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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문화사(17)-상주(尙州)
경상남도와 경상북도를 아울러 이르는 경상도(慶尙道)라는 말은 고려 충숙왕(忠肅王) 즉위 초인 1314년에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머리글자를 따와서 만든 행정 용어인데,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다. 이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상주가 영남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역이었는지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사벌국(沙伐國)이라는 작은 나라의 중심지이기도 했던 상주 지역은 고구려, 백제, 가야, 신라가 대립하던 시기에 신라에 복속되면서 서북쪽으로 진출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자리매김했다. 신라가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편성할 때는 9주의 하나였고, 전국을 10도로 편제한 고려시대에는 영남도(嶺南道)의 중심 지역이었다. 고려 후기에 전국을 8목(牧)으로 나눌 때도 상주는 여기에 들어갈 정도로 중요시되던 지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전국을 8도로 나누었는데, 경상도 전체를 총괄하던 관청인 감영(監營)이 상주에 설치되면서 행정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기차를 중심으로 하는 교통체계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중심 지역이 되지 못했고 면(面)으로 내려앉았다가 읍(邑)을 거쳐 1980년에 시(市)로 승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벌국’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였던 상주 지역은 첨해왕(沾解王, 247~261)이 정복하여 멸망시키고 ‘사벌주(沙伐州)’을 설치하면서 신라의 땅이 되었다. 1530년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조선 후기의 역사서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등에는 ‘사벌’을 ‘사량벌(沙梁伐)’로도 부른다는 기록이 있다. ‘사량벌’에서 ‘사벌’로 바뀌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법흥왕(法興王) 때인 525년에 상주(上州)로 바꾸었다가 555년에는 진흥왕(眞興王)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강등시켰는데, 경덕왕 16년(757년)에 지금의 지명인 상주(尙州)로 고쳤다. 지명의 변천 과정을 보면 ‘사량벌, 혹은 ‘사벌’은 고유의 전통을 지니고 있으면서 매우 오래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사량벌’은 ‘沙梁+伐’의 구조로 되어 있는데, ‘沙梁’이 중심어이므로 이에 대한 분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문장의 구조로 보아서는 이것은 이두 표기인데, 이 표현이 있는 자료를 찾기 어려워서 그 뜻을 정확하게 짚어내기는 어렵다. 다만 신라가 성립하는 데에 핵심적인 구실을 했던 6촌(六村)이 6부(六部)로 개편되는 과정에 대한 기록에 ‘沙梁’이란 명칭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나마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6촌 중 경주 남산이 근거지였던 부족을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이라고 했는데, 유리왕 때인 서기 32년에 사량부(沙梁部)로 바꾸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高墟’를 ‘沙梁’으로 번역한 것인데, 한자를 이두식 표현으로 바꾸었다는 점이 특이하다. 신라 초기에는 남산을 돌산(突山)으로 불렀다는 것인데, 뫼의 모양이 평지에 불룩하게 튀어나와 솟아오른 형태여서 지형적 특성을 잘 살린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지대이면서도 흙으로 된 평평한 공간을 지칭하는 말이 ‘高墟’인데, 이것이 ‘沙梁’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근거로 상주의 옛 땅이름에 쓰인 ‘沙梁’, 혹은 ‘沙’의 뜻을 파악할 수 있다.
‘沙’는 물에 의해 깎이고 부수어진 작은 돌인 모래라는 뜻을 기본으로 한다. 물이 흐르는 주변에 모래가 쌓여서 만들어진 높은 곳이면서 사람들이 모여 살 수 있는 공간을 지칭하기도 하는데, 지명으로 쓰일 때는 주로 이 뜻이다. 그러므로 ‘沙’는 ‘높다’라는 뜻을 가진 ‘高’와 직접 연결된다. ‘梁(들보 양, 다리 양)’은 강 위를 가로질러 나무로 놓은 다리라는 뜻인데, 뫼 같은 데에서 가운데가 솟아 있으면서 평평하여 두두룩한 모양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 글자 역시 지명으로 쓰일 때는 평평하고 두두룩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梁’은 흙으로 된 언덕이면서 평평한 공간이라는 뜻을 가진 ‘墟(언덕 허)’와 연결된다. 그러므로 ‘沙梁’은 ‘높고(위) 평평한 공간’이라는 뜻이 된다.
