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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매 타기
어린 시절, 겨울이 되면 우리가 사는 교외 지역의 눈 덮인 언덕에서 우리는 썰매를 탄다. 동생은 썰매 뒤쪽에, 나는 앞쪽에 타고 달린다. 그 애의 턱이 내 어깨에 닿고 무릎에는 그애의 발이 닿는다.
우리를 실은 썰매는 얼어붙은 길을 달려 내려간다. 언덕을 내려가면서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차가 온다, 위험해!"
누군가 소리친다. 우리 왼편 도로에서 차가 달려오고 있다. 우리는 비명을 지르면서 썰매 앞머리를 돌리려 하지만 활주부가 꼼짝도 하지 않은다. 운전자는 경적을 울리며 급브레이크를 밟고 우리는 용감한 애들답게 썰매에서 뛰어내린다.
후드가 달린 잠바를 입은 우리는 추운 눈밭을 통나무처럼 데굴데굴 구른다. 이제 곧 딱딱한 자동차 바퀴에 쾅 부딪칠 거라고 각오한다. 우리는 너무나 겁이 나서 "아아악!" 소리를 지르며 구른다. 위아래가 뒤집어지고 세상이 바로 보였다 거꾸로 보였다 한다.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구르기를 멈추고 숨을 몰아쉬며 얼굴에 묻은 눈을 닦아 낸다. 운전자는 단단히 화가 난 듯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하면서 도로를 빠져나간다.
우린 안전하다. 조금 전 우리가 탔던 썰매는 조용히 눈 더미에 박혀 있고 친구들은 손뼉을 치면서 "멋져!"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라고 소리친다.
나는 동생을 쳐다보면서 씩 웃었다. 어깨를 으쓱하며 나는 동생과 하나가 된다.
"그다지 나쁜 경험은 아니었어."
우린 이렇게 말하면서 또다시 죽음과 맞설 채비를 한다.
감정
여섯 번째 화요일
교수님 댁 앞에 있는 칼미아 나무와 단풍나무를 지나 푸른 돌계단을 올라갔다. 흰 빗물받이가 문 위에 달려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평소와 달리 코니 대신에 모리 교수님의 부인인 샬럿이 나왔다. 샬럿은 잿빛 머리칼을 한 아름다운 분으로 항상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교수님의 병 진단 이후로도 교수님의 바람대로 계속 MIT대학에서 근무했다. 그래서 교수님 댁에 들을 때면 샬럿은 거의 집에 없었다. 그래서 이날 아침 그녀가 나를 맞아 주자 무척 놀랐다.
"그 양반이 오늘은 무척 힘들어하네요."
샬럿이 말했다. 그녀는 잠시 내 어깨너머를 쳐다보더니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필 이런 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나는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샬럿은 재빨리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이는 미치를 만나면 분명히 좋아할 거예요."
샬럿은 말을 하다가 갑자기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무슨 소리가 나는지 귀를 기울였다. 그러더니 다시 말을이었다.
"미치가 집에 온 걸 알면 그이 기분은 틀림없이 한결 나아질 거예요."
"음, 이 음식을 드려야죠!"
나는 농담을 하면서 가게에서 사 온 봉지를 들어 보였다. 샬럿은 미소와 함께 슬픈 표정을 지었다.
"음식은 아직 많이 남아 있어요. 지난번부터 그이는 통 먹지를 못했거든요."
나는 깜짝 놀랐다.
"선생님이 음식을 통 못 드신다고요?"
샬럿이 냉장고 문을 열자 눈에 익은 그릇들이 보였다. 닭고기 샐러드, 파스타, 야채, 호박 요리......... 모두 내가 교수님께 드리려고 사 왔던 음식들이었다. 샬럿이 냉동실 문을 열자 거기에는 더 많은 음식들이 들어 있었다.
"그인 이제 이런 음식을 못 먹게 됐어요. 삼킬 수가 없거든요. 유동식만 먹어야 한대요."
"하지만 교수님은 그런 말씀을 안 하셨어요."
샬럿은 미소를 지었다.
"미치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말하지 않았을 거예요."
"이 음식들을 먹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어도 되는데. 전 그냥 어떤 식으로든 도와 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러니까 교수님께 뭔가 먹을 거라도 갖다 드리고 싶어서........"
"미치는 이미 그 사람에게 소중한 걸 갖다 주고 있어요. 그이는 미치의 방문을 잔뜩 기대해요. 미치와 함께하는 이번 프로젝트를 잘 해내야 한다면서 말이에요. 어떻게든 자신이 거기에 집중해야 하고 시간을 따로 쪼개야 한다고 하더군요. 두 사람의 만남이 훌륭한 목적의식을 주나 봐요."
