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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원성주사불성회 원문보기 글쓴이: 푸대화상
진주 청곡사
청곡사는 진주 지역에서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은 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로서 국보 제302호 괘불을 비롯하여 보물 제1232호 제석-범천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호 삼층석탑,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51호 대웅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61호 괘불함,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48호 금강역사상,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49호 영산회상도,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39호 업경전 등이 있다
신라(新羅) 49대 헌강왕(憲康王) 5년(879)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創建)한 것으로 사찰(寺刹)을 창건하게 된 동기는 남강변에서 청학(靑鶴)이날아와 서기(瑞氣)가 충만함을 보고 절터로 정하였다고 전하여 내려오고 있으며, 그후 고려말(高麗末) 우왕때 실상사장로(實相寺長老) 상총대사(尙聰大師)가 중건(重建) 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불탄 것을 선조, 광해년간에 복원(復元)한 것으로, 건물의 형식은 단층 팔작지붕와가(瓦家)로서 다포계(多包系) 계통(系統)을 따르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활주(活柱)를 받쳐 보강하고 있다
청곡사 대웅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1호)
대웅전(大雄殿)은 신라 헌강왕 5년(879) 도선국사(道詵國師 )가 창건하였으며, 고려 우왕 6년(1380) 실상사장로(實相寺長老) 상총대사(尙總大師)가 중수하였으나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어 조선조 선조(宣祖) 35년(1602) 계행대사(戒行大 師)와 극명대사(克明大師)가 중건 하였고 광해군(光海君) 4년 (1612)에 법당을 복원하였다.이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八作) 집으로 다포계(多包系) 건물이다. 정면 어칸(御間)은 좌우 협칸(夾間)보다 다소 간격이 넓으나 공포(拱包) 상부 간격은 어칸, 좌우 협칸 모두 같다. 어칸, 협칸 모두 공간포 (空間包) 2구로 짜여 있으며 어칸과 협칸사이의 기둥 위 주상포(柱上包)에서도 협칸쪽 길이보다 어칸쪽 소첨, 대참차 길이를 길게 조정하고 있다. 활주(活柱)가 네 모서리 추녀를 받치고 있는데, 밑면 폭이 상당히 넓고 굵은 추녀 밑에 소누형(小累形) 받침을 놓고 그 밑에 활주(活柱)를 세웠다. 활주 초석은 가공하지 않은 자연석 이다.
기둥은 배흘림이 있고 우주(隅柱)의 귀솟음은 작다. 수평 부재인 창방(昌枋)과 평방(平枋) 의 폭은 상당히 넓어 안정감이 있다.
기둥은 가운데가 약간 불룩한 배흘림으로 처리하였으며, 처마를 받쳐주는 기둥 위의 장식물은 조선후기 다포계 팔작집의 대웅전답지 않게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보아 이 대웅전은 신라시대와 조선시대의 건축 양식이 뒤섞여 있으며, 일제강점기의 대내적 중수로 인해 본래의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렇지만 사찰 전체의 면모가 잘 보존되어있다.
절 앞의 방학교 밑을 흐르는 시냇물과도 잘 어울려 아직도 청학이 날아올 듯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안에는 목조 석가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약사, 아미타여래상이 협시하는 삼존상을 비롯하여 후불탱, 신중탱, 그리고 목조 제석, 범천상의 모조품이 봉안되어 있다.
근래에 지붕기와를 개수하다 청기와 3장이 대웅전의 한복판에서 발견됐는데 이는 청룡의 상징으로 짐작을 하고 있다.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국보 제302호)
이 괘불정서(掛佛幀書)는 금어(金魚) 의겸대사에 의하여 조선조(朝鮮朝) 경종(景宗) 2년(1722)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괘불정서(掛佛幀書)는 삼존불(三尊佛)과 그 뒤쪽 상단(上段)에는 10대 제자 중 대표(代表)와 양대보살(兩大菩薩)등이 자리를 하고 있는 9구(軀)의 불보살(佛菩薩)로 구성된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이다. 석가여래(釋迦如來)가 인도(印度) 영산(靈山)의 보리수(菩提樹) 아래에서 6년간 고행수도(苦行修道) 끝에 대각(大覺)을 성취한 후로 아함경(阿含經) 12년, 방등경(方等經)을 8년, 반야경(般若經) 21년, 법화(法華), 열반경(涅槃經) 8년을 합하면 모두 49년 동안 설법하였는데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란 이 49년간의 설법중에서 마지막편에 해당하는 법화경(法華經)을 설(說)한 회좌(會座)를 도상화(圖上化)한 것이고, 그 장소는 중인도(中印度)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인 것이다. 중앙(中央)의 주불(主佛)은 석가여래(釋迦如來)의 입상(立像)인데, 나발(螺髮)과 육계가 뚜렷하며 수인(手印)은 통인(通印)을 하고 있는데 전체적인 체구는 비대한 편이다.
광배(光背)는 녹색(綠色)바탕에 키형의 두광(頭光)으로 묘사하고 있다. 천의(天衣)의 바탕은 자색(紫色)과 녹색(綠色)이 주종을 이루고 화문(花紋)이 고르게 시문되어 있다. 보관(寶冠)을 쓰고 있는 좌우 협시보살(脇侍菩薩)은 좌보처(左補處)가 문수(文殊), 우보처(右補處)가 보현보살(普賢菩薩)이다. 주불(主佛)의 뒷편 좌우로는 석가여래(釋迦如來)의 10대 제자 중 가섭존자(迦葉尊者) 등 제자상이 배치되었고, 최상단에는 왼쪽에 백의관음보살(白衣觀音菩薩)과 바른 편으로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자리하고 있는데, 여기 또한 하나같이 녹색(綠色) 두광(頭光)을 갖추고 있다.
