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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19
에베소서 1장 3-14절 [3장 5-6항]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3장은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에 대한 고백으로 작정의 대상은 모든 만물입니다. 특별히 인격적 피조물에 대한 작정을 예정이라고 하는데, 3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어떤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었고 다른 사람들과 천사들은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이 되었습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되었든, 영원한 사망으로 예정되었든 하나님은 이 두 부류를 통해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정된 천사들과 사람들은 각자 불변하게 정해져서,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정확하며, 따라서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의 작정은 그분의 속성처럼 불변하도록 정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4항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이 두 부류 중 선택하신 자와 관련된 것으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오직 은혜만으로 선택하실 뿐만 아니라, 예정하실 때 구원의 방편까지도 다 정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오늘 본문을 통해 분명히 보여줍니다. 일단 에베소서 1장 1절과 2절은 여느 서신들처럼 에베소 교회와 성도를 향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3절 이하는 곧바로 ‘찬송하리로다’라고 하면서 찬송해야 할 이유들을 설명하는데, 세 부분을 나누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3절에서 6절입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찬송해야 할 이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3절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하여 성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그분의 아들이 되게 하셨는데, 선택의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두 번째는 7절에서 12절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여 그분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또한 그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데 있다고 할 때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량하시고 기업이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 사함 없이는 거룩하고 흠이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할 목적만 가지시는 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택하신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가 되게 할 목적도 가지십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머리요 교회가 그의 몸이라고 할 때 몸 된 교회의 구성원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택하신 자들이요, 그런 그들이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된다고 할 때 거기에는 하나됨이란 없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13절과 14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기업이 되는 것은 진리의 말씀 곧 구원의 복음을 듣고 믿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이 모든 것까지 작정하시되 믿는 자들에게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시기까지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정리하자면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이 있는데, 신앙고백서 3장 3항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영생으로 예정된 사람들입니다. 영생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주실 것까지 정하셨고, 죄 사함을 주시기 위해 복음을 믿도록 할 것까지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들을 향한 목적은 거룩하고 흠이 없는 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로 기업을 삼으시되 기업의 보증으로 성령 하나님까지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영원 전부터 정하시되 결국 궁극적으로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가? 6절, 12절, 1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선택하신 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신앙고백서를 보면, 먼저 5항에서 하나님께서 무조건적으로, 2항에서 언급했지만 예지가 아닌 은혜로 선택하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뜻의 비밀한 의논과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하셨습니다(엡1:4,9,11, 롬8:30, 딤후1:9, 살전5:9). 그들 중 어떤 자의 믿음이나 선행이나 견인의 어떤 미리 봄이 없거나 혹은 그를 어디로 움직이는 조건들이나 원인들과 같은 다른 어떤 것이 없는 하나님의 단순한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부터(롬9:11,13,16, 엡1:4,9)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모든 찬양을 위해 [선택하셨습니다](엡1:6,12).
생명으로 예정되었다는 것은 3항에서 영원한 생명과 영원한 사망이라고 할 때 전자를 대상으로 합니다. 그들은 누구도 예외 없이 인류에 속한 자들로 있게 됩니다. 인류에 속한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시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인정하신다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시간의 역사 가운데 나타난 자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는데, 여기서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선택하셨다는 것은 모든 만물이 창조되기 전에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 하나님 외에 다른 어떤 것도 존재하기 전입니다. 시간 전이기 때문에 그 시점이 언제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영원 전에 모든 것을 작정하시되, 인격적 피조물과 관련하여 일부는 영원한 생명으로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펼쳐보게 되면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1장에서 창조의 대략을, 2장에서는 모든 창조의 으뜸인 사람의 창조와 관련해서 더욱 자세하게 기록합니다. 3장에서 타락에 대해 설명하고 이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여줍니다. 이런 시간 속에서의 역사로 나타나기 이전부터,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간단하게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모든 사람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자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시고서 그때 비로소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와 타락이라는 시간의 역사가 나타나기 전부터, 영원 전부터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정에 대상에 대한 논쟁으로 타락 전 선택과 타락 후 선택이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방금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자들이 타락한 모습을 보시고서 그때 비로소 구원하여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전부터 그렇게 하셨다고 말했지만, 타락 전과 타락 후는 시간 전과 후의 대한 내용이 아닙니다. 