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無門關) 십오칙(十五則)
동산삼돈(洞山三頓) 육십방을 치리라.
본칙(本則) 역(譯)
운문에게 동산이 가르침을 받으러 왔기에 운문이 물었다. 최근에 어디를 떠나왔는가? 동산이 말했다. 사도에서 왔습니다. 운문이 말했다. 여름엔 어디에 있었는가? 동산이 말했다. 호남의 보자사에 있었습니다. 운문이 말했다. 언제 거기를 떠났는가? 동산이 말했다. 8월 25일에 떠났습니다. 운문이 말했다. 네게 세 차례 방망이질할 것을 봐주었다. 동산이 다음 날 다시 찾아가 문안을 드리면서 물었다. 어제 화상께서 세 차례 방망이질할 것을 봐주셨는데 허물이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운문이 말했다. 밥통아! 강서와 호남으로 이렇게 돌아다녔느냐? 동산은 이에 크게 깨달았다. 雲門因洞山參次, 門問曰, 近離甚處. 山云, 查渡. 門曰, 夏在甚處. 山云, 湖南報慈. 門曰, 幾時離彼. 山云, 八月二十五. 門曰, 放汝三頓棒. 山至明日, 卻上問訊. 昨日蒙和尚放三頓棒. 不知過在甚麼處. 門曰, 飯袋子, 江西湖南, 便恁麼去. 山於此大悟.
평창(評唱) 역(譯)
무문이 말했다. 운문이 그때 곧바로 본분초료(本分草料)를 주어 동산으로, 하여금 따로 한 가닥 살아날 방도가 있게 함으로써 가문이 쓸쓸해지지 않았다. 하룻밤을 시비(是非)의 바다속에 빠뜨렸다가, 곧바로 날이 밝아 다시 오는 것을 기다려 또 그에게 가르침을 베푸니, 동산이 즉시 깨달았으나 아직 영리하다고 할 수는 없다. 자, 여러분에게 묻노니, 동산이 세 차례의 방망이질을 받을 만한가? 받을 만하지 않은가? 만약 받을 만하다고 한다면 초목과 수풀도 모두 방망이를 받아야 마땅하고, 만약 받을 만하지 않다고 한다면 운문은 거듭 헛소리를 한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하다면 바야흐로 동산과 더불어 같이 호흡하게 될 것이다.
無門曰 雲門當時, 便與本分草料, 使洞山別有生機一路, 家門不致寂寥. 一夜在是非海裏著到, 直待天明再來, 又與他注破, 洞山直下悟去, 未是性燥. 且問諸人, 洞山三頓棒, 合喫不合喫. 若道合喫, 草木叢林, 皆合喫棒. 若道不合喫, 雲門又成誑語. 向者裏明得, 方與洞山出一口氣.
송(頌) 역(譯)
게송으로 읊다. 사자는 새끼를 당혹케 하는 방법으로 가르치나니, 앞으로 뛰려고 머뭇거리자마자 얼른 몸을 뒤집는다. 느닷없이 거듭 펼쳐 정통으로 맞추었으니 앞 화살은 오히려 가벼웠으나 나중 화살은 깊도다. 頌曰 獅子教兒迷子訣, 擬前跳躑早翻身. 無端再敘當頭著, 前箭猶輕後箭深.
사족(蛇足)
동산삼돈(洞山三頓)의 동산(洞山)은 동산양개(洞山良价) 선사(禪師)가 아니고, 동산수초(洞山守初) 선사(禪師)를 말한다. 중국 선사들의 선문답(禪問答)은 꼭 어디서 왔느냐? 무엇 하려고, 왔느냐? 로 묻고 답을 한다. 사는 산 이름 따라 고승 선지식(善知識)의 이름이 들어나기 때문도 있고, 찾아온 수좌의 답변하는 살림살이 내공(內功)도 엿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십오칙(十五則) 동산삼돈(洞山三頓) 공안화두(公案話頭)는 문답(問答)이 날짜까지 세세하게 묻고 답을 해서 맹맹한 문답이다. 운문선사(雲門禪師)는 운문종(雲門宗)을 창종(創宗)한 고승(高僧)이다. 운문선사(雲門禪師)는 생지(生知)라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생이지지(生而知之)한 천재(天才)로 알려져 있다. 황벽선사(黃蘗禪師) 회상에서 제일좌(第一座)를 지낸 목주선사(睦州禪師)를 찾아가서 도안(道眼)는 얻게 된다. 목주선사 가풍은 누가 찾아와 도를 물으면 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운문선사가 목주선사를 찾아간 날도 문을 닫고 안에서 누구냐? 고 벼락같은 고함을 쳤다. 문밖에서 운문선사가 원컨 대 큰 스님의 지도를 받고자 찾아왔습니다. 목주선사가 문을 빼꼼히 열고 잠깐 보고 문을 닫아버렸다. 사흘 동안 매일 문을 두드리고 닫고, 문전박대였다. 나흘째 되는 날도 똑같이 찾아가 뵙기를 청하자 문을 빼꼼히 열고 보는 찰나에 틈을 타서 문을 열어 재치면서 방으로 뛰어들자 목주선사가 멱살을 움켜주고 문을 닫자 발목이 문틈에 끼어서 통증으로 주저앉자 멱살을 잡고 한마디 일어보라고 하는데 한 마디도 못이르자, 운문선사를 밖으로 내 밀치면서 하는 말이 진시지도역찬(秦時之鍍轢鑽)이라고 했다. 진시황이 아방궁 지을 때 쓰던 큰못이란 뜻으로 너무 크니까 작은 집에는 쓸모없는 밥벌레라는 뜻이다. 선수행(禪修行)은 이렇게 치열하다. 목숨도 걸어야 한다. 이렇게 치열하게 구도했던 운문선사는 동산의 참방을 받고 너무 느슨하고 맹맹한 문답이다. 다 묻고 다 답하고 삼돈방(三頓捧)을 때리겠다고 한다. 중국 형법은 일돈방(一頓捧) 이십방(二十捧)이다. 그러면 육십방(六十捧)을 때린다는 뜻이다. 묻는 답에 하자(瑕疵)가 없는 사실인데 무슨 잘못 허물이 있다고 육십방(六十捧)을 맞아야 한단 말인가? 그 말 듣고 밤새 밤잠을 설친 꼴이다. 이른 새벽도 찾아와 따지듯이 묻는다. 선사들은 찾아온 납승(衲僧)에게 자존심(自尊心)을 깎아내려 분심(憤心)을 유발(誘發)시키는 언어로 개오(開悟)하게 한다. 혜개선사 평창에 동산이 무슨 허물이 있어 삼돈방(三頓捧)을 맞아야 하는가? 묻고 있다. 이것을 밝혀내는 것이 동산삼돈(洞山三頓)의 화두를 푸는 열쇠다.
화옹송평(和翁頌評) 역(譯)
참방한 동산을 운문이 물으니, 거처 행각 한곳 상세히 답했으나, 동산을 육십방을 때린다고 운문사 답을 하니, 아연실색 밤잠도 설치고 동산은 또 묻는구나! 參訪洞山問雲門 居處行脚詳細答 洞山三頓雲門答 啞然失色不眠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