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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흑암 속 내 소원 대상은 다 죽는다>의 줄거리 :
새해 소원을 가지기 전에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은 내가 소원하면 그 대상이 반드시 죽습니다. 이런 세상 소망은 내 마음속에서 이삭과 같은 장자로서 반드시 죽습니다. 이런 장자의 죽음이 바로 완악함 속에서 나타나는 열 번째 구성성분입니다. 이에 앞서는 아홉 번째 성분은 흑암입니다. 이 흑암 속에 있기에 나는 이 세상 것을 소원합니다. 이 흑암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져서 빚어집니다. 이런 흑암의 상태에서 생기는 일이 바로 이 세상 것을 소원하는 일입니다. 마음속에서 영광의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에 대신 등장한 가짜 태양이지요. 이 가짜 태양으로는 하나님을 못 보는 흑암을 물리칠 수가 없습니다.
흑암 속 내 소원 대상은 다 죽는다
(출애굽기 10:21~11:10)
2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
22.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
23. 그 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
4.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 하셨나니
8.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2025년 첫 번째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 시작합니다. 본문에는 아홉 번째 흑암 재앙이 기록되었고 열 번째 장자의 죽음 재앙이 예고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장자가 죽는 일은 차후에 유월절이 있고 출애굽 할 당시에 장자가 죽게 됩니다. 새해 첫날 두 가지 재앙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희망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흑암 속 내 소원 대상은 다 죽는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아홉 번째 재앙의 흑암이란 열 번째 재앙의 장자의 죽음이 상징하는 실제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에서 첫 번째로 좋아하여 첫 번째로 존재감을 느끼거나, 첫 번째로 좋아하여 소원하고 희망하는 대상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장자의 죽음이라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소원을 죽여야 합니다. 새해에 소원을 마음에 품고자 하신다면 그 전에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소원이 세상 것인 한 죽음을 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물을 소원한다면 나에 대해서 재물이 죽습니다. 건강을 소원한다면 나에 대해서 건강이 죽습니다. 자녀의 형통을 소원한다면 자녀의 형통에 죽음이 임합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첫 번째로 좋아하는 대상을 소원합니다. 장자란 이러한 소원을 상징합니다. 문제는 이 세상 것을 첫 번째로 좋아하여 소원하는 상태는 흑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흑암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 것을 제일 먼저 좋아하여 소원하는 것이 장자입니다. 이러한 장자는 완악함 속에 있는 열 번째 성분으로써 반드시 죽음을 면하지 못합니다.
아홉 번째 재앙은 흑암입니다. 흑암은 완악함의 아홉 번째 성분으로써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을 때 임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할 수 없음이란 곧 하나님이 마음에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있게 하시고, 나를 보고 계시고, 나를 알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유일한 있음이자 유일한 좋음이라는 사실도 마음에서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시력이 완전히 끊어지고 죽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오직 육체에 밀착되어 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만 반응합니다. 이것이 완악함의 아홉 번째 성분인 흑암입니다. 마음의 시신경이 완전히 죽어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흑암이 덮고 있는 상태입니다.
지금도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 내 몸이 있고 수억, 수조 개의 세포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몸을 둘러싼 모든 사람과 사물을 비롯한 환경은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 세상은 하나님의 있게 하심의 주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흑암의 상태라면 이 사실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온 세상에 햇빛이 가득해도 눈이 먼 사람은 빛을 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잠시도 빈틈없이 온 세상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일들에 반응하는 동안에는 하나님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진 상태가 본문에서 말하는 흑암입니다. 육체의 눈은 뜨고 있으나 진짜 보아야 할 사실이자 더 먼저 보아야 할 사실을 볼 수 없는 눈뜬장님과 같은 상태입니다.