‘沙梁伐’에서 ‘伐(칠 벌)’은 중심어가 아니므로 한자의 소리를 빌어 우리말을 표기하는 이두의 원칙으로 보면 높으면서 넓고 평평하게 생겨서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을 가리키는 벌, 혹은 벌판이라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이두에서 ‘伐’은 ‘原’, ‘州’, ‘城’, ‘省’, ‘弗’, ‘火’ 등과 같은 용법으로 쓰여 일정한 경계가 있는 곳이면서 사람들이 모여서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는 높고 드넓은 공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량벌’, 혹은 ‘사벌’은 ‘높은, 혹은 위에 있는 지역’이 되어 ‘윗벌’, ’윗 고을’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게 된다.
‘사벌’의 우리말이 ‘윗벌’이라면 그 아래에 무엇인가가 있고 그것을 기준으로 이런 땅이름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아래에 해당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실마리는 진흥왕이 정한 ‘上洛’이라는 지명에서 찾을 수 있다. ‘上洛’은 문장 구조상으로 볼 때 ‘洛’의 위(上)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러므로 ‘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밝히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이 글자는 중국 황하의 지류인 ‘洛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강 주변에는 13개의 왕조가 1500년 이상을 도읍지로 정했던 곳이면서 고대 중국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낙양(洛陽)이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만큼 ‘洛水’는 중국 문명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강이었다. 일반적으로 ‘洛’은 ‘물 이름’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원래 뜻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洛’은 ‘水(물 수)’와 ‘各(따로 각)’이 결합한 형태인데, 앞의 글자는 뜻을 담당하고 뒤의 글자는 소리를 담당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 형성자(形聲字)에 속한다. ‘水’는 물이라는 뜻을 기본으로 하는데, 물과 관계가 있는 글자에는 예외 없이 ‘氵’가 붙는다. ‘各’은 사람의 발(足)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진 ‘止(그칠 지)’를 거꾸로 한 것과 사람이 사는 곳을 지칭하는 ‘口(입 구)’가 아래위로 결합한 글자인데, 각각의 사람들이 바깥으로부터 집 안으로 들어와 한곳에 모인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대명사로 쓰이는데, 둘 이상의 각각, 모든, 둘 이상이 서로 다른 것 등의 뜻을 나타낸다. ‘洛’은 여러 개의 물이 흘러와서 합쳐지다가 되므로 ‘洛水’는 여러 물길이 모인 강이라는 뜻이 된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는 물길은 낙동강이 대표적이다. 낙동강의 발원지는 강원도 태백시 황지(潢池)로 알려졌지만, 조선시대에는 태백 황지, 순흥 소백산, 속리산 문장대, 혹은 문경 조령의 세 군데에서 나온 물이 합류하여 낙동강이 된다고 했다. 물길이 합류하는 지점 중 가장 아래에 있는 곳을 상주 부근으로 보아 이곳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기까지의 물길을 총칭하여 낙동강으로 부른다고 했다. 여기에서 보듯이 낙동강은 경상도 지역 전체를 뒤덮어 흐르는 것으로 여러 개의 물줄기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강임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은 말하기를, “낙동강은 수레바퀴의 살이 바퀴통으로 모이고, 몸의 근육이 모두 연결되듯이 여러 개가 모여서 하나로 합쳐진다(輻湊筋會而歸于一)”라고 했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태백산 황지에서 나온 물이 서남쪽으로 가서 낙동강이 되고, 동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潢水出太白山 西南爲洛東 又東南入于海)고 했다.
여러 물길이 합쳐진다는 뜻을 가지는 ‘洛’이 이 강의 본질을 나타내기에 가장 합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명칭에 이 글자를 넣은 것으로 파악되는데, 그래서 그런지 조선시대 주요 문헌에도 ‘낙동강’과 함께 ‘낙강(洛江)’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낙강’은 낙수(洛水)와 같은 뜻이기 때문에 ‘洛’의 원래 뜻을 잘 살린 명칭이라고 할 수 있다. ‘낙강’이라는 이름이 먼저 있었고 ‘東(동녘 동)’은 나중에 붙였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한데, 이 글자가 매우 난해해서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
‘東’은 허신(許愼)이 설문해자에서 “해(日)가 나무 사이에 있는 것을 나타내는 글자로 만물이 생기는 근원이 되는 동쪽을 나타낸다”라고 한 이래 이것이 정설처럼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이런 뜻으로 알려졌다. 허신은 상(商), 주(周) 시대의 글자 모양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전국(戰國)시대에 지금의 ‘東’과 비슷한 형태로 변화된 것을 보고 이런 설명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갑골문을 비롯한 고대의 글자들을 보면 전혀 다른 모양으로 되어 있어서 이 설명에 의문이 든다.
