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단과 합동하는 문제는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다음날 속회에서 칠산교회의 장석천 목사는 우리 교단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장기간 설명하고 교단합동의 타당성을 역설함으로써, 다시 여론을 조성해 나갔다. 이 안건은 이미 결정된 사안이었음에도, 또다시 들고 나온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에 대해 예산의 이덕여 회원이 교회합동의 문제를 대리 감독과 서기에게 일임하여 내용을 자세히 알아본 다음 진행하기로 동의하여 가결되었다. 하나의 교단이 존속하느냐 사라지느냐 하는 참으로 중차대한 문제를 몇몇 임원의 손에 맡기려 했던 것도 문제지만, 이미 가결된 사안을 다시 들고 나와서 장로교단과 우리 교단을 합하려 했던 몇몇 지도자들의 의식과 행태는 오늘날 우리에게 경계되어야 할 편의주의와 사대주의의 표본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여기서 역사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한국 침례교의 정체성을 바로 세워보자는 노력보다는 일종의 실용성 논리에 밀려 교단의 정체성을 벗어 던지려고 하는 행동은 비판받아야 할 일이다.
그렇다면 1946년 첫 교단회의에서 교회합동의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 일까? 장석천 목사 자신의 설명처럼, 교단의 인물부족과 재정부족 때문에 이대로는 우리 교단을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일까? 만일 이들의 제안이 받아들여졌다면, 오늘날 한국 침례교회는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까? 회의를 모두 지켜본 나는 장목사 일행이 교단합동을 들고 나온 배경의 가장 큰 이유를 펜윅 선교사의 체제에 대한 불만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목사는 평소 펜윅 선교사의 교회 행정체제에 불만을 보여 왔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번 기회에 “탈동아기독교”를 이루려고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장목사는 펜윅 선교사에 의해 목사직을 박탈당한 적이 있었다. 목사직 박탈이라는 중징계를 받은 원인은 교단 임원과 회원의 자녀들에게 세상 학문을 배우지 못하게 했던 교육정책을 그가 비판하고 거역했기 때문이다. 당시 펜윅 선교사의 교육정책은 일부 젊은이들이 반발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급기야 어떤 이는 교인들을 이끌고 타교단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서도 대거 젊은 층이 주동이 되어 교단합동을 추진하였다는 것은 그런 그들의 심경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펜윅 선교사의 선교정책이 다소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공과를 여기서 논할 생각은 없다. 다만 우려되는 것은 펜윅 선교사와 동아기독교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방법에 관한 것이다. 일개 개인적인 감정으로 그런 일을 추진했든, 범교단적인 장래를 위해 반기를 들었든, 적어도 교단의 정체성을 포기하거나 전복하려고 하는 극단적인 처방은 문제가 있다. 잘못된 것은 중지를 모아 형편에 따라 개선해 나갈 일이다. 대부분 분열이라고 하는 것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독소는 자신들의 아픔을 껴안을 인내와 섬김의 정신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다. 이것은 주님의 방법과 다른 것이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그런 모습들이 여기저기에서 드러나고 있다. 선조들의 순교적 신앙을 외면하고, 타교단과 합동하려고 했던 지난날의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신앙태도는 참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모습이 아닐 수 없다. 과거의 사건들을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우리 교단이 오늘날 처해 있는 현실을 볼 때, 그 때의 교단합동 시도와 같은 역사의 교훈은 우리가 귀담아 새겨들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