진주 청곡사 목조석가여래삼존좌상 보물1688호
진주 청곡사(靑谷寺) 대웅전에는 목조로 만들어진 석가모니불좌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문수보살좌상이 우측에는 보현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다. 현재 이 삼존불은 제작 당시에 기록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제작자 등의 불상에 대한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건륭15년(乾隆十五年)(1750)에 기록된 ‘佛事同?結緣作福錄’에서 “만력43년을묘불상조성(萬曆四十三年乙卯佛像造成...)” 이라는 불상의 제작연대가 적혀있어 1615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본존의 석가모니불좌상은 신체비례가 알맞고 자세가 안정감 있다. 머리는 둥근 복발형에 높게 솟은 정상계주와 중간계주가 표현되어 있다. 방형의 상호는 이마가 넓고, 반개한 눈과 넓고 편평한 코, 굳게 다문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루어 엄정한 인상을 풍긴다. 볼과 턱에는 적당히 살이 올라와 있으며, 두툼한 귀는 턱까지 내려와 있어 전체적인 상호가 원만하다. 넓은 어깨의 네모난 상체를 가졌지만 가슴은 편평하고 아랫배는 부풀어있다. 수인은 오른손을 무릎아래 살짝 내리고 왼손은 오른발 위에 자연스럽게 올려놓아 손가락을 구부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하체는 오른발이 왼쪽 무릎위에 올라온 결가부좌로 넓고 낮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착의는 변형의 편단우견이며 가슴까지 올라오는 승각기는 의대(衣帶)로 묶어 꽃잎형 주름이 나타난다. 왼손에서 내려온 소매자락은 무릎위에 올려진 오른발을 덮고 왼쪽 무릎 위에 꽃봉오리 모양을 이루었다. 다리위에 흘러내린 대의자락은 양 다리를 감싸고 4단의 부채형 주름으로 표현되었다. 좌·우협시인 문수·보현보살좌상은 좌·우 수인의 위치와 좌·우 어깨를 덮는 이중착의 형식만 다를 뿐 상호와 신체비례 등 전체적인 조형은 본존과 동일하다. 각각의 두 보살좌상의 상투는 높은 편이며 귀를 휘감은 보발은 귀 뒤쪽을 타고 내려와 어깨 위에서 조그만 원을 중심으로 두 개의 타원을 형성하고 세 가닥으로 나뉘어 흘러내렸다. 보관은 높고 섬세하게 표현되었으며 이와 반대로 보살좌상의 영락장식은 단순하게 작은 귀걸이와 팔찌만 표현되었다. 청곡사(靑谷寺) 목조석가여래삼존불상(木造釋迦如來三尊坐像)의 제작자는 관련 기록이 현전하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상호의 표현과 신체의 비례, 착의의 표현 등이 1629년 조각승 현진(玄真)이 조성한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과 유사하다. 청곡사(靑谷寺) 삼존불좌상은 현진(玄真)작 불상 중에서 앞서 조성된 1612년 월명암 목조아미타불좌상보다는 얼굴이 편평한 방형으로 바뀌며 당당한 신체표현의 변화가 나타난다. 하지만 이후 제작된 관룡사 삼불좌상 보다는 형식화 되지 않았으며, 옷주름의 표현 등이 자연스럽고 상호의 모습도 안정되어 있다. 또한 본존은 170cm의 대형 불상으로 현전하는 현진(玄真) 작 목조불상 중에서 비교적 큰 규모를 자랑하는 수작(秀作)으로 현진(玄真)의 양식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청곡사 목조 제석천,대범천의상(보물 제1232호)
제석·대범상(帝釋·大梵像)은 원래 브라만 또는 힌두교의 신상(神像)이었으나 대승불교 이후 불교의 호법선신상(護法善神像)으로 사천왕상(四天王像)등과 더불어 불교에 수용되어 불교 미술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왔으며 "삼국유사"에 의하면 조각상이 아닌 화상(畵像)으로 그려졌다고 하는데 현재 전하는 제석·대범상(帝釋·大梵像)도 조선시대의 불화(佛畵)에서 신중화(神衆畵)나 각종 상단불화(上壇佛畵)에 사천왕상등과 더불어 호법선신(護法善 神)으로 도설(圖說)된 예를 찾아 볼수 있으나 독존(獨尊)조각상의 조상례(造像例)는 청곡사 의 것 이외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제석·대범상은 사천왕상과 더불어 불교에서는 대표적인 호법선신으로 많은 조상례(造像例)를 남기고 있는데 사천왕상이 위엄을 나타낸 험상을 나타내고 있음에 반하여 이 상(像) 의 얼굴부분은 보살상에 가까운 자비상을 나타내고 있으나 호분으로 흰색을 나타내어 보살상과 구분하고 있으며 보관은 봉황·화염패 등으로 장식하여 입체감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려 하였음에 양식적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양손도 합장이 아닌 수인(手印)을 결(結)하고 있어 이것 또한 입체감을 나타내려 한 것임을 알수 있으며 의문(依文)도 불화에서의 제석·대범 상(帝釋·大梵像)과는 다른 양식을 살필수 있어 주목된다.
조각의 기법은 조선후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그 양식적 특징이 중국이나 일본에서 조성된 조상례와는 현저한 차이를 나타내고 있어서 우리나라 제석·대범상의 조각상으로서의 양식적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진주 청곡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보물1689호
청곡사(靑谷寺) 업경전은 다른 사찰의 명부전과 같이 지장보살을 비롯해 시왕 등 명부의 존상들이 봉안된 전각이다. 업경전에는 불단에 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인 지장보살삼존상(地藏菩薩三尊像)이 자리하고 좌우로 시왕, 귀왕, 판관, 인왕, 범천·제석천상 등 총 23구가 배치되어 있다. 지장보살좌상에서 발견된 발원문에 의하면, 이 상들은 1657년에 조성되었다. 지장보살삼존상을 포함해 시왕상 및 권속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좌상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입상이나 의자상인 다른 권속보다 크게 조성해 위용 있게 표현하지만, 청곡사(靑谷寺) 지장보살좌상은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시왕 등과 비슷한 크기로 주존을 제작하였다. 모든 존상의 상호는 둥근 얼굴형에 두 눈은 눈꼬리가 길게 빠졌으며, 코는 높고 콧등이 반듯하고 입술은 작아 아이 같은 인상을 준다. 각 존상의 비례를 보면, 전체적으로 신체에 비해 두부를 크게 제작하였다. 특히 무독귀왕, 시왕 및 권속 등은 쓰고 있는 관모가 높아 3등신의 신체비례를 하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둥글고 좁지만 상체와 하체를 양감 있게 처리하였다. 지장보살좌상은 무릎이 높고 폭이 넓어 앉은 자세가 안정감이 있으며, 의자상의 시왕과 범천·제석천상 등도 의자에 허리를 기대고 무릎을 내려뜨린 자세가 다양하고 자연스럽다. 지장보살좌상은 이중으로 대의를 걸쳤으며, 드러낸 가슴 아래에는 승각기가 가로지르고 있다. 옷주름은 상체의 대의자락은 간략하게 직선으로 양감 있게 처리한 반면 하체의 옷주름은 곡선을 살려 장식적면서 볼륨감을 살려 두텁게 표현하였다. 장식적인 곡선의 옷주름 표현은 도명존자의 가사나 시왕의 무릎의 옷주름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어린아이와 같은 상호와 신체비례와 달리 두 손은 여성스럽게 가늘고 길게 조각하였다. 이 상을 조성한 조각승은 인영(印迎), 지변(智邊), 학염(學廉), 서명(瑞明), 법율(法律), 종탄(宗誕), 선우(善祐) 등으로 청곡사(靑谷寺) 업경전의 상들을 제외하고는 현재 이들이 조성한 다른 불상은 알려지지 않았다. 청곡사(靑谷寺) 불상은 비록 17세기에 활동한 여러 조각승의 불상과 계통이 연결되는 요소가 없는 독특한 조각 형식을 하고 있으며, 상의 전체적인 조형미가 뛰어나고 조각 수법 또한 우수하다. 현재 청곡사(靑谷寺) 업경대 봉안 불상군 가운데 권속에 해당되는 범천상과 제석천상은 뛰어난 조각성과 조선시대 현존하는 유일한 범천·제석천상으로서 보물 제123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금강역사상은 사실적이고 우수한 조각수법을 인정
받아 시도유형문화재 제348호로 지정된 상태이다.
