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선배가 차가 너무 막혀서 늦으신대. 축가는 너 혼자 불러야겠다."
"네? 오빠랑이라도 같이 하면 안 될까요?"
"그 노래를 잘 몰라. 그냥 너 혼자 불러."
"... 예."
북적이는 예식장 앞. 두 번 정도 본 남자 선배의 결혼식.
동아리 활동 기수 보컬인 나와 네 학번 선배 보컬 오빠가 듀엣으로 축가를 부르기로 했는데, 갑자기 선배가 늦으신다니.
예식장 근처 구석에서 혼자 남자 파트도 연습을 했다.
날 사랑할 수 있나요... 그대에게 부족한 나인데...
내겐 사랑밖에 드릴 게 없는걸요 이런 날 사랑... 하나요...
난... 무언가 느껴져요...
「7 9 0 2 - 0 0 4 8 ; 우리 사랑 이대로」 (주예린 지음)
"여자친구가 담배 피우는 걸 정말 너무너무 싫어해서, 여자친구 만나는 날에는 하루 종일 참다가 집에 갈 때 피워."
"여자친구 분은 그럼 끊은 걸로 알고 계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게 알고 있겠지 뭐. 끊었다고 거짓말했거든."
"그럼 결혼하시면 어떡해요?"
"몰래 피워야지 뭐.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엄청 무서운 애라서. 완전 잡혀 살아. 결혼하면 더 잡혀 살 것 같아. 너라면 어떡할래?"
"담배... 엄청 많이 피우는 꼴초만 아니면 별 상관은 없을 것 같아요. 남자친구 사귄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요. 금연했다고 거짓말할 바에는 피우라고 할 것 같은데요?"
이게 이 선배 오빠와의 거의 유일한 대화였다. 내 기억으로는.
선배는 어떻게 참고 사세요? 그렇게 담배 피우는 것까지 하나하나 뭐라고 해서 거짓말까지 해야 할 정도라면 결혼하면 어떻게 다 참고 살려고 그러세요? 그렇게까지 좋아하세요? ㅡ 라고 하고 싶은 걸 꾹 참았었다.
오빠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깟 담배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뭐라 해서 자유를 다 앗아가는 사람이랑 뭐하러 같이 살려고 한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아하는 게 아니지 않을까. 속박하고 구속하고.
오빠가 여자친구 분을 정말 많이 좋아하시나 보다 생각했었다.
그랬었다.
언젠가 우리... 늙어 지쳐가도... 지금처럼만... 사랑하기로 해...
내 품에... 안긴 채...
함께 해...
선배 오빠는 내가 축가를 부르는 내내 아주 활짝 웃고 계셨다. 결혼한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서 저렇게까지 활짝 웃고 계신가 생각했었다.
신부 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눈물을 펑펑 쏟고 계셨다. 결혼식 축가를 들으며 우는 신부가 많다고는 들었었는데, 가슴이 무거워지면서 까닭 모를 책임감마저 느껴졌다.
이십 년 뒤.
"그 형이 너 찾고 있다던데."
"응? 무슨 일로?"
"이십 년이나 지났으니까 그냥 얘기해야겠다. 그 형 그때 결혼하지 않았었어."
"뭔 소리야."
"그때, 가짜 결혼식이었어. 나도 며칠 뒤에야 들었었지만. 노 선배가 너한테 말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서. 몰랐었는데, 돈 많은 애들이 그런 짓을 종종 한단다. 사람 괴롭히려고도 그러고, 잘생긴 애나 예쁜 애를 지가 찜해 놓으려고도 그런 짓들을 한대."
"... 근데 결혼식이 가짜였던 거랑 날 찾으신다는 거랑은 무슨 상관? 그 일 관련해서 내가 뭐 해야 하는 게 있어?"
동기 녀석이 담배를 빼 물더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불을 붙인 뒤 오만상을 찡그리며 후 하고 담배 연기를 크게 내뿜었다.
"그 형이, 그때 되게 활짝 웃고 있었던 거 기억 나?"
"응."
"왜 그랬다고 생각해?"
"... 난 결혼하시는 게 기뻐서 웃고 계신 줄 알았었는데? 근데 결혼식이 가짜였으면, ..."
