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경의 알레고리
제 1장에서 특히 강조한 것은 신화의 여러 계층, 즉 이야기의 내용이 여러 수준에서 분석되고 해석 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종류의 알레고리는 우리는 앞으로 說話的인 것으로 분류하겠다. 제 1장에는 또한 圖型的-알레고리(figural allegory)라고 부를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예컨대 자연의 여신(Natura)에는 아무 신화도 없다. 그러나 그 여신 자체가 우주의 어떤 물리적이고 지적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마찬가지로 Er에 계시되었던 동심원의 천체의 구조는 그 자체가 우주의 정신적인 운명의 알레고리이다. Orpheus의 신화는 설화적 알레고리이다. 그러나 따로 떼어서 말할 때 Orpheus의 악기는 圖型的 알레고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종류의 알레고리가 다 같이 성경에 있다. 사도 바울의 「자비의 송가」(고린도서 23장)는 Aristotle의 「미덕의 송가」(《Oxford 그리이스시집》, 469~470) 만큼이나 圖型的 알레고리이다. 잠언 8장에 제시된 「지혜」도 역시 도형적 알레고리이다. 어떤 비유담(parable)―예컨대 「착한 사마리아 사람」(누가, 10장, 30~35)이나 「탕자」(누가, 25장 11~32) ―은 설화적 알레고리이다.
그러나 이 어느 것도 성경의 알레고리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아니다. 금세기에 들어와서, Emile Male와 G.R.Owst같은 학자는 이것들과는 다른 어떠한 것에 관한 관심을 되살렸다. 그 것은 豫表的 알레고리(typological allegory)로서 신약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의 하나이다. 이것은 구약에 나오는 사건과 인물을, 역사적 사실인 동시에 복음과 그리스도의 계시를 예언하고, 豫表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방법이다. 구약의 사건들은 신약의 사건들의 모형이며 豫表이다.이 豫表論은 종교개혁 때까지 기독교 사상과 기독교 예술을 지배하였다. 예컨대 Bede는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이것을 변호하였다. 그 말은 고린도 10장, 1~11절에 있는데,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모든 일은 모두 비유로서 일어났으며,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서 쓰여진 것이라는 말이다:
10:1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10:2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10:3 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
10:4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10:8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10:9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10:10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types)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 구절에서 바울은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애굽에서 탈출한 일이 역사적인 사실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숨은 뜻을 나타낸다고 보고 있다. 애굽은 죄 많은 옛 생활이고, 약속된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이며, 광야는 이 세상에서의 구원을 위한 투쟁이다. 紅海를 기적적으로 건너간 것과, 후에 구름 기둥의 인도를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세례에 해당한다. 맛나는 성찬식의 빵이며 바위에서 솟아 나온 물은 성찬식의 술이다. 모세와 바위는 그리스도를 뜻하며,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운 바위인 베드로를 지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한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의 자녀들이 범한 죄와 실수는 고린도에 있는 젊은 기독교회의 죄와 실수들,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모든 곳의 교회의 죄와 실수에 해당한다. 구약의 사건은 이와 같이 신약의 사건에 대하여 豫表〔τύποι〕가 된다. 이 단어는 그리이스어에서는 근본적으로 ‘처 낸 어떤 것, 찍은 것, 도장찍은 것’을 뜻한다. 도장은 신약의 사건이며, 이것이 구약의 책이, 스스로의 예언의 도장을 찍은 것이다. 이 세상의 시간의 논리로서는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으나, 力動的 영원의 관점에서는 별로 어려울 것이 없다.
이런 종류의 예는 수없이 많지만 솔로몬의 노래의 알레고리적인 해석을 들겠다. 이 해석에 의하면 이 사랑의 노래는 그리스도와 교회간의 사랑을 읊은 것이다. 솔로몬은 그리스도의 豫表이며 시바의 여왕은 교회를 나타낸다. 이 해석의 신약의 근거는 마태복음 12장 42절에서 볼 수 있다:
[마12:42]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이보다 더 큰 명백한 예가 갈라디아서 4장, 22~29절에 있다:
4: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이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계집종에게서, 하나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나
4:23 계집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가라
4:25 이 하가는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데니 저가 그 자녀들로 더불어 종 노릇 하고
4: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4:27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4: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4: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성 바울은 기독교에 개종한 갈라디아 사람들이 유대교의 반대 포교에 의해서 유대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키도록 요구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 편지를 썼다”〔Oxford Dictionary of the Christian Church, sv. ‘Galatians’〕. 바울이 강하게 느낀 바로는 유대인이 아닌 기독교도들은 모세의 율법을 다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모세의 율법은 새로운 그리스도의 자유의 율법에 의해서 대체된 것이다. 이것을 그는 아브라함의 두 아들의 이야기로서 설명한 것이다. 형인 이스마엘은 노예의 여자 하갈의 아들이고 동생인 이삭은 약속의 아들로서, 아브라함이 백 세, 그의 아내 사라가 구십 세일 때 기적적으로 낳은 아들이다(창세기, 16,17, 21장). 바울은 하가를 시내산의 豫表로 생각한다. 시내산은 모세가 옛 율법을 받은 곳이므로, 그 당시 유대교의 사원이 있는 곳이고 유대인들과 그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의 豫表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사라는 하늘에 있는 그리스도 교회의 豫表이다. 이삭의 기적적 탄생은 그리스도가 처녀 마리아에서 탄생한 것의 豫表이며. 이것은 이사야가 전한 여호와의 말에 의해서 더 일층 확증되는 것이다(이사야, 54장 1절 참조).
