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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5일 주일 설교
시리즈 제목: 땅을 위한 하늘의 대리인들 18
설교 제목: 여호와 앞에서 산다는 것은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창세기 17:1~4
https://youtu.be/tpXHQENJ7vU?feature=shared
설교 목적: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사실 모든 인류가 하나님 앞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복 주시고 심판하신다. 그런데 특별히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선다. 하나님 앞에 선다는 말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다. 그러나 그 목적은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라는 것이다. 그 소명의 목적을 망각하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망령되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파멸이다. 그가 하나님의 뜻을 저버렸으므로 하나님도 그를 저버리신다.
나는 최근에 우리들의 삶이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사는 것임을 강조했다. 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러나 그 일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중요성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소명에 더욱 충실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철저하게 주님을 따르고 싶다. 오늘도 주님은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설교 개요:
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란?
2.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는 목적
3. 위험한 자리, 하나님 앞
4.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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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란?
금년도 우리 교회의 표어는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지금 주님 앞에 있습니다!” 우리는 금년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연습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오늘은 이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성경의 표현에 대하여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와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서 내 앞에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창세기 7:1) 노아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구세 때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창세기 17: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는 자기 남편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듣고 야곱에게 이렇게 전달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창세기 27:7). 모세는 제사장의 의복과 관련하여 하나님께 음과 같은 지침을 들었습니다: “너는 우림과 둠밈을 판결 흉패 안에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그의 가슴에 붙이게 하라 아론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흉패를 항상 그의 가슴에 붙일지니라”(출애굽기 28:30).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할 때에 갓 지파와 르우벤 지파의 사람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종들은 우리 주의 말씀대로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민수기 32:27) 신명기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절기 규정이 있습니다: “너와 네 가족은 매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을지니라”(신명기 15:20) 또한 전당물에 대한 규정도 있습니다: “해 질 때에 그 전당물을 반드시 그에게 돌려줄 것이라 그리하면 그가 그 옷을 입고 자며 너를 위하여 축복하리니 그 일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네 공의로움이 되리라”(신명기 24:13)
성경을 보면, 여호와 앞에서 산다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것과 율법을 준수하는 것, 절기는 지키는 것과 전쟁에 참여하는 것, 그리고 일상을 살아가는 것 등 모든 것에 대하여 사용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사실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그것을 믿음으로 행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온전하게 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악하게 살기도 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기도를 보면 하나님 앞에 대하여 독특한 표현이 나타납니다. 다윗도 시편 16편에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나의 오른쪽에 계시므로 내가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16:8)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 있어서 여호와 앞은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시편 63:7)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그의 날개 그늘 아래에 보호받고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의 용기와 지혜는 그가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에서 머물면서 받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을 보겠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29)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곧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떨까요? 사도 바울의 글을 보면 유독 많이 나오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 in Christ)라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린도후서 2: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 5:17)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립보서 4:13).
구약의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앞에서, 주님 앞에서 산다는 고백을 하면서 살았다면, 사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고백합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기 때문에 사도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일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 안에서 말하고 성령을 따라 행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과 같은 의미였습니다.
2. 하나님 앞으로 부르시는 목적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무슨 일을 하는 걸까요? 하나님은 우리를 왜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며, 주님 앞에서 행하기를 원하실까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나이 99세 때 나타나셔서 그에게 하나님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단지 우리를 시험하시며 도덕적으로 흠이 없이 사는 것을 바라시는 감독관은 아니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을 좀더 살펴보겠습니다: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창세기 17:2~4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시려는 것입니다. 그 언약의 목적은 그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는 것입니다. 많은 민족의 아버지가 된다는 말은 단지 후손이 많아진다는 말이 아니라 많은 민족을 먹여 살리고 가르침으로 그들에게 복을 준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미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세기 12:3).
우리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그에게 언약을 세우시는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이미 아담 부부에게 온 세상을 번영으로 인도하는 임무를 맡기셨습니다. 그런데 그 첫 사람의 배반으로 땅이 저주를 받았고 공허와 혼돈이 온 땅에 드리워졌습니다. 노아 이후에 새롭게 시작한 세대도 바벨탑을 쌓음으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세상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위대한 경륜은 다시 아브라함을 통해서 시작되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이루시려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에게 주어졌습니다.
성경에는 아브라함의 언약이 있고 이스라엘의 언약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애굽에서 건짐을 받고 부르심을 받았을 때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의 언약을 갱신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본질적으로 이스라엘의 언약도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회복 프로젝트를 목적으로 한 것입니다.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스라엘의 언약식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애굽기 19:5~6). 이스라엘의 언약은 모든 민족 중에서 하나님의 소유로 뽑혀 제사장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계 모든 민족을 축복하고 선도할 모델국가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한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은 아담 이후로 세상을 회복하시기 위하여 일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은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온 세상을 물로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시작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며 가족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인류는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죄로 가득하여 더 이상 생명이 살 수 없는 세상을 바로잡아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의로운 사람 노아를 통해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에 흩어진 민족들을 회복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 아브라함이며 그의 자손 이스라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온전하게 행한다는 말의 의미는 그 언약에 충실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한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무흠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었지만 포도주를 즐겼습니다. 아브라함은 때때로 두려워하고 비굴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나바와 다투고 서로 갈라졌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는 끝까지 그 부르심에 충실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고백했습니다(딤후 4:7).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한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했다고 하며 하나님의 시험에 참여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언약은 결혼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결혼 서약을 할 때 도덕적으로 완벽하게 살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결혼생활을 할 때 우리는 성미가 급할 수도 있고 우유부단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돈을 모을 수도 있고 씀씀이가 헤플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혼 서약에 있어서 완벽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에게 충실하겠다는 다짐을 성실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서약에 충실할 때 우리는 다른 부분에서도 점차 성숙해질 것입니다. 그것이 결혼에 담긴 비밀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하는 것이며, 그 언약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한 오래된 것으로서 이 세상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그 회복 프로젝트가 작동되는 곳에는 구원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그 일을 이루시며 성령이 그 길을 인도하신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회복하기 위하여 세우신 하나님의 대리인 공동체라고 사도들은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교회를 세우고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 펼쳐질 것을 믿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방식입니다.