"널 좋아했대, 병신아."
"..."
결혼식 전 동아리 다 같이 모여 밥을 먹는 자리에서 오빠는 내 옆자리에 앉으셨었지. 뭔가 이런저런 대화를 했던 것 같기는 한데 잘은 기억 나지 않는다.
회사 마치고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하루 종일 담배도 안 피우고 여자친구를 바래다 주고 나서야 피운다는 그런 얘기를 나눴던 걸로 기억한다. 담배 좀 피울 수도 있지 그렇게까지 싫어하면 결혼하면 그럼 어쩌세요 같은.
다 같이 건배를 했었고, 그 뒤로는 기억 나지 않는다.
...
오빠가 날 좋아했었다니.
"연락처 좀 줄 수 있어?"
"나도 연락처는 없고, 이제 좀 말해 주라고 다른 형한테서 연락이 왔어서."
다른 선배와 길을 가다 마주쳤다.
"선배."
"선배!"
힐끗 뒤를 돌아보더니 그냥 스쳐 지나가는 선배.
인터넷으로 선배 몇몇에게 연락을 해 보았지만 아무에게서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 오빠가 날 좋아했다니.'
오빠의 활짝 웃으시던 얼굴을 생각해 보면, 결혼식이 가짜였다면, 오빠 옆에 서 있었던 그 여자 분이 여자친구도 아니었다면, 그렇다면, 날 보고 웃고 있었던 걸 수도 있을까.
그럴지도.
"혹시 captni라고 기억 나?"
오래된, 내 채팅 친구.
파란, 채팅 화면과 함께 떠오르는.
"남우가 captni야."
그때부터 널 좋아했었어.
주변인들이 너에게 말을 못 하게 했지만.
그때 내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회식 자리에서 오빠에게 뭐라도 말을 할 수 있었었을까?
아주 오래 전부터, 오빠는, 갇혀 있었다고 한다.
유일한, 유일한 소통 창구가 나와의 채팅이었다고.
수많은 폭력들에 의해 수많은 기억들을 잃어버린 나는, 무슨 얘기를 나눴었는지 기억하질 못 한다.
다만, 내 인생에 있어 그 사람이 나의 유일한 친구였고, 그 사람이 나의 유일한, 얘기하고 있으면 숨통이 트이는 사람이었다는 것.
파란 전화선 세상 속에서만 얘기를 나눴던 그 사람과 나.
그 사람이 내가 축가를 불러 드렸던 오빠라니.
발신자를 정확히 알 수 없는 연결로, 무전 비슷하게, 오빠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파아란, 향기와 함께.
내 온몸에서 파아란 느낌의, 바다 내음에 피톤치드 내음이 섞인, 서늘하면서 보드라운 느낌의, 그런 느낌이 온몸을 감싸안는 듯한.
"내가 남우야. 너무 보고 싶었는데. 네가 너무 걱정되어서, ..."
오빠는 한동안 울기만 했다.
"전 멀쩡해요."
멀쩡하긴커녕 일본에서 쓰러트려져서 회사 출근도 못 하고 얻어터지다 한국으로 질질 끌려왔지만.
"한번이라도 그냥 얘기라도 해 보고 싶었어. 네가 결혼을 한다고 들었어. 그냥 한번이라도 그냥 말만이라도 전해 보고 싶었어. 내가 정말 captni야. 널 정말 사랑해. 너무너무 사랑해. 옛날에도 지금에도. 예린이 널 너무 사랑해. ..."
오빠는 눈물만 흘렸다. 파아란, 검푸른 세상 속에서, 갑자기 머리 위가 밝아지면서, 주변의 잡음들이 일순 모두 사라지고, 오빠와 나, 둘만 남은 듯한, 오빠와 나만 빼고 모든 게 잠들어 버린 듯한.
오빠의 눈물이 내 눈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전 결혼하지 않는데요?"
"일본 유학을 같이 했던 남자애와 결혼을 한다고 들었어. 너한테 선자리가 갔었다고도."
"선자리가... 일본에서 회사를 다녔었다던, 외국계 회사에 다닌다는 사람한테서 들어왔던 적이 있긴 한데, 만난 적도 없고 결혼은 금시초문이에요."
