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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저주 급물살과 지옥 폭포 탈출하기>의 줄거리 :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에 대한 지식입니다. 그런데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뜻은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중단함을 뜻합니다. 그러면 이제 심판과 맹렬한 불길의 형벌이 기다린다는 뜻입니다.
저주 급물살과 지옥 폭포 탈출하기
(히브리서 10:26~39)
26.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27.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28.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으로 말미암아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29.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
30.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31.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
폭포에는 낙하지점이 있습니다. 저주의 급물살에서 탈출할 수 없다면 폭포에서 떨어지듯이 지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주의를 기울여야 할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26~27절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짐짓’이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자발적으로, 자기가 원해서’라는 뜻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에 자발적으로 죄를 범하면 다시는 속죄의 기회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맹렬한 불’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나와의 관계 안에 계신 삼위일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없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라는 사실로써 존재하실 뿐 진리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과 관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유일하게 ‘참’이라는 상황을 허락하십니다. 참이란 곧 올바름입니다. 그리고 기쁨과 만족이 있는 상태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만족이 없다면 참된 상황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참이란 가변성이 없어야 합니다. 변하거나 허무해지지 않는 영원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를 통하여 참됨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리고 기쁨과 만족이 생깁니다. 이러한 상태에 영원함이 보태집니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참의 상황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상황을 가져다주는 진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진리를 아는 지식’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앎이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연합하여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에 대한 지식을 받은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람이 다시 자발적으로 죄를 짓는 경우가 있다면 다시 속죄할 기회가 없습니다. 심판과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맹렬한 불을 마주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에 대한 지식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 하나님 아버지와의 연합, 성령님과의 연합이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럴 때 부활하신 예수님, 승천하신 예수님,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과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의 몸을 내 마음이 입게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연합은 마음의 의식과 욕구와 주체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만을 있음으로 의식하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욕구하고, 하나님만을 추구하여 하나님의 주체성을 받아들이는 상태가 하나님과의 연합입니다. 성령님과의 연합은 예수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동안 이 땅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내려와서 내 몸을 장갑으로 끼심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내려오신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연합함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는 자가 짐짓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죄는 곧 빗나감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과 연합하지 않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에 대한 지식을 들어서 앎에도 불구하고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을 비롯한 생활 현장에서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중단한다면 마음은 빗나가서 하나님 이외의 것들을 향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상태에서는 다시 속죄할 방법이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심판과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씀을 대하자면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에 대한 지식을 받은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라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십자가 생활화를 주제로 전해지는 말씀을 듣기 전에 생활 현장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에 대한 지식을 들었습니까? 날마다 모든 장소와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과 연합함을 통하여 하나님과 성령님과 연합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처한 상황을 보면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님의 이름을 부르며 세례를 받았으니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함에 대한 지식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을 마주 대할 때나 직장에 나가서 일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다는 지식 자체를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살다가 죽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1900년대 말에서 2000년대에 들어가는 시점에서 대한민국의 개신교는 1,200만 명의 교인수를 자랑했습니다. 당시 200만 정도였던 천주교까지 합하면 국민의 1/4이 기독교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던 상황이 지금은 반대가 되었습니다. 천주교 교인이 많이 늘어나고 개신교 교인은 오히려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개신교만 따지자면 국민의 25%에 달하던 교인이 20여년 만에 5% 미만으로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교계에서 5%미만이면 미(未)전도 국으로 분류된다고 합니다. 전도가 아직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나라로 취급된다는 뜻입니다. 대한민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몇 년이나 되었는지 생각해보면 심각한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진리를 아는 지식’이란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생활 현장에서 연합함을 아는 것이라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러한 지식을 들어본 사람도 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날마다 나누고 있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생활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기를 자발적으로 멈춰버린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을 이루어갈 수 있기 위해서 십자가 생활화의 말씀을 꾸준히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씀을 듣고도 실제 삶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중단된 채로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가 진짜 문제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심판이 언급됩니다. 다시 27절을 보면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인내하라, 믿음에서 물러나지 말라’와 같은 내용이 39절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심판과 관계되어 치명적으로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여서 정말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일에 대해 심판과 관계된 오해는 굉장히 큰 방해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 때 심판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성경이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현재의 나는 선함과 악함이 판결되지 않은 중립의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 법에서는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죄인이 아닙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예수님 재림 때 심판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있으니까, 그전까지는 아직 죄인의 판결을 받지 않은 중립의 상태라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교리적으로는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심판이라는 이야기만 하면 반드시 재림때 있을 일로만 생각하며 지금은 중립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에 아담으로부터 태어날 모든 인간에게는 저주가 임했고 그로 인해 멸망이 확정되었습니다. 인류는 선과 악의 심판 전 중립의 상태가 아닙니다. 이미 저주 속에 던져졌고 형벌이 확정된 상태입니다. 저주 속에서 살다가 몸이 죽게 되면 지옥으로 떨어져 들어가게 될 뿐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심판이 지금 우리의 상태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우리는 저주와 멸망 속에 이미 들어와 있는 지옥행 사형수들입니다. 이것은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옥행 사형수들이 살고 있는 세상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지옥행 사형수 누구라도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벌어질 심판은 내가 선한지 악한지를 따지는 재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를 따지는 재판입니다.
