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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귀신의 기독종교 제작과정>의 줄거리:
복음 전파의 현장에서 예수님과 귀신의 엇박자 만남이 반복됩니다. 아직 세례요한 말고는 아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거룩하게 구분된 그리스도임을 모르고 있을 때, 귀신들이 계속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때마다 함구령으로 대처하십니다. 복음을 종교로 둔갑시키려는 귀신들의 계략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귀신의 기독종교 제작 과정
(누가복음 4:31~44)
40.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나아오매 예수께서 일일이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고치시니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귀신의 기독종교 제작 과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귀신의 기독종교 제작 과정’
오늘은 귀신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어 내는지를 견학해 보겠습니다. 그럼으로써 종교심이 아닌 신앙심을 되찾을 기회로 삼고 지금까지 신앙심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이 종교심은 아니었는지를 살펴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종교심은 귀신이 만든 종교를 추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심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이 두 마음가짐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기독교는 그 이름대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종교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종교심과 신앙심의 차이는 간단합니다. 오히려 너무 간단해서 많은 사람이 신앙심이 아닌 종교심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마지막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42절을 보면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라고 하였습니다. 주석에 따르자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는 모습은 다른 복음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누가만의 독특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수가성 여인에게 전도를 하셨을 때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이 유하시기를 요청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와 다른 점은 이미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베푸시는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러 다른 곳으로 떠나시는 예수님을 막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만류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떠나시지 못하게 했다는 것은 그만큼 예수님을 좋아했다는 뜻이고 곁에 있고 싶어 했다는 뜻이 됩니다. 이러한 모습은 일견 바람직해 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떠나십니다. 이들이 이처럼 예수님을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한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기적들을 베푸셨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못 고칠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고침을 받는 등의 기적을 보면서 이처럼 유익한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리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만류하였다’는 한 마디 표현으로부터 세상에 종교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지가 드러납니다. 귀신에 의한 종교의 제작 과정을 보여주는 한마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유익함을 곁에 두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부터 종교는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종교는 성인들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공자가 유교를 창시하고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하고 무함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하고 예수님이 기독교를 창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드실 생각은 꿈에도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귀신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려는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반대하시며 그 계략을 분쇄하시고자 하십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가장 경계하신 것은 복음이 종교화되는 일이었고 예수님으로 인해 기독종교가 만들어지는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슬람교 유교 불교 천주교 기독교 힌두교 등의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귀신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 본문은 귀신이 종교를 만들어내는 과정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종교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정확하고 뚜렷하게 제시합니다. 이로부터 종교심과 신앙심을 구분할 수 있도록 은혜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십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31절~36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내쫓으신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귀신의 행동이 특이합니다. 34절을 보면 “아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귀신은 자신들이 멸망할 존재임을 공개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외침은 예수님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님을 끌어들이기 위한 고도의 작전이었습니다. 어떠한 일을 똑똑하게 잘하는 사람을 보고 “귀신같이 잘한다.”는 표현을 쓰는데 정말로 귀신은 기가 막히게 머리를 잘 씁니다.
세상에 귀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님으로 인해 자신들이 멸망할 상황에 처했음을 뉴스처럼 공개해버립니다. 동시에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라고 예수님의 정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내 밝힙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귀신이 예수님 때문에 멸망을 당하는 광경은 옳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귀신이 자멸을 재촉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저 귀신을 쫓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35절을 보면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입을 다물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함구령을 내리신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귀신이 한 말은 틀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귀신이 망하게 되었음도 사실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분이심도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에 귀신의 계략이 숨어있습니다.
이러한 귀신의 행동은 우리가 읽은 41절에서도 다시 한번 반복됩니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 질러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은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메시아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또한 표면적으로는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꾸짖으사 그들이 말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 줄 앎이러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상황과 동일하게 귀신에게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바둑에서는 기가 막힌 묘수를 ‘신의 한 수’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반복되는 귀신의 외침은 가히 신의 한 수라고 부를만한 계책입니다.
