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졸당’ 앞길을 따라 동쪽 산길을 넘어가면 ‘원천遠川’이다. 원천은 산 아래 ‘원촌遠村’과 강
건너 ‘천사川沙’를 통합한 이름이다. 과거에는 별개의 마을로 존재했다. ‘땅재’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보인다. 이들 마을들을 굽어보노라면 저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아, 저렇게 단정한 마을일 수가! 감정이 무딘 사람이라도 ‘땅재’에서 바라보는 원천은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아늑함을 느끼게
한다. 산천을 보는 것만으로도 원천은 볼만하다. 차를 세우고 소나무 사이사이로 보이는 원천을
보기 바란다. 가능하면 고개에서부터 천천히 걸어 들어가면 더욱 좋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원촌을 가보자’고 하며 단숨에 차를 몰아 마을 중심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러면 원촌은 못 본다. ‘부용대’를 오르지 않은 많은 사람들이 하회마을을 둘러보고는 ‘생각보다는 별로이네’라고 푸념하는 경우와 같은 경험이 되어버린다.
‘보는 관점’은 중요하다. 가령 이 시대, 이런 저런 연유로 ‘고독하고 불행하다’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설악산 ‘대청봉을 올라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대청봉에 올라보라, 그리고 조국 산천을
보라! 그러면 그는 그가 지금 가슴에 품고 있는 ‘고독과 불행’이란 정체가 얼마나 부질없고 사소한 것인지 문득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전연 다른 인생을 순간
설계하게 될런지도 모른다. 그는 문득 조국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편견이겠지만, 나는 우리 시대 가장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설악산 대청봉을 올라보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접근 방법’도 중요하다. 지금 대청봉을 오르는 길은 많다. 외설악, 내설악, 남설악 곳곳에 길이
있다. 저마다 맛이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백담사-수렴동-봉정암-대청봉을 올라 중청에서
1박하고, 다음날 다시 대청에서 일출을 보고 희운각-양폭-비선대-소공원으로 내려오는 코스를
권유한다. 초행자면 무조건 이 길을 추천한다. 어느 코스가 이 코스의 아름다움을 따르랴.
나는 설악산 등산은 최소한 1박 2일 정도의 여유를 가지며, 앞에 소개한 길로 올라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그리하면 그는 학창시절 수학여행에서 가졌던 울산바위에서 느꼈던 감동의 20배 이상의 충격적 그 무엇이 가슴으로부터 충만해 옴을 체득하게 될 것이다.
원천의 부용대, 윷판대
그런데 글을 쓰는 도중, 퇴계 후손 한분이 “다음은 원천을 쓰지 않겠습니까, 원천으로 넘어가기
전에 꼭 한 곳 볼 만한 데가 있고, 그 곳을 써야 되지 않겠습니까?” 했다. ‘꼭 한번 볼만한 곳’은 이 고개에서 100m 정도(?) 남쪽 산위에 있는 고대 암각화인 이른바 ‘윷 판대’ 유적이었다. 필자는 이 유적의 존재는 알고 있었지만 가보지도 않았고, 더구나 ‘꼭 써야 할 곳’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2003년 11월, 하계 출신의 안동문화연구회 이동신 회장과 ‘수석정’ 가는 길목 첫째 집에서 뒷산
능선 길을 따라 가보니 ‘윷 판대’의 실체보다는 앞에 펼쳐진 경관에 넋이 나갈 지경이었다. 장관이었다. 원촌, 천사가 한 눈에 펼쳐졌다. 강은 저 멀리 ‘단사협’에서부터 정확한 S자의 태극을 이루어 흘러와 ‘윷 판대’ 아래로 지나가며, 그 양쪽으로 원촌과 천사가 빙 둘러친 병풍 같은 산들에 포근히 싸여 있었다.
김철희金喆熙 선생이 쓴 ‘원대정기遠臺亭記’에 원촌 모습을 “낙동강 구비 구비 흘러 乙자형을 이루는데, 둘러싼 산은 나물을 캐러 갈만하고 앞에 흐르는 물은 낚시를 할만하다(洛東之江 曲曲而來 而作乙字形橫流 山可採而水可釣也)”한 표현이 있는데, 이곳 ‘윷 판대’에서 본 원촌은 사실이 그러했다. ‘윷 판대’는 바로 원촌의 ‘부용대’였다.