샬럿의 눈은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마치 딴 세상을 향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교수님이 힘든 밤을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계속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녀도 역시 잠을 자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어떤 때 교수님은 몇 시간 동안이나 계속해서 기침이 터져 나와 고생하기도 했다. 이 때 목에 걸린 가래를 뱉어 내는 데는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이젠 간호사들이 밤에도 집에 머무르고 있었고 낮에는 졸업생들이나 동료 교수, 명상 선생님들이 드나들었다. 하루에 손님이 대여섯 명이 넘게 오는 날도 있었고 샬럿이 퇴근해서 집에 왔을 때까지 손님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남편과 함께 지낼 귀중한 시간을 다른 사람들이 빼앗는데도 샬럿은 참을성 있게 그 상황을 잘 받아들였다.
"목적의식 그건 정말 좋은 일이에요."
샬럿이 말했다.
"저도 그랬으면좋겠습니다."
나는 새로 사 온 음식을 냉장고에 넣는 것을 도왔다. 부엌 조리대에는 온갖 종류의 메모와 전갈, 의료 지식이 적힌 종이가 있었다. 식탁 위에는 어느 때보다도 약병이 많았다. 천식 때문에 먹는 셀레스톤, 수면을 유도해 주는 아티반, 감염 때문에 복용하는 나프록센, 거기에 분유와 완화제까지 놓여 있었다. 복도 끝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그이가 나오고 있나 봐요. 가서 보고 올께요."
샬럿은 다시 내가 가져온 음식을 힐끗 봤고 나는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우리 선생님은 남아 있는 이 음식들을 다시는 맛보지 못하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루게릭병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우리가 마주 앉았을 때 교수님은 평소보다 훨씬 많이 기침을 했다. 몸통 전체가 마구 흔들리고 머리까지 앞으로 확 쏠리게 하는 심한 기침이었다. 이런 기침이 터지다가 잠잠해지면 그는 눈을 감고서 숨을 내쉬었다. 나는 교수님이 기운을 차릴 때까지 조용히 앉아 있었다.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나?"
교수님은 눈을 감은 채 불쑥 말을 내뱉었다.
"네, 돌아갑니다."
나는 버튼을 누르며 재빨리 대답했다.
"나는 지금 '경험에서 벗어나기'를 하고 있다네."
모리 교수님은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말했다.
"벗어나기요?"
"그래, 벗어나기. 나처럼 죽어 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자네처럼 아주 건강한 사람한테도 이것은 아주 중요해.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교수님은 눈을 떴다. 그리고 숨을 내쉬고 말했다.
"불교도들이 뭐라고 하는지 아나? '세상의 일들에 매달리지마라. 영원한 것은 없으니까.'"
"하지만 선생님은 늘 삶을 경험하라고 말하지 않으셨나요?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모두 경험해 보라고."
내가 말했다.
"물론 그렇지."
"경험하라고 하시면서 또 벗어나라고 하시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의미죠?"
"음, 자네도 거기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었군. 하지만 벗어난다고 해서 경험이 우리를 꿰뚫고 지나가지 못하게 한다는 뜻은 아니야. 반대로 경험이 자네를 온전히 꿰뚫고 지나가게 해야 하네. 그렇게 해야만 거기에서 벗어날 수 있어."
"아직도 어려워요."
"어떤 감정이든 결코 그것에 초연할 수는 없어. 예를 하나 들어 보도록 하지. 어떤 여자를 사랑한다고 가정해 보세. 아니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이나 또는 지금의 나처럼 치명적인 병으로 인한 두려움과 고통과 같은 것을 느낀다고 해보자고. 우리가 감정을 자제하면, 즉 그 감정들이 자신을 온전히 꿰뜷고 지나가게 하지 못한다면 겁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할 거야. 고통이 겁나도 슬픔이 두렵지. 또 사랑의 감정에 뒤따르는 약해지는 마음 때문에 겁이 나게 된다네."
목이 마른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그는 계속한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에 온전히 자신을 던져서 스스로 그안에 빠져들도록 내버려 두면, 그래서 온몸이 거기에 빠져들어 가게 되면 그때는 그 감정들을 제대로 경험할 수 있게 돼. 고통이란 게 뭔지를 알게 되는 거지. 또 사랑이나 슬픔이 뭔지도 알게 되네. 그럼 그제야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좋아, 난 지금껏 그 감정을 충분히 느꼈어. 이젠 그 감정을 너무도 잘 알아. 그렇다면 이제 잠시 그 감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겠군.'이라고 말이야."