청곡사 영산회상도(경남유형문화재 제349호)
조선후기(1700년대)에 조성된 이 불화는 청곡사대웅전 후불탱화로서 영산회상도이며 견본채색화(絹本彩色畵)로서 부처를 비롯한 시왕상이 그려진 대작으로 건융15년(1750)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내용이나 기법, 규모면에서 보기드문 탱화이다.
청곡사 금강역사상(경남유형문화재 제348호)
업경전에 출입문 좌우에 있는 상으로, 금강역사는 불교의 수호신 중의 하나로, 다른 말로 ‘인왕’이라고도 한다. 보통 사찰 문의 양쪽에 서 있는데, 왼쪽은 밀적금강, 오른쪽은 나라연금강이다. 금강역사상은 대체로 머리 부분에 둥근 빛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이들 신이 단순히 힘만 센 것이 아니라 지혜 또한 뛰어나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나라연금강은 입을 벌려 ‘아’하고 소리치는 듯한 형상을 하여 ‘아금강역사’라고 하고, 밀적금강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기 때문에 ‘음금강역사’라고도 부른다. 이 ‘아’와 ‘음’은 범어의 첫 글자와 끝 글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금강역사의 입은 처음과 끝을 연결하는 영원과 통일을 상징한다. 우리나라 금강역사상의 특징은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무섭지 않고 약간의 민화적 형상을 취하여 친근감을 준다는데 있다.
청곡사 업경전 금강역사상은 나무로 만든 것으로, 명부시왕의 수호신 역할을 한다. 커다란 괴목에 이음새 없이 조각된 사실적 조각수법이 뛰어나 신체의 생동감을 잘 전해주고 있다. 조선시대 후기 작품으로 불교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드물게 나무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더욱 귀중하다.
청곡사 업경전내 좌 우에 서있는 금강역사상은 목조금강역사상으로 명부시왕(冥府十王)에 대한 수호신역할을 하는 문지기상으로 대형괴목에 이음새 없이 통조각된 사실적인 조각수법으로 신체의 생동감을 느낄 수 있는 조선시대 후기 작품으로 불교조각사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목조조상의 조성예도 또한 드물다.
청곡사 괘불함(경남유형문화재 제261호)
이 괘불함(掛佛函)은 국보 302호인 청곡사 영산회 괘불탱을 보관하는 것으로 두꺼운 목판으로 견고하게 제작하였는데, 각 모서리마다 금속장식을 부착하였으며, 운반시 편의를 위하여 장방형의 몸체에 균형이 맞도록 고리를 달았다.
청곡사 삼층석탑
청곡사(靑谷寺)는 신라 헌강왕 5년(879) 도선국사(道詵國師)에 의해 창간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광해군(光海君) 4년(1612)에 중건된 이후 금세기에 들어와서 중수된 사찰이다 . 현재는 해인사(海印寺)의 말사로 되어 있다.
석탑은 대웅전(大雄殿) 앞에 있지 않고 그 좌측 약 30m 지점에 별도로 있다. 또한 이 석탑이 과연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창건할 당시 건립한 탑인지는 의문이가나 현재 청곡사(靑谷寺)에 남아 있는 유물 중에는 가장 시대가 앞선 것으로 생각된다.
석탑의 형태는 신라(新羅) 전형 석탑양식을 모방하여 이중기단에 삼층으로 형성되어 있는데 석재의 풍화가 심한 편이다. 기단의 면석에는 양쪽 모서리에서 우주(隅柱)를, 그리고 중앙에는 탱주를 새겨 비교적 간략하게 처리하고 있으며 상부의갑석(甲石)은 일부가 파손되었다.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은 각각 일매석(一枚石)으로 처리하여 축소되었고, 탑신에는 우주(隅柱) 이외의 별다른 조각은 보이지 않으며 옥개석은 4단의 층급받침을 마련하였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위에 복발(覆鉢), 앙화(仰花), 보주(寶珠)등이 비교적 잘 남아 있어 시대에 따른 상륜부의 양식을 살피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이 석탑은 전체적인 양식에 있어서는 통일 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3층 석탑의 일반양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으나 기단부의 간략화라든지 탑신과 옥개석이 축소된점, 그리고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볼 때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이르러 중건 당시 이 탑도 아울러 건립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응석사
응석사는 신라시대인 554년(진흥왕 15)에 연기(緣起) 조사가 창건하였다. 662년(문무왕 2) 의상 스님이 강원(講院)을 설치했다고 전하는데, 그러나 이 해는 의상 스님이 중국 당나라에 유학 중이었으므로 연대에 문제가 있다. 고려시대에서는 지공(指空), 나옹(懶翁), 무학(無學) 스님 등이 머물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사명 유정(四溟 惟政, 1544~1610), 진묵 일옥(震? 一玉, 1562~1663) 스님 등이 머물며 화엄도량으로서의 명성을 떨쳤다. 당시 가람의 규모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관음전, 문수전, 극락전, 비로전, 영산전, 나한전, 팔상전 등과 163개의 방이 있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하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왜병들이 몰려와 관음전에 참배하던 중 관음상 밑에 숨겨 두었던 승병들의 무기가 발각되자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고 한다. 그 뒤 1736년(영조 12)과 1899년(광무 3)에 각각 중수가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구산 수련(九山 秀蓮, 1909~1983) 스님이 1950년에 응석사에 머물며 수도한 바 있다. 현재는 일주문과 요사채등 부속건물을 갖추고 사찰 주변을 정비하여 전통사찰로서의 면모와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응석사 대웅전(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41호)
신라시대(新羅時代)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했으며 무학(舞鶴), 뇌옹, 지공대사(知公大師) 등이 이곳에서 수도했다고 전한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구조로 팔작 (八作)지붕을 한 다포계(多包系) 건물이다. 기둥은 현저하지는 않지만 다소 배흘림이 있으며 직경이 대단히 굵어 하부직경은 기둥높이의 1/5가량이나 된다. 우주(隅柱)는 안쏠림이 현저하다.
팔작(八作)지붕의 형태가 체고(體高)와 비례에 맞지 않게 낮아 물매가 완만하며, 용마루 길이가 짧아 합각마루의 위치가 중앙으로 몰려있다.
지붕은 정면과 우측면에는 겹처마이지만 좌측면과 배면에는 부연(浮椽)이 없는 홑처마로 구성 되어 매우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으나 처마내밀기는 4면이 모두 같다. 처마 내밀기는 체고에 비해 짧으며 장연(長椽)내밀기와 선자연(扇子椽)이 모두 짧다. 서까래 간격도 우측면에 비해 나머지 3면은 모두 성글고 부재치수도 작다.
응석사 대웅전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41호
팔작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주심포계(柱心包系) 건물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지은 것으로 근래에 몇 년 간에 걸친 보수 공사 끝에 2003년 12월 9일에 새롭게 상량되었다. 하지만 예전부터 있던 기둥과 일부 부재는 그대로 써서 지었다. 보수 때 발견된 상량문에 1736년과 1899년 7월 26일에 각각 중수한 기록이 있다.