『맹자孟子』책에 ‘觀水有術 必觀其瀾’이란 구절이 있는데, 해석하면 “물은 보는 데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물결을 보아야 한다”이다. ‘공자 다음의 성인’ ‘아성亞聖’께서 하신 말씀이니 그냥 해보는 말씀이 아니다. ‘관수觀水’는 ‘관란觀瀾’이 요체인데, ‘란瀾’은 ‘큰 물결’로 근원이며 전체이다.
근원과 전체를 볼 줄 아는 안목. 그것이 필요하다. 원천을 찾는 자, 이런 측면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는데, ‘윷 판대’에 오르니 그 ‘란瀾’이란 개념의 실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시간이
있는 자, 선사 시대의 유적도 볼 겸 한 번 올라보기를 권유한다. ‘윷 판대’에서 바라보는 원천은
행복 그 자체이다. 사진을 잘 찍어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드리고 싶은데 어떨지 모르겠다.
고향의 원형, 원촌
원촌은 아득한 시절 ‘말을 멘대’라 하여 ‘말 멘대’라 했다. 이 말이 ‘말 먼데’, ‘먼 먼대’, ‘먼 대’로 변했다. 한자로는 각각 ‘馬繫村’, ‘遠遠臺’, ‘遠臺’라 했다. 이런 이름들이 ‘원촌’으로 되었다. 이나 저나
‘말이나 키울 오지의 먼 동네’를 뜻한다.
원촌은 배산임수의 전형이다. ‘배산背山’, ‘임수臨水’한 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싶은 사람, 원촌을 와 보기 바란다. 풍수지리로 봉화의 닭실, 영양의 주실, 경주의 양동, 울산의 돌내를 거론하지만 산수의 조화로움이야 어찌 원촌에 미치랴. 『안동향토지』에 원촌을 “무릉도원을 연상하게
하는 꿈과 환상의 마을”이라 했다. ‘꿈과 환상의 마을’이 한국 어디에 있는가! 나는 ‘도산9곡’에
형성된 마을 가운데 원촌이 가장 ‘마을’로서의 아름다움을 지닌 곳으로 보고 있다.
고향의 원형이 있다면 원촌은 바로 그런 곳이다. 지금 마을 앞 동수洞藪가 없어져 허虛해 보이지만, 원촌은 마을이 갖추어야 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추었다. 전국을 유람해 봐도 이런 마을은
사실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
땅은 3가지 정도 구분할 수 있다. 살만한 땅, 볼만한 땅, 놀만한 땅. 한자로는 ‘可居之地’와 ‘可觀之地’와 ‘可遊之地’다. 독자 여러분도 생각해보고 나름대로 판단해보기 바란다. 어느 곳이 어떤 땅인가를? 땅은 저마다 용도가 있을 뿐, 불모의 땅이란 없다. 땅은 심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니 볼만한 땅에 가서 살면 안 되며, 놀만한 땅에 가서 살아도 안 된다.
가령 ‘설악산’은 어떤 땅인가? 두말할 것도 없이 ‘볼만한 땅’이다. 놀 곳은 못된다. 살 곳은 더욱
못된다. 놀 수도 없고 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산을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은 ‘부석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석사는 산서山書를 모르는 사람도 올라보면 천하의 명당임을 느끼게 한다. 사실 천하 명당이다. 그렇지만 그 명당은 그 명당을 감당할 큰 스님이 아니면 안 된다. 부석사 전면의 광활무애함은 평범한 사람에게는 부담스러움을 넘어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부석사는 ‘천하의 볼만한 땅’이지 살만한 땅은 아니다. 부석사에 스님들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은 것도 이런 지형과
관련이 있다.
‘유원지’들은 놀만한 땅이다. 이런 땅도 살기에는 부족하다. 그렇다면 과연 ‘살만한 땅’은 어디인가? 산과 강이 조화되어야 한다. 산은 높지 않아야 한다. 낮지도 않아야 한다. ‘적당해야’ 한다.
