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망양로를 오르며
버스가 범내골 가까이 들어서자 증산이 보인다. 크고 작은 직육면체의 집들로 둘러싸여 거대한 포장미술의 일부처럼 보이는 산은 원래의 제 모습을 생각해보라는 듯 능선을 감추고 있다. 나는 범내골 로타리에서 내려 망양로를 따라 걸어 올라간다. 이곳 사람들이 아리랑 고개라 불렀던 길에는 사나운 범 대신 마이크로버스와 대형버스가 연달아 크르릉거린다. 성북고개에서 증산으로 가는 성북로에 들어서자 길 입구 가게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유심히 쳐다본다. 옷을 얼마나 껴입었는지 눈사람처럼 뚱뚱한 그녀의 발치에는 갖가지 트레이닝복이 펼쳐져 있다.
"많이 춥죠? 장사는 좀 됩니까?"
"요 밑에 고무공장 있을 때는 잘 됐다카더마는 인자 여어는 사람이 많이 안 댕긴다 아잉교. 그래서 첨에는 힘들더마는 요샌 좀 낫네요, 아주무이는 머로 해볼라카능교? 시작이 에럽지 머든 해보믄 돼요!"
그렇게 살가운 그녀에게 마실 삼아 올라와봤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겠지요, 그런데 저 안쪽에 뭐가 있는지 아세요?"
나는 내게는 특별한 시간과 공간을 의미하는 증산 쪽을 보며 묻는다.
"거 머가 있겠능기요, 시장이요, 시장."
"시장 말고 저 산 쪽에 옛날에 뭐가 있었습니까?"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지금은 공원인데, 안에는 운동 기구뿐이요."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흐느적거린다
시간이라는 매질을 통과한 성벽 위로
오래된 것들이 묵은 핏줄기처럼 돋아난다 · 시계의 시간과 마음의 시간, 그 사이에서
검고 길쭉한 타원형의 돌에 새겨진 '증산 공원'이라는 이름은 인근의 역사를 증발시켜버릴 듯 낯설다. 임진왜란 때 정발 장군을 비롯한 온 군민이 장렬히 싸웠던 부산진성이 왜 증산공원으로 불려야 하는지, 저 아래 버스정류소도 지하철역도 철도역도 부산진이라 부르는데 정작 부산진을 지켰던 이곳은 왜 부산진성으로 불리지 못하는지…. 나는 돌 틈이 시멘트로 메워진 성벽을 따라 걸으며 왼편의 집들을 본다. 예전과 달리 새로 지은 집이 많고 뼈대는 그대로 둔 채 창문만 알루미늄 새시로 바꾼 집도 있다.
"학생, 여기 옛날에 뭐가 있었는지 알아요?"
모릅니다, 마주오던 학생은 몰라서 미안하다는 듯 인사까지 하고 간다.
공원 정문에 이르자 바다 쪽의 작은 숲에서 새들이 재잘거린다. "저 여기 있어요"라고 말하는 듯이. 주차장 옆 등나무 아래 벤치에 있는 중학생들에게 여기가 어떤 곳이었는지 아느냐고 물어본다. "몰라요." 아이들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휴대폰으로 게임을 하느라 바쁘다.
"저 산은 조선 시대에 왜놈들이 쳐들어와서 전쟁을 치렀던 곳이고 저 아래 공동 우물 근처는 죽은 말을 묻었던 곳이라 합디다. 사람들은 밤중에 몰래 파낸 말을 먹기도…." 예전에 이 근처에 이사 왔을 때는 동네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해주었는데 이제는 그렇게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도 맥이 끊겨버린 것 같다. 그때보다 살기는 나아졌지만 우리가 공유해야 할 소중한 기억들, 우리의 일상사가 스며든 땅과 거리의 이야기는 잃어버린 게 아닐까.