본문 21절을 보면 이 흑암을 “더듬을 만한 흑암”으로 표현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깜깜해서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듬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흑암 자체를 손으로 더듬어서 만질 정도로 두텁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의 상황을 생각해 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24~25절에서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라고 했습니다. 육체의 눈에 보이는 소망은 진정한 소망이 아니며,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마음으로 바라보면서 소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또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는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우리가 마음의 시신경을 살려서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기를 요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마음은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에 먼저 반응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마음은 반응해야 할 기준을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으로 정합니다. 따라서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도록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집니다. 이것은 우리가 아주 주의해야 합니다. 일단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에 반응하면, 그다음부터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반응하지 않는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시각에 한정되는 일이 아니라 육체의 오감으로 대하는 일들 전체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루를 시작함에 있어서 마음이 육체의 오감에 반응하기 전에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을 먼저 의식에 켜놓고 마음이 반응할 조건을 갖출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런 조건도 갖추지 못한 채 삶을 시작한다면 마음은 하루 종일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들에 대해서만 반응해야 되는 줄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오늘의 번제를 드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제일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과 천국을 켜놓고 마음이 그 천국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나는 아버지가 계신다. 하나님 아버지는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다. 내가 오늘 하루 사는 동안에 만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서 있게 될 것이다.’라는 사실을 의식에서 켜놓고 있어야 하늘을 향한 마음의 시신경은 활발하게 살아서 유지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아침에 눈을 떠서 곧바로 세상 것들에 반응한다면 마음에서는 착각이 발생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 반응해야 되는 기준은 눈에 보이는 것들과 귀에 들리는 것들이다.’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일단 그렇게 되면 십자가에서 죽기도 힘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에 대해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져서 흑암에 갇힌 사람과 하나님에 대해 마음의 시신경이 활성화된 사람의 차이는 어떻게 나타날까요? 그 대표적인 예가 노도광풍 속 일엽편주에 예수님과 제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의 시신경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살아계셨습니다. 그렇기에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서 모든 것이 있게 된 가운데 광풍이 있게 됨을 보셨습니다. 다시 말해 광풍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마음의 시신경으로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도 주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광풍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있게 하심은 예수님이나 제자들에게나 빈틈없이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다도 있게 하시고, 광풍도 있게 하시며, 배도 있게 하시고, 제자들의 목숨도 있게 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제자들의 마음의 시신경은 하나님에 대해 끊어져 있었습니다. 제자들의 육체의 눈은 분명하게 광풍을 보고 있으나 마음의 눈은 흑암 속에서 하나님을 보지 못하는 장님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며 죽겠다고 난리를 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천사들은 이 광풍을 하나님이 있게 하심으로 보았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육체의 눈으로 광풍을 보며 반응하느라 마음의 눈으로 광풍을 있게 하신 하나님을 전혀 볼 수 없었습니다. 천사들은 이러한 제자들이 마치 장님이 허공을 향하여 팔다리를 허우적대는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모습도 제자들과 같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한 해를 살아가는 동안에 삶의 현장은 하나님의 있게 하심으로 가득 차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졌다면 하나님의 있게 하심을 전혀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께 맞추어진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것처럼 허공을 향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몸부림을 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있게 하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 채움을 위하여 가져야 할 유일한 좋음입니다. 내 마음이 평안을 위하여 느껴야 할 유일한 있음인 존재감의 대상이십니다. 그런데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흑암 속에 있으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눈뜬장님과도 같습니다. 이로부터 우리가 새해에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볼 수 없게 하는 흑암을 거두어 내는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마음이 하나님을 보는 상태에서 한시도 떨어져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보면 됩니다. 일년내내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시신경이 활발하게 움직이기를 바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눈뜬장님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무엇인가 다른 존재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껴야 됩니다. 또한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좋음으로 채워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있음은 하나님이십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있게 되었기 때문에 존재감을 느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있게 하신 하나님만이 유일한 존재감의 대상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볼 수 없어도 답답함을 느끼지 못합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은 스스로 있는 존재가 아니기에 무엇인가 있다는 느낌을 통해 존재의 토대를 삼습니다. 그런데 유일한 있음인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또한 마음은 비어있기 때문에 무엇인가 좋음을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일한 있음인 하나님을 취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이라면 답답함을 느껴야 정상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전혀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장자가 등장합니다. 하나님에 대해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진 사람은 육체의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서 첫 번째 있음이자 첫 번째 좋음으로 여겨지는 대상을 붙잡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을 좋아함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흑암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져서 하나님을 볼 수 없는 흑암 속에 있기 때문에 세상 것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좋아할 때 나타나는 효과는 마음이 장님인 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 것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을 욕구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면 답답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하나님 대신 육체의 눈으로 보는 것들 중에서 첫 번째로 있다고 여겨지는 것과 첫 번째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찾습니다. 그것이 장자로 상징된 것입니다. 이러한 장자들 때문에 흑암 속에 있으면서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을 볼 수 없어도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존재감을 느낄 수 없고 채울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장자를 가짜 태양처럼 여기며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장자들 때문에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진 장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 3장 17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라오디게아 교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스스로를 부자로 여깁니다. 이는 곧 ‘내가 마음으로 돈을 보고 있기 때문에 나는 장님이 아니다.’라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에는 진짜 있음과 진짜 좋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하나님만이 진짜 있음이고 진짜 좋음입니다. 있음과 좋음이 필요한 마음이 이러한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면 답답해 미칠 지경이 되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라오디게아 교회가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처했던 것처럼 사람들은 답답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신하여 눈으로 보는 세상 것들 중에서 있음과 좋음을 붙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붙잡은 대상이 장자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열 번째 재앙은 장자의 죽음입니다. 성경에서 장자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 인물은 이삭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 이삭의 삼각관계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삭은 영적인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독자이며 장자입니다.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기 위하여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침으로 죽였습니다. 하나님이 막으셔서 이삭이 실제로 죽지는 않았지만 아브라함의 마음에서는 이삭이 죽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내 마음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대상들이 장자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쳤듯이 마음의 장자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죽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장자는 삽니다. 그러나 반대로 마음에서 장자를 끝까지 붙잡으면 열 번째 재앙이 뜻하는 대로 장자는 반드시 죽습니다.