물은 ‘흐르는 물’이어야 한다. 여울, 소沼, 구비들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구비에 적당한 토지를 장만해 두어야 한다. 그런 산과 강이 마을을 감싸고 있어야 한다. 그 산과 강은 당연히 ‘나물을 캐러 갈만하고 낚시를 할만해야’ 한다. 이런 환경은 사색의 공간을 만든다.
‘사색’은 인간을 ‘인물’로 만든다. ‘사색’은 인간 최고의 교육이다. 원촌이 바로 그런 땅이다. ‘말이나 키울’ 궁벽한 오지 원촌에 인재들이 배출됨은 이런 산수가 영향과 절대 무관하지 않다. 안동에서 하회마을이 언필칭 ‘뜨고’ 극찬하는 사람까지 나왔다. 그럴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필자에게 한 곳을 살라고 하면 주저 없이 원촌을 선택할 것이다.
그러나 이곳 역시 하계의 풍광과 다르지 않다. 안동댐 수몰지역이기 때문이다. 원촌은 안동댐
마지막 수몰동네이다. 지금 몇몇 떠나지 못한 집들만이 산 밑에 웅크리고 있다. 나는 원촌을
지날 때마다 ‘신원촌’을 조성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을 한다. 앞들 가운데를 가로 질러 제방을
하면 신원촌의 조성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이를 위해서는 정말 탄원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원촌을 알린 인물, 육사 이원록
원촌 동리를 열어간 사람은 이구(李?1681-1761)이다. 퇴계 5대손이며, 동암의 증손자로 갈봉 이극철(葛峯 李克哲)의 아들이다. 하계에서 생장했지만 결벽에 가까운 성격은 속세를 더욱 멀리하게
했다. 그래서 이 곳 ‘말 맨데’로 와서 지명을 ‘원대遠臺’로 고치고 호로 삼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대처사’라 불렀다. 퇴계가 상계를 개척했고, 손자 동암이 하계를 열었고, 그 증손자가 원촌을
개척했다. 상계는 16세기, 하계는 17세기, 원촌은 18세기로 대략 100년을 간격으로 열어나갔다.
하계의 계보에서 다시 연결해보면,
1) 李詠道- 岐- 希哲.........하계파 克哲.........원촌파 2) 李克哲- ?.........단사파 ?.........원촌파
원대의 후손으로 원촌이 배출한 인물을 대략 적어보면, 동추 李世翊, 참판 李龜雲, 군수 李龜星,
현감 李程淳, 판서 李孝淳, 동추 李彙徹, 대사간 李晩由, 교리 李晩鉉, 응교 李晩正, 응교 李晩容,
독립운동가 李洸鎬, 李寧鎬, 李藎鎬, 李烈鎬, 李先鎬, 李陸史, 李源永 등이다. 이 분들이 살았던 집은 서울댁, 언양댁, 병성댁, 영해댁, 너다래댁, 참판댁, 아산댁, 상주댁, 진사댁, 대감댁
등이다. 그러나 지금 이런 집들은 어디에도 없다. 그 집들은 어디로 갔는가?
지금 원촌에는 ‘목재고택(李晩由 家)’을 비롯해 4체가 남아있고, 나머지는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내가 그 소재를 알고 있는 집은 안동 시내로 나온 서울댁(육사생가)과 ‘치암고택’이라
부르는 언양댁(李晩鉉 家)뿐이다.
원촌을 알린 인물은 단연 육사 이원록(1904-1944)이다. 육사는 오지 원촌을 전국에 알렸다. 육사가 아니라면 원촌은 어쩌면 지금도 ‘먼 동네’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이를 상징하듯 지금 원촌은
육사기념사업이 한창이다. 기존의 ‘육사기념조형물’ 외에 새로 ‘육사생가복원’, ‘기념관건립’이
그것이다.
‘육사기념관’은 동리 입구에 상당히 규모 있게 지어지고 있다. 아직 ‘어떠하다’ 단정하기 어렵다.
