그치십시오. 그렇게 사는 것이 구원받는 길이라면 얼마든지 열심히 힘써 그렇게 사십
시오. 그러나 육체에서 떠날 때 영원한 불지옥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기억하고 그렇게 사는 것에
용감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절대 부정적이거나 저속한 언사는 하지 않아야 합니다.
"저게 도대체 언제 깨달아 저것, 아우 저것 때문에 내가 미치겠어, 저 새끼 저것 나이를 어디로 쳐
먹은 거야 저거....,이런 투의 저속하고 상스런 욕설과 말들, 인격적이지 않은 저주의 말들 좀 하
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로 자기 자신을 저주에 묶어놓고 자녀들은 부모들의 부정적이고 상스런 그
런 말들로 올무가 되어서 발걸음 하나하나가 저주에 묶인다는 것입니다. 부모인 자기들은 도무지
변하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만 있는 거짓 믿음으로 자녀들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하는,
성경이 가르친 바 없는 그런 악은 그치고 그 입부터 닥치는 것이 하나님께서 역사하실 수 있는 최
소한의 일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신부터 예수님 앞에 끓어 엎드려 좀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따라 제대로 변하는 것부터 처절히 하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4:6에 말씀하시길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사
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게 생겼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개가 자기를
속 썩여서 망한다고 말하는 겁니다. 이놈의 사회가 맘에 안 들어서 자기가 망한다고 하고, 정치가
그래서 망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 정말 웃겨요! 모든 기준이 모든 판단이 자기로부터가 되어서
자기가 누구 때문에 망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면 참 신기한 겁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믿는다는
말을 하는지 참 신기하다는 말입니다. 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신에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망하는 분이 아닙니다. 망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똑바로 알고 하나님과 함께 살면 망
할 일 없는 것입니다.
정치 이야기나 대통령 이야기하는 것도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했습니
다. 네가 편안하려면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정치를 잘하냐? 못하냐? 그런 말로 비
판하고 정죄하여 재판관 노릇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 기도하
는 것입니다. 그래야 내가 땅에 사는 동안에 국가의 안녕과 평안과 질서가 있어야 편하니까, 그리
고 대통령 이하 위정자들을 존중하는 것이 곧 나도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
터 온 권위와 질서를 지키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대통령이라
도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했지 그를 비방해라, 대통령 때문에 못 살겠네, 정치 못 해서 못 살겠
네, 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이지, 정
치가 잘못돼서 사회가 잘못해서 망하는 것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내
가 망한다고 망해간다고 그러지만, 여러분! 망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것
입니다. 사회가 그래서, 정치가 그래서, 대통령이 잘못해서 하는 따위에 책임을 돌리는 힘이 있다
면 그 힘 그런 죄짓는 데다 소비하지 말고 하나님을 아는 데 그 힘을 쓰십시오. 그것이 자기가 망
하지 않는 진리입니다.
호세아 6:6에 하나님께서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만 무조건 드리면 하나님께 할 일
한 것처럼 하는 것 원치 않는다. 너희가 하나님 알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깊
이 알지 못하면서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면 되는 줄 알고 있
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서 부지런히 예배 참석 잘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예
수님에 대해 한 시간도 말할 줄 모르면서 성경 이야기를 잘하면 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사는 싫다, 너희가 나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요16:3에 저희가 그
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요, 또한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예수
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 예수님을 액세서리로 생각
하는 것,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안다면 필요할 때만 찾고 필요 없으면 뒤로 제쳐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요일4:5,6에 저희는 세상에 속한 고로 세상에 속한 말을 하매 세상이 저희 말을 듣느니라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정답입니다.
