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독(路毒) /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문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리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한다
도보 순례자 / 이문재
나 이제 돌아가리라
도처의 전원을 끊고 덜컹거리는
마음의 안달을 마음껏 등지리라
지그시 눈감으며 나에게로
혹은 나로부터 발사되던 직선들을
깡그리 무시하리라
그리하여 나 돌아가리라
등한시했던 몸의 변두리를 찾아
두 발에게 두 손에게 머리 숙이리라
때와 장소를 자백하고
20세기에 태어난 그 어린 이름들도 불리라
하여 나 어서 몸이리라
소리에 민감하고
냄새에 반응하리라
맛에 겸손하고
촉감에 민첩하며
육감에 충실하리라
나 몸이리라
오로지 몸으로 더운 몸이리라
그리하여 낯선 나
나에게로 돌아가리라
화전/이문재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이 여름, 깊은 가뭄으로 흠뻑 말라 있으니
와서, 어서들 화전하여라
나의 후회들 화력 좋을 터
내 부끄러움들 오래 불에 탈 터
나의 그 많던 그 희망들 기름진 재가 될 터
와서, 장구 북 꽹과리 징 치며
불, 불 질러라, 불 질러 한 몇 년 살아라
한때 나의 모든 사랑, 화전이었으니
그대와 만난 자리 늘 까맣게 타버렸으니
서툴고 성급해 거두지 못하고, 나누지 못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다른 숲을 찾았으니
이제 나, 잡목 우거진 고랭지
와서 불질러라, 불
오래된 기도 /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소금창고/이문재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늦가을 평상에 앉아
바다로 가는 길의 끝에다
지긋이 힘을 준다 시린 바람이
옛날 노래가 적힌 악보를 넘기고 있다
바다로 가는 길 따라가던 갈대 마른 꽃들
역광을 받아 한번 더 피어 있다
눈부시다
소금창고가 있던 곳
오후 세시의 햇빛이 갯벌 위에
수은처럼 굴러 다닌다
북북서진하는 기러기떼를 세어보는데
젖은 눈에서 눈물 떨어진다
염전이 있던 곳
나는 마흔 살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이렇게 자꾸 오는 것이었다
거미줄
이문재
거미로 하여금 저 거미줄을 만들게 하는
힘은 그리움이다
거미로 하여금 거미줄을 몸 밖
바람의 갈피 속으로 내밀게 하는 힘은 이미
기다림을 넘어선 미움이다 하지만
그 증오는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어서
고요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팽팽하지 않은 기다림은 벌써
그 기다림에 진 것, 져버리고 만 것
터질 듯한 적막이다
나는 너를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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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꽃 멀미
이문재
봄꽃들은
우선 저질러놓고 보자는 심산 같다
만발한 저 어린것들을
앞세워 놓고 있는 것이다
딸아이 돼지저금통을 깨
외출하는 봄날 아침
안개가 걷혔는가 싶었는데
저런 저기 흰 벚꽃
박물관 입구 큰 벚나무
작심한 듯 꽃을 피워놓고 있었다
희다 못해 눈부시다 못해
화공약품을 뿌린 듯한 오래된 벚나무
흰빛은 모든 빛을 거부해서 흰빛
가까이 가면 내가 표백될 것 같았다
동창 녀석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왼쪽 구두코에는 발자국이 찍혀 있고
윗저고리에는 아직도 삼겹살 냄새
나트륨등 켜져 있는
농업박물관 입구
아무 말 없이 흰 꽃잎 두어 장
새벽 한 시 근처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말만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야 임마 내가 이렇게 떳떳한 것은
내가 이 가난을 선택했기 때문이야
아 그 말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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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너는 내 운명
이문재
예술가란
한 사람만을 사랑할 수가 없어서
인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지식인이란
인류를 사랑하느라
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인이란
우주 전체를 사랑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없앤 사람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몰라서
풀 한 포기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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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노독
