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정정리:2001.12.15
12월15일:중산리 민박
12월16일:04:00기상-07:00출발-07:35칼바위-08:25망바위-09:00로터리산장-10:20개선문-10:40천왕샘-10:55천왕봉-12:00장터목산장-13:00중식-13:30명성교-14:10유암폭포-15:25칼바위 갈림길-16:00중산리
어제는 남도의 산하와 들녘에 많은 눈이 내렸었다. 눈 덮인 지리가 눈에 아른거리고, 마침 산불 경방 기간도 풀린 터라 기쁜 마음으로 지리산으로 향한다. 남원으로 향하는 88고속도로에서 차창 밖을 바라보니 하얀 옷으로 갈아입은 만복대의 서북 능선이 모습을 나타내, 벌써 마음은 지리산 품속에 와있는 듯하다. 왜 지리산을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떨리고 설레는지. 첫사랑을 만날 때 느끼는 감정처럼 이 증상은 지리산을 바라볼 때마다 좀처럼 고쳐지지 않고 계속된다.
며칠 전 남원산O과는 천왕봉 등정을 약속하였고, 절실한 크리스천인 정읍의 L선생을 꼬드겨 이번 일요일 지리산 산행에 강제적으로 합류를 시켰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용서를 해주실 테지. 남원산O, L 선생과는 지난겨울 인월의 옥계동에서 지리산 막둥이 봉우리 덕두산을 오르다가 도중에 폭설을 만나 산행을 포기했던 경험이 있다.
토요일 오후 한가로운 남원시청에 주차하고 기사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이마트에 들러 먹거리를 장만한다. L 선생의 체력을 고려하여 내일의 코스는 일단 중산리-천왕봉으로 한다. 모처럼 애마 지프를 쉬게 하고, L 선생의 EF 쏘나타로 바꾸어 타고 핸들을 잡았다. 부드러운 핸들링과 로드 홀딩에 승차감이 뛰어나 드라이브를 즐기며 중산리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4시. 그동안 바쁜 일정에 제대로 들러보지 못한 빨치산 전시관을 들러보았다. 빈약하고 형식적인 자료와 전시물로 반공교육에 집착한 현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다. 좌우로 갈라져 우리민족의 최대 비극 동족상잔의 과거사가 상상되어 안타깝게 한다. 민족은 사상보다 우선이다. 모두 다 우리의 형제요. 같은 핏줄인 것을.
민박집을 정하고 오랜만에 편한 마음으로 친우 남원산O, L 선생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서로의 정을 돈독히 나눈다. 기나긴 지리산의 겨울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모르고 술을 거듭 마시며 학창시절로 돌아간 L 선생의 모습에 참으로 지리산 동행을 잘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그저 기쁘기만 하다. 이른 새벽에 창문 밖이 다소 소란한 듯하여 나가보니, 중산리 주차장에는 벌써 많은 산님들로 장사진을 치고 있다. 여러 대의 관광차와 승용차가 산님들을 토해내었고 날씨가 추워서 식당 안에는 따끈한 어묵 국물로 몸을 녹이고 있었고 곳곳에서 버너 불을 붙여 추위를 달래는 산님들도 있다.
지금의 시각이 새벽 4시 30분. 마음이 바쁜 산님들은 매표소 앞에서 입산 시간을 줄지어 기다리며 앞당겨달라고 재촉하기도 한다. 겨울철 산불 경방 통제 기간이 오늘에서야 풀려 많은 산님이 설레는 마음을 달래며 천왕봉을 향하여 산행 준비를 하는 것이다. 습하고 차디찬 새벽 공기를 한껏 폐부로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하고, 민박집으로 들어와 아침 식사 준비를 한다. 어제 과음으로 잠자리에 코를 골며 장렬하게 전사한 L 선생을 이불을 덮어 좀 더 쉬게 하고, 남원산O과 대구 매운탕을 끓인다. 보글보글 끓어 오르는 국물 맛이 기가 막힌다..
식사 후 한 시간쯤 TV를 보며 휴식을 취하고서 우리는 7시에 민박집을 나와 산행을 시작한다. 이곳 중산리에서는 천왕봉을 오르는 가장 빠른 길이 열려있다. 칼바위를 거쳐 법계사로 올라 천왕봉으로 오르는 것이 가장 빠르다. 또는 유암 폭포를 거쳐서 장터목으로 오르기도 한다. 또는 우측으로 난 포장 도를 따라 경남 학생수련원의 순두류 길을 따라 로터리 산장을 거쳐 천왕봉을 오를 수 있다. 그리고 순두류 상류서 중봉 골로 천왕봉을 치고 오를 수 있다. 하지만 오늘은 오랜만에 칼바위를 만나고 법계사를 들러 천왕봉에 오르고자 한다.
