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호를 둘러보고 이내 근처 줄무덤 성지를 찾았다
줄무덤은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묻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으로 줄묘라고도 부른다.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들을 탄압할 때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교도들이 매장되어 있다.
총 37기가 있으며, 주로 가족 단위로 매장되어 있다. 주위에 없어진 10개의 인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교 탄압 때 마을 전체가 화를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내포 예산과 당진의 경계인 신리에 한양에서 조상이 돈 꽤나 주무른 중인이기에 이존창은 조상이 남겨준 재산을 가지고 내려온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관과 탐욕스런 주변 양반 찌그러기의 수작에 땅을 거의 빼앗기다시피 억울한 일들을 당한다
그러다가 다시 한양의 생활이 그리워 한양을 찾았다가 전에 친분이 있었던 초기 천주교 학자들과 교류하며 천주교에 입문한다
세상의 부조리를 몸소 체험한 그에게 천주교 교리는 일대 구세주 같은 자각을 갖게 되고 그 이후 그 누구보다 독실한 천주교 교리를 실천한다
그 이존창이 다시 내려와 충청도 내포지역을 중심으로 그 주변 예산, 당진, 홍성, 공주지역까지 천주교 교리를 전교한다
그의 힘으로 초대신부 김대건 가문이 천주교에 입문하고 또 그의 누이를 아내(최양업 모친 이존창 누이)로 맞은 이곳 최양업 경주최씨 가문도 천주교에 입문했을 것이다
그리고 국가권력이 탄압하는 천주교박해에 의해 온 집안 아니 온 고장 사람들이 순교의 참혹한 결과를 맞는다
이러한 일들이 200년 전 이곳에서 일어난 것이다
어쩌면 이때 천주교 전파 과정에서 이존창의 누이 같은 혼척관계 때문에 한 집안에 여자가 잘못 들어오면 집안이 망한다라는 속설이 생겼으리라 물론 이존창의 누이가 이곳에 천주교를 전파한 것이 아니고 최양업 조부인 최인주가 천주교를 전파했지만 사람들의 입들은 그렇게 사설을 만들며 입방아를 찧었을 것이다
이곳 청양 다락골 성지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자리한 곳이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빼내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최양업 우리나라 제 두번째 신부의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아명(兒名)은 양업,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1821년 3월 홍주(洪州) 다락골(현재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 새터 마을에서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 사람들은 조선 천주교 초창기부터 대대로 신자였으며, 그의 부모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했다.
1836년에 입국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모방(Maubant) 신부에 의하여 김대건(金大建), 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조선인 신학생으로 선발되었고, 그해 12월 3일 유학길에 나섰다.
3명의 신학생들은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 해인 1837년 6월 7일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고,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마카오에 도착한 지 몇 개월이 지난 1837년 11월에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였다.
1842년, 프랑스의 세실(Cecille) 제독은 조선 원정을 계획하면서 조선인 신학생을 통역으로 동행시켜 줄 것을 신학교에 요청했다.
최양업과 김대건은 각자 다른 군함을 타고 마카오를 떠났으며 그해 9월 상해에 도착했다.
난징 조약〔南京條約〕 체결 이후 세실이 조선 원정 계획을 포기하자 최양업과 김대건은 계속 북상하여 요동에 도착했다.
여기서 김대건은 조선 입국로 탐색을 위해 떠나고, 최양업은 조선대목구장 페레올(Ferréol) 주교가 머물고 있던 북만주의 소팔가자(小八家子)로 가서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1844년 12월 10일경 최양업은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이후 김대건 부제는 귀국로를 탐색하기 위해 떠났고, 최양업 부제는 소팔가자에 머물러 있다가 1846년 초에 귀국을 위해 메스트르(Maistre) 신부와 함께 두만강 근처의 훈춘(琿春)으로 갔다.
그곳에서 중국 관원에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소팔가자로 돌아왔다. 그해 김대건 부제는 상해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9월 16일에 순교하였다.
최양업 부제는 1846년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다시 한 번 귀국로를 탐색하던 중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으며, 조선 교회 밀사들의 만류에 따라 귀국을 포기하고 파리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가 이전되어 있던 홍콩으로 출발하였다.
1847년 초 홍콩 대표부에 도착하였고, 그해 7월 28일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프랑스 해군 군함을 타고 조선으로 갔으나 배가 난파되어 8월 12일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상륙하였다가 상해로 돌아와야만 하였다.
