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원리해설 (후편)
사위기대 복귀를 중심한 인류역사 탕감복귀 섭리노정
서론
인류역사는 인간시조의 타락으로 인하여 출발된 비원리세계를 원리세계로 복귀하여 하나님의 천주창조의 이상을 실현코자하는 복귀섭리역사라는 것은 이미 전편에서 상술하였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어떤 시대에 어떤 장소에서 어떠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하는 평면적인 요인만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뒤에 계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반역하고있는 사탄 사이에서 하나의 목적을 지향하고 벌어지는 입체적인 사실들이 그대로 인간세계에서 실체로서 구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성서로써 알려지는 이스라엘역사나 많은 학자들에 의하여 전하여오는 역사는 이 섭리노정에서 일어난 평면적인 사실만을 그대로 기록하였을 뿐이고 하나님과 사탄과의 입체적인 관계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인류역사는 어떻게 종결될 것이며 따라서 이 역사는 어떠한 공식적인 섭리노정을 이루어 나오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하여서는 명확한 대답을 하여주지 못하였다.
가인이 아벨을 살륙함으로써 시작된 선과 악의 투쟁역사는 알 수 없는 헝클어진 곡선을 그리면서 유구한 기간을 두고 돌고 또 돌아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을 다시 찾아 나아가는 방향을 취하고 있다.
타락된 인간이 창조본연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려면 이 헝클어진 섭리노정을 찾아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길이 타락된 인간이 걷지 않으면 안 될 길이요 이른 바 인지당행지도이다. 역사노정에 오고간 많은 성현과 선지선열 또 뭇 도인 철학자들이 노심초사하여 찾아 헤매온 길이 바로 이 길이었다.
미로에서 헤매는 인간이기에 눈물을 머금고 종교를 찾으며, 한숨을 지으며 도를 세우려는 것이었다. 원리를 떠나서는 운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은 이미 창조원리에서 해명되었다. 원리로써 천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재창조역사인 복귀섭리로 원리를 떠나서는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한날의 행사를 거행하기 위한 프로젝트가 있거든 하물며 6천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 공식적인 프로젝트를 떠나서 원리적인 복귀섭리를 하실 것인가.
이 헝클어진 역사노정이 공식적인 원리궤도로써 풀려질 때 온 인류는 다같이 한길을 통하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한 목적을 향하여 한 곳으로 모이어 하나님의 한 자녀로서 창조이상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사탄의 질곡을 벗어나 자유인이 되어 자유의 길을 걸어야한다. 자유인이 되려면 진리를 알아야겠고 자유의 길을 걸으려면 원리의 길을 알아야겠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놓아 주리라고 말씀한 것이다(요 8/32).
역사이래에 오고 간 많은 선인들이 부르짖은 어떠한 종교도 철학도 그는 이 원리의 길의 한토막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원리를 중심하고 종교통일을 목표로한 혁명운동의 가능성도 이로써 알려질 것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인류역사는 동일한 환경에 처한 종족 혹은 민족에서 형성되어지는 문화권을 중심하고 발달하여왔다. 그리고 이 문화권을 형성하는 중대한 요인은 그 종족 혹은 민족이 가지고 있는 사상이며 이 사조의 주류를 형성하는 필수의 요인은 그 종족이나 민족의 사상을 지배하는 종교에 있다.
복귀원리의 의의는 하나님의 주관권내에서 이루어지는 종교 즉 기원절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중심한 종교요 기원이후에는 영적 이스라엘인 기독신도를 중심한 종교로써 이루어 내려온 공식적인 복귀섭리노정을 밝히려는데 있다.