본래 멸망은 운명처럼 정해진 일입니다. 나는 저주 속에 있으며 멸망이 정해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형벌과 맹렬한 불길이 꺼지지 않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저주 속에 있고 멸망이 정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아예 모르면 전부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면 멸망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운명처럼 정해진 사실입니다. 따라서 심판 때는 예수님을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뒤로 멸망으로 가는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저주 속에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어차피 멸망으로 정해진 사람이었기에 망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렇기에 어차피 멸망하기로 정해진 사람일지라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므로 멸망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이아가라 폭포를 가보면 물이 떨어지는 낙하지점에서 볼 때 완전히 압도당합니다. 쏟아지는 어마어마한 수량을 보고 있으면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기분이 듭니다. 엄청난 소리와 물안개가 일어나는 광경은 그야말로 압도적입니다. 그런데 폭포 낙하지점이 아닌 상류로 가본다면 느낌은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이 상류에서 물에 빠졌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가만히 내버려 두면 머지않아 폭포의 낙하지점으로 밀려가 바위에 떨어져 죽을 것입니다. 물살이 너무 거세서 누가 들어가서 구해올 수도 없고 배를 타고 들어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헬리콥터가 왔습니다. 밧줄에 구명 튜브를 내려주는데 이상하게 이 사람이 잡지를 않습니다. 아직 폭포지점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지금 잡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아무리 빨리 잡으라고 소리를 치지만 튜브를 잡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이 사람이 싱글벙글 웃으면서 급물살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곧 떨어진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곧 떨어진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물살을 타고 흘러가는 것이 재밌어서 끝까지 튜브를 잡지 않았습니다. 결국 떨어져서 바위에 부딪혀 죽고 맙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심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가 쉽게 됩니다. 이 사람은 급물살에 빠졌지만, 급물살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주어진 구명 튜브를 거부했기에 죽은 것입니다. 급물살이 이 사람을 휩쓸어서 떨어지게 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 자체의 이유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이 이와 같습니다. 인간은 인격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물에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머지않아 낙하지점에 도달하면 죽을 것이라고 깨달았다면 위험을 느끼고 구명 튜브를 붙잡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낙하지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급물살을 즐기느라 구명 튜브를 붙잡지 않았다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입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는 분명히 저주 속에 있습니다. 저주 속에 있는 사람은 지옥이라는 폭포에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류를 구하기 위해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하여 저주받은 상황으로부터 하늘에 닿는 구명줄을 내려주셨습니다. 이 줄을 붙잡고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면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구명줄을 거부하듯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은 구명줄을 붙잡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를 붙잡으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예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고, 이 땅에서는 성령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연합을 거부하는 이유는 급물살을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낙하지점이 있다는 것을 체감하지 못합니다. 지옥 폭포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교리로만 알았지, 실제 생활 현장에서 체감하지 못한 것입니다.
마음이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을 중단하면 저주의 급물살에 휩쓸리게 됩니다. 세상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맛볼 수 있는 오감을 통해 들어옵니다. 마음이 오감의 급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2장 1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는 들은 것에 더욱 유념함으로 우리가 흘러 떠내려가지 않도록 함이 마땅하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적 사실들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진리이신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잡아야 함을 들었습니다. 이것 외에는 다른 복음이 없음을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들은 영적 사실에 유념할 것을 요청합니다. 마음을 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마음 두기를 자발적으로 중단합니다.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자면 단순히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 흘러 떠내려가서 멸망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들은 영적 사실들에 유념하지 않았기에 멸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흘러 떠내려감은 이미 속해 있는 상태입니다. 유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이르셨습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이 땅에서 하늘로 이어지는 줄을 만드셨습니다. 유념하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대하시는 방법이 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고 자기를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가 당연히 받을 형벌은 얼마나 더 무겁겠느냐 너희는 생각하라”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란 바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지 않은 자들을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은 자로 여기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자로 간주하십니다. 은혜의 성령을 모욕한 자로 취급하십니다.