먼저 31~36절의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회당에는 예수님과 귀신들린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마음에 세상을 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족에게 붙어있고 직장과 사업에 붙어있습니다. 마음이 붙어있다는 것은 그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이 등장하십니다. 귀신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세상 대신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게 하는 복음이신 예수님의 등장은 자신들의 멸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귀신들은 포기하지 않고 상황의 반전을 꾀합니다. 공개적으로 예수님을 드러냄으로써 우상화시키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시고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면서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님의 능력이 자신들을 떠나지 않고 머무시기를 바랍니다. 귀신들이 노렸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귀신들은 열세의 몰린 국면에서 오히려 예수님을 전도함으로써 반전을 꾀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마음에서 잡아당기게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잡아당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이미 세상에 마음을 붙이고 있었습니다. 그 대상은 가족이나 직장이나 사업이나 건강 등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귀신이 예수님을 전도합니다. “이분이 바로 너희들이 싫어하는 나 같은 귀신을 멸할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세상을 구원할 그리스도시라”고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박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마음에는 귀신의 외침이 일종의 기회로 여겨지게 됩니다. 귀신이 전도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마음에서 잡아당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관심하게 된 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복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귀신을 쫓으시고 병자를 고치신 것은 사람들의 마음을 붙일 장소로 당신 자신을 제시하시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사업에 마음을 붙인 사람에게 귀신을 쫓으시는 것을 보이시며 이제 마음을 사업에 두지 말고 예수님께 둘 것을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 마음을 붙이게 되면 예수님이 가시는 곳으로 마음이 따라가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시는 곳은 영원한 기쁨이 있고 궁극적 만족이신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이 세상으로부터 결별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시고자 하신 복음의 내용이고 목적이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일시적이고 썩어버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서 떨어지기를 위함이었습니다. 결코 이 세상에 마음을 붙이는 것에 도움을 주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열중하는 일들을 성취하도록 도와주시기 위함도 아닙니다. 세상일에서 기쁨과 만족을 얻게 하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서 떨어져 나와서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가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것을 역으로 이용하고자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은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전도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으며 선전합니다. 그러자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기회로 여기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악한 귀신들을 쫓으시고 못 고칠 질병을 고치시는 걸 보니 그 말이 틀림없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힘이라면 내가 고민하고 있는 세상일들을 다 해결해주실 수 있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세상의 일들을 위해 예수님을 끌어당기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심입니다. 반대로 세상을 등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신앙심입니다. 귀신들은 마음이 세상의 붙박이가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도함으로써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종교를 만들도록 유도하였습니다. 세상에 붙박이였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떠나지 못하도록 신앙심을 종교심으로 대체시키고자 한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종교심과 신앙심을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전도 왕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전도를 많이 했으니 전도 왕이라 불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종교심에 의한 것이라면 귀신을 따르는 전도 왕입니다. 예수님을 전도하였지만 귀신이 시키는 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습니다. 귀신에게 전도를 받았다면 진짜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죽을 때까지 등잔 밑의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차라리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참 복음을 받아들일 가능성이라도 있지만 이미 예수를 믿는다고 확신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참 복음이 들어갈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혹시 그렇지는 않았는가에 대한 점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 때,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예수님을 전도할 때에 귀신의 영향력에 의한 것인지 성령에 의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고린도전서 12장 3절을 보면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구절만 보면 예수님에 대한 전도는 성령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12장 전체 맥락을 보면 전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 상황을 복음의 내용으로 붙잡았음을 전제로 하여 이러한 말씀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음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낙오자가 되고 무력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생각할 수 없고 시도할 수 없고 번영을 추구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의 주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까지 따라가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가 쓰인 시기는 로마에 의한 박해가 있었던 때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아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으로부터 버려지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른다는 것은 성령께서 이끌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만 우리가 처한 상황은 바울의 시대와 같지는 않습니다. 이 땅을 떠나고 싶지 않고 마음이 세상에 대해 붙박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얻고자 추구하는 중에 예수님을 전도 받았고 전도하기도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어봤더니 돈 문제나 건강문제나 삶의 문제들이 해결되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전도는 귀신의 전도입니다. 최고의 전도 왕이 있다면 귀신일 것입니다.