‘육사기념조형물’은 동네 가운데 있다. 생가 터에 희고 둥근 돌들을 배열해 놓았다. 청포도 송이를 상징하는 것인가? 미적 측면은 모르나, ‘정겹다’는 느낌은 솔직히 와 닿지 않는다. 조형물 위
오석烏石에 시 ‘청포도’가 새겨있다. 천천히 다시 한번 읽어 본다. 내 고장 7월(七月)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靑袍)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뿍 적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 쟁반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육우당유허지비
그런데 조형물 옆에 또 다른 비석이 우뚝 세워져 있다. 당연히 육사의 이력을 새겨놓았거니 하고
보니 그게 아니다. 전면에 ‘육우당유허지비六友堂遺墟址碑’ 라고 쓰여 있다. “여섯 형제들이 살았던 터를 기리는 비”라는 뜻이다. 육사생가에 육사 이야기는 없고 웬 여섯 명의 형제이야기인가?
나는 솔직히 육사를 모른다. 알고 있는 것은 시, ‘청포도’와 ‘광야’뿐이다. 사정이 그러하니 육사생가 터에 와서 이런 비석을 대하니 더욱 막연하다. 그래서 돌아와 여러 문헌을 찾아보니, 육사는 6형제였고 우애가 남달랐다. 아니 조부들의 우애가 더욱 남달랐다. 육사의 장조카인 이동영 교수의 글에는 이 비가 세워진 연유가 이렇게 설명되어 있었다.
“고조는 아들 3형제를 두었는데, 만휘, 만철, 만정이라 했다. 장자 만휘가 아들 없이 일찍 죽자 만철은 외아들 중직中稙을 형에게 양자 보내고 자기는 동생 만정의 아들을 양자 했다. 만철은 1살의
어린 아들을 큰집에 세우고 형수를 위로하기 위해 서슴없이 바쳤다. 중직은 육사의 조부이다.
이런 내림인지 이 집의 후손들은 한 집도 창씨개명하지 않았다. 육사의 여섯 형제들은 콩이 한 개면 여섯 조각으로 나누어 먹었고, 성장해서도 내 것 네 것이 없이 지냈으며, 의복도 맞으면 서로
바꾸어 입고 나가 남들이 여유가 있는 줄 알았다고 했다. ‘육우당비’는 이런 연유로 세워졌다.”
지금 이 글을 보면, 이 집 후손들은 아마 육사의 애국보다 집안의 우애전통을 더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형제우애’를 기리기 위해 비석을 세운 예는 정말 보기 어렵다. 이곳 말고
다른 어느 곳에 있는지 모르겠다. 육사집안의 이런 우애는 입향조 원대처사의 유훈 때문인지도
모른다.
원대가 후손들에게 남긴 유훈 한 가지는 “형제간에 혹 언짢은 일이 있더라도 참고 또 참아라”였다. ‘행략行略’에 보이는 기록이다. 원대의 이런 유훈은 퇴계의 유훈을 이은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퇴계언행록’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형제간에 잘못이 있으면 서로 말해 주어야하지 않습니까?” 하고 어느 제자가 물으니, 퇴계는 답변하기를,
“우선 나의 성의를 다하여 상대방을 감동하도록 한 다음에라야 비로소 서로간의 의리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성의 없이 대뜸 나무란다면 서로 사이가 벌어지지 않은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래서 말하기를 ‘형제간에는 항상 기쁘고 즐거운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했는데 진실로 이 때문이다.”
‘우애友愛’는 어렵다. 형제는 선의의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우애’가 하나의 덕목으로 존재함은 우애가 그만큼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 어려움을 퇴계는 ‘대뜸 나무라기만 하기 때문’이라 진단했다. ‘성의를 다한 감동’을 전제했다. 성의 없고 감동 없는 충고는 상처만 준다는 논리이다. 우리는 뜻밖에 가족들 사이의 상처로 가슴 아파한다. 까닭 없이, 이유 없이, 대책 없이 상처를 많이
준다. 상처 받음에는 예민하고 상처 줌에는 관대하다. 상처 줌을 ‘사랑’이라 여기기까지 한다.
이것이 가족상처의 주범이다.