이 건물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주(高柱)가 팔각형인 점과 공포에 이상이 있는 점이다. 현재의 공포는 외1출목(外一出目)․내2출목(內二出目)으로 되어 있으나 본래는 외3출목(外三出目)·내3출목(內三出目)이었던 듯하다. 병자호란 이후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으면서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 앞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괘불대(掛佛臺) 두 쌍이 있다. 2기가 나란히 마주보며 있는 것을 한 쌍으로 볼 때, 한 쌍은 완전하지만 나머지 한 쌍은 1기가 뿌리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근래 대웅전 보수 공사를 하면서 밑바닥에서 부러진 나머지 한 쌍이 나왔다. 괘불대의 형식으로 보아서 18세기 대웅전을 중수할 때 세운 것으로 생각된다.
진주 응석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보물1687호
응석사(凝石寺) 대웅전에는 석가여래를 주불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구성된 삼세불상이 봉안 되어 있다. 불상조성기에 따르면 응석사(凝石寺)가 화재로 폐허가 된 후 경천(敬天), 극수(克修), 일휘(日輝) 등이 발원하여 법당, 승당, 요사 등을 짓고 1643년(崇禎14년)에 삼존을 모셨다고 한다. 불상 조성에는 청헌(淸憲)과 법현(法玄), 원택(元澤) 등의 조각승이 참여하였다. 삼세불상 중 석가여래는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보다 약간 크게 제작하여 삼불의 주불로서 존재감있게 표현하였다. 삼세불상의 비례는 신체에 비해 두부(頭部)가 큰 편이다. 얼굴은 방형에, 머리는 육계를 구별이 없이 낮고 둥글게 하고, 정상계주와 중간계주를 표현하였다. 상호는 살짝 반으로 감은 두 눈에 코등이 반듯한 코, 끝이 살짝 올라간 입술 등이 조화를 이루어 단정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은 편이나 신체의 흐름이 팔로 좁게 연결되면서 상체가 왜소하게 보인다. 상체에 비해 앉은 자세는 무릎이 높고 넓어 전체적으로 안정감 있게 보인다. 이처럼 세 불상은 기본적으로 상호와 신체 비례 등이 같으며 존상에 따라 수인과 옷주름에 세부적인 차이가 난다. 석가여래는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려뜨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으며, 착의법은 왼쪽어깨를 덮은 변형편단우견에 드러낸 가슴 아래를 가로지르는 내의를 주름지게 표현하였다. 사선과 직선으로 떨어지는 옷주름은 간략하면서도 두께감 없이 편평하며, 옷자락의 끝단은 형식적인 곡선으로 마무리하였다. 약사야래와 아미타여래는 한쪽 손을 가슴 부분까지 올리고 다른 손은 무릎위에 올려 엄지와 중지를 둥글게 맞대었으며, 손의 위치는 서로 반대이다. 착의법은 이중의 대의를 걸쳐 입고 가슴 아래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내의는 석가여래와 다르게 단순하게 처리하였다. 불상 조성을 주도한 청헌(淸憲)는 17세기 전반에 활동한 화승으로, 1626년 충북 보은 법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360호), 1636년 전남 구례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좌상(보물 제1548호), 1639년 경남 하동 쌍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378호), 전남 고흥 능가사 대웅전 목조석가불좌상, 1641년 전북 완주 송광사 대웅전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보물 제1274호) 등 조선후기 중요 불상으로 손꼽히는 다수의 불상을 제작하였다. 1643년에 제작된 응석사(凝石寺) 목조삼세불상은 청헌(淸憲)의 말년에 조성된 상으로서 조형성이 우수할 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조각승 청헌(淸憲)의 불상 양식의 흐름을 알수 있는 중요한 불상이다.
여래삼존상은 응석사 대웅전의 보수공사로 인해 옮기는 과정에서 복장유물(服裝遺物)이 발견되어 그 조성연대가 확실한 조선시대의 불상이다. 본존은 석가모니불, 좌협시불(左挾侍佛)은 아미타여래 우협시불(右挾侍佛)은 약사여래이다. 세월이 오래되어 박락(剝落)이 심하고 균열이 있는 것을 최근에 개금(改金)하여 보수가 완료되었다.
진양 정평리 무환자나무 시도기념물96호(진주시)
무환자(無患者)나무는 자식에게 화가 미치지 않는다 하여 무환자(無患者) 나무라 하며 제주도에서는 도욱남 또는 더욱남으로 불리고 있다. 원산지는 대만으로 우리나라에는 중국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열매는 염주(念珠)를 만드는데 쓰여졌기 때문에 절이 세워진 후에 심어진 것으로 보인다. 진양 정평리 무환자나무의 나이는 25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5m, 둘레는 2.15m이다. 응석사(凝石寺) 경내 뒤편에서 자라고 잇다. 통일신라말(9세기경)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무환자 열매를 먹으면 전염병을 예방하고, 늙지 않고 오래 살며 가정의 나쁜 일을 쫓아준다 하여 심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무환자나무에 정성을 드리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진양 정평리 무환자나무는 흔히 볼 수 없는 나무로 생물학적 가치가 있어 기념물에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응석사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진주 나들목으로 나와 합천(해인사) 방향으로 향한다. 이 길로 15㎞ 정도 가면 왼쪽에 응석사 표지판이 나온다. 이 표지판 따라서 좌회전하여 4㎞ 정도 들어가면 왼쪽에 커다란 저수지가 보인다. 이 저수지를 끼고 조금 더 들어오면 응석사 앞 주차장에 닿게 된다.
집현산
진주시 관내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 해발 572m 이며, 시민들의 등산로로 애용되는 곳이다. 도보로 4시간 정도 걸린다.
옛 고려시대의 한 선비가 본 면을 지나다가 산세가 험하고 웅장한 산세를 보고 혀를 끌끌 차며 내 이 세상에 태어나 이렇게 요상한 산세를 본 일이 일찍이 없으며 용이 승천한 것이 틀림이 없다고 혼자말로 지껄이며 지나가는데 마침 이곳은 가뭄과 수해 등으로 백성들은 찌들어 죽을 지경에 놓여 있던 차에 어린 꼬마가 선비가 지껄이는 혼자 말을 엿듣고는 선비를 붙잡고 이 지역의 우환이 왜 이런지 가르쳐 달라고 통사정했으나 뿌리치며 이 지역의 백성들이 죄를 범하여 지금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그 후에도 계속하여 가뭄과 수해 등으로 농사는 안되고 주민들은 병들어 그 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계속적인 재난으로 고생을 하고 있던 차에 선비가 지나가던 시절의 어린 꼬마가 청년이 되어, 그 선비가 말한 것을 회상하면서 손뼉을 치고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읽으면서 바쁜 걸음으로 집현산으로 입산하였다.
청년은 집현산 구석 구석을 헤매다가 큰 바위 옆에서 그 때 그 선비가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되어 기도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빌며 선비에게 본 면의 우환을 풀어주도록 울면서 호소하였다. 한동안을 계속 빌고 나니 밤이 되어 선비와 함께 바위 옆에서 잠자리도 같이 하게 되었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계속 애걸하니 마침 선비가 입을 열어 이야기를 했다.