몸이 예배당에 모였다고 교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는 상태라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기에 교인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하나의 교회 안에 들어있는 사람들만이 교인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박이가 아닌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심지어 목사님조차도 설교를 하면서 이 상태를 묵인합니다.
부모가 자녀 문제로 걱정하고 기도하는 것을 당연시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열심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녀 문제를 원하는 대로 해결해주시리라 말할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은 그저 좋은 뜻에서 한 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귀신에게 전도 받은 것이고 복음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종교를 받아들인 것입니다. 목사님이 마음을 붙이고 있는 일에 예수님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잡아당기는 것은 기독종교입니다. 세상을 등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복음의 신앙심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마음이 세상에 붙었음을 문제시하는 설교를 하는 목사님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을 언급하고 죄 사함과 구원과 천국을 이야기하지만 전부 귀신이 만든 종교에 사로잡힌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설교입니다.
앞서 18~19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전쟁 포로는 잡혀온 적국 안에서 마음 붙일 데가 없습니다. 눈 먼 자는 토굴에 갇혀서 세상에 대해서 눈이 멀게 된 상태입니다. 무엇에 대해서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억눌려서 노예가 된 사람은 스스로 판단과 의지를 가지고 세상에 마음을 붙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예수님을 복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포로 되지 않아 자유로운 사람, 토굴에 갇히지 않아 멀쩡하게 세상을 보는 사람, 억눌리지 않아 마음껏 생각과 소원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에 마음을 붙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세상의 붙박이가 되어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예수를 전도 받으면 예수님을 끌어당기게 됩니다. 이것이 귀신이 만든 기독교라는 종교입니다.
진짜 복음을 받아들인 목사라면 교인들에게 세상에서 붙박이가 된 마음 상태에서 벗어날 것을 귀찮을 정도로 강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마음이 붙어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을 끌어당기면 귀신이 만든 종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이는 신앙심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박이 된 상태임을 인정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서는 이를 돌이키시기 위해 그 대상을 치실 것입니다. 그 대상이 건강이라면 건강을 치실 것이고, 사업이라면 사업을 치실 것이고, 자녀라면 자녀를 치실 것입니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이 택한 선민이라면 그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마음이 이 세상 어떤 것에도 붙지 못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이 아니라면 당신이 아무리 세상과 마음이 붙어있어도 하나님은 손대지 않으실 것입니다. 오히려 사업이 잘될 것이고 건강할 것이고 자녀들도 형통할 것입니다. 하는 일마다 다 잘될 것입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귀신은 전도 왕입니다. 오늘도 75억 인구 사이에서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이심을 전도하며 돌아다닐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의 붙박이가 된 사람들을 문제시하지 않고 묵인하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만들 것입니다. 귀신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 열심히 전도를 하며 세상을 누빌 것입니다. 본문에서 귀신을 더러운 귀신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귀신이 가르쳐 준 종교심의 영적 본질은 더러움입니다.
또 38~39절을 보면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사건이 나타납니다. 종교심의 특성은 열병과도 같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세상의 붙박이가 되어 세상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찾으려 합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열심히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가짐은 열병입니다. 우리가 열을 내며 추구해야 될 기쁨과 만족의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세상에 붙박이가 된 마음이 떨어져 주님께 붙기를 바라십니다. 주님께 붙은 마음만이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코 땅에 붙박이 된 상태를 유지하며 예수님을 끌어당길 대상으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고민을 덜어드릴 수 있는 길은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지불되는 마음의 대상들에 대해 십자가를 바라보며 죽어야 합니다.
지금 손대고 있는 일을 완성하고 내가 망친 일을 수습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시선을 무조건 예수님께 돌릴 수 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일들은 흥하든지 망하든지 하나님의 주권에 내어드리고 우리의 마음은 주님을 따라서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귀신은 내 속에서 내 주변에서 세상에 붙어있는 마음 상태를 확인하고 예수님을 전도할 것입니다. 이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봄으로써 세상의 붙박이 마음이 죽게 하시고 예수님을 끌어당기는 대신에 예수님을 따라가게 해주셔서 오늘도 기필코 하늘까지 도달하는 역사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