이문재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길을 닮아 물 앞에서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등불 이리 환한가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어둠의 유일한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독 한 사발
몸 속으로 들어온 길이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길을 나서서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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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녹이 슬었다
이문재
고장이 난 것이다
안쪽에 녹이 잔뜩 슬었다
연결 부위가 다 뻑뻑해졌다
눈도 어두침침하고
호흡도 많이 샌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다
너는 탈이 난 것이다
몸과 마음이 따로 놀고
기억력이 상상력으로 승화되지 않으며
감정을 이입하지 못하고
무엇보다 자존감
자신감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너는 탈진한 것이다
돈에 눈이 어두워진 것이다
이념의 껍데기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무기력이 분노를 부둥켜안지 않아서
기억이 미래를 움켜쥐지 않아서 탈이 난 것이다
꿈이 따뜻한 이야기를 빚어내지 못해서
우리가 좋은 장소를 만들어내지 못해서
녹슬어버린 것이다
너 민주주의 말이다
아니다
고장 나 녹이 슨 것은
자신 있게 속물이 된 우리들이다
탈이 났는데도 아프지 않은 우리 시민들
경제적으로 성난 동물이 된 우리 소비자들
세련되게 나약해진 우리 혈기 왕성한 괴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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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농담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가,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내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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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눈 냄새
이문재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성긴 눈 내린다
복숭아같이 생긴 여자아이가 걸어간 곳
아주 희박하게 눈발이 흩날리고
머릿발 서 있는
강원도의 힘센 산들이 집중한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꽝, 하고 문 열고 나온 휴가병이
국괭이 들고 내려가
꽝꽝 언 계곡물을 내리친다
넓은 이마에서 푸른 김이 피어오른다
강원도의 골짜기 골짜기들이
딴딴한 가슴팍으로 메아리를 받아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성긴 눈발 굵어지고
복숭아같이 생긴 여자 아이
또박또박 강원도 속으로 떠나고
강원도 계곡물 겨우내
시퍼렇게 깊어진다
점점
점점 눈발은 굵어지고
하얀 눈 때문에 앞은 캄캄해지고
강원도는 주먹밥 같은 눈물을
마구 집어던진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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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마음의 오지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도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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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모래시계
이문재
이쯤에서 쓰러지자
이쯤에서 쓰러져서
조금 남겨두기로 하자
당분간 이렇게 쓰러져 있기로 하자
누군가 나를 일으켜 세워
멈춰 있던 자신의 시간을 살릴 수 있도록
자기 시간을 찬찬히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누군가의 아픔이 기쁜 아픔이 될 수 있도록
누군가의 기쁨이 아픈 기쁨이 될 수 있도록
아니다
상체를 완전히 비우고
우두커니 서 있도록 하자
누군가 나를 뒤집어
자신의 새로운 시간과 만날 수 있도록
이렇게 하체의 힘으로
끝끝내 서 있도록 하자
숨을 죽이고
가느다란 허리의 힘으로
꼿꼿이 서서 기다리기로 하자
누군가 나를 뒤집어
누군가의 맨 처음이 시작되도록
누군가의 설레는 맨 앞이 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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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물의 결가부좌
이문재
거기 연못 있느냐
천 개의 달이 빠져도 꿈쩍 않는, 천개의 달이 빠져나와도 끄떡
않는 고요하고 깊고 오랜 고임이 거기 아직도 있느냐
오늘도 거기 있어서
연의 씨앗을 연꽃이게 하고, 밤새 능수버들 늘어지게 하고, 올