예정의 대상에 대한 논쟁으로 둘 다 영원한 선택에 대한 것이지만 하나님의 선택이 타락한 자들 가운데 선택하는 것인지(타락 후), 아니면 창조하시고 난 뒤 타락하게 될 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인지(타락 전)에 대한 논쟁입니다. 그러니까 타락 전 선택은 [선택과 유기 - 창조 - 타락]의 순서로 정하셨다면, 타락 후 선택은 [창조 - 타락 - 선택과 유기]의 순서로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결코 선택의 예정이 시간 이전에 이루어진 것이냐, 시간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냐에 대한 논쟁이 아닙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작성되기 전 도르트 신조가 작성이 되었는데,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우리의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토르트 신조는 타락 후 선택 입장을 취합니다. 1장 7항입니다(박일민 번역). “선택이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기 이전에,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주권적이고도 기쁘신 뜻을 따라서, 스스로의 허물로 인하여 본래의 도덕적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죄와 멸망에 빠진 온 인류 중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중보자와 택자들의 머리와 구원의 기초로 영원히 작정되어진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도록 하신 하나님의 변치 아니하시는 뜻이다...” 여기서 ‘스스로의 허물로 인하여 본래의 도덕적 지위를 지키지 못하고 죄와 멸망에 빠진 온 인류 중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으로 표현하는데, 타락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타락 후 선택의 내용입니다.
도르트 신조가 고백하는 것처럼 개혁주의 안에서 다수의 개혁자들은 타락 후 선택을 지지합니다. 왜냐하면 사건이 일어난 역사적 순서가 논리적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순서로 이해하면 결국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타락하신 자들 가운데 일부를 선택하시고 일부를 유기하심으로 선택된 자들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시며 유기하신 자들을 통해서는 그들의 죄에 대한 공의를 드러내는 것으로 강조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일부는 타락 전 선택 입장을 취했는데, 이것은 목적을 먼저 정하시고 그 목적을 위한 수단을 정하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선택과 유기를 정하시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 창조와 타락, 구원이라는 순서로 작정하십니다. 타락 전 선택은 선택과 유기가 창조와 타락보다 앞서 정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타락을 고려하지 않고 누구는 선택하시고 누구는 유기하기로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이 강조될 수밖에 없습니다. 도르트 신조가 작성될 때는 고마루스(F. Gomarus)라는 신학자가 타락 전 선택 입장이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작성될 때는 총회의 의장이었던 윌리엄 트위스(William Twisse)가 타락 전 선택 입장이었습니다. 특별히 윌리엄 트위스는 로마서 9장 11절을 타락 전 선택 입장을 더욱 분명히 하는 구절로 반박하기도 했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결과물은 타락 전, 타락 후라는 어떤 뚜렷한 입장으로 고백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존 페스코의 경우는 신앙고백서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타락 후 선택이라는 방향으로 기울여져 있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합니다(역사적, 신학적 맥락으로 읽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하지만 신앙고백서 자체는 뚜렷한 견해를 선택적으로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일하심에 있어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과 예정에서 더더욱 하나님의 주권이 강조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 타락 전 선택이 하나님의 영광이 더욱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신앙고백서의 내용으로 오면,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은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에 하나님께서 그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과 그의 뜻의 비밀한 의논과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생명으로 예정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을 위해 선택하신 사람들인데, 영원하며 불변하신 목적은 오늘 본문인 에베소서 1장에서 세 번이나 밝혀주고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3항에서 강조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그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어떤 자들은 선택하시고 어떤 자들은 유기하신다는 겁니다. 5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5항 마지막 부분에 가면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모든 찬양을 위해 선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비밀한 의논과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선택하신 사람들입니다. 왜 그들을 선택하셨는지 그 이유는 우리가 알 수 없습니다. 거저 우리는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사랑하기로 하셨다는 것밖에는 알 수 없습니다.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할 때(롬9:13) 사랑할 만한 이유가 야곱에게 있고 미워할만한 이유가 에서에게 있어서가 아닙니다. 조금 전에 로마서 9장 11절을 언급했지만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서만 그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의 비밀한 의논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하나님의 선한 기뻐하심이 있습니다. 마지못해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억지로 선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고, 또한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있습니다. 물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셨지만 결국 타락도 정하셨습니다. 보시기에 심히 좋은 상태로 만드셨지만 하나님과 같아지려고 하는 마음으로 불순종했을 때 죄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조차 선히 보시고 그것을 기뻐하시는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타락하실 것도 정하셨지만 타락 이후 구원하실 것도 정하셨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모든 것을 다 정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선한 기뻐하심을 따라 선택하신 것입니다.