타락된 피조세계는 창조전의 질서없는 혼돈세계와 같이 창조본연의 가치를 상실한 비원리세계다. 그러나 영원을 표준하고 창조하신 원리적 기준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계를 도말하여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같이 창조하신 원리의 형만을 갖추고 있는 비원리세계를 다시 원리세계로 복귀하려는 섭리를 하신다. 그러나 이 타락된 세계는 사탄도 취할 수 있는 원리형인 조건이 성립되어 있음으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 어떤 조건을 성립시키지 않고는 이를 원리세계로 복귀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단순히 때와 곳을 터로한 인간을 중심하고 일어난 사실로써만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간과 인간과의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실은 반드시 하나님과 사탄과의 사이에서 원리적 관련성을 갖고 벌어지는 섭리의 실체적인 전개로서 현현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류역사는 하나님과 사탄이 타락된 인간을 중간에 놓고 서로 탕감조건을 세워가면서 싸우는 사람 빼앗기 싸움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역사는 탕감복귀역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면 탕감복귀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무엇이든지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상실하였을 때 그 상태를 회복하려면 반드시 어떠한 조건이 성립되어야한다. 이와같이 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이에 해당하는 조건을 세우는 것을 탕감이라고 하며 이 조건을 세워 본연의 상태로 복귀하는 것을 탕감복귀라고 한다.
탕감조건을 세움에는 두가지 형식이 있다. 첫째는 본연의 위치와 상태에서 상실되었던 것과 동일한 가치의 조건을 세워 원상으로 회복하는 것이니 이런 경우에는 보상이라든가 환상이라는 의미로 통할 것이다. 보상이나 환상을 하는 것은 보상 혹은 환상할 필요가 없었던 본래의 입장을 회복하기 위함이다.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데인 것은 데임으로 상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 21/23~25)고 기록된 모세의 율법은 곧 이런 의미의 탕감법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상실된 본연의 가치보다 훨씬 작은 가치의 조건을 세워 원상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십자가의 신앙은 영적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이다. 창조본연의 위치와 상태를 회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인간자신의 능력이나 노력으로는 그 상실된 본연의 전 가치를 찾아 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조그만 가치로써 예수님과 같은 죽음을 죽었다는 탕감조건을 세워 영적 복귀의 혜택을 받는 것이다.
세례의 기원도 홍수로써 구원받은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는데 있다. 즉 우리의 몸 전체를 물에 담갔다는 것으로 노아 홍수를 거쳤다는 탕감조건을 세워 40일 홍수심판으로 구원을 받은 노아의 입장을 복귀하려는 것이다(벧전 3/21). 근래에는 머리에 물방울을 떨어뜨리는 것으로 동일한 조건을 세우고 있다.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로써 예수님의 성체를 먹었다는 가치를 찾아 세울 수 있음도 이것으로써 예수님과의 일체적인 입장을 복귀하기 위한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이며 이스라엘민족이 할례를 하는 것도 아담이 하나님의 품을 떠나 양부로 인하여 사망의 피를 받았음으로 그 입장을 복귀하려면 그 양부를 쳐서 사망의 피를 뽑지 않고는 탕감조건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탕감조건은 어떻게 세울 수 있을 것인가 하면 본연의 상태를 상실하게 된 경로와 반대의 경로에 의한 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예수님을 미워하여 십자가상에 살해하였음으로 인간이 죄악에 빠졌으니 예수님을 살해하지 않고 이루었을 구원의 입장을 복귀하려면 그와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함으로 우리도 예수 십자가와 같은 죽음의 길을 걸었다는 탕감조건을 세우지않으면 아니된다. 무릇 타락인간이 죄의 대속을 받는 이유는 이와같이 원상복귀를 위한 탕감조건을 세우려 하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여 하나님을 서럽게 하였으니 반대로 내가 서러움을 당하면서라도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것으로써 탕감조건을 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을 배반하기 전의 입장으로 복귀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최후의 운명을 마치는 순간에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이유도 이와같이 인류의 죄를 대속키 위한 탕감조건을 세워야할 원리적 섭리가 있기 때문이었다. 즉 에덴동산의 아담은 하나님의 품 속에서 하나님을 버리고 사탄품 속으로 윤락하였음으로 후아담으로서 아담의 저지른 죄를 대신 속죄하러 오신 예수님께 대하여서도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버리시는 입장에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이와같이 하나님이 버리시는 입장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충절을 버리지 않는 탕감조건을 세웠기 때문에 온 인류는 복귀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하였으니 예수님의 영광을 복귀하려면 반대로 우리 자신들도 피를 흘리지 않으면 안 된다. 모든 순교자들은 이렇듯 예수님과 같이 인류의 죄 를 대신 탕감하고 간 사람들이다. 무릇 선인으로서 하늘을 대신하여 왔다간 모든 선인들의 비참한 생애도 예수님과 같이 이러한 탕감조건을 세워 사탄세계를 빨리 하늘세계로 복귀하기 위하여는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이 대신탕감으로 희생된 모든 성도들은 인류역사가 선의 세계로 완전히 복귀될 때에는 그 가치에 해당하는 은사를 받게되는 것이다.