이야기인즉 내가 바로 승천한 용인데 한가지의 미비한 점이 있어 이승으로 하강하여 도를 닦고 있다고 말하자 청년은 계속 다그쳐 물었다. 그러자 선비는 승천시에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아야 하는데 이 지역의 주민들이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승천하는 용을 보라고 고함을 질렀기 때문에 나는 이승에서 고생을 하고 주민들은 벌을 받고 있다고 말하고 우측 산봉우리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기도를 하고서는 굉장한 번개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청년은 맥이 빠진채 집으로 돌아와 주민들을 모아 놓고 집현산 우측 꼭대기에서 일어난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하고 매일 등산하여 천지 신에게 빌었다. 하루 하루의 세월이 흘려 100일 이란 세월이 흐르고 보니, 그 청년도 지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마을 주민들은 그 청년의 애절한 심정을 애도하고 추모하는 뜻에서 계속 집현산에서 빌고 있는데, 어느날 갑자기 번개가 치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던 소나기가 대지를 적시자마자 병들은 농작물은 일시에 소생하고 병들은 주민은 회생하여 평온한 온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으며, 지금도 이마을 주민의 우환이나 걱정거리가 생기면 집현산 정상 소나무 밑에서 비는 것을 종종 볼 수 있다.
두방사
두방사는 월아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고 동쪽에는 천룡사, 서쪽에는 청곡사가 있다. 절 주위에는 울창한 숲과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절부터 아래 마을까지 산림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삼림욕장으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길 양쪽으로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터널을 만들어 장승처럼 방문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두방사 뒤쪽을 보면 빽빽한 활엽수림으로 옷을 지어 입은 월아산이 마치 절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듯한 모습에 포근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곳이다. 두방사 종각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 보면 멀리 문산들이 보이고 푸른 산들이 겹겹이 물결치는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절 구경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샘물로 목을 축이는 것이다. 등산객이든 산사를 찾는 사람이든 산사에 오면 가장 먼저 찾는 것이 바로 이 약수다. 산을 오르며 느꼈던 갈증을 푸는데는 절집의 시원한 약수만큼 좋은 것도 없다.
두방사는 신라 49대 헌강왕 4년(878년), 도선국사가 창건한 아주 오래된 절이다. 도선국사는 월아산이 절을 감싸고 있으며 정면으로 산 아래가 다 보이는 명당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두방사를 세웠다.
선조 36년(1603) 계형대사가 중건하고 불법을 계승하여 오다가 1946년 청담대종사가 수도장의 조건을 구비하고 시설을 개수했다.
청곡사 암자로 두방암이라고 불렸으나, 1962년 해인사 말사로 등록하면서 두방사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두방암으로 많이 알고 있다.
이 후 1963년 철웅 스님이 무량수전을, 1970년 법령스님이 요사채 보수, 사람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1973년 성범 스님이 진입로 1.5km를 포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지 스님은 암자의 무량수전에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은 드문 일이라며 남쪽지역에 영천의 부귀암에서 승격한 부귀사를 비롯해 3군데가 있다고 한다. 대웅전과 스님들이 묵는 숙소, 산신을 모셔놓은 삼성각, 명부전이 전부였으나 몇해전에 완공한 지장전이 사찰의 기품을 더해주고 있다. 대웅전 앞마당에 가면 야트막한 다층석탑을 볼 수 있는데, 색깔과 모양이 무척이나 특이하다. 이 석탑은 역시 신라시대에 조성되었다고 전해지며,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최근에는 월아산 두방사 아래 산림욕장이 조성되면서 도시생활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흙과 돌과 바람과 계곡의 신선함을 함께 선사하는 웰빙의 공간으로도 손색이 없다.
두방사 가람배치
두방사 무량수전 앞 뜰 종각 위에서 산 아래 문산들을 바라보면 모든 마음의 욕심은 어느새 날아가고, 그 빈 마음에 부처님의 법이 다소곳이 자리한다. 뒤를 돌아 부처님이 계신 무량수전을 보면 저절로 두 손은 모아지고 합장을 하게 되는 것이다.
두방사 무량수전은 절의 가운데 위치하고 있으며,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중생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안치하고 있다. 무량수전 앞 뜰에는 특이하게 정판암을 사용한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으며,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한그루 노송은 두방사의 전각들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무량수전 양쪽에는 지장전과 남명선원(南明禪院)이라는 현판이 붙어있는 선방이 자리하고 있다.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이 ‘남명선원’이라는 글을 짓고 총무원장 지관스님이 글을 썼다고 한다.
지장보살 600분을 모시고 있는 지장전 뒤쪽에 약수터가 있으며, 이 약수터는 옛날 사람들의 아픈 몸을 치료했다고 한다. 약수터 위쪽으로 돌계단을 걸어 올라가면 삼성각이 산 아래를 향해 있다.
두방사 경내를 들어오기 위해서는 계단을 따라 100m정도 걸어 올라와야 하는데 계단은 종무소와 공양간 등 3층 요사 옆에 설치되어 있으며, 계단을 다 오르고 경내 입구에 범종각이 범음의 소리를 산 아래로 울려 퍼지게 하기 위해 우두커니 서 있다.
두방사 무량수전
사찰에서 아미타불을 주불로 안치하고 있는 법당으로 아미타전 또는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극락정토신앙이 강하여 내부 구조는 대웅전만큼이나 화려하다.
두방사의 무량수전은 1963년 중창해 극락정토의 본존인 아미타불을 중앙에 모시고,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한다는 관세음보살을 안치하고 있다. 보통은 좌우협시로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 또는 지장보살을 봉안한다.
본존불의 신앙 내용을 구체적으로 그린 불상 뒷벽의 후불탱화로는 극락정토를 묘사한 아미타탱화가 걸려 있으며, 불단 외쪽에 신장탱이 걸려있다.주불을 모시는 불단 위에는 닫집인 천개(天蓋)가 달여 있으나 두방사 무량수전에는 없다. 기둥과 천장에는 단청을 하고 있으며 동종이 내부에 있다.
규모는 앞면 5칸, 측면 3칸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며져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한 공포는 익공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외벽에는 심우도와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두방사 지장전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는 법당이 지장전이다. 무량수전 우측에 자리한 지장전은 지장보살이 불단 가운데 단독으로 있으며 규모가 작은 금동 지장보살 600분이 봉안되어 있다. 지장전 안으로 햇빛이 들어 올때면 법당안 전체가 금빛으로 물들 정도다.
지장전에서는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사람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한다. 지장보살은 석가의 위촉을 받아 미래불인 미륵불이 출현하기까지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6도의 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지장전 앞면과 좌우 벽면에는 지장탱이나 시왕탱을 모시는데 중건한지 3년 된 두방사 지장전에는 불화가 한점도 없는 상태다.