증산 아래, 부산진성의 남문 자리쯤에 정발 장군과 함께 순사한 사람들을 기리는 정공단이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에 부산진성이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이곳이 임진왜란 때의 첫 패전지고, 왜병들이 성을 왜식으로 개축했다 해도, 종전과 함께 다 타버리고 남은 것은 성을 이루었던 돌밖에 없다 해도, 부산진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는 것 아닐까. 부산진지성이었던 자성대만 해도 주변이 어지럽기는 하지만 안내판도 있고 그런대로 잘 다듬어져 있던데 싶어 안타까웠다.
나는 지난 여름에 왔을 때와 달리 작은 변화라도 있을까 싶어 정문 옆에 있는 '증산 공원 이용 안내도' 앞으로 간다. 게이트볼장, 휴게소, 중앙광장…. 눈을 씻고 봐도 여기에 부산진성이 있었다는 표시는 없다. 한때 부산왜성으로 불렸다는 말도, 공동묘지였다가 동물원이 될 뻔 했다는 말도 없다. 부둣가에 쌓인 컨테이너들만 무심히 반짝이고 앞바다만 연방 눈을 깜빡거린다. 기억의 터에 대한 우리의 무감각을 나무라는 듯이.
정문 옆에 선 시계탑 꼭대기의 둥근 시계를 쳐다본다. 네 시.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시간은 살바도르 달리가 그린 시계처럼 흐느적거린다. 시간이라는 매질을 통과한 성벽 위로 오래된 것들이 묵은 핏줄기처럼 돋아난다. 419년 전,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가 종결된 후 살아남은 것들이 마저 도륙되던 시간. 우리가 밀어내버린 치욕스러운 과거는 사라지기는커녕 어딘가에 남아 우리를 짓누르는 것 같다. 이젠 우리도 과거를 직시할 수 있을 만큼 여유로워졌으니 그 아픔을 드러내고 치유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그런 과정을 거쳐야 시간의 지평을 확대해 나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새도 살고, 사람도 살았던 그곳
이곳에 동물원을 지을 때 공동묘지를 이전하는 작업을 먼저 했는데 그 와중에도 인근의 분위기는 무척 활기찼다. 동물원이 완공되기도 전에 코끼리가 들어오자 인근의 조무래기들은 죄 모여들었다. 그해 국회의원 선거 때는 입후보자들이 코끼리 우리 앞에서 유세를 했는데 코끼리가 후보자 머리 위에 코를 갖다 대자 모두들 한참 웃었다. 입구에서 좌천 아파트 쪽으로 걸어가자 길과 나란한 높이의 반원형 시멘트지붕이 보인다. 옆으로 가서 지붕 아래를 보니 좀 부서지기는 했지만 예전의 새둥지다.
동물원을 짓던 개인업자가 파산하자 동물들은 바닷바람에 죽어나갔고 빈 우리에는 사람이 들어가 살았다. 그것도 놀라웠지만 비 오는 날 아이를 안고 새 우리에 올라가 있던 여인을 보았을 때는 슬펐다. 좌천동 전찻길 옆, 지금은 병원으로 변해버린 집에 살 때 아버지와 함께 '죵'을 데리고 올라가던 산. 그곳이 그렇게 되었을 때 나는 혼돈의 가장자리에 서있는 듯 했다. 다시 아버지 손을 잡고 벤허를 보러가거나 대청장 연주홀에 간다한들 무작정 행복했던 예전의 나로는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
테니스장을 지나 산꼭대기로 올라가자 완장을 찬 늙수레한 산불감시원 외는 아무도 없다. 아저씨도 예전에 여기 뭐가 있었는지 모른다 한다. 장군들이 올라가 지휘하던 장대와 왜병이 지은 천수각이 있었다는 곳은 깎여 운동장이 되어버렸다. 바다는 나무에 가려 잘 보이지 않고 반대쪽의 수정산과 엄광산이 보인다. 산자락에 빽빽이 들어찬 집을 보자 가슴이 먹먹해온다. 나는 그 어렵던 시절에도 이 부근에서 누가 자살했다는 얘기는 듣지 못했던 것을 생각해냈다. 바로 곁에 주검이 널려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 코끼리 고기를 잡쉈다고요?