한 국가에 세워진 형법도 그 국민의 안녕과 질서를 원상대로 유지하기 위한 탕감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타락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세워야할 원리적인 탕감조건은 무엇인가를 알아보기로 하자. 하나님이 아담과 해와를 창조하시고 그들이 지켜야할 오직 하나의 조건을 주셨던 것이다. 그 조건은 곧 믿음이라는 조건이었다.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창 3/3)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면 영생하리라는 계명으로 주신 것임을 알 수 있다.(타락론 참조)
타락론에서 이미 상술한 바이지만 이 계명을 주신 것은 아담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시봉하는가 아니하는가를 보시기 위함이 아니요 원리의 힘보다 강한 사랑의 힘으로 하여금 원리궤도를 탈선치 않도록 하시기 위한 절대적이면서도 불가피한 것으로서 아니 세울 수 없는 조건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타락인간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타락전의 아담에게 있어서도 완성기준에 도달할 때까지는 필수의 계명으로 세워졌던 것이다. 하나님과 일체이상을 이루어 믿음을 완성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믿어야할 아무 조건조차 필요치 않은 것이다.
아담은 이와같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기대 위에 서야할 것이었는데 이 믿음의 기대에 사탄이 침범하였기 때문에 그의 실체에까지 침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된 아담이 다시 창조본연의 상태를 복귀하려면 탕감복귀원리에 의하여 먼저 믿음의 기대를 세워가지고 그 기대 위에 후아담을 복귀하여 그를 중심하고 타락인간 전체를 복귀하려는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제 각론에서 밝혀질 것이지만 인간은 후아담된 메시아를 맞기 위한 타죄이후 4천년이란 유구한 시간의 흐름을 요치 않았던 것이다.
가인이 아벨의 제물이 모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수 있는 것이 되어 가인이 아벨을 살해하는 일이 없었다면 그 때에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 후아담(예수)이 복귀되어 에덴복귀는 아담가정에서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가인이 아벨을 살육함으로 이 믿음의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였음으로 그를 다시 복귀하기 위하여 노아를 세웠던 것이다.
그런고로 함의 타락행위가 없었더라면 노아가정을 중심하고 믿음의 기대를 세워 그 기대 위에 또 메시아는 오셨을 것이었다. 노아의 심판은 이 목적을 위하여 감행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아의 가정마저 아담가정과 같은 입장으로 돌아갔음으로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잃어버린 이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키 위하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셨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더라면 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그 기대 위에 메시아는 오셔서 창조이상의 세계는 이 때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그 기대에는 다시 사탄이 침범하게 되었음으로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2천년기간은 사탄에게 내어준 기간이 되어 버렸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는 이삭헌제를 거쳐 야곱에게 만회되었음으로 야곱은 믿음의 조상의 뜻을 완수하지 않으면 아니될 사명을 갖고 사탄세계인 밧단아람과 애급으로 들어가 사탄과 싸우며 하늘의 자녀를 번식하여 다시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믿음의 기대를 씨족으로부터 민족 국가에로 넓히어가면서 예수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 이후 예수님까지의 2천년 기간은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잃어버린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 기간이다.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 사탄에게 내어주었던 2천년 기간을 다시 하늘 것으로 탕감복귀하는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기간이 곧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2천년 기간이므로 이 시대를 탕감복귀시대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보면 아담으로부터 2천년 기간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한분을 찾아 세우기 위한 기간으로 되었고 선민을 불러세워 메시아를 맞을 수 있는 민족적인 믿음의 터를 조성키 위한 복귀섭리는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어 예수님까지 이르렀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아담으로부터 아브라함까지의 기간은 아브라함 한 분을 찾아 세움으로써 다음 복귀섭리시대를 출발할 수 있는 기대를 조성한 시대였음으로 이 시대를 복귀기대섭리시대라고 한다. 