나도 전에 퇴계의 이 글을 보고 느낀 바 있어 불현듯 수첩에 메모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다.
그러나 결심은 그 순간 뿐, ‘감동하도록’한 경우는 그 후 한번도 없었다. 언제 퇴계처럼 감동을 줄 수 있는 우애를 나눌 수 있을는지. 나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 건지.
육사생가복원과 기념관 건립
이런 생각은 잠시 뿐, 나그네의 관심은 다시 온통 육사로 쏠린다. 지금 동네 한 곳은 건축으로 활기차다. 육사생가복원과 기념관건립 때문이다. 안동시내로 이건 되었던 생가가 30여 년 만에 새로
복원된다. 기념관도 짓는다. 이렇게 되면 나 같은 문외한도 차츰 육사 가까이 있게 될 것이다. 이 일은 ‘육사기념사업회’의 의지의 소산이다. 육사는 이런 대접을 받고도 남을 분이다.
나는 육사가 어떻게 일제에 저항했고, 어떻게 북경감옥에서 순국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지조를 지켰다’는 것은 믿고 있고, 그것만으로도 이런 생각이 든다. 윤동주, 한용운, 이육사가 있어서 만 명의 문인 지식인의 변절을 ‘변절’이라고 할 수 있다고. ‘사슴’을 쓴 노천명이 정신대에 끌려간 여자들을 찬양한 ‘남방의 처녀야’를 바로 볼 수 있다고.
나는 원촌을 지날 때 가끔 이원무李源武 어른을 뵙는다. 이원무 어른은 연세가 86세로 ‘과거의 원촌’을 알고 계시는 한 분이다. 어느 날 나는 문득 “육사가 있을 때 동네에 청포도가 있었습니까?”
물었다. 당연한 일을 왜 물었는가 하면, 최근 들리는 이야기로는, 포항시 문인들이 ‘육사청포도시비’를 만든다고 했다. 아니 이미 만들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육사의 ‘청포도’ 시는 육사가 포항에
갔을 때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 한다. ‘푸른 바다와 흰 돛단배’ 는 포항 앞바다라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내 고장 7월, 청포도가 익어 가는 곳”은 포항이란 말인가?
이원무 어른의 증언은 “그때 청포도가 마을에 있었다” 이다. 원촌의 앞 강변 수藪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와 시무나무가 우거져 있었고, 그 나무들 사이로 산머루가 얽혀 있었다. 원촌사람들에게 ‘당나무’라 불린 그 느티나무는 암수 두 나무로 육사의 동생 원조源朝의 기록처럼 “하루 종일 볕 한번
들지 못할(‘회향기懷鄕記’)” 정도로 큰 고목이었고, 그 아래 강변에는 원촌 사람들 모두의 추억이
서린 ‘붉은 바위’가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온 여름을 여기서 보냈다. 어른들은 느티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으며, 아이들은 ‘붉은 바위’에서 멱감질을 했다. 육사의 유년시절도 그러했다. 산머루는 서편 산기슭에도 많았다. 이원무 어른은 육사에게 ‘산머루가 청포도’라고 단정했다. 원촌 출신으로 역학易學에 천착한
이동수 형은 육사의 시 ‘초가草家’의 “앞밭의 보리밭에 말매 나물 캐러간”구절에 나오는 ‘말매 나물’은 원촌에 무수히 많았고, ‘초가’의 시적 이미지는 그대로 원촌의 정서라 했다. 지금 원촌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친구 이동렬도 비슷한 증언을 하면서, 육사에게 시 ‘광야’의 광야는 원촌 앞들의 확 트인 벌판이라 했다. 사실 필자가 ‘윷 판대’에서 본 원천은 바로 그 ‘육사의 광야’였다.
문학적으로 ‘청포도’는 풍요로운 삶의 상징이고, ‘내 고향’은 공동체의 오랜 역사와 미래의 화해로운 생활을 향해 열려있다고 한다. 육사 또한 “내 고향은 조선이고 청포도는 우리 민족이고, 일본은 곧 끝장 난다”라고 했다 한다. 또 “함께 해야 할 사람들은 지금 ‘청포를 입고’ 고달픈 몸으로
삶을 살아가며, 언젠가 다가올 ‘은쟁반 하얀 모시수건’의 순결한 만남을 소망하고 있다” 한다.