3. 위험한 자리, 하나님 앞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충만하시지만, 특별히 하나님이 땅에 자신의 자리를 정하시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나신 곳이 있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거하신 곳이므로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거룩한 곳에서부터 세상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시작됩니다. 성경은 그런 곳을 에덴동산이라고 소개하며, 또한 성막과 성전이라고 소개합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며 거룩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대리인들로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는 곳에는 아무나 갈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그곳에서는 온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겨야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실 수 없고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은 더럽혀지게 됩니다. 그런 일이 성막에서 있었습니다. 제사장 아론의 아들들도 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게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목을 성경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아론의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께서 명령하시지 아니하신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더니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이르시기를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하셨느니라
아론이 잠잠하니 모세가 아론의 삼촌 웃시엘의 아들
미사엘과 엘사반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나아와 너희 형제들을 성소 앞에서 진영 밖으로 메고 나가라 하매
레위기 10:1~4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며 하나님의 경륜에 동참하는 일이지만, 그것을 가볍게 여기고 망령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몹시 위험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실 때 베드로를 통하여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사도행전에서 읽습니다. 베드로는 말하기를 그들이 감히 성령을 속였다고 책망했습니다(사도행전 5:3).
하나님 앞에서 산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를 망각한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계시록 2:5). 우리는 거룩한 부르심을 받아 영광을 얻었다가 교만하여 멸망에 떨어진 사람들을 봅니다. 그런 무리들을 위하여 주님이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
이사야 14:12~15
오늘 우리 교회에게는 두 가지 비극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얼마나 위대한 가문에 속하여 영광스러운 일에 부르심을 받았으며 하나님이 우리들을 통하여 얼마나 놀라운 일을 이루실 것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왕자로 태어났지만 거지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통치자가 될 사람들이 노예 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 날 부러워 아니하여도 나도 역시 세상 사람 부럽지 않다고 담대하게 노래하던 선배들의 찬송을 잊고 살아갑니다. 우리 선배들이 부르던 그 노래에서 왜 세상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았는가 하면, 첫째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 때문이며, 둘째는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 때문이요, 셋째는 앞으로 받을 영원한 영광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하기를,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린도후서 6:10) 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지를 잘 알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의 그 고백을 용감하고 담대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첫 번째 비극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비극은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한 사람들이 그 앞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를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하나님의 교회를 가볍게 여기고 목회자와 성도들을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대하지 않고 육신적으로 대합니다. 그럴 때마다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시들어가고 결국 세상의 단체들 중에 하나로 전락하고 맙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비극입니다.
그런 교회의 목회자와 성도들은 교회의 영광을 건물의 크기와 교인들의 숫자로 판단하며, 교회의 운영을 자기 마음대로 하여 법을 어기거나 사람들의 뜻을 외면합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력의 이양과 관련하여 가족 간의 세습을 우려하는 것은 교회를 목회자의 소유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조기 은퇴를 하고 원로목사의 자리를 마다하고 교회를 떠난 목회자가 그렇게 조명을 받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 교회가 금년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을 훈련하는 목적은 바로 이런 두 가지 비극에서 벗어나 빛나는 대리인의 대열에 동참하기 위함입니다. 그것은 저와 여러분 모두의 과제이며 기도제목입니다.
4.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흠이 없이 행하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흠이 없이 완전하다는 말은 앞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하게 사는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저는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에 있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이것은 또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6~8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며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며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믿음의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한다는 말은 성령의 생각, 믿음의 생각을 따른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기뻐하셨고 에서는 미워하셨습니다. 야곱은 장자의 축복권을 사모했습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바꾸어 버렸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많은 축복을 의미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에서가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창세기 32:25) 장자의 명분은 나에게 유익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시는 약속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런 에서의 행동을 망령된 것이라고 경고합니다(히 12:16). 여기서 망령되다는 말은 금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선을 마음대로 넘어가 버리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이 하실 일을 기대하겠습니까? 그것이 육신의 생각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고 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의 아내를 얻게 위하여 하란으로 종을 보낼 때 절대로 이삭을 데려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설령 며느리를 얻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었음을 의미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삭도 가뭄을 만났을 때 하나님이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100배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제사장의 영역을 자기 마음대로 침범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왕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많은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만, 그가 하나님을 믿었으며 성령으로 행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기름부으신 사람을 자기 임의대로 처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은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며,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세상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프로젝트에서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이 일하실 것을 믿는 언약입니다. 이 언약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복에 참여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물려주시는 새로운 창조세계를 받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전한 때가 이르기 전에는 이 세상에서 완성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세상을 미리 보여주는 공동체를 이룰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모이는 교회이며 든든하게 세우기를 원하는 공동체입니다.
지금부터 4천년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모든 말씀이 무엇을 가리킵니까?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이며,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완성하실 새로운 세상이 무엇인지를 기대하라는 뜻 아닙니까? 그것을 모르거나 기대하지도 않는다면 그는 육신적인 사람이며, 에서처럼 망령된 일을 서슴지 않고 할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는 비록 하는 일이 작아도, 심지어 옥에 갇혔을지라도 그는 기뻐하고 또 기뻐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우는 하나님의 경륜이며, 그것에 충실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금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십니다. 할렐루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