그런고로 복귀기대섭리시대로 인하여 복귀섭리시대는 시작된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가 없었다면 개인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에덴복귀의 뜻을 이루었을 것이었던 것과 같이 이스라엘민족이 예수를 믿고 따랐다면 영육 아울러 예수님을 합당한 제물로 바침으로써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는 조성되어 에덴 복귀의 뜻은 이 때에 또 이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민족은 제물된 예수님을 살해함으로써 마치 아브라함의 제물에 사탄이 침범한 것같이 제물된 예수님의 몸에 사탄이 침범하게 되어 이 복귀섭리시대도 역시 사탄에게 내어준 결과가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기간을 또 다시 하늘편으로 탕감하여 세우는 예수 이후 2천년 기간이 있어야할 것이니 이 기간을 재탕감시대라고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렇듯이 무너진 민족적인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기 위한 섭리는 예수 이후 기독신도들을 불러세워 재림기에 이르러 세계적인 믿음의 기대를 재조성하는 섭리연장시대로 옮겨진다. 이와같이 아담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믿음의 기대를 찾아 세우기 위한 역사는 아브라함 개인중심에서 이스라엘민족 중심을 거쳐 기독신도를 중심한 세계에로 확대되어 이 터 위에 예수께서는 재림하셔서 복귀섭리를 완수함으로써 아담 해와가 타락치 않고 이루어나온 것과 같은 세계를 일시에 이루어 맞추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시대를 복귀섭리완성시대라고 부른다. 이로써 복귀섭리는 잃어버렸던 믿음의 기대를 탕감복귀하는데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논하였다.
그러면 이 믿음의 기대를 조성키 위하여는 어떠한 탕감조건을 세워야하는가를 알아 보기로 하자. 위에서도 논한 바이지만 인간이 완성될 때는 하나님과 일체의 이상을 이루어 믿어야할 조건조차 필요치 않게되는 때다.
믿어야할 조건이 필요없다함은 믿음의 목적을 다 이루어 믿음을 완성하였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믿음의 완성이라함은 하나님과의 사이에 미와 사랑의 회로를 완전히 조성함을 의미한다. 환언하면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미의 기대의 조성을 의미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체휼할 수 있는 미의 기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하면 아담이 창조원리의 완성존재가 되어 타락의 혈통을 받지않은 원리적 자녀를 번식하여 하나님 아담 해와 자녀 이렇게 사위기대를 조성함으로써 창조본연의 부모와 부부와 자녀의 원리적 사랑을 체휼할 수 있는 기대를 말함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이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에게 주신 축복의(창 1/28) 목적이었으나 타락으로 인하여 아담 해와는 하나님을 중심하지 못하고 사탄을 중심하여 부부를 이루어 사탄의 혈통을 받은 자녀를 낳았음으로(요 8/44)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는 사탄을 중심한 사위기대가 된 것이다.
하나의 존재기대가 조성되려면 그를 중심한 동서와 남북의 사위가 확정되지 않으면 안 되므로 4수는 존재기대수다. 그러므로 지상에 하나님의 대상실체적 존재기대가 확립되려면 사탄 중심하고 조성된 이 사위기대를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로 복귀하지 않으면 아니된다. 이러한 논리로써 믿음의 기대를 조성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중심한 이 사위기대를 조성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따라서 복귀섭리의 목적도 사탄중심의 사위기대를 하나님을 중심한 사위기대로 복귀하려는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사위기대를 중심한 인류역사라고한 제목의 의의는 자명해질 것이다. 사위기대를 복귀한 터 위에 믿음의 기대를 조성코자 노아심판 40일로써 믿음의 중심 노아를 세우려 하였으나 함의 타락행위로 인하여 이 사위기대에 사탄이 재침범하였음으로 믿음의 기대에도 사탄이 재침범하여 이것을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400년 기대를 세워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세웠던 것이다.
