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3월 남자 중학교 1학년 8반
그 전날까지 68명의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우고 처음으로 가슴 벅차게 교단에 섰던 날이다
교단에 서고 첫 가정방문 날이었다
우리반 4번이었던 작은 아이 호섭이네를 찾아갔다
언덕을 오르고 올라서 찾아가니 대문도 없는 집 단칸 사글셋방에 살고 있었다
아빠는 일용직으로 나가고 엄마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셔서 호섭이가 살림을 하고 있었다
그날도 초등학교 다니는 동생 밥해 먹인다고 수도도 없는 집에서 펌프질을 하며 쌀을 씻고 있었다
선생님 오셨다고 너무 반가와하며 부엌 딸린 방으로 들어오시란다
앉아계시라고 하며 연탄 불 아궁이로 가더니 솥에서 시루떡 한덩이를 꺼내 온다
“어제가 엄마 제사였어요 선생님 드리려고 남겨 놨어요“ 중학교 1학년 남자아이가 엄마 젯상을 차렸단다
그 떡을 둘이 맛있게 먹고 땀범벅되어 들어온 동생을 보고 돌아왔다
세상에 태어나 첫번째 아픈 손가락이었다
다음날 휴게실에서 가정방문 다녀온 선생님들이 모여 각자의 아픈 손가락들을 얘기했다
밥도 못해 먹고 있는 집에 쌀포대 들여놓고 왔다는 선생님, 라면박스 들고 갔다는 선생님,
애들 데리고 나가 같이 짜장면 먹고 온 선생님등 많은 얘기가 있었다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선생님이 오신다니까 반가이 맞아주며,
사과 몇 개를 봉지에 넣어 굳이 손에 들려 주던 학부형도 있었다
그렇게 정을 나누며 보내던 뒤숭숭하고 어지럽던 80년 봄의 학교 생활이었다
그해 여름이 들어서던 하늘이 맑은 날 아침,
그날따라 아래 위로 하얀색 옷을 입고 아이들 만날 기쁨으로 일찍 학교에 갔다
교무실을 들어서는데 학생 주임 선생님이 부르신다
”노 선생 얼른 교실로 가 봐“
뛰어 가보니 교실이 엉망이었다
책상이 엎어져 있고 의자가 뒹굴어 있고 두 아이가 피 묻은 얼굴로 꿇어 앉아 있었다
68번 우리반 부반장 종우랑 또 덩치 좋은 성주랑 싸움이 붙은 것이었다
다행히 너무 이른 시각이라 아이들은 몇 명 없었다
처음 맞닥뜨려본 이 상황, 어떻게 정리하나?
아이들 상태를 보니 병원 갈 정도는 아니었다
우선 불어 터져 피난 곳만 닦아주고 약을 사오라고 같이 내보냈다
터진 곳 멍든 곳에 약을 발라주고 자초지종을 들은 후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어봤다
”부모님께 전화해서 오시라고 할까“ 했더니 두 놈 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루 벌어 먹고 사는 부모님 걱정하게 안하려는 나름 효도였다
”둘 다 많이 다치진 않았으니까 서로 화해하고 교실 정리 할래?“ 했더니 그제야 웃으며 그러겠단다
그 후로 두 아이들은 잘 지냈는데 학교 출근 할 때면 오늘 또 무슨일 있으면 어쩌나 걱정 되긴 했었다
그때 그 부반장 종우는 내 교사 생활 중 참 마음 아픈 아이 중 하나였다
눈빛이 매섭고 세상 보는 눈이 좀 어둡긴 했어도 키도 크고 잘 생기고 똑똑한 아이였다
엄마가 시장에 좌판 깔아 과일을 팔고 아빠는 시골에서 일하면서 몇달에 한번씩 집에 오는 어려운 가정이었다
2학기 가을 쯤 학교에 안나오기 시작했다
힘든 일이 있었는지 어느날 밤 가족 모두가 야반도주를 했단다
시장으로 찾아갔던 날 옆 상점 주인분이 알려주셨다
그 아이가 어느 곳에서든지 계속 공부하길 바랬고 가끔 생각이 났다
지금도 생각하면 흐뭇해지는 대견한 녀석도 있다
우리반은 체육 시간이었고 교무실에서 서류 정리 중이던 나를 부르러 반장이 뛰어왔다
“선생님 종필이 팔이 부러졌어요”
체육 시간에 축구를 하다가 서로 부딪히면서 팔이 꺾여졌나보다.