거룩하게 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긴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부정함’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코이논(κοινὸν)은 사소한 것, 보통의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짓밟는다는 것과 같은 의미의 표현입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꽁초를 던져버립니다. 껌을 씹던 사람이 단물 빠진 껌을 땅에 뱉어버립니다. 짓밟는다는 것은 땅에 버리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노아 홍수 때와 똑같은 저주속에 빠져있는 인간쓰레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쓰레기들 중에서 구원받을 자들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쓰레기 취급을 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독생자가 오신 사건을 담배꽁초나 씹던 껌을 땅바닥에 버리듯이 밟고 다닐 것으로 여겼습니다. 전혀 소중한 줄 몰랐던 것입니다.
자기가 쓰레기 상태에 있고, 저주받은 급물살에 떠내려가고 있고, 지옥 폭포에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로 살아갑니다. 급물살에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제일 급한 일은 구명줄을 붙잡고 빨리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언제 지옥 폭포에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잡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에 보이는 건강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자녀 문제를 더 큰 일로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배우자 문제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눈에 보이는 돈 문제가 더 큰 일입니다. 급물살을 즐기듯이 세상을 즐기고 있습니다. 돈 문제의 해결을 좋아합니다. 자녀의 형통한 상태를 좋아합니다. 몸이 건강해서 오래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세상의 급물살을 즐기느라 가장 시급한 일을 잊어버렸습니다. 내 마음이 급물살에 빠져들어 가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나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돈 문제 자체는 큰일이 아닙니다. 돈 문제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큰일입니다. 건강 문제는 큰일이 아닙니다. 건강 문제에 마음이 휩쓸려 가는 것이 큰일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휩쓸려 가는 것이 더 큰 일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로 살아갑니다. 건강이 좋아서 건강 문제에 빠져 떠내려갑니다. 돈이 좋기 때문에 돈 문제에 빠져 떠내려갑니다. 자녀가 좋아서 자녀 문제에 빠져 떠내려갑니다. 이러한 모습은 저주의 급물살을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저주받음의 두드러진 특징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심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이심을 모릅니다. 하나님만이 내 주체성으로 추구해야 할 분이심을 모릅니다. 그 대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좋아합니다. 이 세상에서 몸으로 움직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 세상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저주에 중독된 사람에게 제일 무서운 일은 저주에서 빠져나오는 것입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사업 문제, 직장 문제가 생기면 그 모든 문제들은 저주의 급물살입니다. 그 문제를 일으킨 내용들이 좋아서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한다면 지옥의 폭포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독생자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서 도대체 예수님께 비중을 두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지구가 두 쪽이 나도 독생자 예수님께 신경을 쓸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예수님을 발에 밟힐 수밖에 없는 담배꽁초나 껌처럼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산책을 가면 보통 모자를 쓰고 갑니다. 그런데 때때로 모자를 깜빡 잊고 나올 때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시 돌아가서 모자를 쓰지는 않습니다. 모자 같은 건 사소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을 그렇게 사소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생활 현장에서 십자가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대단한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잊어버리는 것을 특별히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십자가를 잊어버리는 일이 아무렇지 않습니다. 모자 놔두고 산책하는 정도의 보통의 것이라고 여깁니다.
이것이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선물로 약속된 성령을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모독하는 일이며, 당신 자신을 주시겠다고 하늘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맹렬한 불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저주의 급물살이 지옥 폭포로 이어져 있음을 가장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급물살에 떠내려가면 폭포에서 떨어져 죽을 것임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서 건강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돈 문제도 문제가 아닙니다. 자녀 문제도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떨어지면 바위에 부딪혀 즉사하게 생겼는데 세상 문제가 문제일 수 없습니다. 그것을 알면서도 저주의 급물살을 즐길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에서는 히브리서 기자의 안타까움이 잘 느껴집니다. 이 안타까움이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안타까움이 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저주의 급물살에 떠내려가는 상황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고 십자가를 놓치지 않는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저주의 급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게 해주는 유일한 구명 튜브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는 너무너무 대단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는 일은 너무나 끔찍한 일입니다. 이것을 한시도 체감하지 못하고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은혜 내려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