아브라함의 제물실수로 인하여 이 기대에는 사탄이 다시 침범하였음으로 이를 다시 탕감복귀하기 위하여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기간이 남아졌으니 이렇듯이 유구한 역사의 과정을 두고 하나님은 얼마나 사위기대를 세우시려 애쓰셨으며 사탄은 이를 얼마나 침범하였던가.
즉 노아심판 40일을 비롯하여 노아에서 아브라함까지 400년, 이스라엘민족의 애급고역 400년, 모세의 바로 궁중 40년, 미디안 광야생활 40년, 시내산 금식기도 40일, 이스라엘민족의 가나안복귀 광야생활 40년, 여리고 탐정 40일, 사사 400년, 사울왕 40년, 다윗왕 40년 솔로몬왕 40년 엘리야 호렙산까지 기도기간 40일 예수님의 금식기도 40일 부활 40일 요나의 니느웨에 대한 예언 40일 아담부터 예수님까지 4천년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0대(아브라함 제물실수로 인하여 42대가 됨=본문참조=)등등을 보면 사위기대복귀에 애쓰신 하나님의 심정을 역연히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책임분담섭리의 입장에서 복귀역사를 개관하기로 하자. 창조이상이 실현된 세계라는 것은 결국 사탄을 완전히 자연굴복시킨 세계다. 하나님은 자유이상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이 세계를 다시 찾으심도 자유이상이란 원칙에서 하지않으면 아니된다.
피조세계 전체의 주관자로 인간을 창조하셨음으로 인간은 천사도 주관해야 되고 따라서 타락된 천사인 사탄까지도 인간이 주관하는데까지 이르지 못하면 천주의 주관자로서 하나님을 대할 수 있는 원리완성존재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이 사탄을 자연굴복시킬 때를 바라시고 섭리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타락은 어디까지나 인간자신에 책임이 있지만 하나님은 창조하신 원리적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탄굴복의 제1책임은 하나님 자신이 부담하셨으니 이 시대가 곧 소생 구약시대다. 하나님은 이 시대를 통하여 선지자들을 직접 대하시고 섭리하셨다.
타락의 제2책임은 인간조상 아담과 해와에게 있다. 그러므로 아담 해와 대신 복귀사명을 지고 오신 예수님과 성신(기독론 참조)이 사탄굴복 의 제2 책임을 지고 직접 타락인간을 대하여 섭리하신 시대가 곧 장성 신약시대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성신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세워 사탄굴복의 길을 보여주신 제1책임분담노정을 본보기로 신약시대의 제2책임분담노정을 걸음으로써 다음에 성도들이 사탄을 굴복시킬 수 있는 제3책임분담노정의 본보기를 보여주셨던 것이니 성도들이 이 제3책임분담노정을 걷는 시대가 곧 완성성약시대다.
그러므로 성약시대는 예수님과 성신의 역사는 끝나고 하늘에서 재림하는 성도들과 지상의 성도들이 협력하여 사탄을 굴복시켜야할(부활론 참고) 시대임으로 이 시대는 성도의 시대요 삼위신은 안식하셔야할 시대다.
이제 우리는 이 복귀원리에 맞추어질 수 있는 사료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겠다. 천주창조가 그러하듯이 무엇이든지 중심없이 되어지는 결과는 있을 수 없다. 이와같이 수많은 종족 혹은 민족을 터로한 역사가 얽히어지면서 인류의 전체적인 역사노정은 하나의 목적을 향하여 움직이고 있지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대하여 내려오면서 인류역사의 중심적인 노정을 형성하여온 역사가 있을 것이니 이것이 즉 하나님의 선민을 중심하고 이루어진 이스라엘역사다.
그러므로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의 4천년은 구약성서에 씌어있는 이스라엘민족사가 복귀원리의 사료가 될 것이요 예수이후는 바울이 이른바 영적이스라엘인 기독신도로써 엮어내려온 기독교사가 그 사료가 되어야할 것이다.