놀라서 운동장으로 가보니 체육 선생님이 부목으로 응급 치료를 하고 계셨다
뼈가 부러진건 아닌지 병원으로 얼른 데려가자고 하신다 병원에 가는 동안 아파하는 아이를 차마 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치료 받는 동안 이를 악물고 소리 한번 내지 않는 종필이가 얼마나 대견스러웠는지 모른다
그렇게 장난도 많이 치고 까불까불하던 개구쟁이가 의젓한 대학생이 되어 남고에 있는 나를 찾아왔다
시큰시큰 아프던 손가락들이 시간이 지나면 힘껏 주먹 쥘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도 했다
중학교 남자 아이들은 얼마나 장난이 심한지 잠시만 방심하면 사고가 일어난다
한참 수업 중인데 가운데 쯤 자리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가보니 비명 지른 아이 뒷머리통에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뒤에 앉은 녀석이 심심했는지 샤프심으로 앞 친구 머리를 찌른 것이다
크게 싸운것도 아니고 억하심정이 있던 것도 아니고 피도 나지 않으니 저희들도 그냥 웃는다
놀란 가슴 쓸어내리며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냥 웃기만 했다
지금도 생각하면 피시식 웃음이 나오는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큰 사고 작은 사고들이 끊임없이 일어나도 학교에 찾아와 책임을 묻는 학부형은 없었다
웬만한 일은 저희들끼리 해결하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고자질도 안하던 아이들이었다
조금 큰 문제는 담임과 학생주임이 부모님 면담으로 해결하곤 했다
지금 신문에 나오는 그런 문제들보다 더 심각했지만 학교로 따지러 오거나 법을 들먹거리는 사람도 없었다
정년퇴직까지 학교에 남아있던 동료 교사들과 연락할 때면 빨리 그만두고 싶다고 했다
”노선생, 옛날 같지 않아 학생들이 너무 무서워“
학생이 교사를 폭행하고 학부모가 교사를 고소하고 결국 경험없는 초임교사들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물러나는 현 세태를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접할 때가 있다
안타까운 마음이면서도 “아 그래도 나는 다행이었구나”하는 안도감을 느낀다
여고에서 근무할 때 만난 또 하나 아픈 손가락 성자
그 아이가 우리반이 된 걸 알고는 여중에서 올라온 선생님이 조언을 해주었다
중학교도 수업 일수 겨우 채워 졸업한 아이라고.
그런 성자가 입학 얼마 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방과 후 어둑해질 때 쯤 가정방문을 갔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는데 성자가 등에 어린아이를 업고 김치를 담그고 있었다
새엄마가 낳은 동생을 돌보고 집안 살림하느라 학교를 못나온 것이었다
수학여행 가는 버스 안에서 성자가 노래를 하는데 옛날 트롯트를 그렇게 잘 부를 수가 없었다
수업 중 아이들이 지루해하면 노래를 부탁하곤 했는데 성자의 그 행복해하던 모습이 너무도 좋았다
결국 졸업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생활 전선으로 뛰어들었지만 성자의 구성진 노랫가락은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1986년 야간 산업체 특별학급을 맡은 적이 있었다
산업체에 근무하고 있는 근로 청소년들에게 주경야독의 기회를 주기 위해 인근 고등학교에 부설된 특별학급이었다
성실하게 일하고 공부하고 싶은 열의가 있으면 산업체에서 추천해주고 지원하는 것이었다
산업체 학급은, 수업은 하고 담임은 맡지만 학생들 생활 관리는 산업체에서 책임지는 방식이었다
오후에 출근하고 밤에 퇴근하며 수업 부담도 없어 아이 키우는 엄마 교사에겐 좋은 기회라 지원을 했었다
우리반 아이들도 낮에는 모두 공장에서 일하고 퇴근 후 피곤한 몸으로 밤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시골에서 올라왔기에 혼자 밥 해먹고 사는 외로운 아이들이었다
그 중에 미화는 경상도에서 올라온 아이로 순하고 수업도 열심이었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개학 후에 본 미화가 얼굴색도 안좋고 몸도 좀 불어 있는것 같아서 교무실로 불렀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니.? 몸 아픈건 아니고?”