1848년 상해에 설립된 예수회의 서가회(徐家匯) 신학원에서 마지막 신학 수업을 마친 뒤, 1849년 4월 15일 예수회의 강남대목구장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되었다.
1849년 5월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해로를 통한 귀국을 다시 시도하여 백령도(白翎島)까지 갔으나 신자들이 타고 온 배를 만날 수 없었다.
이에 상해로 귀환하였다가 요동으로 가서 훗날 제4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되는 베르뇌(Berneux) 신부의 보좌로 차쿠〔岔溝〕성당에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1849년 말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봉황성 책문에서 조선 교회의 밀사를 만나게 되었고, 12월 3일에는 밀사들의 권유에 따라 메스트르 신부를 요동에 남겨 둔 채 혼자 귀국하였다.
1850년 조선에 입국하자마자 6개월 동안 5개도에서 사목 활동을 했는데, 이후에도 수년간 광범위한 지역의 사목을 도맡아 해야 했다. 프랑스 선교사제들이 입국하면서 그의 관할 구역은 점차 축소되었으나 프랑스 선교사제들이 담당하고 있던 구역에 비하면 여전히 넓었다. 선교사제들이 들어가기 힘든 곳은 조선인 사제인 최양업 신부가 담당해야 했다.
또 조선인 사제 양성에도 관심을 갖고 있어 1854년 3월에 3명의 조선인 신학생들을 배편을 이용하여 말레이 반도 서쪽 섬인 페낭(Penang)에 있던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냈다.
1861년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으나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덮쳐 그해 6월 15일에 숨을 거두었다. 시신은 11월 배론신학교(충북 제천시 봉양읍 구학리)의 뒷산에 안장되었다. 그가 숨진 지역에 대해서는 문경, 진천 배티, 진천의 다른 장소 등의 논쟁이 있다. 당시의 기록에는 지명이 나와 있지 않으며, 후대의 증언 자료에 따라 견해가 나뉜다.
라틴어로 작성한 서한이 있으며, 이 서한들은 기존에 알려진 19통 외에 2013년에 추가로 확인된 2통을 포함하여 현재 21통이 있다. 서한에는 사목 활동, 천주교회의 사정, 조선 정부와 조선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 등이 담겨져 있으며, 1839년에 순교한 부모의 약전과 최(해성) 요한 순교자의 약전도 포함되어 있다. 이후에도 순교자 행적을 조사하고 그 자료를 다블뤼(Daveluy) 주교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교우 중에 특히 배우지 못한 서민계층을 위해 난해한 교리와 종교적 사상에 음률을 달아 조선인의 전통적 생활감정에 맞도록 노래를 통해 천주교 교리를 쉽게 전달해주는 천주가사(天主歌辭)가 만들어져 신자들 사이에 퍼졌는데, 「사향가」 · 「사심판가」 · 「공심판가」 등이 최양업 신부가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에 관한 저작 여부를 증명해 줄 명확한 문헌적 근거는 현재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중 〈사향가〉는 천주가사 가운데 이본이 가장 많고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애송되던 작품으로 인간의 본향(本鄕)이 어디인지 생각하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이런 분위기가 전해져 결국 경상도 땅 최제우 동학창시자가 용담유사 동경대전 등을 집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개인적으로 추정한다
1846년 당시 페레올 주교는 1839년 순교자들의 행적인 『기해일기』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한편 1846년 순교자들의 행적을 새로 저술하여 홍콩 대표부에 있는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에게 보냈다.
주교의 지시에 따라 최양업 부제는 기해년 순교자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여 파리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로 보냈다.
또 1859~1860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교리서와 기도서 번역 및 수정 작업을 했다. 1861년 최 신부가 사망한 후, 그해 8월 경 서울에 목판 인쇄소가 건립되었으며, 이곳에서 교리서 『성교요리문답』이 인쇄되었다.
1862년에는 기도서인 『천주성교공과』가 인쇄되어 신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천주교 서적의 한글 번역에 최양업 신부의 공헌이 컸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으로서 첫 번째 신학생이며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는 현재까지 ‘땀의 증거자(순직)’로 지칭되고 있을 정도로, 12년에 걸친 그의 전교 활동은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현재 일반인은 김대건 초대신부에 대해서만 주로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의 발자취와 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는 너무나 현격하게 다른 처우를 일반인에게 받고 있다
같이 신학을 출발한 최양업 신부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관심갖기를 바라며 이곳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