원래 신약성서는 구약성서의 율법서에 해당되는 복음서와 또 구약성서에 있어서의 예언서와 시문서에 해당되는 계시록과 사도서한이 있으며 특히 이스라엘역사서에 해당되는 사도행전이 있으나 사도행전에는 예수님 당시의 사도들의 역사만이 기록되어 있으므로 신약성서가 구약성서에 대비되는 기록으로 남아지려면 사도행전가운데는 예수님이후 2천년 간의 기독교사가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게되면 신약성서만이 예수님 이후의 복귀원리의 사료가 될 것이다.
복귀원리와 우리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은 가장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오늘의 나는 나 하나로서의 내가 아니다. 오늘의 나는 인류역사의 결실로써의 나요 오늘의 전인류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진 나요 지난 역사를 정리하여 내일의 나를 세워야할 나다.
그러므로 오늘의 나에게 있어서는 지난 역사의 맥박이 그대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 나는 이제 확실히 병들었으나 나의 맥박으로 보아 이 무슨 병인지 알려주는 의원은 하나도 없으니 이제는 맥 보기는 그만두고 역사를 들추어 나의 병명을 알아내러 바른 치료를 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이다.
내일의 나의 생명은 지난 역사를 들추어 바른 진단을 내리는데만 의존되어있다. 지난 역사를 정리하고 청산하여 새로운 역사를 빚어내야할 나는 역사노정에서 선지선열들을 중심하고 하나의 뜻 가운데서 벌어졌던 그 모든 사실들을 원리적으로 구명하여 그들이 이루지 못한 조건들을 내 한몸에서 승리의 조건으로 세워놓지 않으면 6천년 역사를 탕감복귀한 신부로서의 자격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복귀섭리의 프로젝트를 맞추기 위하여 왔다간 모든 선인들의 걸은 길은 모두가 우리가 되풀이하여 걸어야할 길이요 그들이 다 걷지 못하고 남긴 부분의 길까지도 다 걸었다하는 조건을 세워놓아야 예수께서 남기고 가신 유업을 계승완성한 신부로 설 수 있을 것이다.
이와같이 과거는 지나가 죽어버린 것이 아니고 지금의 것으로 살아있는 것이요 또한 앞으로 올 것이므로 이것을 아는데서만 오늘의 나를 알아 내일의 나의 생명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알아 그의 원하시는 뜻을 맞추어 뼈저린 감사의 염에 잠기울 때 하나님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각자를 찾아오실 것이다.
복귀원리에 사용된 역사와 연대에 관하여는 이견이 있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인류의 기원이 6천년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자들이 고고학적 견지에서 세운 결론이다. 5천년 이상의 역사는 모두 미분명하다.
오직 구약성서에는 6천년 역사가 뚜렷이 연대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부언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계시는 모두가 표징적이요 암시적이며 또한 시대성을 띠우고 있다는 것이다.
즉 똑같은 내용을 계시한다 하더라도 시대를 따라 또는 계시를 받는 사람의 지능과 심령의 정도에 따라 또 그 환경을 따라 각각 그 받는 형식이 동일치 않다. 이를테면 전도서를 보면 「해는 떴다가 지며 그 떴던 곳으로 빨리 돌아가고」(전 1/5)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천동설을 믿고 있는 시대의 인간들에게는 그들의 사상을 그대로 시인하여 해가 어떤 한 곳으로 돋기도하고 지기도하는 것처럼 계시를 주셨다. 우리는 해가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돌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렇다고해서 계시가 틀린다고 반박한다면 도리어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말 것이다.
이와같이 설혹 인류역사의 실제의 연대가 6천년이 훨씬 넘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뜻을 중심하고 생각하면 계시는 계시로써 참이 아닐 수 없다. 계시로써 연대를 밝히었으니 이렇게 밝혀진 연대로써 하나님의 복귀섭리의 공식노정을 명시하려하신 것은 명확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밝히기 위하여 계시로써 주신 이 연대에 관하여는 실제와의 부합여부를 막론하고 아무 조건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