문제는 내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고 좋음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진 상태에서는 하나님 대신 이 세상 것들을 채택하면서 그것이 곧 나의 장자가 됩니다. 그렇게 마음에서 채택한 장자를 죽이지 않는다면 그 장자는 반드시 죽게 됩니다. 이것이 열 번째 재앙이 알려주는 완악함의 마지막 요소입니다.
그렇다면 장자가 왜 죽어야 하는 것일까요? 말씀드렸듯이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습니다. 이로부터 소원하고, 희망하고, 소망하고, 바라고, 욕구하고, 소유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마음의 본능으로써 죄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대상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마음의 시신경이 죽고 흑암 속에서 하나님을 볼 수 없기에 육체의 눈에 보이는 대상 중에서 마음으로 붙잡을 대상을 찾습니다. 쉽게 말해 이거면 되겠다고 여기는 대상에는 ‘이거면 내 마음에 채움이 일어나겠다. 이것의 있음을 통해서 내 존재의 토대를 삼을 수 있겠다.’라는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있음의 존재감과 좋음의 만족감의 문제에서 하나님에 대해 장님인 상태에서는 세상 것을 붙잡으면 그것이 장자로 확정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내가 좋다고 여기는 것을 마음으로 소원하게 됩니다. 마음이 채워지기 위해서 붙잡습니다. 그럴 때 그것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은 다 끊어집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있게 하신 것들을 앞으로도 있게 하실 것입니다. 장자는 내가 자의적 완악함의 흑암 속에서 만들어 낸 가짜 태양입니다. 장자는 내 소원의 대상이며, 내 마음에서 첫 번째 좋음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완악함이기에 어떤 대상이 나의 장자가 될 때 그것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은 끊어지게 됩니다.
지난 시간에 시체나 사체의 영적인 의미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시체나 사체는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지 않는 대상을 상징합니다. 시체나 사체에 대해 하나님은 더 이상 뜻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소원하는 일들이 시체가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새해에는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돈을 장자로 삼아 소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 대한 재정 문제에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돈은 마음으로 끌어안아도 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내가 돈을 장자로 끌어안고 있기에 재정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은 다 끊어지게 됩니다. 이제 재정 문제는 내게서 죽는 장자가 됩니다. 건강이나 자녀나 배우자의 형통이나 내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그림 그리고 소원하는 동안 그것들은 내 마음에서 장자가 됩니다. 스스로 있게 하려는 완악함으로 나의 미래를 끌어안은 것입니다. 그러면 내 미래를 향하여 하나님이 갖고 계시고 있게 하시려는 뜻은 끊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끊어진 대상은 시체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이 끊어졌기에 내 미래가 시체가 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서 첫 번째로 갖고 싶어 하는 소원이 장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소원을 갖는 이유는 흑암 때문입니다. 진짜 있음이고 진짜 좋음인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졌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을 첫 번째로 좋아하는 장자를 키우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세상 것을 장자로 삼는 순간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뜻이 끊어집니다. 나에 의해 하나님의 뜻이 끊어짐으로써 시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이전에 살펴본 재앙의 구성성분과 같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삶을 근본적으로 끊어냄으로써 생명이 유출되어서 피바다가 되어버립니다. 그리고 삶 전체는 개구리로 상징되는 거짓 토대 위에 세워져 있게 됩니다. 장자를 소원하며 그것을 이루겠다고 살아갈 때 방충망 없는 창문인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에 의해 마음은 끊임없이 자극을 받게 됩니다. 내 스스로 생각하면서 구더기를 키우고 그것이 말과 행동으로 나와 파리가 됩니다. 삶은 그야말로 뒤죽박죽이 되어버립니다. 이처럼 흑암은 재앙 전체를 감싸는 포괄적인 요소입니다. 완악함의 포괄적 구성성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흑암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 것을 장자로 채택함에 있습니다. 세상에서 첫 번째로 좋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마음에서 장자로 키우는 것입니다.