육사는 이 시를 쓰고 스스로 “어떻게 내가 이런 시를 쓸 수 있었을까!”했다 한다. 이런 증언과
저런 분석들이 있을 수 있고 저마다 합리성을 가진다.
‘아무렴은 어떠냐’고 하는 사람도 있다. 육사를 추모하는 마음이면 누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상관할 일이 무어냐고. 그러나 나는 다르다. 나는 누가 무어라 하든 그렇게 본다. ‘내 고향’은 원촌이고, ‘청포도’는 원촌 앞들 수에 있었던 청포도라고. “파랑새 노래하는 청포도 고향 아래로...”는
바로 원촌이다. 육사가 원촌에서 이를 체험하지 않고 어디서 느꼈단 말인가!
나는 원촌 산수의 아름다움이 시 ‘청포도’와 ‘광야’를 낳았다고 믿는다.
육사와 임청각
그런데 이 글을 쓰는 도중, ‘임청각’의 후손이며 친구인 이재업이 “육사가 ‘임청각’에 머물러 있었다, 그 무렵 나운규도 왔다”는 증언을 해 주어 소개한다. 내용은 이러했다. “육사가 몸이 아파 임청각에 상당기간 머물러 있었는데, 그 무렵 나운규가 임청각에 와서 영어를 가르쳤고, 얼마 뒤 하회마을로 가서 다시 영어를 가르쳤으며, 그것을 증명하는 사진이 최근까지 있었다”는 것이었다.
진술이 사실이라면 놀라운 일이라 생각하여, ‘그 사진’이 있느냐고 하니,
그도 지금 이 사진의 행방을 알아보고 있다고 했다.
집에 돌아와 바로 문헌을 찾아보니, ‘육사의 임청각 관련’은 어느 글에도 보이지 않고, ‘기념사업회’에 문의해보아도 금시초문이라 한다. 안동대 김희곤 교수 역작의 ‘육사평전’을 보니 단 한 줄의 인척관련만이 언급되어 있는데 ‘석주의 며느리’라고 잘못 소개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 집안
족보를 살펴보니, 인척관계는 사실이며 독립운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 관계를
대략 도표화 해보면,
1. 李龜雲(문과, 참판)-程淳(생원, 현감)-彙明-晩器-中杰-觀鎬-源永(애족장) 晩實-中聖-寧鎬(애족장) 晩晋-中立-奎鎬(처사, 문집) 晩由(문과, 대사간) 彙鈺-晩儉-中洙(처사, 문집) 彙斌-晩徽-中稙-家鎬-源祿(애국장, 육사陸史) 彙면-晩鉉(문과, 교리) *李晩由의 딸-李相龍의 며느리 *李家鎬의 처-許?의 딸
2. 李承穆-相龍(독립장)-濬衡(애국장)-炳華(독립장) 相東(애족장)-衡國(애족장) 運衡(애족장) 鳳羲(독립장)-光民(독립장) 光國(항일옥거) *李濬衡의 妻-육사 재종조모, 李晩由의 딸 *李炳華의 妻-육사의 외사촌, 許?의 손녀 許銀
3. 許운-祚- 薰(애국장) ?(애국장) 蔿(대한민국장) 禧- ?-발-銀(1907-) 佶(1876-1942) 珪 (독립운동) * 許銀- 李相龍의 손부, 육사의 외사촌 * 許佶- 李家鎬의 처, 육사의 어머니 * 許珪-육사의 외삼촌으로 직접적인 영향을 줌 *許佶의 ‘佶’은 많은 책에 ‘吉’로 많이 표시했는데, 여기서는 허은 여사의 회고록에 따른다.
위 도표를 다시 정리해보면, 석주 이상룡(石州 李相龍)의 손부 허은許銀 여사는 의병장 왕산 허위(旺山 許蔿)의 종형인 범산 허형(凡山 許?)의 손녀이고, 육사는 외손자였다. 그러니까 육사의 집은 허은 여사에게 고모의 집이였고, 임청각은 육사의 외사촌 집이다. 말하자면 내외종간이다.