이어지는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설명하는데, 그들 중 어떤 자의 믿음이나 선행이나 견인의 어떤 미리 봄이 없거나 혹은 그를 어디로 움직이는 조건들이나 원인들과 같은 다른 어떤 것이 없는 하나님의 단순한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부터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모든 찬양을 위해 선택하셨다고 고백합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시는 것은 그 자신을 원인으로 하지 다른 것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2항에서 하나님은 미래나 혹은 어떤 조건들 위에 장차 일어나려는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에 어떤 것을 작정하지 않으셨다는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5항은 조금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즉 예지예정을 비롯한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에 반하는 모든 것을 거절합니다.
물론 로마서 9장 13절에 대하여 알미니안주의자들은 그들 입장에서 이 구절을 해석하기도 합니다(이하 김병훈 교수 글 참고, http://repress.kr/19686/).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할 때 우리는 야곱이라는 인물을 사랑하시고 에서라는 인물을 미워하였다고 한다면, 저들은 야곱과 같은 부류의 사람은 사랑하시고 에서와 같은 부류의 사람은 미워하신다고 해석합니다. 그럼 야곱과 같은 부류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고 보신 그것으로 선택하시는 예지예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에서와 같은 부류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서 미리 보시고 보신 그것으로 유기하시는 예지예정입니다. 그러나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알미니안주의의 해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확고히 선언합니다. 그래서 오직 선택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고 고백합니다.
실제로 로마서 9장 13절 전후에 나오는 여러 말씀들을 보면 이러한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 합니다. 11절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15절과 16절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8절에서는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이처럼 하나님의 의지와 주권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에 19절 이하에서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 것입니다.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롬9:19-23)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어떤 사람의 믿음이나 선행이나 견인의 어떤 미리 봄으로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를 어디로 움직이는 조건들이나 원인들과 같은 다른 어떤 것들 때문에 선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로마서 9장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주권적인 의지만이 원인입니다. 야곱을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단순한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단순한 값없는 은혜와 사랑으로 선택하셨다고 해서 아무런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선택의 목적은 그의 영광스러운 은혜의 모든 찬양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입니다. 그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어떤 이들을 선택하시되 창조하시고 타락까지도 작정하시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은 신앙고백서가 고백하는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선택하신다고까지 고백입니다. 택자이기 때문에 모든 인류가 아담 안에서 타락하지만, 타락한 상태로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시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선택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의 영광이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할 때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영원한 영광에 이르도록 하실 것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으로 예정된 인류에 속한 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분명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났다는 것을 증거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만 원인이 있는 것이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에 원인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안에서는 이러한 선택을 무조건적인 선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6항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그것에 덧붙여 모든 방편들을 예정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목적만이 아니라, 그 목적에 이르도록 하는 수단과 방편까지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방금 언급한 그리스도도 선택을 위한 수단이요 방편이십니다. 일단 신앙고백서 3장 6항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신 것처럼, 그의 뜻의 영원하며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그것에 덧붙여 모든 방편들을 예정하셨습니다(벧전1:2, 엡1:4,5, 2:10, 살후2:13). 그러므로 선택된 그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여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었고(살전5:9,10, 딛2:14), 적합한 때에 역사하시는 그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고, 의롭게 되고, 자녀로 삼아지고, 거룩하게 되고(롬8:30, 엡1:5, 살후2:13), 그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됩니다(벧전1:5). 오직 택자 외에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지 못한 다른 어떤 자도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거나, 의롭게 되거나, 자녀로 삼아지거나, 거룩하게 되거나, 구원받지 못합니다(요17:9, 롬8:28-39, 요6:64,65, 10:26, 8:47, 요일2:19).
