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 동탄에서 친구를 만난다하여 나도 오랜만에 같이 전철 타고 올라가 독산성을 찾았다
마을길을 걸어 민가 밭기슭을 통해 독산성으로 올랐다
독산성은 548년에 백제가 차지하고 있던 산성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548년에 백제가 한강 이북에서 차지하고 있던 산성이다. 독산성의 위치에 대해 종전에는 『일본서기』에 근거하여 ‘고산(孤山)’을 독산(獨山)이라고 추정하여 충남 예산군으로 비정하였다.
최근에는 ‘한강 이북'에 있었다는 기록과 고구려의 용병으로 예(말갈)의 군사가 동원된 점에 주목하여 경기도 양주와 포천 등이 거론되고 있다. 독산성의 위치는 475년~551년 사이 한강 유역의 영유권을 논란과 백제와 신라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고구려가 예(濊: 말갈)의 군사를 동원해 공격했지만 신라군의 지원때문에 성의 공취에 실패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 고구려본기 · 백제본기에는 548년에 같은 사건의 내용을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내용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548년 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545~559)이 예(濊)의 군사 6천 명을 동원하여 한북(漢北)에 있는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신라의 장군 주령(朱玲, 또는 朱珍)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패하여 물러갔다.
독산성의 위치는 기왕에 충남 예산군으로 보는 견해가 많았다. 이들이 주목한 것은 『일본서기(日本書紀)』 였다. 곧 『일본서기』 권19, 흠명천황(欽明天皇) 9년(548) 4월조에 고구려가 침입한 것으로 나오는 마진성(馬津城)을 백제가 멸망한 후 당이 설치한 현에 “마진현은 본래 고산이다(馬津縣本孤山).”이라고 한 것에서 착안하였다. ‘고산(孤山)’= ‘독산(獨山)’이라는 것이다. 『삼국사기』 지리지 웅주(熊州)에 따르면, 고산현(孤山縣)이 충남 예산군이다.
그러나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주요 교전지역과 동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의 구원군이 파견되기에도 충남 내륙의 예산군은 어울리지 않는다. 독산성의 위치에 대해 '한강 이북(漢北)'에 있었다는 기본적인 전제와도 부합하지 않는 문제를 안고 있다.
독산성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는 어렵지만, 고구려의 용병으로써 예(濊)가 동원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는 추가령구조곡을 통해 한강 방면으로 서남진해 백제를 침략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의 침입경로를 고려할 때, 북한강이나 임진강 유역, 곧 경기 동북부나 강원도 철원 지역으로 위치를 비정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구복은 『고려사(高麗史)』 열전, 김취려전(金就礪傳)에 나오는 경기도 양주의 독산(獨山)을 주목하였다. 또한 김병남은 독산성의 위치를 경기도 포천으로 위치 비정하기도 했다.
548년 당시 한강 이북의 독산성이 백제의 영유 하에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그 이전에 백제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현재 학계에는 475년~551년 사이 한강 유역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논란이 분분하다. 기왕의 통설이 ‘고구려 영유설’이라면, 최근에는 연구자마다 한강 유역 회복시기와 범위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백제 영유설’을 주장하는 연구 성과도 축적되고 있다. 독산성의 위치가 한강 이북이라면 ‘백제 영유설’의 논리가 좀 더 보강되는 셈이다.
한편 433~434년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은 이후 5세기 후반에 이르면 두 나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495년 이후 동맹군의 활동이 없었는데, 이때 이르러 다시 공동으로 군사활동을 한 것이다. 541년에 백제가 신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관계를 다시 복원한 후 구체화된 첫 결실이었다. 곧 548년 독산성 전투는 ‘나제동맹’의 추이와 관련해서도 의미가 있다.
이런 백제시대 독산성과 연관 오산 독산성과 세마대지는 과연 연관이 있을까? 오산 독산성은 쌓은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전략적 요충지에 자리하였으므로, 한강 하류에 도성을 두었던 백제시대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독산은 본래 석대산, 향로봉이라고 불려 왔고 조선시대에는 독산성이라 불려 왔으나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폈던 진묘한 병법 전략에 연유해 지금은 ‘세마산’ 또는 ‘세마대’라고도 부르고 있다
이 산성은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곧 1593년(선조 26) 7월에 전라도관찰사 겸 순변사였던 권율(權慄)이 근왕병 2만 명을 모아 북상하다가 이곳에 진을 치고서 왜적을 물리쳤고, 이듬해 9월 11일~14일에는 백성들이 힘을 모아 불과 4일 만에 고쳐 쌓았다.
이러한 과정은 주변에 알려져 금지산성(衿之山城)에서도 군량을 모으고 병사를 훈련시켰으며, 월계산성(月溪山城)과 파사산성(婆娑山城)까지 영향을 미쳤다. 1595년에는 포루(砲樓) 시설을 갖추었고, 1597년 2월에는 왜병이 쏜 조총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성벽 안쪽에 평평한 집을 지었으며, 석차(石車)와 함께 투석용으로 쓰던 포차(抛車)를 배치하면서 성 밖에 목책을 세우려고 계획하기도 하였다.