어떤 말을 듣고 어떻게 살고 있느냐로 하나님께 속했는지 속하지 않았는지 분명하게 구분되는 것
입니다. 네가 세상에 속한 말을 듣고 있다면 아직은 세상에 속했고, 네 입으로도 세상에 속한 말을
한다면 너는 세상에 속한 자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말을 듣는다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것을 히브리어로 '쉐마'라고 합니다. 그러나 '복종'도 쉐마입니다. 왜 같은 단어냐 하
면 들으면 복종이 일어나야 하는,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듣는 것과 복종을 같은
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다=복종입니다. 예수님을 알면 예수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예
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 이야기 하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예수님을 경험하면 예수님 이야기하는 사
람끼리 모이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술 좋아하면 술꾼과 어울리게 돼 있고, 도박 좋아하면
도박꾼끼리 모이게 돼 있고, 남 흉보기 좋아하면 그런 사람끼리 모여서 흉볼 것 없나 찾습니다.
자기와 생각이 맞으면 열심히 흉보는 일 합니다.
호2:19,20에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
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어떻게
경험하게 한다는 말입니까? 아주 결혼한 사이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나를 알게 하는
데 내가 너에게 아주 장가 들어주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그
의 신부라고 말하잖습니까? 그냥 '아! 예수님은 우리 구주임을 믿습니다' 그런 정도로만 끝나도 된
다면, 내가 너에게 장가든다는 그런 표현 안 하셨습니다. 바로 부부가 서로를 잘 알게 되듯이, 부
부가 서로를 아는 것보다 더 하나님을 알고 경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누구의 이름이라고 했습니까? 아버지가 가지고 계셨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에
요. 예수님 당시에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아니, 예수님
이름은 예수님만 사용했던 이름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 때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던 이름이었는데 꼭
이름을 알아야 하는 것인가요? 그럼 그 이름은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질
문이야 좋지만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알면서 왜 아버지의 의도나 뜻은
모르는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질문을 하니, 아니, 몰라도 되는 것은 알고 알아야 할 것은 모
르니 아주 답답한 것이지요. "하이고 이 사람아! 혈과 육체의 사람들이 가진 예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셨느냐? 하늘에서 오신 분이냐는 것이 중요한 것이고,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서 몸 찢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예수님, 하나님이 가지셨던 그 예수님의 이름을 알라
는 것이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만, 여러분도 이런 답답한 구석이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피 흘려주신 분, 우리에게 생명을 내주신 분,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
던 구주의 이름, 하나님의 이름이라는 이것이 생명이요, 구주요, 능력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라는 말
입니다. 이것을 모르니 예수님의 그 이름의 능력을 모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만 찾잖아요? '주'
로는 구원 얻는 이름이 아니고 그렇기에 '주'로는 영적 능력은 없는 것입니다. 주는 우리의 주인이
라는 것밖에는 맺을 것이 없습니다. 똑바로 잘 알아듣기 바랍니다. 그래서 속사람(성영님이 오셔서
거듭난 것)도 없고 능력 없습니다. 다 벌거벗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이름이 하나
님의 이름이고 또 누구의 이름이라고요? 아들의 이름, 또 그 이름을 누가 가지고 왔어요? 성영님이,
그렇기에 '예수님'하면 모든 하나님의 역사가 다 들어있는 이름이고 하나님의 뜻을 통틀어 말하는
이름인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이름이에요. 그러기에 '예수' 이름으로 구원을 받고 '예수' 이름으
로 귀신이 쫓겨나가고, 병든 자가 치료되고, 기도를 받으시고, 응답해주시고, '예수'이름으로 부활
하는 것입니다.
