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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를 믿음으로 받으면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갑니다. / 2023년 5월 7일 주일 오후 예배
본문 / 고린도후서 6:1-13
세상에는 큰돈을 빚을 지고 감당할 길이 없어 고통스럽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은 큰 어둠입니다. 그 빚으로 인해 인생에 짙은 어둠이 드리우면 무슨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빚은 별로 진적은 없지만 교회로 빚을 졌을 때도 그것은 순전히 목회자의 빚과 같기 때문에 큰 부담이 됩니다. 금리가 올라가면 걱정이 됩니다. 어쩌다 은행에서 전화가 오면 받고 싶지 않습니다.
쉬지 않고 밤새 일하며 돈을 버는 대로 이자로 쭉쭉 빠져나가고 오히려 원금은 더 쌓이면 어떻겠습니까? 사채를 갖다 썼으면 어떻습니까? 돈을 제때에 갚지 않으면 온갖 모욕을 다 당해야 합니다. 그 위협과 협박에 하루도 잠을 편히 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걱정과 두려움에 짓눌려 사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감당할 수 있는 빚이 있습니다. 그러나 감당할 수 없는 빚으로 인해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은 걱정과 염려와 불안과 두려움에 짓눌려 우울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어둠의 터널을 지나지만 끝이 안 보이는 것입니다.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절망만이 그 인생을 감싸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빚으로 인해 스스로 세상을 떠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받고 있는 겁니다. 요즘에 전세 사기를 당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떼이면 결국은 빚을 진 것이고 그 빚으로 인해 어둠 안에 갇혀 나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빚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게 무엇일까요? 맛있는 음식을 사주면 좋아할까요? 아니면 좋은 옷을 선물하면 감사하겠습니까? 여행을 갔다 오라고 하면 기뻐할까요? 빚 그 어둠이 있는 상태에서 아무 것도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빚으로 고통을 받는 사람이 가장 기뻐하는 것은 정부나 어떤 기관이나 사람이든지 그 사람의 빚을 0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요즘에 전세금을 사기당하여 죽은 젊은 사람들이 떼인 그 돈은 그 사람들에게 큰돈이지만 어마어마한 돈은 아닙니다. 몇 천만 원입니다. 그런데 몇 천만 원도 어떤 사람들에게 정말 벌기가 힘든 돈입니다. 고생고생하며 그 돈을 번 것입니다.
몇 천만 원도 감당할 수 없어서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버리는 겁니다. 빚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가장 기쁜 소식은 빚을 전부 탕감해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희망을 품고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은 기분이 어땠을까요? 만 달란트는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그 상상도 할 수 없는 빚을 다 탕감해주었습니다.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영원히 빚진 자로 살아야 하는데 말입니다.
만 달란트의 빚과 그것을 탕감해주는 것은 타락한 죄인들의 죄가 무엇인지 그 죄를 용서해주시는 그 대속의 은혜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죄인들은 하나님께 빚을 진 자들입니다. 빚을 져도 내가 갚을 수 있는 어지간한 빚을 진 것이 아니라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것입니다. 그게 만 달란트입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다.”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무슨 빚을 진 것입니까? 죄의 빚을 진 것입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아숭배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이 그게 왜 죄입니까? 그게 당연한 것 같지 않습니까?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인간을 자신을 위해 사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43장 21절에서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해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한 것입니다.
안 믿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는 나를 위해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것은 인생이 아닙니다. 자아숭배는 인생의 목적도 방향도 존재의 이유도 가치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를 만드시고 나에게 생명을 주고 인생을 주시고 세상에 보내신 창조주 하나님이 너는 나를 위해 존재하고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데 불만 있습니까?
마귀가 그 불만을 미혹하고 파고 든 것이 선악과 사건입니다. 에덴동산의 타락인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다면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을 겁니다. 본능대로 사는 짐승들은 타락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였다면 직립보행 하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주셨습니다. 영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게 놀라운 은혜이며 축복이지만 마귀의 미혹을 받을 때 타락과 저주가 된 것입니다. 피조물이 감히 자신을 창조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존재로 즉 하나님이 주시는 그 은혜로 사는, 믿음으로 사는, 하나님의 속한 자로 사는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하고 내가 하나님과 같이 되어 나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그것이 교만입니다.
잘난 체하며 남을 무시하는 것은 교만의 열매이고 교만의 뿌리는 내가 하나님이라는 타락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를 위해 살겠다는 그 자아숭배로의 타락이 교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는 내가 내 마음과 인생의 주인이 자리에 앉아 내 자신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도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인생의 주인의 자리에 앉아 내 마음대로 내 뜻과 생각과 감정대로 내 육체의 정욕과 탐심을 위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죄의 빚을 청산하지 못한 것입니다. 여전히 죄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대속해주신 우리의 죄가 무엇이라고 증언합니까? 자신을 위해 사는 자아숭배라고 한 것입니다.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바울도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다 죄의 빚을 졌다고 선언하면서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육신을 위한 삶으로 자신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영이신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이 거룩한 자들이 마귀의 미혹을 받을 때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사는 자로 타락하여 육신대로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육신을 위해 사는 자가 된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 사는 자로 타락한 죄인들에게 육체의 정욕과 탐심 즉 자신의 육신의 만족과 이익과 기쁨과 즐거움과 쾌락을 위해 사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기지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자아숭배가 인생의 목적과 가치와 성공과 행복인 것처럼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원히 빚을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빚은 타락한 죄인들이 어떤 짓을 해도 영원히 갚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죄의 빚을 갚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죄를 지으면 죽어야 하는 겁니다. 죽으면 없어집니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영적인 존재인 사람은 영원불멸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죄로 인해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심판을 받고 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의 불구덩이에 들어가야 하는 자들입니다. 한 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곳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의 실존이며 하나님 앞에 진 죄의 빚입니다. 인간은 완전히 불가능하고 완전히 소망이 없는 완전한 절망 속에 빠진 자들인 것입니다.