위에서 임진왜란중 4일만에 고쳐 쌓았다 했는데 그 주인공은 우리 동사공 오정위 공의 외조 서경 유근 선생이 이곳 관찰사로서 이 독산성을 수리한 기록이 나온다
그 뒤 임진왜란이 끝난 뒤에는 전략적 위상이 계속 중시되어, 1602년(선조 35)에 변응성(邊應星)이 수리하여 쌓았다. 1796년(정조 20)에 수원성 축조와 함께 고쳐 쌓아 오늘에 이르는데, 당시 성의 둘레는 1,800보이고 성문 4곳이 있었다고 한다.
이 산성은 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기에는 물이 부족한 편이다. 이것은 세마대(洗馬臺)을 낳았다. 곧 1593년에 권율이 이곳에 주둔하였을 때 왜군이 와서 산에 물이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물 한 지게를 산 위로 올려보내며 조롱하였다.
권율은 물이 많은 것처럼 보이기 위해 백마를 산 위로 끌어 올리고서 목욕시키는 것처럼 흰 쌀을 끼얹었다. 이를 본 왜군은 말을 씻길 만큼 산 꼭대기에 물이 풍부하다고 생각하고는 물러났다고 한다.
세마대는 1957년에 복원되었다. 지난 번 왔을 때는 이 세마대 공사가 한창이어서 못 봤는데 이번엔 세마대가 완전히 개방되었는데 오늘도 독산성 남문 주변 유적 발굴로 인해 인부들의 잡다한 물품들로 어수선하였다
세마대가 1957년 중건되면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권위에 의해 본인 친필로 세마대란 현판을 붙여 현재도 그대로 있다
조선후기에는 사도세자가 온양온천으로 병치료를 위해 행차한 후 정신을 말끔이 가다듬고 한양으로 오르며 이 독산성에서 하룻밤을 묵어간 일이 있었다 그 날 사도세자는 주변의 백성들을 위무하며 미래의 임금으로서 그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러나 그 뒤 임오화변으로 사도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가둬 죽이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 아들 정조 때 이 독산성을 허물려하는 논의가 있자 아버지 사도세자의 흔적이 있는 곳이기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가르침과 백성과의 돈독함을 보이는 유적으로서 정조대왕이 유난히 이 독산성을 의미에 두고 아꼈던 역사가 있다 정조의 효심을 볼 수 있는 유적지 중 하나가 바로 독산성이다
지금도 이렇게 독산성 서문에서 보면 사도세자와 정조가 묻힌 융건릉을 바라볼 수 있으며 정조의 아들 순조는 한때 현륭원 보호를 위해 독산성 서문을 폐쇄시키는 단호함을 보이기도 했다
독산성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본성의 총연장은 1,100m이며 내성은 350m이 달하는 아담한 산성이다.
독산성 안에는 보적사가 있다
용주사 본말사지에 의하면 보적사는 창건당시 이세계 중생의 질병치료, 수명연장, 재화 소멸, 의복, 음식 등을 만족케하고 부처의 행을 닦아 무상보리의 진리를 터득케 한다는 약사여래를 모신 약사전을 정전으로, 독산성의 역사와 함께 오랜 세월을 같이 했으나 1990년 도광정운(道光正云)스님의 불사 때 석가여래불을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창정전이 건립되면서 대웅전으로 명칭이 변경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적사는 백제의 고성인 독산성 정상하단 동문 앞에 위치해 있는데, 삼국시대에 독산성을 축성한 후 성내인 현재의 터에 전승을 기원하기 위해 창건된 이래 여러 차례의 전란으로 인한 중건을 거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적사란 이름이 지어진 것은 백제시대 보릿고개로 끼니조차 잇기 어려운 노부부가 겨우 쌀두되만이 남아 있어 굶어죽을 지경에 이르러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부처님께 바치겠다고 결심한 후, 공양후 집에 돌아와 보니 곡간에 쌀이 가득차 있는 기적이 발생하였다고 하며 열심히 공양하여 보화가 쌓인 신통력 있는 사찰이라 하여 보적사라 명명되었다고 한다.
그외 독산성 내 독산성 산림욕장도 있어 탐방객들이 많이 찾아 마음의 힐링을 만든다
내려오는 길엔 양산봉을 거쳐 한신대 방향으로 내려왔다
한신대 만우관이 산밑에서 곧바로 이어져 있는데 이곳엔 류동운, 윤한봉 열사들의 추모비가 세워져 있다
두 분 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다 젊은 나이로 비명에 간 인물들이다
박정희의 유신독재와 전두환의 광주민주항쟁의 희생자이다
한신대의 뿌리들이 이렇게 나름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는데 작금 이 나라의 개독들이 더 많아 이 숭고한 정신들을 이용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등쳐먹는 족속들 그리고 친미 친일로 보수의 탈을 쓴 채 수많은 한민족의 백성을 고통에 빠뜨리게 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럽다
내가 이 한신대를 돌아볼 즈음 때마침 서울 김구선생기념관에선 이 나라의 반민족반헌법행위자 열전이 10여년간의 산고 끝에 출판을 하게 된 기념 기자회견이 있었으니 다시는 이 땅에 이런 국가라는 조직의 허명으로 백성에게 피해를 주는 인간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간곡히 소망한다
아울러 반헌법행위자 열전을 만드는 한홍구 교수 같은 이 시대의 선각자들이 한 하늘 아래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이렇게 2026년의 봄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따스하게 나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