여름에도 말간 소년 하나 끌어들일 참이냐
거기 오늘도 연못이 있어서
구름은 높은 만큼 깊이 비치고, 바람은 부는 만큼만 잔물결 일
으키고, 넘치는 만큼만 흘러 넘치는, 고요하고 깊고 오래된 물
의 결가부좌가 오늘 같은 열엿샛날 신새벽에도 눈뜨고 있느냐
눈뜨고 있어서, 보름달 이우는 이 신새벽
누가 소리 없이 뗏목을 밀지 않느냐, 뗏목에 엎드려 연꽃 사이로
나아가지 않느냐, 연못의 중심으로 스며들지 않느냐, 수천 수만의
연꽃들이 몸 여는 소리 들으려, 제 온몸을 넓은 귀로 만드는 사내,
거기 있느냐
어둠이 물의 정수리에서 떠나는 소리
달빛이 뒤돌아서는 소리, 이슬이 연꽃 속으로 스며드는 소리, 이슬
이 연잎에서 둥글게 말리는 소리, 연잎이 이슬방울을 버리는 소리,
조금 더워진 물이 수면 쪽으로 올라가는 소리, 뱀장어 꼬리가 연의
뿌리들을 건드리는 소리, 연꽃이 제 머리를 동쪽으로 내미는 소리,
소금쟁이가 물 위를 걷는 소리, 물잠자리가 제 날개가 있는지 알아
보려 한 번 날개를 접어보는 소리
소리, 모든 소리들은 자욱한 비린 물 냄새 속으로
신새벽 희박한 빛 속으로, 신새벽 바닥까지 내려간 기온 속으로, 피어
오르는 물안개 속으로 제 길을 내고 있으리니, 사방으로, 앞으로 나아
가고 있으리니
어서 연못으로 나가 보아라
연못 한가운데 뗏목 하나 보이느냐, 뗏목 한가운데 거기 한 남자가 엎
드렸던 하얀 마른 자리 보이느냐, 남자가 벗어놓고 간 눈썹이 보이느냐,
연잎보다 커다란 귀가 보이느냐, 연꽃의 지문, 연꽃의 입술 자국이 보이
느냐, 연꽃의 단 냄새가 바람 끝에 실리느냐
고개 들어 보라
이런 날 새벽이면 하늘에 해와 달이 함께 떠 있거늘, 서쪽에는 핏기 없는
보름달이 지고, 동쪽에는 시뻘건 해가 떠오르거늘, 이렇게 하루가 오고,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오고, 모든 한살이들이 오고가는 것이거늘, 거기,
물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다시 결가부좌 트는 것이 보이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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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민들레 압정
이문재
아침에 길을 나서다 걸음을 멈췄습니다
민들레가 자진自盡해 있었습니다
지난봄부터 눈인사를 주고받던 것이었는데 오늘 아침, 꽃대 끝이 허전했습니다
꽃을 날려보낸 꽃대가, 깃발 없는 깃대처럼 허전해 보이지 않는 까닭은
아직도 초록으로 남아 있는 잎사귀와 땅을 움켜쥐고 있는 뿌리 때문일 것입니다
사방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민들레 잎사귀들은 기진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해낸 자세입니다
첫아이를 순산한 젊은 어미의 자세가 저렇지 않을는지요
지난봄부터 민들레가 집중한 것은 오직 가벼움이었습니다
꽃대 위에 노란 꽃을 힘껏 밀어 올린 다음, 여름 내내 꽃 안에 있는
물기를 없애왔습니다 물기가 남아
있는 한 홀씨는 바람에게 들켜 바람의 갈피에 올라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불려가는 홀씨는 물기의 끝, 무게의 끝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잘 말라 있는 이별, 그리하여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결별,
민들레와 민들레꽃은 저렇게 헤어집니다
이별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오지 않습니다 만나는 순간, 이별도 함께
시작됩니다 민들레는 꽃대를 밀어 올리며 지극한 헤어짐을 준비합니다
홀씨들을 다 날려보낸 민들레가 압정처럼 땅에 박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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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밖에 더 많다
이문재
내 안에도 많지만
바깥에도 많다
현금보다 카드가 더 많은 지갑도 나다
삼년 전 포스터가 들어 있는 가죽 가방도 나다
이사할 때 테이프로 봉해둔 책상 맨 아래 서랍
패스트푸드가 썩고 있는 냉장고 속도 다 나다
바깥에 내가 더 많다
내가 먹는 것은 벌써부터 나였다
내가 믿어온 것도 나였고
내가 결코 믿을 수 없다고 했던 것도 나였다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안데스 소금호수
바이칼 마른 풀로 된 섬
샹그리라를 에돌아 가는 차마고도도 나다
먼 곳에 내가 더 많다
그때 힘이 없어
용서를 빌지 못한 그 사람도 아직 나였다
그때 용기가 없어
고백하지 못한 그 사람도 여전히 나였다
돌에 새기지 못해 잊어버린
그 많은 은혜도 다 나였다
아직도
내가 낯설어 하는 내가 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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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봄날