입구로 나오다가 나이든 아저씨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
"예전에, 동물원이 있었어요. 자금 부족으로 중간에 그만 뒀지만요."
"아저씨, 그 당시 있었던 일 중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까?"
"아, 번개시장에서 염소 고기를 먹었는데 나중에 소문을 들으니 코끼리 고기라는데…. 다 초식동물이라 그랬는지, 모르고 맛있게 먹었어요."
나는 번개시장이 어디냐고 물었고, 하경수(68세·좌천1동) 씨는 들어오는 입구에 있는 시장이 그렇게 불리거나 성북시장이라 불린다고 한다.
"그 이전엔 여기 뭐가 있었는지 아세요?"
"동구 도서관 옆에 포대가 있었다는데…."
코끼리 고기를 먹었다는 것은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데 포대가 있었다는 것은 얼른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다.
· 낙인이 있었던 곳에 언어가 생기고…
이 근처에 살았던 중학교 때의 일 년이, 그때 보았던 것들이 이렇게 오래 잊혀지지 않을 줄은 그때는 몰랐다. 이곳은 내게 단순히 부산진성이나 공동묘지나 동물원이 있었던 장소가 아니라 낯선 곳에 던져졌던 내 삶의 모습을 환기하는 소중한 곳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곳에서 본 일을 이야기하고 싶어 했고, 듣는 사람은 뜨악한 표정을 짓다가 끝내는 밑바닥 생활을 했군요, 하며 함부로 결론을 지어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내가 거기서 성년식을 치른 셈이라고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다. 민속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는 고통과 기억의 관계를 성년식을 예로 들어 함축성 있게 설명했다. '성년식이 끝나고 통증이 잊혀진 후에도 무엇인가 남게 된다. 몸은 기억의 흔적을 지니게 된다'고. 그래서 나는 그곳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런 일에 관심을 가져볼 여유도 없는 사람들에게 서툴고 성급하게 그 흉터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것일까.
· 부산진성, 우리에게 읽히고 싶어 하는…
아치 모양의 정문을 나서자 우뚝 선 동구 도서관이 눈에 들어온다. 오랜 세월, 자신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책처럼 기술되고 읽혀지기 바랐던 부산진성의 염원이 저기에 도서관을 세우게 한 것이 아닐까. 나는 기억을 뱉어내려는 듯 버티고 선 성벽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해묵은 돌과 하염없이 돋아난 풀들 사이로 그들끼리 이어온 의연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제아무리 패전의 수치를 은폐하려고 발버둥 친다한들 저 황갈빛 돌들이 뿜어내는 기억을 끝내 외면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무지개 모양의 아치 위로 부산진성과 공동묘지와 동물원과 증산공원이 겹겹의 꽃잎처럼 솟아올랐다. 언젠가 이들이 복원된다면 공원을 거니는 이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인 자신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졸저 '네 사람이 누운 침대'중 '시간의 꽃'에서 발췌)
유령처럼 흔들리는 마른 풀꽃들은 여기에 부산진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리려면 문화적 기념물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무언가를 기억하고 계승하려면 거기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고, 그래야 자신과 역사로부터 소외되지 않는다고 속삭이는 것 같다. 성의 복원이나 기념물을 만드는데 시간이 걸린다면 여기에 부산진성이 있었다는 안내판이라도 붙이면 어떨까 싶다. 급한 대로 증산공원이라는 이름 아래 '옛 부산진성'이라고 딱 한 줄이라도 써넣으면 좋겠다 싶다. 나는 인정 많은 노점 아주머니의 말을 떠올리며 번개시장 쪽으로 내려간다. "시작이 에럽지 머든 해보믄 된다!"
박영애 소설가
◇약력=1996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등단. 소설집 '네 사람이 누운 침대'. 제13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 제9회 들소리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