그다음에 예수 그 이름을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어서 아들의 이름이 되고 그 이름으로 성영님이 오
셔서 성영님의 이름도 되었는데 그다음 성영님이 그 이름을 누구에게 주었어요? 우리에게, 이름을
아는 우리 안에 아주 이름이 들어오셨는데 성영님이 예수님의 이름을 가지고 내 안에 들어오셨다면
이 원리를 알아야 해요. 이름이 오셨으니 그러면 누가 오신 것입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성영님이 오셨으니 예수님이 오신 것이고 예수님이 오셨으니 아버지도 오신 겁니다. 그
래서 예수님이 오늘 본문 말씀에 "아버지가 내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
희가 알리라"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기 안에 계신 것을 알고 이 관계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의 이름이 내 안에 오시니 이름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사랑하는 나의 주 예수님의
이름, 이름을 생각하면 너무나 친근하고 너무나 능력이고 너무나 감사입니다. 그러니 주 부르려 해
도 안 불러요. 이미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기를 쓰고 당신은 내 '주'입니다
안 해도 제가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 이름은 주 하나님이라는 것이요, 구주라는 것이요, 치료
라는 것이요, 생명이라는 것이요 부활이라는 것이요 우리의 닛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예수님
이름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좋은지 자다가도 예수님 이름 앞에 마음의 무릎을 꿇는 거예요.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진정 이 믿음이 되기 원하면 예수님 이름 앞에 무릎을 꿇으세요. 그리고 말
씀에 비춰 회개하고 자복함으로써 이 관계의 믿음이 되는 것을 소원하여 기회를 얻기를 원하십시오
성영님을 의지하고 사모하세요. 그리고 어디서든지 말씀을 듣다가 성영님께서 회개의 감동을 주시
면 그 자리에 그냥 무릎 꿇으십시오. 그 자리에 무릎 꿇고 "성영님이 내게 회개케 하시니 감사합니
다. 회개의 영으로 오셨으니 감사합니다"하고 성영님께 자신을 맡기고 기도하라는 얘기에요. 그것
이 역사가 일어나는 기회 주시는 때이니 즉시 순종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사람 눈치 볼 것 없습니
다. 사람이 내게 구원을 베푸는 것이 아니니 사람 의지할 것 없습니다.
마22:20-22에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들이 와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내야 하느냐 내지 않아야 하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하시며 '그 셋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고
이 형상(가이사)과 이 글이 뉘 것이냐?'믈으시니 '가이사(로마 황제)의 것입니다'했습니다. 그러면
가이사의 것이면 가이사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셨습니다. 세상의 것은 세상에
주고 네가 하나님의 것이 맞는다면 하나님께 돌아오라. 네가 시험코자 하는 그가 곧 하나님이니
하나님의 것이면 내게 오라는 말씀입니다. 세상 것은 세상에 돌려버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돌아오라는 것으로 바로 네가 세상 것 가이사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냐? 세상 것이면 세상 것으
로 가고 하나님의 것이면 하나님께 분명히 돌아오라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것입니까? 세상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면 하나님께 확실히 나와서 예수님께
서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알리라'하신 관계가 돼야 하지 않습니까? 바로 성전 관계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으니
너희가 내안에 있으면'하신 이 관계가 되면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아버지 볼 수 없습니다. 심판하시는 무서운 하나님만 보이는 겁니다. 사람들이 율법에
있으니 거룩하시고 자비하시고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기도할 때 그러잖아요? 율법에 있으
니 그 하나님만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하나님은 아버지시
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해산의 고통으로 피 흘려서 낳아주신 관계로서의 아버지
다. 여러분 아기 낳을 때 피 흘리잖아요. 예수님은 피 흘려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고, 이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
더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피 흘리게 하사 우리를 낳으셨으니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라는 말입니다. 이해됐습니까? 그래서 율법으로는 하나님을 심판의 주로밖에 만나지 못합니다. 예
수님으로는 우리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제는 예수님 안에서 아버지를
만나는 믿음, 아버지와 아들과 성영님을 경험하는 믿음이 되어 영생으로 들어가 버리는 저와 여러
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에게 믿음이 되도록 도우신 성영님, 피 흘려 우리에게 죄 용서와 생명 주신 예수님, 우리를
예수님으로 낳아주신 아버지께 감사와 찬송으로 영광을 돌립니다. 아멘!!
제 19 장 너희가 내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p359-p3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