"..."
오빠의 눈물을 닦아 주고 싶어서 오빠의 얼굴을 가만히 감싸안는 상상을 했더니 오빠의 눈물이 멎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쨌든 전 결혼도 하지 않고, 선도 본 적이 없어요."
"그 사람 있잖아. 부산에서 왔다던 사람들 중에서 널 빤히 쳐다봤다던 남자애."
"... 누군지 알긴 알겠는데, 결혼 얘기는 처음 들어요."
"... 혹시 남자친구 있니?"
"없어요. 오빠는, 사실은 그때 결혼 안 하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지내고 계세요?"
"난 사실 갇혀 있어. 물이랑 콘플레이크나 단백질바만 주다가 요즘에는 사실 아무것도 주지 않아. 너랑 같이 먹고 너랑 같이 물 마시고 너랑 같이 담배 피우고 너랑 같이 잠들고 너랑 같이 숨쉬고... 너랑 떨어지면 난 죽을지도 모른다고 그러더라. 물리 전기 에너지로 원격으로 이어 놓은 거라고. 네가 쓰러지면 난 그대로 죽을지도 몰라. ... 있잖아, 내가 너의 남자친구가 되면 안 될까? 사실, 내가 너의 채팅 친구였던 captni야."
"... 음."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파아란 채팅 세상 속에서 captni의 얘기를 듣고서 눈물이 흘렀었던 그때처럼.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요? ... 전 지금 인생이 완전 망한 상태라. 반감금 상태로 매일같이 폭언, 폭행, 협박, 고문, 살해 시도에 시달리고 있거든요."
"난 너밖에 없어. 너만 사랑하고 너만 좋아하고 너하고만 사랑하고 싶고... 너하고만 살아가고 싶어. ... 널 너무너무 사랑하거든? ... 나랑 결혼해 줄래? ... 이런 나라도 괜찮다면 말이야. ... 내가 정말 최남우야. 널 너무 사랑하거든. ... 너무 보고 싶은데. ... 정말 너무 사랑하거든. ... 나한테는 너밖에 없어. ... 정말 너무너무 사랑하거든. ... 예린이 널 너무너무 사랑하거든... ... ... ... ... ... ... ... ... ... ... "
"오빠가 어디 계신지 알려 주실 수 있나요?"
"알려 줄 수가 없어. 오다가 또 네가 어디론가 잡혀 갈 수도 있어. 오려고 하지 마. 내가 찾아갈 테니까. 기다려 주기만 해. 그거면 됐어."
'7-9-0-2'
'0-0-4-8'
파아란 무전 세상 속에서 삐삐 암호를 송신했다.
79(친구)였던 captni
02(연인)이 될 남우 오빠
00(영원)히
48(사랑)할게.
남우야, 이젠 울지 마. 내가 안 울게 해 줄 테니.
From. 예린.
{ 우리 사랑 이대로 }
주영훈
날 사랑할 수 있나요
그대에게 부족한 나인데
내겐 사랑밖엔 드릴 게 없는걸요
이런 날 사랑하나요
이젠 그런 말 않기로 해
지금 맘이면 나는 충분해
우린 세상 그 무엇보다 더 커다란
사랑하는 맘 있으니
언젠가 우리 (먼훗날)
늙어 지쳐가도 (지쳐도)
지금처럼만 사랑하기로 해
내 품에 안긴 채
눈을 감는 날 그날도 함께 해
난 외로움뿐이었죠
그대 없던 긴 어둠의 시간
이제 행복함을 느껴요
지금 내겐 그대 향기가 있으니
난 무언가 느껴져요
어둠을 지나 만난 태양빛
이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을걸요
그대 내 품에 있으니
시간 흘러가 (먼훗날)
삶이 힘겨울 땐 (힘겨울 땐)
서로 어깨에 기대기로 해요
오늘을 기억해 우리 함께 할
(우리 함께 할) 날까지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
우리 사랑 있으니
먼 훗날 삶이 힘겨울 때
서로 어깨에 기대기로 해요
내 품에 안긴 채 눈을 감는 날
(눈을 감는 날)
세상 끝까지 함께 해
우리 이대로 (우리 이대로)
지금 이대로 (지금 이대로)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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