‘東’의 초기 형태는 주둥이가 양쪽으로 열려 있으면서 아래위의 끝이 묶여 있는 전대(橐) 모양으로 되어 있다. 크지 않은 물건을 넣어 운반할 수 있는 것이면서 밑바닥이 없는 주머니를 ‘橐(전대 탁)’이라 하고 밑바닥이 있으면서 아래쪽이 막혀 있는 큰 주머니를 ‘囊(주머니 낭)’이라고 하는데, ‘東’의 초기 형태가 바로 이런 전대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무겁다는 뜻을 가진 ‘重(무거울 중)’의 초기 글자에도 사람이 전대를 등에 지고 있는 모양인 것을 보면 ‘東’의 원래 뜻은 물건, 혹은 ‘전대’라는 의미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것이 전국시대를 지나면서 현재와 비슷한 모양으로 바뀌고 동쪽을 나타내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아직 밝혀내지 못한 상태이다. 이런 점으로 보면 ‘洛東江’은 ‘여러 개의 물길이 모여 하나로 합쳐져서 흐르는 강’이라는 뜻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상주는 낙양(洛陽)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그 동쪽에 있는 물’이어서 낙동강이라고 했다는 주장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상주라는 땅이름으로 돌아가 보자.
신라 법흥왕 때의 지명인 ‘상주(上州)’는 무엇인가가 아래에 있고 그것의 위, 혹은 꼭대기에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지사자(指事字)인 ‘上’은 땅, 혹은 기준선을 나타내는 ‘一(하나 일)’에다가 위쪽을 나타내기 위해 아래의 것보다 길이가 짧은 ‘一’을 위에 놓은 형태(二)였다가 점차 지금의 모양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글자는 높은 곳, 위, 위쪽, 하늘, 군주 등의 뜻을 나타낸다. 진흥왕 시대에는 ‘상락(上洛)’으로 지명이 바뀌는데, ‘洛’의 위쪽이라는 뜻이다. 즉, 상락군으로 불렸던 상주 지역은 ‘낙강’, 혹은 ‘낙동강’ 상류에 있는 지역이라는 의미가 된다. 상주 부근에서부터 바다로 들어가는 곳까지의 강 이름을 ‘낙동강’이라고 부른다는 조선시대의 기록으로 봐도 이 해석이 가장 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덕왕 시대에 이르면 지금의 지명인 상주(尙州)로 바뀌는데, 앞 시대의 땅이름이 가진 뜻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尙(오히려 상)’은 기(氣)가 위로 흩어지는 것을 가리키는 ‘八(여덟 팔)’과 북쪽(위)으로 나 있는 창문을 의미하는 ‘向(향할 향)’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형성자(形聲字)로 창문 같은 구멍을 통해 기운이 날아간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글자의 기본 뜻은 위, 높음 등이 되고 ‘높이다’, ‘숭상하다’, ‘더하다(增)’, ‘멀다(遠)’ 등으로 확대되었다.
우리말로는 ‘윗 고을’이라고 할 수 있는 ‘상주(尙州)’는 글자에 대한 해석만으로는 정확한 뜻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사벌국’->‘사벌주’->상주(上州)->상락군(上洛郡)->상주(尙州)로 땅이름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뚜렷하게 보이는 ‘낙강(洛江)’, 혹은 ‘낙동강’을 넣어서 생각하면 ‘낙동강 상류에 있는 고을’이라는 뜻이 들어 있음을 쉽게 간파할 수 있다. ‘상주’가 ‘사벌국’이었을 때의 것으로 알려진 유적이 남아 있는데, 낙동강 바로 서쪽 강가에 있는 ‘병풍산성’이 그것이다. 동쪽과 북쪽, 서쪽은 낙동강과 병성천이 막아주고 남쪽은 병풍산이 그야말로 병풍처럼 둘러쳐 있어서 공격과 방어에 아주 유리한 천혜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낙동강의 시작 지점에 있는 지역이어서 상주라는 땅이름이 붙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황지에서 내려오는 물길부터 바다에 들어가는 곳까지를 모두 낙동강으로 부르고 있지만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상주 부근부터 김해까지의 물길을 통틀어서 ‘낙동강’이라고 불렀다고 했으니 ‘상락(上洛)’은 상주의 지형적 특성을 가장 잘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복잡하면서 다양한 성질을 가진 물길이 여러 방향에서 내려와 합쳐진다는 특성을 고려하여 ‘낙강’에 ‘東’을 넣어 ‘낙동강’이라 하고 그것이 시작되는 지역을 ‘상주’라고 함으로써 ‘다양한 물길’이라는 것과 ‘크고 새로운 강이 시작된다는 것’을 하나의 땅이름에 모두 담아내고 있으니, 선인들의 지혜에 놀라움과 탄복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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