정면 5칸, 측면 2칸인으로 팔작지붕에 익공식 공포로 지어졌으면 외벽에도 아직 벽화가 그려져 있지 않다
두방암 다층석탑(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00호)
두방암(杜芳庵) 다층석탑(多層石塔)은 본래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며 이웃의 법륜사(法輪寺)에 건립되어 있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절이 폐허가 되자 그 터에 남아 있던 이 석탑을 일제시대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이 석탑의 재료는 점판암이다. 점판암재 석탑은 석재의 돌빛이 푸른색을 띠어 일명 청석탑(靑石塔)이라고 하는데 석질의 특수성으로 인하여 탑신은 상자와 같이 되고 옥개석(屋蓋石)은 한장으로 되어 얇고 작은 석재로 차곡차곡 쌓은 것 같은 소형탑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러한 제약에서 이루어진 청석탑은 다른 탑에 비해 외관상 전혀 다른 느낌을 주게 되는데, 기단만은 대부분 화강암으로 조성된 것 역시 석재의 견고성 때문이라 하겠다. 청석탑은 주로 통일신라(統一新羅) 말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高麗時代) 에 유행하는데 해인사(海印寺) 원당암(願堂庵), 금산사(金山寺)의 청석탑이 대표적 예에 속한다.
이 석탑은 각 옥개를 4각으로 처리하여 해인사(海印寺) 원당암 (願堂庵) 다층 석탑과 유사성을 보이고 있다. 그 재료와 각 부재의 결구방식이 특수하여 주목되고 있으나 애석하게도 지금의 위치로 옮길 때 하대를 기단의 폭보다 좁고 높게 시멘트로 만들어 전체적인 균형이 잘 맞지 않아 매우 불안정한 느낌을 주고 있다.
원래는 다른 청석탑의 예와 같이 화강암으로 된 하층 기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본래의 기단을 찾아 복원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간혹 이 탑을 13층 석탑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견해로 연화문이 새겨진 기단 부의 갑석(甲石)까지도 옥개석으로 보고 층수에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다른 탑재가 더 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현재의 상황으로는 9층으로 보는 것이 옳다 하겠다. 다른 청석탑에 비해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한 탑이며, 이 탑의 건립시기는 청석탑이 유행하던 고려시대(高麗 時代) 초기의 수작으로 추정된다.
두방사 삼성각
삼성각은 사찰에서 독성(獨聖), 칠성(七星), 산신(山神)을 한곳에 안치한 전각으로 전통 민간신앙인 삼성신앙이 불교에 흡수되면서 생겨났다. 한 건물 안에 독성ㆍ칠성ㆍ산신을 함께 모시면 삼성각이라 하고, 이들을 따로 모시면 칠성각ㆍ산신각ㆍ독성각이 되는 것이다.
두방사 삼성각은 지장전에서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있는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에 지붕은 팔작지붕, 공포는 익공식으로 지어졌다.
내부에는 가운데 칠성탱, 왼쪽에 독성탱, 오른쪽에 산신탱이 걸려있는데 모두 불기 2544년에 제작되었으며, 동종도 내부에 있다.
두방사는 신라 49대 헌강왕 4년(878년)에 도선국사가 창건한 아주 오래된 절이다. 도선국사는 월아산이 절을 감싸고 있으며 정면으로 산 아래가 다 보이는 명당이라 할 수 있는 곳에 두방사를 세웠다.
선조 36년(1603) 계형대사가 중건하고 불법을 계승하여 오다가 1946년 청담대종사가 수도장의 조건을 구비하고 시설을 개수했다.
청곡사 암자로 두방암이라고 불렸으나, 1962년 해인사 말사로 등록하면서 두방사로 승격되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두방암으로 많이 알고 있다.
이 후 1963년 철웅 스님이 무량수전을, 1970년 법령스님이 요사채 보수, 사람들의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위해 1973년 성범 스님이 진입로 1.5km를 포장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주지 스님은 암자의 무량수전에 아미타불상을 모시고 있는 것은 드문 일이라며 남쪽지역에 영천의 부귀암에서 승격한 부귀사를 비롯해 3군데가 있다고 한다.
두방사 찾아가는 길
승용차를 이용할 경우-남해 고속도로를 이용 문산 나들목으로 빠져 나와야 한다. 문산 나들목에서 문산읍 방향으로 우회전 한다. 문산 삼거리에서 국제대학쪽으로 진주-진성간 국도를 타고 들어가다 보면 남해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굴다리 앞에 이정표가 있다. 이 굴다리를 지나 들어가다 보면 옹기종기 50여 호가 모여 있는 작은 마을이 나오고 마을길을 지나 산으로 10분 정도 오르면 두방사에 도착할 수 있다.
월아산
달이 떠오르는 모양을 한 산이라는 월아산(月牙山)은 진주시민들이 자주 찾는 쉼터이다.
1986년 3월 6일 도시자연공원으로 지정(건설교통부 고시 제 93호)된 월아산 은 일명 달음산이라고도 하는데 시내에서 10여 분만에 도착할 수 있는 가까 운 곳이고, 산이 구릉을 이루고 있지만 숲이 아름다운 아담한 산으로 험하지 않아서 가족단위의 등산객들이 주말을 이용해 즐겨 찾는 산이다. 높이가 482m밖에 되지 않아 한나절 산행으로 알맞은 곳이다.
정상은 장군대(482m)이다. 장군대는 예부터 금산, 문산, 진성면 주민들이 가물 때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김덕령 장군이 목책성(木柵城)을 쌓고 왜적을 무찌르는 본영으로 삼았다는 역사적 사실이 있는 곳이다. 월아산에는 동쪽에 천룡사, 남쪽에 두방사가 있지만 서쪽에 있는 청곡사로 더욱 더 잘 알려져 있는 산이다. 절 주위에는 울창한 숲과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다.
금호지
금산면사무소로부터 약 400m 지점의 금산면 용아리 1102-1번지에 소재한 금호지는 전체구역면적이 204,937m² 규모의 큰 저수지이다. 금호지의 전설은 무척 흥미롭다.
옛날 옛적에 황룡과 청룡(혹은 흑룡)이 하늘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것을 본 어느 용사가 "싸움을 멈추라"고 소리치자 청룡이 놀라 아래를 보는 순간 황룡이 청룡의 목을 비수로 찔렀다. 청룡이 땅에 떨어지면서 꼬리를 치니 그 꼬리에 쓸려 갑자기 하나의 큰 못이 이루어 졌다고 한다.
이것이 오늘의 금호지로, 금호지는 청룡을 닮아 항상 물이 맑고 푸르다고 한다. 또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금호지를 둘러 봤느냐?"고 묻는다. "안둘러 봤다."라고 하면 게으른 놈이라고 벌을 준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저승까지 이름이 난 못이고 보면 용이 있다는 전설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금호지는 둘레 5km로 굴곡이 많아 한눈에 못의 전부를 볼수 없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에 자연적으로 형성되었다는 추정만 하고 있다. 평균 수심 5.5m, 250ha의 몽리면적을 갖고 있는 수원의 큰 규모의 못을 사람들은 금호못이 워낙 깊어 명주실구리 3개가 들어갔다는 옛전설을 이야기 하고 있다. 한편 전설처럼 주위에 울창한 송림으로 둘러싸여 경관이 아름다울 뿐아니라 어족자원이 풍부하여 낚시터로도 유명하여 사시사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명소이기도 하다.