이러한 바울의 태도는 신약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가령 마태복음 12장 40~42절에는 다음과 같은 예가 있다:
12:40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
요나가 고래 뱃속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수난의 금요일부터 부활의 일요일까지, 지옥에 내려 갔다가 부활한 것의 알레고리로 보는 것이다. 좀더 복잡한 예가 요한복음 3장 15~15절에 있다:
3:14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3:15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이 여기에서 십자가에 의한 구원의 豫表로 해석하고 있는 구약의 사건은 민수기 21장 5~9절에 볼 수 있다:
21:5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 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21:6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
21:7 백성이 모세에게 이르러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와 당신을 향하여 원망하므로 범죄하였사오니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 뱀들을 우리에게서 떠나게 하소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2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
21:9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
구약의 인물 중에서 신약의 여러 사건이나 인물을 豫表하는 인물은 많은데 그 주요 인물이 히브리서 11장에 열거되어 있다. 이 ‘구름처럼 많은 증인’이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라합,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과 선지자들이다. 이 계보 속에서 우리는 새로운 역사관의 발전상에 있어서의 한 단계를 본다. 완전히 기독교적인 사관에서는 역사를 하나의 연속이 아니라, 창조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신의 육신화와 속죄를 거쳐 최후에 심판의 날에 이르는 과정으로 본다. 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사건은 나사렛 출신의 목수의 아들, 예수의 이 세상에서의 몇 해에 집중된다. 모든 역사가 豫表로 되었고 그 의미는 단 한 사람의 일생, 그것도 보기에는 창피스럽게 끝마친 일생에 의해서 평가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기독교적인 사관은 그 이전의 유대교의 사상을 완성한 것인데, 이 사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왕국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구세주에 인도되어 세상을 평화롭게 통치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이에 비해 기독교적 사상은 더 내향적이고 어느 의미로는 더 겸손하며, 로마제국과 그 이후의 지중해 세계의 현실에 훨씬 더 밀접했다. 이 새로운 관점이 어떻게 문학에 영향을 끼쳤는가를 가장 잘 분석한 것이 Erich Auerbach의 《Mimesis》이다.
豫表的 알레고리는 성서의 알레고리의 전부가 아니고, 그보다 더 광범위한 예언적이고 상황적인 알레고리(prophetic and situatonal allegory)의 중요한 부분이다. 이런 알레고리는 신약과 구약의 특징이다. 앞서 논한 豫表的 알레고리의 네 가지 예(솔로몬의 노래, 이스마엘과 이삭, 요나와 고래, 광야의 뱀)의 알레고리로서의 힘은 說話로서의 이야기에 달린 것이 아니고 그 상황에 달려 있는 것이다. 즉 상호간의 사랑, 異腹형제를 갈라 놓은 신분의 차이, 요나로 하여금 고난에 일게 한 사정 이야기보다 그의 고난 그 자체 및 이스라엘인들을 문 뱀의 모양에 의해서 그들이 기적적으로 치유된다는 것─ 이와 같은 상황이 의미를 띠게 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후에 일어난 사건과 관련되어 비로서 밝혀진다. 상징적 형상(figure)은 있지만, 그 알레고리적인 의미를 끌어내기 위해서는, 고립시켜서는 안되고, 의미있는 전후관계 속에 놓아야 한다. 그 형상보다도 예언적인 상황이 알레고리를 이루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야기(narrative)가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초보적 수준의 이야기 밖에는 없다. 앞서 언급한 예─ 즉 착한 사마리아 사람 또는 탕자 ─로 되돌아가 비교해 보면, 豫表的 알레고리에는 이야기의 전개가 전혀 없음을 알 수 있다. 가령 사마리아 사람의 우화에서는 司祭와 레윗 사람이 도입되어 있고 탕자의 이야기에서는 탕자의 행동과 대조되는 형의 행동이 그려져 있다. 예언적・상황적 알레고리와 설화적 알레고리의 관계는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과 극 자체와의 관계와 흡사하다.
[출처= 문학비평총서 19: Allegory 서울대학교 출판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