이뿐만이 아니라, 허은 여사의 시어머니가 목재 이만유(李晩由)의 따님인데, 이분은 육사의 재종조모가 된다. 육사가 임청각에 머물러 있었을 개연성은 이로써 충분하다. 더구나 이 증언이 바로
허은 여사에게서 나왔으니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여겨진다.
친정 허許씨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시댁 역시 임시정부국무령을 역임한 석주로부터 시아버지,
남편이 모두 독립운동을 하였으니, 허은 여사의 일생 또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이런 집안에
인척이며 저항시인 육사가 찾아와 머물러 있었다는 사실은 전연 이상할 것이 없다. ‘찾아오지 않았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이상할 일이다.
육사의 집안 또한 예사롭지 않다. 육사의 6대 조부 사은 이귀운 (仕隱 李龜雲)의 후손들은 원촌의 대표적 가계를 형성했다. 사은은 동생 속은(俗隱 李龜星)과 더불어 외모와 인품과 학문이
빼어났다.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속은은 이름마저 임금이 “서경에 ‘경운경성慶雲慶星’이라는
말이 있으니 너의 이름을 바꾸라” 하여, 초명 귀주龜疇를 ‘귀성龜星’으로 개명할 정도였다.
사실 지금 원촌파의 대부분이 이들 형제의 후손으로 원촌역사를 주도해왔다.
육사의 치열한 저항정신은 이런 가계의 자부심이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허은 여사의 회고록,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1995년 正宇社)를
임청각의 후손이며 전 청년유도회 이형수 회장에게서 얻어 보게 되었는데, 나는 이 책을 단숨에
읽었다. 육사 관련 부분도 있어 더욱 기쁘게 있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는 영화가 있다고
했는데, 이 책이야말로 그런 책이었다. 어느 독립운동 관련 글이 이 책처럼 감동을 주는 것이
있는지 모르겠다. 전에『백범일기』를 읽고 큰 감동을 받은 바 있는데, 이 책은 『백범일기』
보다 더 진한 여운을 주는 책이었다. 『남부군』이라는 책 한권으로 한국근대사를 알게 된 경험과 비슷했다. 육사와 관련된 부분은 이러하다.
“시인 이육사가 북경에서 총살당했다는 소문은 한심통박하였다. 아직 젊은 나이에 그가 꿈꾸고
바라던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한 채...그러나 조국광복의 간절한 소망을 구구절절이 시로 써나마
남겼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내 손녀가 읽어 준 육사 시에는 ‘그가 바라는 손님은 청포를 입고
찾아올 것’이며, ‘하얀 모시수건을 은쟁반에 준비하라’고 했더라. 얼마나 조국광복을 간절하고
애절한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겪어 본 나는 안다.
해방 이듬해 10월에 원일, 원조, 원창이 삼형제가 돗질에 들렸다. 묘사 지내려 안동 오는 길에
외사촌누나인 나를 보러 왔던 것이다. ‘우리는 국수 좋아하는데 국수 좀 해주시려는가?’ 그들 중 누가 그랬다. ‘국수 좋아하면 더 좋지. 반찬 따로 안 해도 되고.’ 대답해 놓고 밀가루 반죽해서 손으로 썰어 얼른 칼국수를 해주었다. 한 그릇씩 먹고 더 먹는 걸
보고 어찌나 흐뭇했던지 모른다. 집 앞에 있는 정자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나더니 개울물소리가
좋다고 찬사가 대단했다. ‘원일아 너 거기서 시 하나 지어라’ 했더니, 그렇잖아도 쓰려던 중이라 했다. 바위틈으로 졸졸 흐
르는 도랑물이 큰 바위 석곽에 일단 고였다가 다시 떨어진다.
그 석천의 운치가 보통 사람에게도 예사롭지 않았다.