효자리 삼층석탑(보물 제379호)
하층 기단은 일부가 파묻혀 구조가 분명하지 않으나 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 1주(柱)가 있고 갑석 윗면은 경사져 있는데 중앙에 호형(弧形)과 각형(角形)의 괴임이 있다.상층 기단 중석은 모두 4매의 판석으로 결구 되었고 우주와 탱주 1주(柱)가 조각되었다. 특히 우주와 탱주는 폭이 넓어 중석 전체 폭의 거의 반을 차지하고 있다. 갑석(甲石)은 2매 의 판석으로 아래에는 부연(附椽)이, 위에는 2단의 괴임이 있다. 탑신부는 옥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딴 돌로, 옥신석에는 각 층마다 우주형이 모각(模刻)되었으며 특히 초층 옥신 양면 에는 방광문내에 창살이 있는 두 짝의 문비(門扉)와 고리가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상당히 두터운 편으로 1·2층은 받침이 4단이며 3층은 3단이다. 처마선은 위 아래가 모두 수평을 이루나 네 귀에서 완만하게 솟아 있으며, 낙수면은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모두 없어졌다.
이 석탑은 각 부분의 재료가 두터워 둔중한 느낌을 주며 기단부와 탑신부와의 비례도 조형상 불균형을 보이고 있다.
고산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경남유형문화재 제236호)
불상(佛像)은 수곡면 원내리에 있는 한산사(寒山寺) 보운전 (寶雲殿)안에 봉안되어 있는 비로사나불상(毘盧舍那佛像) 이다.
나발(螺髮)의 머리와 육계 사이에 중앙 계주를 나타내고 있으며, 얼굴은 직사각형에 가깝다. 눈썹은 호형(弧形)이고 코는 오똑하며 입은 작게 표현하였다. 또한 턱에 수염을 그려 넣었고 목에는 삼도(三道)를 새겼다. 법의(法衣)는 우견편단 (右肩偏袒)으로 왼쪽 어깨에 의문(衣文)이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아래로 하고 왼손으로 오른손 손가락 을 쥔 지권인 (智券印)의 비로사나불상(毘盧舍那佛像)이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대(上·中·下臺)를 갖추고 있다. 방형(方形)의 하대석에는 연화문을 조각하고 그위에 중대 받침 2단을 몰딩하였으며 괴임에는 안상(眼象)을 새겼다. 중대석의 4면에 는 양(兩) 우주(隅柱)를 마련하고 그 내부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양각으로 새겼다. 전체적인 조각수법으로 보아 이 불상은 신라(新羅)말이나 고려(高麗)초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명석 자웅석
진주시 명석면 신기리(晋州市 鳴石面 新基里)에 자웅(雌雄)을 상징하는 한쌍의 성기형상(性器形象)암석이 서있다. 이 돌을 운돌 혹은 명석(鳴石)이라고 한다. 숫돌은 자연석 남자 성기모양으로 보이고 암돌은 여자가 족두리를 쓴 형태이다.
원래 숫돌은 현 위치에서 북동쪽 300m 지점의 논두렁에 서 있었고 암돌은 북쪽 500m 지점의 하천변에 누워 있던 것을 1970년 음력 3월 3일에 옮겨 세우고 1973년에 명석각(鳴石閣) 을 준공하여 모시고 있다. 해 마다 음력 3월 3일에 유교식 제를 올리는데 제(祭)를 지내는 목적은 호국충절을 기리고 풍농을 기원하는 것이라 하겠다. 제를 지낼때에 출향인을 초대하여 오후는 각종 민속놀이를 벌인다.
전설에 의하면 고려(高慮) 공민왕(恭愍王)때 여진(女眞) 및 거란의 침입을 대비하여 『일설에는 고려(高慮) 고종(高宗)18년 몽고(蒙古)의 침입을 대비한 것이라고 한다.』 진주성(晋州城)을 수축할 때에 부역에 동원되었던 광제암(廣濟庵)의 승려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급히 걸어오는 한 쌍의 돌을 만나서, "무영석물(無靈石物)이 어디가느냐?"하고 물으니까 돌들이 "진주성 부역에 고생하는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성돌이 되고자 간다." 답하여서 "이미 성을 다 쌓았다."고 하자 돌이 크게 울며 전신에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섰다. 그래서 이 자웅석을 운돌이라 이름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 소식을 들은 중국(中國)명사 두사충(杜思忠)은 "크나큰 그 돌/낭랑한 그 울음이여 /그 이름의 크고 장함/천만년 빛나리 <뢰뢰유석(磊磊鍮石) 낭랑 기명(琅琅其鳴) 기명굉대(其名宏大) 어천만령(御天萬齡)>" 이라는 자웅석찬(雌雄石讚) 의 시 를 보냈다고 한다.
진주삼천포 농악(중요무형문화재 제 11-가호 )
(1) 유래 ;
농악의 기원에는 농사안택축원설(농사안택축원설), 군악설(군악설), 불교관계설(불교관계설) 등이 있으나 농악의 목적에 따라서 당굿과 같은 마을굿, 지신밟기굿, 걸립굿, 두레굿, 판굿 등으로 분리 발전한 것으로 본다. 진주삼천포농악은 1966년에 지정될 당시에는 『농악12차』라 했으나 1986년에는 진주농악으로, 1993년에는 진주삼천포농악으로 개칭되었다. 명칭은 바뀌었으나 이 농악은 12차의 판굿으로서 걸립굿과 두레굿 등의 가락을 12종 36가락을 구성 정립한 것으로 진주와 삼천포지역에 전래되고 있는 경남형 농악이다. 이 판굿은 진해의 명 상쇠였던 박경호로부터 진주시의 고 김한노에 이어졌으며, 초대 상쇠보유자였던 진주의 고 황백일과 삼천포의 문백윤이 전수 받았던 것이다.
(2) 편성 :
진주삼천포농악의 편성은 영기, 농기, 나발, 꽹과리, 징 북, 법고 그리고 양반, 포수, 잡사, 농군, 가장녀, 무동 등으로 한다. 쇠가락은 홑다드래기, 겹다드래기, 삼채다드래기, 영산다드래기, 잔다드래기, 덧뵈기, 판굿길군악, 길군악, 오방진가락, 호호굿가락 등이 있다.
진주검무(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晉州劍舞)는 진주지역에 전승되는 검무를 가리킨다. 8명의 무원(舞員)들이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戰笠)을 쓰고 서로 맞서서 양손에 갈라 쥔 칼을 휘저으며 추는 춤으로 도드리 장단에 늘어서서 느릿하고 장중하게 한삼을 뿌리며 춤을 추다가 한삼을 빼어 놓고 맨손을 뿌리며 입춤사위로 추다가 이윽고 엎드려 숙인사위로 어르며 앉은사위로 춤을 추다가 땅에 놓았던 칼을 양손에 갈라 쥐고 씩씩한 타령 장단에 칼을 좌우사위로 휘두르며 방석돌이로 돌아가며 장쾌하게 칼춤을 춘다.
원래는 전쟁터에서, 군사들의 사기 충전과 승전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추기 시작하였던 것으로이후 왕 앞에서 공연되던 춤으로 진주감영에 교방청이 있었고 진주 교방청 기생들에 의해 연마되고 성숙되어 계승되어 오고 있다.