강릉에는 정동진이 있습니다. 서울 광화문에서 정 동쪽에 있기 때문에 정동진이라고 합니다. 새해 첫날이 되면 정동진은 해맞이 인파로 난리가 납니다. 차로 강릉 시내를 지나려면 한 시간이나 걸릴 정도입니다. 이 좁고 작은 도시에 사람들이 몰려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닷가를 붉게 물들이며 해가 솟아오릅니다. 사람들은 짙은 어둠을 물리치며 해가 솟아오르는 모습을 보며 소원을 기원합니다. 마음에서 장자를 낳고 키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의 소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어야 합니다. 나의 마음을 하늘로 인도하는 주님의 십자가와 밀착함에 대한 것이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 것이 소원이라면 완악함 속에서 시신경이 끊어진 장님의 상태에서 장자를 갖는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이 장자의 죽음인 것처럼 내가 소원하여 가진 마음의 장자는 하나님의 뜻에서 끊어져 죽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소원에 대한 말씀이 다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2장 13절을 보면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했고, 시편 37편 4절에서는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소원이란 우리 마음의 시신경은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인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을 먼저 볼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그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과정 중에 우리에게 소원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내게 옮겨붙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마음에서 세상의 장자를 갖는 것은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고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는 상황을 보지 못하는 흑암 속에 있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있음과 좋음이 필요하기에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들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장자로 채택합니다. 그러나 그 장자는 애굽에 내린 열 번째 재앙처럼 반드시 죽습니다. 내가 소원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인도하심의 뜻에서 끊어지고 죽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여 여러분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의 시신경에 의해서 보이는 하나님의 윤곽이 더욱더 뚜렷해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있게 하심의 주권이 더욱더 뚜렷해지면서, 나를 둘러싸고 빈틈없이 내려오는 하나님의 있게 하심과 있게 하시는 하나님 자신을 육체의 눈으로 보는 어떤 것보다도 더욱더 뚜렷하게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소원하시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흑암이 사라지게 해달라고 소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시신경이 끊어진 흑암 속에서는 육체의 눈에 보이는 것을 장자로 삼고,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짜 태양으로 삼고, 희망으로 삼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런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내 속에 임하고 있는 흑암을 죽입니다. 진짜 희망의 태양은 동해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지 않고 십자가 너머에서 떠오릅니다. 그 태양은 멀리서 바라보는 태양이 아닙니다. 떨기나무에 붙은 불꽃은 태워죽이는 불이 아니듯이, 예수님은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과 함께 하게 해주시는 빛이 되십니다.
진짜 영광의 빛이신 하나님은 십자가 너머에 계십니다. 우리의 소원은 이 십자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십자가 수평선 너머에서 떠오르시는 하나님 아버지를 향하여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라보는 대로 아버지의 있음과 좋음을 마음속에 받아들이고, 내가 하나님의 장자가 되는 것이 우리의 소원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에서 장자를 키우는 자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장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쪼록 하나님과 내 마음 사이에 어떤 것도 끼어있지 않은 완벽한 장자 됨이 온전히 이루어지는 2025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이루어질 수 있기 위하여 소원하고 간구하며 1월 1일을 시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고 감탄하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일 년 동안 하나도 빠짐없고, 하나도 유출되지 않고 다 이루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흑암의 재앙과 장자 죽음의 재앙 속에서 2025년 새해의 희망을 바라봅니다. 이 두 가지 재앙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 속에서 우리의 소원은 하나님뿐임을 확인합니다. 나의 소원, 나의 희망, 나의 바람 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의 관계가 더욱더 두터워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더욱더 하나님 아버지 부자가 되고, 하나님 재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한시도 주님의 십자가를 떠나지 않고 살아가는 2025년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