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철 - 하늘 나라 청지기 - 3. 충무교회 인도자로 1 40일 전도 기간을 마치고 집에 와서 일을 하려니 손에 잡히지 않았다. 더 이상 서울에 있을 수 없었다. 2 1957년 10월 부산으로 내려갔다. 부산교회는 이요한 목사님께서 맡고 계셨다. 언제나 말씀을 해주셨다. 말씀은 꿀과 같이 달았다. 그때부터 주일학교 일이며 화장실 청소는 맡아 놓고 했다. 교회에는 이렇다 할 생활 기반이 없다 보니 누님 댁에서 끼니마다 얻어먹기도 미안하여 굶기가 일쑤였다. 3 1958년 4월, 어느 집회에서 말씀이 끝난 다음 “봉철씨 통영에 가지 않겠는가?”라고 이 목사님께서 말씀이 계시기에 어리둥절했다. 아무 것도 모르고 어떻게 갈 수 있겠느냐고 거절했다. 그랬더니 내 마음을 아시고 “누가 기도하고 설교하라 하는 줄 아는가? 집이 비었으니 집 지키러 가라 하는 거야” 하시는 것이었다. 더 이상 못 가겠다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집 지키는 일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떠난 길이 목회자로서의 첫걸음이다.
4 1958년 4월 28일, 봄 날씨라 따뜻했다. 부두에서 목사님과 몇 분 식구들의 전송을 받으며 통영으로 가는 배를 탔다. 짐이라곤 작은 가방 하나와 책을 넣은 상자 하나가 전부였다. 5 충무로 가는 날이 충무공의 탄신일이었다. 첫 인도자로 아니 청지기로 떠나는 나의 마음도 임진왜란 때 나라 지킨 충무공과 같은 비장한 각오를 가지기로 다짐했다. 6 목회자는 첫째 하나님을 대신할 말씀의 대언자요, 둘째 하나님과 타락한 인간과의 중보자로서 하나님의 심정을 인간들에게 전하며, 셋째,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 천국이상을 실현시켜야 하는 막중한 책임을 진 자라고 배웠다. “사람 없어 나같이 어리석고 못난 것을 보낼 수밖에 없는 하늘의 뜻대로 청지기 노릇이라도 잘 하겠나이다” 하고 몇 번이고 기도하였다.
7 어느덧 배는 충무시에 도착하였다. 이봉운 장로님과 몇 분 식구들이 부둣가에서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셨다. 가정사를 뒤에 두시고 몸소 일선에서 어려운 생활을 하신 이봉운 장로님은 소나무 잎을 말려 가루로 만드시어 물에 타서 마시며 한 많은 하늘 뜻을 이룩하시기 위하여 뼈 살을 깎는 어려움을 겪으시며 계셨다. 8 충무에 도착하던 날은 금요일이었다. 밤에는 청년과 학생들이 10여 명이 나와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 같아 얼굴이 붉어졌다. 첫인사로 “나는 아무것도 모르며 다만 집 지키러 온 사람이니 잘 보아 달라”라고 했다. 9 이튿날부터 식구들이 새사람에 대한 호기심에서인지 한두 사람이 오기 시작했다. 말씀을 기다리는 얼굴들이었다. “집 지키러 왔다”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진지한 자세여서 말을 못 하고 여러 가지 사정 이야기로 하루를 보냈다. 다음 날은 주일이다. 예배드리는 형식은 보아 왔지만 식구들 앞에서의 설교는 처음이다. 10 “하나님을 왜 믿어야 하며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서 신앙해야 하는가?” 기본에서부터 시작했다. 어떻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제대로 되었을 리 없지만 저녁 예배는 새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말씀을(원리 강의) 해 주길 바랐다. “나는 강의를 할 줄 모른다”라고 할 용기가 없었다.
11 밤새도록 선생님이 하사해 주신 원리해설을 읽고 메모했다. 골자를 만들어 몇 번이고 혼자 강의 연습을 해도 잘되지 않았다. 처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 도와주십시오. 어린 저에게 용기와 지혜를 주시옵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고 용기가 생겼다.
12 이튿날 어떻게 말씀했는지 모르지만 새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왔다. 더욱 열심히 강의하고 식구들의 사정을 들으며 같이 울고 웃으며 지냈다. 어려움도 잊어버리고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식구들과 같이 다니며 아버지의 심정을 체휼하면서 서로가 성장해 갔다.
13 1958년 7월, 그토록 뵙고 싶었던 선생님께서 특별 40일 순회 도중 충무에 오셨다. 한 번도 모셔보지 못한 선생님을 가까이서 뵈올 수 있게 되니 정말 어린아이와 같이 기뻐 어쩔 줄 몰랐다. 누가 무엇이라 해도 기쁘고 그저 좋기만 하였다. 그러나 일면 책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책망을 들을 것만 같아 두렵기도 하였다. 14 선생님이 오셨다는 소식에 40여 명의 어린 식구들이 작은 성전을 꽉 메웠다. 선생님은 시작에서부터 눈물로 호소하셨다. 충무공의 나라 위한 충절의 전적지 충무에서 태어난 어린 식구들에게 눈물 어린 간곡한 말씀은 정말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였다. 지금도 “하늘나라 충신으로 일하며 주인 되기 부끄럽지 않은 실적을 쌓으라” 하시던 귀한 말씀 귀에 울리는 것만 같다.
15 미륵불이 환생하는 곳이라는 전설이 담긴 미륵산 미륵사에서 며칠 머무시다 진주로 떠나셨다. 선생님께서 어린 식구들에게 “내가 누군지 아느냐”라고 물으셨다. 대부분 “잘 모릅니다”라고 했다. 다시 선생님께서 “아무에게도 내가 누군지 말하지 말라”라고 하셨다. 정말 외로우신 선생님이셨다. 16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보시고 “세상에서는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라고 할 때 “혹은 선지자 혹은 선생으로 압니다”라고 하였다. 다시 예수님께서 “너는 나를 누구로 아느냐”라고 할 때 베드로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하니 복이 있다고 칭찬해 주셨다. 세상이 어두워 빛과 생명의 주인이신 선생님을 몰라보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였다. 17 일찍이 못난 것이 뜻 안에 들어와 사랑을 받게 되었으니 어찌 복되다고 하지 않겠는가? 747번 짚차로 떠나시는 선생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하염없이 나오는 눈물을 닦으면서 말 없는 충성을 다짐했다. 18 선생님이 떠나신 뒤로는 봄과 가을에 전 식구들을 데리고 선생님 머무시던 미륵산으로 갔다. 어린 식구들을 위로해 주시는 성령의 은사며 의심하는 식구들을 끝까지 믿고 따르기를 자상하게 타일러 주시는 역사가 있었다.
19 몸은 떠났어도 마음만은 항상 함께하여 주시는 크신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실지로 깊은 은혜를 체험한 식구들은 회개의 눈물과 함께 새로운 각오를 하늘 앞에 다짐하는 것이었다. |
첫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