춤은 경쾌하면서 우아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발랄한데 멋을 겉으로 표출시키지 않고 내면에서 삭여 나간다. 춤의 유래는 나라를 구하려던 신라 황창랑이 백제에 들어가 추었다는 고사에서 비롯되기도 하고 신라 병사들이 관창의 탈을 쓰고 칼춤을 추어 황산벌 싸움에서 승리를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주검무는 다른 고장의 검무에 보이지 않는 여러 화사한 춤사위가 보인다. 칼은 한 쌍인데 백동으로 칼날을 만들고 자루에는 붉은 비단을 붙이고 칼 끝 부분과 자루부분에는 장식수술을 달았다. 칼 길이는 10cm이다. 진주검무 칼은 다른 검무 칼처럼 목이 꺾어지지 않고 고정되었기 때문에 농검(弄劒)을 할 때 손목을 많이 돌려야 칼이 제대로 노는 것이 특징이다.
개천예술제
개천예술제는 1949년(단기 4282년)에 정부수립의 실질적인 자주독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서 제1회 영남예술제로 개최되었다.
그 이후 1950년 한국전쟁과 1979년 10.26을 제외하고 매년 어떤 어려움에도 그 맥을 이어온 국내 최대, 최고의 예술제이다.
1959년에는 영남예술제에서 개천예술제로 그 명칭을 바꿔 개최되었으며, 1964년부터 1968년까지는 국가원수가 개제식에 참석하는 최초의 예술제였다.25회를 맞는 1974년에는 순수예술의 대중화란 주제설정으로 새로운 변화를 꾀하였으며, 33회째인 1983년에는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지정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개천예술제는 그 동안에 전통 예술 경연을 통해 우리의 예술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여왔으며, 지방 문화 발전에 이바지 한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특히 49회 째인 1999년부터는 개천예술제를 세계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들기 위한 기획실을 상설 운영하여 행사의 전반적인 개혁과 변화를 추구하였다.
전국 문화예술제의 효시인 개천예술제는 임진란 당시 병사들이 가족의 안부를 전하는 신호로 사용하던 유등이 남강과 어우러져 일대 장관을 이루는 밤 풍경을 연출한다.
행사 기간 동안 남강에 유등을 띄우는 행사(진주남강유등축제, 2003년 문화관광부 문화관광축제 지정,2006~2010년 최우수축제 5년연속), 소싸움대회, 각종 문예행사, 청소년축제 등 서제 , 개제식, 예술문화행사의 8개 부문에 58 여 개의 행사가 다채롭게 개최되고 있다.
진주 논개제
천년고도 진주는 예로부터 북평양 남진주라 불릴 정도로 전통예술이 뛰어난 고장으로 유명하다.진주의 뜻 있는 문화예술인들은 지역의 훌륭한 전통예술을 기반으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에서 순국한 논개를 비롯한 7만 민.관.군의 충절과 진주정신을 포괄하면서 시민들이 동참할 수 있는 전통예술축제를 창제하기로 하고 그동안 진행되어 오던『의암별제』를 중심으로 하는 진주논개제를 만들었다.
진주논개제는 매년 5월 넷째주 금,토,일 3일간에 걸쳐서 호국충절의 성지 진주성에서 개최되며, 1868년 당시 진주목사 정현석이 창제한 것으로서 제향에 악,가,무가 포함되고 여성들만이 제관이 될 수 있는 독특한 형식의 제례인 의암별제를 서막으로 진주오광대를 비롯한 민속예술과 진주기생들이 남긴 교방문화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자리로 이어지고, 탈춤과 대동놀이로 하나된 신명을 만들어 축제의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가장 지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라는 말이 있다.
모름지기 진주논개제는 어느 지역에서도 흉내낼 수 없는 진주만이 가지고 있는 것들을 소재로 하기 때문에 세계적 축제로서 발전도 가능하리라 기대하며 또한 전통예술 위주로 봄에 열리는 논개제는 순수예술 중심으로 가을에 열리는 개천예술제와 함께 진주를 문화예술의 고장이란 명성에 걸 맞는 축제의 도시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남강 유등축제
축하및 공연행사
불꽃놀이 (2회정도)
남가람 어울마당 : 축제 기간동안 국내외의 품격높은 민속공연
※ 기타 : 진주향토 음식점 및 농ㆍ특산물 판매코너 운영
관람객 체험(참여) 행사
1. 창작등 만들기
학생들이 직접 만든 등을 품평회를 거쳐 시상하고 출품된 작품은 행사기간 동안 남강 둔치 전시
2. 소망등 띄우기
참가자의 소원을 적어 등 안에 넣어 남강으로 띄워 보내는 행사
3. 소망등 달기
촉석루 맞은편에 참여시민들이 기원을 담아 돔형 터널식 구조에 소망등 전시
4. 시민 참여 등 만들기
행사 관람자들이 현장에서 직접 등 제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체험마당 운영
5. 읍면동 상징등 거리행렬
37개 읍면동 시민들이 살고있는 지역의 상징을 등으로 제작하여 거리 행렬을 통해 유등축제를 축하
6. 사랑의 다리(부교) 건너기
남강에 띄운 유등을 부교에서 자세히 관람하거나 사진찍기 등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
7. 등 캐릭터 사진찍기
다양하고 친근한 등 캐릭터를 제작, 추억 가꾸기 사진찍기 공간 제공
8. 전통놀이 체험 : 투호, 게기차기 등 전통놀이 체험
9. 시와연인의 거리
유등 관련 시, 사랑 고백 등
10. 전국 시·군 상징등 전시 및 기업등 전시
진주 민속 소싸움대회
진주의 소싸움대회는 신라가 백제와 싸워 이긴 전승(戰勝)기념잔치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을정도로 투우대회의 발상지이다. 예전에는 진주의 "큰판(소싸움)"은 남강 백사장이었다. 투우가 벌어지는 며칠 동안은 싸움소가 일으킨 뿌연 모래 먼지가 백사장을 뒤덮었으며,수만 군중의 함성은 하늘을 찔렀고 수백개의 차일(遮日)이 백사장을 온통 뒤덮었으며 차일 속에 오간 술바가지로 인하여 양조장술은 동이 났다한다.
이러한 진주 투우는 일제때 민족의 억압된 울분을 소싸움에서 발산했고 왜인들이 진주땅을 들어설 때 수만 군중이 백사장을 뒤엎고 시가지를 누비니 겁에 질려 남강 나루를 건너지 못하고 며칠씩 머물렀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이 진주 소싸움대회는 해마다 년 2회 개최(논개제, 개천예술제)하고 있으며, 특히 10월 개천예술제 기간중에 개최되는 소싸움대회는 전국에서 수만명의 관광객이 찾아오고 있는 진주의 새로운 관광상품으로 각광받고있다.
또한 진주시에서는 소싸움의 옛명성을 되찾고 진주를 찾는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하여 진양호 제2매표소 앞 50,648㎡ 부지위에 3000석 규목의 원형경기장인 진주전통소싸움 경기장을 건립하여 2006년4월부터 매년(3월 - 11월) 토요상설 소싸움경기를 개최하고 있다.
첫댓글 진주에 살아도 이리 좋은글 조사 못했는데 참고자료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