새벽에 그 많던 산님들은 이미 산행을 떠난 후라 식당 앞과 주차장 그리고 매표소 앞은 한가롭다. 오히려 그들이 없음에 다행이라 생각하며, 우리는 보다 여유 있고 조용한 산행을 즐기기로 한다. 민박집에서 수통 2개에 물을 채우고 나왔으니 법계사에서 물을 보충하면 된다. 배낭은 남원산O과 내가 나누어지고, L 선생의 체력을 고려해 가벼운 차림으로 오르게 한다. 야영장을 지나 왼쪽으로 중산리 계곡의 물소리를 들으며 산행은 시작된다.
어제 먹은 술 탓에 L 선생은 초반부터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노란 얼굴에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으며 발걸음이 무겁다. 그동안 개인적인 어려움에 그를 위로하고자 마련한 산행이, 오히려 그에게 육체적으로 고통을 안겨 준다고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탁 트인 일망무제의 천왕봉에 오르면 인생의 자신감과 큰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애써 위로하며 그의 작은 육체적 고통을 무시하기로 한다.
크고 작은 바위틈 사이로 열려있는 등산로를 걷다 보니 어느새 칼바위. 오랜만에 칼바위를 만나 인사를 한다. 막간의 휴식시간에도 L 선생은 물 한 통을 비우고 큰대자로 눕고 만다. 걱정이다. 남원산O을 앞세워 보내고 힘겨워하는 L 선생을 격려하며 다시 산행을 시작한다.
지리산의 북쪽 자락은 백설로 지리산이 온통 은세계이지만 남쪽 자락인 이곳은 잔설만 조금 있을 뿐, 지리 설경을 느낄 수는 없다. 저 멀리 장터목이 있는 산정을 바라보니 그곳은 흰 눈이 가득하다. 새벽에 산행을 시작한 듯한 단체 산객들은 벌써 하산을 하며 우리를 스쳐 지나간다. 망바위를 지나서야 비로소 흰 눈을 밟는다. 하지만 길이 미끄럽지 않아 아이젠은 생략하기로 한다. 오름길 우측으로는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이 비슷한 눈높이로 나타났고 그 너머 둔철산도 살짝 보인다.
날씨가 그리 맑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조망은 뚜렷하다. 남쪽으로는 저 멀리 구름에 쌓인 듯한 남쪽 바다가 바라보이고, 굽이굽이 지리산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가 꿈틀거리며 바다를 향하여 흐르고 있다. 멋진 풍광이다. 사진을 담는다. 계속되는 가파른 된비알을 치고 올라, 정면으로 천왕봉을 바라보고, 그 아래 법계사와 로터리 산장에 도착한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정책으로 폐쇄하기로 결정을 보았던 로터리 산장이건만 오히려 울타리와 취사장이 새로 만들어져, 더욱 세련된 모습이다. 그 어떤 형태로도 로터리 산장은 존재하여야 한다. 로터리 산장이 없다면 천왕봉의 중간 기지로서 그 아쉬움은 예상 밖으로 클 것이다.
물을 뜨러 샘터에 갔건만 샘터가 말라 물은 구할 수가 없다. 건빵과 귤로 간식을 먹었고 오름길에 법계사에 들러 수통과 물통에 물을 욕심껏 보충한다. 천왕샘과 장터목의 산희샘도 물 사정이 좋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법계사에서 바라보니 중산리 마을이 가깝고 더 정겹게 느껴진다.
L 선생도 이젠 몸이 풀렸는지 조금 전보다는 발걸음이 가볍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천왕봉을 가리키며 걸음을 재촉한다. 이대로의 속도라면 천왕봉까지는 4시간 정도를 잡아야 한다. 천왕봉까지 0.7km가 남았다는 개선문 앞 이정표를 지나 한참을 걸어서 천왕샘에 도착한다. 몇몇 산님이 물을 얻으려는 듯 두꺼운 얼음을 깨고 샘터 주위를 어루만지고 있다.
지나친다. 우측으로 돌아 천왕봉까지 마지막 된비알 바윗길만 남았다. 사실은 이 구간이 제일 힘든 구간이다. 천왕봉 정상이 눈앞이다. 마음이 다소 급해졌으나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는 마음을 앞서지 못한다. 힘들게 자신을 재촉하여 드디어 천왕봉에 올랐다.