몸이 안좋아 붓기가 있다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괜찮다는 말에 잘 챙겨 먹고 힘들면 찾아오라 하고 돌려보냈다
가을 수학 여행도 같이 갔었다
수학여행 다녀 온 얼마 후 미화가 결석을 했다
산업체 아이들은 많이들 학교를 빠지기에 곧 오겠지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고 며칠 후 출근 했을 때 보건 선생님한테 병원에서 전화가 오고,
학생주임 선생님은 경찰서에서 온 전화를 받고 계셨다
전화 받은 후 학생주임 선생님이 조용히 부르시더니 “노선생 반에 미화 학생이 있어?” 물어보신다
미화가 화장실에서 아기를 낳고 겁이 나니까 신문지에 싸서 버렸단다
주변에서 신고를 하고 병원으로 실려 갔단다
”노선생은 아무 책임 없으니까 그냥 있어요 내가 경찰서에 갔다 올테니까“
그렇게 마무리를 해주셨다
경상도 산골에서 아버지가 오셔서 미화를 데려 갔다는 말씀만 전해 들었다
어린 나이에 혼자서 얼마나 무섭고 힘들었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서늘하다
한번은 나이가 많으신 할머님이 찾아오셨다
엄마 아빠 대신 손자를 양육하고 계셨다
서류 떼는 것을 다 도와드린 후 배웅하려는데,
할머니가 앞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원짜리 지폐 몇 장을 꺼내시더니 내 손에 꼭 쥐어주신다
깜짝 놀라 다시 할머니 손에 쥐어드리려하니 손사레를 치시며 내 손에 넣어주고 손을 꼭 잡으신다
손자 잘 봐달라는 말씀도 안하시고 그저 손만 꼭 쥐고 계신다
시장에서 생선 팔고 나물 판 돈인줄 알기에 그 따뜻한 마음에 상처 드릴까 고맙다며 그냥 받았다
그 돈을 한참동안 쓰지 못하고 교무실 책상 서랍에 간직했었다
많이 배우지 못하고 가진 것 없던, 그때 그 학부형들은 교사를 최고라고 존경했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말 한마디라도 더해줄거라는, 학교만이 유일하게 교육 받을 수 있는 곳이란 믿음을 갖고 있었다
선생님이라 불리우는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던 때였다
교사 생활 중 가장 아픈 손가락 하나는 재준이다
얼굴이 맑고 순수하며 부모님들도 교육에 관심이 많으신 아이였다
내가 교사 생활하는 동안 가장 아끼고 예뻐했던 아이들 중 하나였다
수업 끝나고도 친구들이랑 같이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고 아카시아 꽃 따기 놀이도 하던 맑고 순수한 아이였다
가정 얘기 친구얘기 이런저런 것들을 많이 나누면서 재밌게 학교생활을 하던 재준이었다
중학 졸업을 하고 조금 먼 고등학교로 진학한 재준이를 점심시간에 교문 밖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알던 재준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는 덥수룩하고 단추 풀린 사복에 슬리퍼를 찍찍 끌고 있었다
같이 있던 친구들도 그렇고 겉모습만으로도 불량기가 많아 보였다
너무 놀라서 어떻게 지내냐는 말도 못 꺼냈다
옆에 같이 있던 선생님들이 수업 들어가야한다며 잡아끄는 바람에 잘 지내라고 팔 한 번 잡아주고는 돌아서야만 했다
말썽도 어지간히 부리던 아이들이 대학도 가고 사회생활도 잘하고 있는데,
얌전하고 공부도 잘하던 아이들이 눈빛이 달라져 평범한 생활을 못하는 것을 볼 때가 있다
떡잎만 보고서 함부로 평가할 수 없는게 자라나는 아이들인 것 같다
아이들은 특히 남자 아이들은 여름 방학을 한번 지나고 오면 눈빛들이 많이 달라져서 오기도 한다
방학 때 있었던 일을 영웅심으로 무용담으로 자랑스럽게 반 친구들에게 얘기한다
또 주변 아이들은 그 얘기들을 부러워하며 귀를 솔깃 세우고 들으며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도 가진다
방학 끝난 후의 아이들은 세심한 관심이 더 필요했다
내 손가락은 열개 뿐이 안되는데 내가 쓰다듬어줘야하는 아이들은 60명 70명이나 되었다
그 많은 아이들 중 내 손이 가지 못했을 아이들, 나로 인해 상처도 받았을 아이들, 일부러 내가 외면한 아이들,
한 명 한 명 모두를 아픈 손가락 싸매듯 할 수없었던 나를 원망했을지도 모르는 아이들.
수십년이 지난 지금 그 아픈 손가락들이
또 다른 아픈 손가락들을 만져주고 부벼주고 있기를 바랄 뿐이다
(*학생들 이름은 실명이 아닙니다)
첫댓글 일상의 잔잔한 이야기
마치 제가 노현남 선생님의 제자로 반에 있는 것 같이 실감합니다
거의 모두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 때엔 힘들고 아프고 어려움도 많았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은 같이 아파 해주고 같이 울고 웃고 서로 도와주며 정으로 맺어진 순수한 마음들이 더불어 살았었죠
지금도 그 때가 마냥 그립기만 합니다
따스한 이야기 올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회 전체가 자기 중독증을 앓고 있는
'터'가 무너져 가고 있는 세상이 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좋은 놀이터야 할 학교가 사라져감이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때가 그리운 우리들은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소시적 학창시절을 떠어오르게 하는 글이군요.
많은 친구들 지금쯤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생각하고
또 많은 은혜와 배움 주셨던 선생님들은 아직 건강하실까?
아득히 막연하게 급급하게 살아온 세월이 야속하게 느껴집니다.
이 글을 읽고 옛날을 회상해보는 시간을 갖어봅니다.
그리고 그동안 정을 나눈 수많은 인연들을 외면한채
여기 캘거리에 나홀로 서있는 나를 생각캐 되는군요 .
글 너무 잘 봤어요..
글을 쓰면서 나의 삶을 되돌아보고 정리해봅니다
애쓰고 아픔, 아쉬움보다는 그리운 것들이 더 많이 생각납니다
남아있는 날들 동안 많은 인연들을 또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나의 언어로 나의 세계를 만들며,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과 마음을 나누고 싶습니다
그 사람이 친구이지요!!
오늘 하루도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