이문재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칼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 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 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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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사랑이 나가다
이문재
손가락이 떨리고 있다
손을 잡았다 놓친 손
빈손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사랑이 나간 것이다
조금 전까지 어제였는데
내일로 넘어가버렸다
사랑을 놓친 손은
갑자기 잡을 것이 없어졌다
하나의 손잡이가 사라지자
방 안 모든 손잡이들이 아득해졌다
캄캄한 새벽이 하얘졌다
눈이 하지 못한
입이 내놓지 못한 말
마음이 다가가지 못한 말들
다 하지 못해 손은 떨고 있다
예감보다 더 빨랐던 손이
사랑을 잃고 떨리고 있다
사랑은 손으로 왔다
손으로 손을 찾았던 사람
손으로 손을 기다렸던 사람
손은 손부터 부여잡았다
사랑은 눈이 아니다
가슴이 아니다
사랑은 손이다
손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손을 놓치면
오늘을 붙잡지 못한다
나를 붙잡지 못한다
☆★☆★☆★☆★☆★☆★☆★☆★☆★☆★☆★☆★
《15》
손의 백서
이문재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가슴이 있는 곳을 찿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두 손을 가슴 앞에 가지런히 모으지 않고서는
신이 있는 곳을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아야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손이 손을 잡으면 영혼의 입술이 붉어진다
손이 손을 잡으면 가슴이 환하게 열린다
손이 손을 잡으면 피돌기가 빨라진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기억을 공유한다
손이 손을 잡는 순간 몸이 몸을 만난다
손이 세상을 바꿔왔듯이
손이 다시 세상을 바꿀 것이다
나는 손이다
너도 손이다
☆★☆★☆★☆★☆★☆★☆★☆★☆★☆★☆★☆★
《16》
시월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
《17》
아직 멀었다
이문재
지하철 광고에서 보았다.
인디언들이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옵니다.
그 이유는, 인디언들은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얼마나 높고
넓고 깊고 맑고 멀고 푸르른가.
땅 위에서
삶의 안팍에서
나의 기도는 얼마나 짧은가.
어림도 없다.
난 아직 멀었다.
☆★☆★☆★☆★☆★☆★☆★☆★☆★☆★☆★☆★
《18》
어떤 경우
이문재
어떤 경우에는
내가 이 세상 앞에서
그저 한 사람에 불과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내가 어느 한 사람에게
세상 전부가 될 때가 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한 사람이고
한 세상이다.
☆★☆★☆★☆★☆★☆★☆★☆★☆★☆★☆★☆★
《19》
오래된 기도
이문재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그렇게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이 멈추기만 해도
꽃 진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을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이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 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만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
《20》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이문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어릿광대처럼 자유롭지만
망명 정치범처럼 고독하게
토요일 밤처럼 자유롭지만
휴가 마지막 날처럼 고독하게
여럿이 있을 때 조금 고독하게
혼자 있을 때 정말 자유롭게
혼자 자유로워도 죄스럽지 않고
여럿 속에서 고독해도 조금 자유롭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여
그리하여 자유에 지지 않게
나에 대하여
너에 대하여
자유롭지만 고독하게
그리하여 우리들에게
자유롭지만 조금 고독하게
☆★☆★☆★☆★☆★☆★☆★☆★☆★☆★☆★☆★
《21》
지구의 가을
이문재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가
내 덕행으로 받기가 부끄럽네
마음의 온갖 욕심 버리고
육신을 지탱하는 약으로 알아
깨달음을 이루고자 공양을 받습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나는 두려워 헤아리지 못합니다
마음의 눈 크게 뜨면 뜰수록
이 눈부신 음식들
육신을 지탱하는 독으로 보입니다
하루 세번 식탁을 마주할 때마다
내 몸 속에 들어와 고이는
인간의 성분을 헤아려보는데
어머니 지구가 굳이 우리 인간만을
편애해야 할 까닭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주를 먹고 자란 쌀 한 톨이
내 몸을 거쳐 다시 우주로 돌아가는