강한 바람과 추위로 천왕봉은 무주공산. 백무능선의 끝인 창암산과 구형왕릉의 왕산과 필봉을 바라보고 웅석봉과 황금능선을 더듬는다. 그리고 구곡산과 주산. 저 멀리 반야봉, 노고단, 왕시루봉, 만복대, 고리봉, 하얀 눈이 쌓인 바래봉, 그리고 덕두산까지 광활한 지리산 자락을 바라보며 넋이 나간다. 삼신봉을 또 바라다보고 삼정산도 시야에서 찾는다. 지리산 구석구석과 산줄기를 찾는다.
천왕봉의 강한 바람에 견디지 못한다. L 선생을 위하여 몇 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고민에 빠진다. 중봉과 써리봉을 거쳐 황금능선 일부를 맛보고, 지난번 지나쳤던 국수봉 근처에서 순두류 방향으로 하산하려고 생각하였으나, 바람 부는 중봉에서 점심을 먹는 것이 부담되며 무리일 것 같다. 얼굴과 손발은 이미 얼어붙었고, 피부를 도려낼 것 같은 칼바람에 몸서리를 친다.
윈드스토퍼 위에 고어 재킷을 한 장 더 걸친다. 아쉽지만 장터목으로 발길을 향한다. 산님들은 지금도 줄줄이 장터목 산장에서 천왕봉을 향해 오른다. 주능에는 많은 눈이 쌓여 겨울 산행하는 맛을 듬뿍 느끼며 쾌감을 맛본다.
장터목 취사장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을까 걱정을 했으나, 운 좋게 공간을 확보한다. 어제 먹다 남은 소불고기를 대파와 양파를 넣고 프라이팬에 올리고 급한 마음에 소주 몇 잔을 빈속에 털어 넣으니 뱃속에서 불이 붙는다. 소주 2병을 순식간에 비운다. 라면을 끓여서 뜨거운 국물도 맛본다. 자리를 기다리는 산님들을 위해 자리를 조속히 양보한다. 장터목을 뒤로하고 중산리 계곡으로 하산을 한다.
작년 신년산행 때는 중산리 계곡에 정말 많은 눈이 있었다. 한껏 설경에 취하며 산행했던 추억을 생각하며 하산을 한다. 명성교를 지나 근사한 유암폭포다. 작년에는 폭설에 파묻혀 없었다. 지금은 얼어붙은 바위 아래로 물이 흘러 내려 폭포다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이곳부터의 하산길은 크고 작은 바위들이 계곡을 가득 메우고 있는데, 과거 장마 때마다 주능의 남쪽 사면 암석들이 쏟아져 내려 쌓이면서 형성된 것이다.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장터목의 안부가 꽤 물러나 앉았다. 칼바위 갈림길을 지난다. 오전에 매우 힘들어하던 L선생은 조금 지쳐 보였으나 한겨울의 천왕봉을 올랐다는 자부심에 얼굴은 밝다. 중산리에 하산하여 다시 천왕봉을 바라보니 역시 천하의 웅자답다.
항상 천왕봉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중산리 사람들. 그들은 참으로 좋겠다. 지리산 자락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할까. 그들이 마냥 부럽다. 그래서 남명 조식선생은 조정에서 내린 벼슬도 마다하고 천왕봉이 보이는 덕산에서 제자들을 기르며 지리산 품에서 살았고 육신을 묻었다.
지리산이 가까운 남도의 땅에서 내가 제일 살고 싶은 곳은 구례와 순천이다. 구례와 순천은 인심이 매우 좋은 곳이고,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쉽게 지리산에 오를 수 있는 지리적 강점이 있는 매력 있는 곳이다. 하지만 반세기 전 그곳은 엄청난 비극의 도시였다. 그런 곳이기에 더욱 안타까움과 정으로 어루만져 주어야 할 우리의 산하인 것이다.
평화로운 덕산마을에 들러 다시 천왕봉을 하염없이 바라다본다. 덕산 사람들은 참 좋겠다. 중산리 사람들처럼 매일 천왕봉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으니 얼마나 행복할까. 짧은 겨울 해가 점차 어둠 속에 자신을 감추는 지리산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아쉽게도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첫댓글 내가 가서 살고 싶은 산은 전남 강진에 계신 주작산과 덕룡산 근처에 살면서 일주일에 한번 두 산을 오르고자함 입니다.
지리산 품도 좋아하지만 천왕봉의 기 가 엄청 세 므로 일년에 한 두번 올라 그 품에 안기는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동생부부(승진)가 그렇게 가고싶어 했던 천왕봉을 울부부와 함께 얼마전에 다녀 왔네요.
그래도 뭐니해도 엤날이 좋았던 같아요.
지금은 제대로 정상석에 발 디딜 자리도 없을 만큼 인산인해 입니다.
겨울 지리산을 보고 싶어요~~
많이 춥다고 하던데 얼마나 추운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