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순례지 개요
신리는 조선 시대 천주교 수용 초기부터 형성된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일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신자들이 많았던 만큼 박해도 심하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한 곳이다. 특히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를 통해 마을 전체 신자가 순교하거나 피난할 정도였는데 인근에 있는 '무명 순교자들의 묘'가 이를 말해 준다.
신리는 박해를 겪는 조선 교회의 중심지 역할도 하였다. 서해를 통해 들어오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기착지 였고,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머무르며 사목 활동을 한 곳이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매트르 신부, 황석두 루카, 손자선 토마스가 신리에서 체포되어 보령 갈매못과 공주에서 순교하였고 후일 성인이 되었다. "예수님을 가진 자가 모든것을 가진 자다."라고 한 다블뤼 주교 말처럼 신리는 신앙을 위해 모든 것을 봉헌한 교우촌이다.
신리의 다섯 성인들을 기리는 기념 성당에는 성인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2014년 5월 6일 다섯 성인의 시성 30주년을 기리며 다블뤼 주교 기념관을 건립하여 그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2017년 3월 기념관 지하에 '순교 미술관'을 개관하였다.
(한국 천주교 성지 순례 70쪽)(순례확인도장: 성전 사무실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