커다란 원이 보입니다
내 몸과 마음 깨끗해야
저 쌀 한 톨 제자리로 돌아갈 터인데
저 커다란 원이 내 몸에 돌아와
톡톡 끊기고 있습니다
마음 온갖 욕심 버린다해도
이 음식으로 이룩한 깨달음은
결코 깨달음이 아닙니다
☆★☆★☆★☆★☆★☆★☆★☆★☆★☆★☆★☆★
《22》
햇볕이 드러나면 슬픈 것들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엣 읽어 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23》
혼자만의 아침
이문재
오늘 아침에 알았다
가장 높은 곳에 빛이 있고
가장 낮은 곳에 소금이 있었다
사랑을 놓치고
혼자 눈 뜬 오늘 아침에야 알았다
빛의 반대말은 그늘이 아니고
어둠이 아니고 소금이었다
언제나 소금이었다
정오가 오기 전에 알았다
소금은 하늘로 오르지 않는다
소금은 빛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서
세상 가장 낮은 곳으로 가라앉는
가장 무거운 앙금이다
소금은 오직 해를 바라보면서
소금기 다 뺀 물의 잔등을 떠미는 것이다
가장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가장 높은 곳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다
소금은 있는 힘을 다해 빛을 끌어안았다가
있는 힘을 다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단 하나의 마음으로 남는 것이다
내가 놓친 그대여
저 높은 곳에서 언제나 빛인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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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활보
이문재
선글라스 끼고 활보
도회지 한복판 교차로 횡단보도 건너
휘황찬란한 상점들의 거리
날마다 커지는 찬란한 본사 유리 건물을 지나
쨍쨍한 햇빛 속으로 활보
투스텝으로 깨금발 까치발로 활보
경복궁 광화문 앞을 활보
대왕과 장군은 본체만체
미래가 왜 앞에만 있단 말인가
너희의 미래는 왜 앞만 보고 있단 말인가
여름이라면 여름의 정면
캠페인이라면 캠페인의 잔등
증후군이라면 증후군의 발바닥
대형 사건 사고라면
대형 사건 사고의 엉덩이를 쏘아보며 활보
소풍가듯이 행진하듯이 활보
미래는 뒤에 있을 수도 있다
십 년 후 십 년 전 대체 어디가 앞이란 말인가
미래는 왼쪽 오른쪽 위 아래
다섯 시 열한 시 방향
어디에도 있을 수 있다
색안경을 끼자
자기 얼굴에 어울리는 선글라스를 쓰자
색안경을 써야 더 잘 보인다
문제는 색안경을 내가 골라야 한다는 것
내가 고른 것을 당당하게 쓰고 다녀야 한다는 것
그리고 타인의 색안경을 칭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마음에 맞는 선글라스를 끼고
마음에 맞는 사람의 손을 부여잡고
변두리의 한복판에서 도심지의 텅 빈 중심까지 활보
지하에서 옥상까지 현관에서 광장까지
다자인 사무실에서 쇼윈도까지
현금지급기에서 방범용 폐쇄회로 카메라까지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쓰레기하치장까지 활보
우리의 새로운 거처는 거리
우리는 도시의 거리에서 만나야 한다
대오 없이 왁자지껄 무질서하게 활보
기도하듯 중얼거리며
잊지 말자고 한눈팔지 말자고 떠들며
마주치면 싱긋 웃어주며
카니발처럼 덥석 손부터 부여잡으며
흰소리 헛소리라도 좋다 잠꼬대라도 좋다
잡은 손 놓지 않고 활보
거리에서 거리로 활보 활보
우리의 새로운 장소는 거리
우리가 기필코 되찾아야 할 거처는 거리
도시를 거리로 나오게 해야 한다
건물을 거리로 나오게 하고
도로를 거리로 올라서게 해야 한다
색안경을 낀 우리의 새로운 터전은 거리
거리에서 노래 부르자
거리에서 춤추고 떠들고 외치며 꿈꾸자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이 우리의 미래가 된다
색안경을 빼앗겨서 거리를 빼앗겨서
우리 삶이 이 지경이 된 것이다
미래가 보인다면 색안경 너머로 보일 것이다
미래가 온다면 거리로 올 것이다
미래가 있다면 거리에 있을 것이다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면 거리에 만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새로운 광장은 거리
선글라스 끼고 활보
도회지 한복판 교차로 건너
휘황찬란한 상점들의 거리
날마다 커지는 찬란한 본사 유리 건물을 지나
쨍쨍한 햇빛 속으로 활보
탄탄한 어둠 속에서도
색안경을 끼고 함께 활보 활보 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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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시월
이문재
투명해지려면 노랗게 타올라야 한다
은행나무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은행잎을 떨어뜨린다
중력이 툭, 툭, 은행잎들을 따간다
노오랗게 물든 채 멈춘 바람이
가볍고 느린 추락에게 길을 내준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
노란 은행잎들이 색과 빛을 벗어던진다
자욱하다, 보이지 않는 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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