육사형제는 모두 여섯이다. 원기, 원삼, 원일, 원조, 원창, 원홍이다. 원삼이가 곧 육사인데,
이명은 원록이라고도 했다. 육사는 해방되기 얼마 전에 만주에서 돌아와 서울에 들렀다가 북경
갔다고 했다. 그길로 붙잡혀 그 이듬해 사형됐다. 그가 바라던 청포 입은 손님도 맞이하지
못하고 마흔살 나이에 아깝게 갔다.
원일이하고 남편하고는 동갑이라 집에 오면 늘 항렬 따지고 생일 따지기는 서로 자기가 어른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고모(육사 어머니)가 안동으로 시집와 시어머니의 친정 질부가 된 때문에 양쪽으로 친척이라 항렬 따지기가 좀 복잡했다. 육사를 제외하고 다른 형제들 유해는 모두 자기 어머니, 즉 우리고모님과 함께 미아리 공동묘지에 모셔졌다. 훗날 원기의 아들인 부산대학교 이동녕
교수가 고향인 원촌으로 다 이장했다. 육사의 유해만 북경에 홀로 남아 있는 셈이지."
나운규의 안동출현과 영어교육, 그리고 육사와의 관련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지만 현재로서
추적할 단서가 없다. 그런데 얼마 전 ‘육사기념사회’의 이진구 선생이 나운규가 전진환씨 등과 안동에 와서 교육을 했다는 서이환씨 어른의 메모가 있었는데, 지금 그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실낱같은 증언이지만 후일 육사연구에 조금이나마 자료가 될지 모른다고 생각되어 이
말씀도 여기에 아울러 기록해 둔다.
육사의 생애는 거룩하다. 두고두고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하계, 원촌의 정서가 그런 토양을 재공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유공자’로 표창을 받은 같은 분은 말할 것도 없는
일이지만, 가까운 집안 어른들의 언동 편린을 보면 육사의 인생행로는 이미 예고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치암 이만현(恥巖 李晩鉉1832-1911)이 경술년 국치 이후 ‘비분강개하여 화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는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가령 당대의 학자 이류재 이중수(二柳齋 李中洙1863-1946) 같은 분의 ‘유사遺事’를 보면, 국치소식을 듣고 “4천년 예의의 나라가 수치와 욕됨이
어찌 이런 극단의 지경에 이르렀는가, 오늘날 선비 된 자 죽을 곳도 없으며, 살아도 죽은 거와 같으니 내 장차 어디로 돌아갈까” 하며, 날마다 ‘체읍황황涕泣徨徨’했다고 했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내 이제 내 조국에 뼈를 묻게 되니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했다.
이 글 외에도 원촌어른들의 문집은 볼 만한 내용이 많은데, 한말의 학자 우송 이규호(友松 李奎鎬)의 『우송문고友松文稿』를 보면 육사의 조부 중직中稙, 동생 원조源朝, 외삼촌 허규許珪등에게
보낸 여러 종류의 글이 있고, 위당 정인보(爲堂 鄭寅普), 벽초 홍명희(碧初 洪命熹)등과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 있어 흥미롭다. 필자는 전에 벽초에게 보낸 편지를 번역하여 이 책 『안동』의
권세홍 편집위원장에게 넘겨준 바 있다.
이분들은 위 도표에 나타난 것처럼, 독립운동가 이원영, 이영호와 더불어 육사에게는 모두 8촌
이내의 가계를 보여준다. 8촌까지는 ‘한 가족’으로 이른바 ‘집안(堂內)’라 한다. 집안 어른들의
이런 모습을 보며 성장한 문인 육사에게 색다른 인생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튼 이런 진술이 육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자료가 되고, 그 진위가 확연하게 밝혀지기를 기대한다.
내년은 ‘육사탄신100주년’ 되는 해다. 관민이 함께 하여 다양한 추모행사를 펼친다. 계획서를
보니 많은 행사가 준비되어 있다. 그런데 가능하다면, 나는 이 행사가 지금 ‘메밀꽃 필 무렵’의 봉평으로 사람들이 흘러들어가듯, ‘청포도 익을 무렵’의 원촌 넓은 들(광야)로 찾아오도록 ‘원촌+육사+청포도’에 포커스가 맞추어지는 그런 잔치가 되었으면 어떨까 생각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