이 내용은 8장 중보자 그리스도, 10장 유효적 소명, 11장 칭의, 12장 양자, 13장 성화, 14장 구원받는 믿음, 15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 16장 선행, 17장 성도들의 견인, 18장 은혜와 구원의 확신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해당 주제를 살필 때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것입니다. 여기서는 대략적으로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살펴볼 텐데,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시면서 그 목적을 위한 모든 방편도 정하셨다고 할 때 모든 방편을 정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의 영광을 위하여 간섭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을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대로 실행하는 것처럼, 다시 말해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예정론 즉 선택이나 유기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을 향한 목적을 정하시고, 정하신 목적을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편까지 하나님께서 친히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은 유일한 원인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방편을 정하셨다는 것은 선택하셨다는 사실 때문에 방편을 무시하거나 방편들에 대해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도 염두 해 두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선택의 방편으로 그리스도를 두셨고, 그 그리스도를 믿어야지만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리스도 없는 구원을 말할 수 있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가 성화의 과정을 거친다고 할 때 이미 의롭다 함을 받았기 때문에 성화에 있어서는 마땅히 해야 할 열심을 품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택자를 영광에 이르도록 정하셨다고 할 때 그들을 위한 방편은 어떤 것들이 있는가? 가장 먼저 선택된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아담 안에서 타락하도록 정하셨다고 해서 하나님이 죄의 저자, 죄의 승인자가 되는 것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으로 결코 죄의 저자, 죄의 승인자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죄의 저자, 죄의 승인자가 되지 않는 방식으로 죄를 작정하실 수 있고, 작정하신다면 작정하신 결과 실행의 역사로 나타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아담 안에서 타락하지만, 선택된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이 됩니다. 이것은 5항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는 것이 실행의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 것인데,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가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 없이 영원한 생명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는 일이 있느냐? 없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만 영원한 생명으로, 또한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역사는 오늘날 우리의 시점에서 보자면 과거의 일입니다. 구약 백성의 시점에서 보자면 미래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점으로 하자면 그리스도 이전이 구약이고 그리스도 이후가 신약인데, 구약 백성들이 오실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방식이든 아니면 신약 백성들이 오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방식이든 적합한 때에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심을 받도록 하십니다. 효력 있는 부르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부르심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인데, 모든 부르심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 주에 살필 유기 부분에서 언급되겠지만 부르심은 있는데 효력이 없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르심 자체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택된 자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되되, 적합한 때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이르도록 효력 있게 부르십니다.
이러한 부르심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지고, 거룩하게 됩니다. 이러한 방편들을 소위 구원의 서정이라고 말하는데,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의롭다 하심, 자녀 삼으심과 같이 단회적인 것이 아니라 점진적입니다. 로마서 8장 30절에 보면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하는데, 전체를 다 요약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서정을 잘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특히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롭게 하신 하나님께서 결국 거룩까지도 책임지실 것임이 틀림없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또한 이런 이유로 신앙고백서의 내용처럼 성령의 능력으로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보존되는 것으로 나타난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모든 내용은 오직 택자 외에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다음 주에 보게 될 유기자들은 그리스도에 의해 구속받지도 못하고, 효력 있는 부르심을 받지도 못하며, 의롭게 되거나, 자녀가 되거나, 거룩하게 되거나, 구원을 받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미 4항에서 고백하고 있는 것처럼 선택이든, 유기든 그렇게 예정된 자들은 각자 불변하게 정해져서, 그들의 수는 매우 확실하고 정확하며, 증가되거나 감소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내용 속에서 우리가 몇 가지 주목할 것이 있는데, 그의 뜻의 영원하며 가장 자유로우신 목적에 의해 모든 방편들을 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어떤 조건이나 원인을 고려한 바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5항 선택하시는 내용만이 아니라, 방편을 정하시고 실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방편들 가운데 가장 먼저 언급되는 것이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대신하여 죗값을 치르셨다고 해서 선택하신 모든 자가 이어지는 구원의 서정 내용 없이 죄 용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대속은 구약 백성에게는 미래의 일이요 지금 우리에게는 과거의 일이지만, 신앙고백서가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적합한 때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주실 때 실제로 죄 용서의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에 의한 구속만이 아니라 효력 있는 부르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 양자됨, 성화, 그리고 견인 등의 모든 구원의 서정은 불필요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하며 그 길을 걸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방편들을 통해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영광에 이르도록 만들어 가십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은 그 형편이 어떠하든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영광이 이르도록 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여기에 예정론이 주는 참된 위로가 있습니다. 비록 구원의 과정 속에서 고난 없는 신자는 없지만, 그래서 현실의 삶이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지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영원 전에 선택하신 자들이라면 그래서 영광에 이르도록 하실 목적을 가지고 계시다면 반드시 우리를 그 자리에 앉히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택자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방식인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