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사회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어떻게 치켜질 수 있는가? 이상호(소소감 리더십 연구소 소장)
22세기를 사는 우리는 대중사회 상황에 살고 있다. 대중사회 상황은 대중이 자기 내부의 정체성과 가치 상황보다는 대중적 상황에 민감하며 대중적 상황을 지향하고 거기에 의존하면서 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대중사회 상황에서 대중의 심리와 생활을 이끄는 상당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대중 매체다. 텔레비전, 핸드폰, 특히 최근에 와서 유튜브와 인스타그램 등을 포함한 각종 SNS 매체들은 대중들에게 절대 필요한 존재가 되었으며 대중은 거기에 거의 의존하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속의 대중들은 이성적인 사고보다는 타인 지향적인 감정적인 사고를 지향한다. 대중사회의 특징이 진지함보다는 즉흥적이고 감각적인 것을 지향하기 때문에 대중사회의 각종 매체 역시 감각적인 요소로 순간순간 대중을 사로잡는다. 여기에는 대단한 상업주의가 깊이 개입되어 있다. 따라서 대중사회의 모든 매체는 돈과 연결되어 있으며 얼마나 대중의 인기를 얻느냐에 따라 영향력이 달라지고 영향력이 클수록 자본이 몰리게 되어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오늘날 민주주의 역시 이런 대중사회의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원래 민주주의는 탄생부터 이성적인 사고와 성찰에 기반을 두고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의 아고라(agora)는 정치와 학문, 문학과 상업 등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교와 담론의 장이었다. 거기에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적인 교류가 이루어졌으며 특히 이성적 사고를 통해 올바른 결론을 내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그리스어인 데모크라티아(δημοκρατία dēmokratía)에서 유래 된 민주주의라는 말인 democracy도 아고라를 기반으로 발달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아고라를 통한 수많은 담론을 고치면서 d-emos(민중)와 cratos(지배)라는 두 가지 단어의 합성어인 d-emocratia를 현실 정치로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아고라와 데모크라시에는 다양한 의견들이 감정적으로 충돌되는 상황에서 이성적으로 종합하고 정리하는 가운데 발전할 수 있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이성적 판단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현재 대중사회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이성적 담론과 판단보다는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판단과 결정이 주를 이룬다. 그것은 선거에서도 유권자가 후보자의 도덕성과 능력, 이력, 정책 등을 다양하고 꼼꼼하게 검토하고 미래 비전을 판단하여 선택한다기보다는 호감도나 경향성, 특히 정치 집단에 팬덤화된 상황에서 순간순간 감각적으로 지지 성향을 드러낸다. 그런 상황에서 특정 진영에 팬덤화된 지지자들은 그 후보의 도덕성과 흠결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오히려 그를 옹호하고 지키기에 여념이 없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특정의 사건이나 말 한마디, 한가지 상황에 따라 지지 양상이 춤을 추기도 한다. 지극히 대중적인 현대 민주주의는 대중사회 상황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일까? 현대의 모든 정치인은 대중의 정치 지향과 감각에 지극히 의존하므로 미래 비전과 역량을 크게 발휘하기 어렵다. 그것은 마치 히틀러 시대에 베이컨과 같은 명망 있는 지식인들, 그리고 포드 같은 저명한 사업가들도 감히 히틀러가 그 엄청난 전쟁을 일으켜 세상을 혼란 속에 빠지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독일 곳곳을 여행하며 즐겼던 것과 같다. 히틀러의 철저하고도 계획적인 언론통제와 대중적 선전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으며 사람들은 그 선전에 속아 넘어갔다. 어쩌면 그때도 대중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적인 대중사회 상황에 빠져 정치적 담론보다는 당장의 정치적 감정과 이해관계에 빠져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기에 히틀러는 90%가 넘는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지지율이 곧 민주주의의 성숙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당에 대한 균형을 상실한 절대의 지지는 절대 부패하고 있다는 증거이며 그 절대 지지율만큼이나 민주주의는 무너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현명하고 이성적인 민주시민은 절대 하나의 권력과 하나의 정당에 절대 지지를 보내지 않으며, 정당 간 이념 간, 권력 간의 절묘한 균형을 만들어 냄으로써 정치인들이 늘 시민의 마음을 살피게 만든다. 대중사회 상황에 빠진 상당수의 국민은 그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그것을 고려하려면 냉철한 이성을 통해 상황을 살피며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에 감정적인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정치 집단은 이를 이용하여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쌍방 비난을 통해 자기들의 입지를 강화하려 한다. 그런 과정에서는 민주주의에 대한 지적 관심과 담론은 실종되고 가짜 뉴스와 자극적인 선전이 난무한다. 지금 한국 상황이 그런 상황이 아닐까? 최근에 와서 한국의 정당은 균형을 상실해 버렸다. 국민은 다음에 또 어떤 선택을 할까? 나는 이런 대중사회 상황 속의 한국 민주주의를 걱정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대중사회 상황은 당분간 더 지속될 것이며 정치인들 또한 그것에 편승하고 그것을 이용하려 할 것이다. 정치는 미래 비전과 철학보다는 현실 속에 갇혀서 대중의 환심을 사기에 바쁜 단편적인 정책과 표퓰리즘에 빠질 우려도 크다. 그래서 대중이 감각적이고 팬덤화된 상황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민주주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중우정치로 전락할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현명한 민주시민이 되어 민주주의를 지키려면 그런 대중사회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지키고 인간존중의 자유와 평등이 조화되는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새로운 담론을 펼쳐야 한다. 그것은 감각보다는 이성적이어야 하며 처칠이 영국 국민에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피와 땀과 눈물’이라고 역설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비전과 약속을 위해 정신과 삶의 띠를 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러한 민주주의에 대한 지적 관심과 욕구는 민주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영혼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으며 화산처럼 분출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잠재되어 있을 뿐 분출의 기회를 가지지 못한 탓이기도 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인들은 그 깊은 영혼 속에 도사린 이성적인 정치적 담론의 분출보다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감각적인 대중사회상황을 더 이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연 현상인 화산분출과는 달리 인간의 일이기에 인간사회에서 누군가 아니면 특정의 정치 집단이 아니면 자각된 대중들의 운동으로 그 영혼 깊은 곳에 도사린 민주주의에 대한 이성적이고 지적인 욕구가 분출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는 그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특히 보수주의자들은 새로운 각성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참된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한 보수정신은 기득권 세력이거나 수구주의가 아닌 인간다운 사회를 지향하는 정신에 입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성에 입각한 진지한 담론이야말로 민주주의를 지키고 진리와 정의의 본 모습을 찾아가는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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