모리 교수님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마 내가 제대로 알아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오직 죽어 가는 것에만 관계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내가 지금껏 언급해 온 것들과
비슷한 이야기라네. 어떻게 죽어야 할지를 배우게 되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깨닫게 된다는 것 말이야."
교수님은 가장 두려운 순간에 대해서 말했다. 숨을 들이쉬다가 가슴이 탁 막혀 버리는 느낌이 들 때, 혹은 다음 숨이 어디서 나올지 확신할 수 없을 때가 그는 가장 무섭다고 했다. 그럴 때 처음 느껴지는 감정은 두려움, 공포, 초조함인데, 하지만 일단 이런 느낌과 감촉, 그 축축함과 오싹함이 머리끝까지 확 솟아오르느 것을 느낀 후에는 "좋아, 그래. 난 지금 겁이 나. 그럼 이제 여기에서 빠져나가야겠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모두는 얼마나 외로운가. 어떤 때는 눈물이 날 정도로 쓸쓸하지만 울어선 안 된다는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또 어떤 이에게 사랑하는 감정이 솟아나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면 관계가 틀어질까 봐 두려워서 입을 꼭 다물어 버린다.
모리 교수님의 접근법은 이와 완전히 반대였다. 수도꼭지를 틀어 놓고 감정으로 세수를 한다. 그렇게 하면 오히려 큰 도움이 되고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두려움이 안으로 들어오게 내버려 두고 그것을 늘 입는 셔츠처럼 입어 버리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좋아, 이건 그냥 두려움일 뿐이야. 요놈이 나를 좌우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자고."
외로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외롭다면 감정을 풀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충분히 느낀다. 그러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좋아, 그건 내가 쓸쓸함을 느끼는 한 순간일 뿐이야. 난 쓸쓸함을 느끼는 게 두렵지 않아. 하지만 지금은 이 감정을 옆으로 밀어 놓고 이 세상에 있는 또 다른 감정을 맛봐야겠어. 다른 것들도 경험해 보자고."
난 놀란 얼굴을 하고 그를 쳐다본다.
"벗어나게."
모리 교수님은 다시 말했다. 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또 기침을 해 댔다. 기침을 한 후에 더 크게 또 기침을 했다. 갑자기 가슴이 막히면서 폐에 울혈 중상이 생겨 기침이 위로 올라오다가 떨어지면서 숨을 쉬지 못하게 했다. 교수님은 내 앞에서 구역질을 하더니 심하게 마른 기침을 해 댔다. 그의 머리까지 마구 흔들렸다. 두 눈을 감고 양손을 저으면서 거의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나는 이마에 땀이 송송 맺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가래를 뱉어 냈다. 기침이 멈추자 그는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공기를 들이마셨다.
"괜찮으세요, 교수님? 정말 괜찮으신 거예요?"
나는 공포심을 감추려고 애쓰며 물었다.
"난, 괜찮아. 그저..........잠시 기다려 주게."
교수님은 힘없이 손을 흔들며 속삭였다. 그의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기다렸다. 머리통에서 땀이 솟는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은 바람이 들어와 추우니 창문을 닫아 달라고 내게 부탁했다. 그에게 바깥 기온이 27도나 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마침내 속삭이는 소리로 교수님은 말했다.
"내가 어떻게 죽고 싶어 하는지 혹시 아나?"
나는 침묵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온하게 죽고 싶네. 아주 평화롭게 말이야. 방금 전처럼 그렇게는 아니야. 벗어나기가 힘을 발휘하는 때는 바로 이때야. 만약 방금처럼 기침을 해 대다가 죽어야 한다면 난 그 두려움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어. 그럴 때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두려움에서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해야겠지."
근심스런 내 얼굴을 보며 교수님은 말을 이어 나갔다.
"공포 속에서 세상을 떠나고 싶진 않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받아들이고, 평화로운 곳에 이르고, 자유롭게 놓여나고 싶네. 이해가 되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은 놓여나지 마세요."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교수님은 억지로 웃었다.
"그래, 아직은 안 되지.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까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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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빠져들었다 벗어나기..... 좋은 가르침을 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정에 몸을 맡겨라.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벗어나라... 여기에도 수파축랑의 지혜가 보이네요. 파도를 타다가 결정적 순간 파도를 박차고 높이 날아오르는 모리 교수님의 모습을 그려봅니다. ^^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