그것이 영원히 갚을 수 없는 만 달란트의 빚입니다. 그런데 그 영원히 갚을 수 없는 그 죄의 빚이 단번에 해결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결단코 티끌만한 죄도 눈감아주지 않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변할 수 없는 공의입니다. 하나님은 그 공의를 실현하기 위해 죄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서 심판하셨습니다.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전가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속의 은혜를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십자가에서 대속해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는 자들의 죄를, 그 빚을 전부 탕감해주신 것입니다. 얼마 전에 새벽에 기도하는 데 이런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부끄러움을 당했으니 너는 죄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예수님이 내가 영원히 갚을 수 없는 그 죄의 빚을 다 대신 갚으신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즉 하나님의 의가 완전하게 성취되었고 하나님의 그 의를 믿을 때에 세상이 이런 일이 있습니까?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아야 할 죄인이 천국에서 영원히 안식을 누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데 말입니다. 일은 다 예수님이 하셨는데 말입니다. 죄는 내가 짓고 고통은 주님이 당하셨는데 말입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그 대속의 은혜를 믿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말입니다. 정말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은혜로 부름을 받았으니 평생을 매주 100억짜리 로또에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당첨되는 것과 비교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내가 정말 그 기가 막힌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인지 묻고 확인해야 합니다. 바울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증언합니다. 은혜를 헛되이 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로서 너희를 권하노니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이 직분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려고 무엇에든지 아무에게도 거리끼지 않게 하고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난동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지고 영광과 욕됨으로 그러했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그러했느니라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기는 받았는데 헛되이 받았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울은 십자가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증언한 후에 무엇을 선포합니까? 십자가의 믿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장에서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합니다. 로마서 8장에서도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선포한 것입니다.
네가 영원한 갚을 수 없는, 지옥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아야 할 그 죄의 빚을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전부 탕감을 받았으면 이제 네 빚을 대신 갚아준 주님을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나를 위해 살던 그 자아숭배의 죄를 십자가에 대속해주신 것을 정말 믿음으로 회개하였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이제는 주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야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몸에서 그리스도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이 대단한 은혜를 받고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부 순교자의 믿음만은 아닌 것입니다.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를 받고 구원을 받은, 용서받은 모든 죄인들의 고백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육신을 입고 주님을 위해 사는 그 믿음이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육신에서 나오는 정욕과 탐심을 날마다 십자가에 못을 박아야 하는 고난의 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많아도 택함을 입은 사람들은 적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성도들은 많아도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좁은 길을 가는 성도들은 적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찾은 이가 적은 좁은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면 십자가의 은혜를 받을 수 있지만 누구나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며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십자가의 좁을 길을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길은 참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에서 제일 힘든 게 자신과 싸우는 것이고 자신을 이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자신과 싸우는 게 힘들까요? 타락한 죄인의 자아는 하나님처럼 되었기 때문입니다. 엄청나게 교만해진 겁니다. 내가 주인이고 내가 왕이라고 생각하는 가장 교만한 자들입니다. 자존심으로 단단하게 굳어져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오죽했으면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을까요? 십자가의 은혜를 받고 좁은 길을 가며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가장 괴로운 것이 뭐겠습니까? 빚을 갚지 못하는 겁니다. 또 빚은 지는 겁니다.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을 탕감해 줄 수 없을 때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내가 정말 만 달란트를 탕감을 받은 자인지 의심이 드는 겁니다. 이런 생각이 듭니다. 천국에 가는 그 믿음이 내 행위와 열심만으로 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말입니다. 케냐에서 예수님을 만나려면 굶어죽어야 한다는 사이비 교주의 말을 듣고 백 명이 넘게 죽었다고 합니다.
저도 금식하면서 죽을 때까지 기도하면 예수님을 만나 천국에 간다면 그 길을 가겠습니다. 한 사오 십일 고통을 견디면 되는 것 아닙니까? 사오십 일만 견디면 천국에 간다면 그것을 못하겠습니까? 죽기까지 음식을 먹지 않고 고통을 당한다고 죄의 빚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갚아주셨습니다. 내가 이루었다고 즉 내가 다 갚았다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십자가의 은혜를 받았으니 잘 안되어도 힘들고 어려워도 나를 십자가에 부인하며 즉 육체의 정욕과 탐심과 교만과 자존심과 온갖 감정들과 자아숭배와 싸우면서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을 받들고 순종하는 십자가의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굶어 죽으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라고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한 번 굶어죽는 것보다 더 힘든 것입니다. 날마다 죽어야 하는 겁니다. 날 십자가에 부인하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뜻에 순종하는 믿음이 잘 안 나오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고 그 괴로움을 통해서 십자가의 믿음을 조금씩 배우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내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합니다. 결단코 의롭게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내가 아무 것도 한 것이 받는 십자가의 은혜는 그것을 받고는 아무 것도 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면 은혜를 헛되이 받은 것입니다.
반드시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그 열매로 믿음을 판단하십니다. 내 죄를 대속해주신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며 자신과 죄와 싸우며 하나님을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열매를 확인해야 합니다. 그것이 깨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음과 목숨과 뜻을 즉 생명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자답게 자신을 십자가에 부인하며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십자가의 믿음으로 좁은 길로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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