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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예수교장로회 만나교회/기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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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 게시판 스크랩 한국장로교회사
dhleepaul 추천 0 조회 40 14.11.09 18:5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한국장로교회사/소재열 박사

한국에 복음이 전래된 시기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고찰할 수 있으나, 1885년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한 것을 공식적인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선교사가 공식적으로 입국하기 전에도 한구내외에서 복음적인 활동은

활발하였다. 토마스 선교사가 대동강변에서 성경을 전달하고 선교하였으며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로스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의 전도로 의주사람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 4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고려문 부근을 내왕하며 전도의 기회를 모색하다가 1874년 의주사람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등 4명을 만나서 전도하였다. 이들은 1876년에 가서야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이들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로서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는 이들과 함께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1889년까지 요한복음과 누가복음을 번역하고 다시 두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번역하였다.

성경번역사업을 추진하고 있던 중 의주사람 서상륜을 만나 전도하였다. 서상륜은 1881년 봄에 세례를 받았고, 성경인쇄와 반포사업에 협력하게 되었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의 인쇄가 완료되었고, 1887년에 신약성경 전체가 완료되었다. 이와 아울러 로스 목사와 맥킨타이어 목사는 만주 지방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에게 전도하여 많은 수제자를 얻었다.

서상륜은 홍해도 송천(松川, 속명 솔내)의 가지 집에서 사람들에게 전도하고 함께 예배드리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첫 교회였다.

일본에서는 이수정(李樹庭)이라는 청년이 1881년 한국 정부의 신사유람단으로 도일(渡日)하여 일본 각계를 시찰하는 중 농학계의 권위자여며 신실한 신자인 쯔다 박사를 만나 전도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미국 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enry Loomis)목사의 권고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기 시작하여 1884년에 마가복음 한글판을 발행하였다. 또 한국에 선교하여 줄 것을 선교사들에게 간청하여 선교의 새로운 선교준비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1885년에 입국한 언더우드 목사와 아펜젤러 목사가 가지고 오는 선교 역사에 유래가 없는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만주에서의 전도 운동과 일본에서의 성경 번역사업 등이 한국 선교를 위한 준비 과정이 되었다. 한국교회의 1885년 4월 5일 제물포항을 통하여 선교사들이 입국했는데 선교사들의 활동을 통하여 교회의 기초를 잡아 갔으며 복음의 활기가 강하게 역사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만주에서 로스 목사와 같이 성경번역사업과 전도사업에 종사하다가 고향인 의주에 와서 전도 사업을 하던 서상륜은 동생 서경근과 같이 박해를 피하여 황해도 솔내(松川ㆍ九美)에 있는 삼촌 집으로 왔다. 그는 1884년 로스 목사가 선편으로 부친 6천권의 성경을 당시 세관 고문이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의 호의로 인수하여 전도 사업을 하였고, 1883년에 한국인의 손으로 최초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선교사가 입국하기 전에 한국인의 손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된 사실은 선교 역사에 유래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솔내는 한국 프로테스탄트의 요람지이며, 한국 교회 역사의 발상지라고 하겠다.

자립 전도를 실시하였고 몇 해 안되어 이 교회는 그 마을의 58세대 중에서 50세대의 장년을 포섭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언더우드 목사가 1887년에 솔내 교회에 가서 7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는데, 이것은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신자들이 성경을 읽고 스스로의 신앙을 키워 나갔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전도 활동을 암암리에 시작하였고, 성례를 베푸는 사역을 하였다. 1887년 6월 24일에는 아펜젤러 목사에게 전도받아 공부하던 학생 중 하나가 아펜젤러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1887년 9월 12일에는 서울서 처음으로 새문안 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교회는 처음에 정동에 있는 언더우드 목사의 사랑방에서 집회하였다. 첫날은 14명이 모였고, 다음 주일에는 15명이 모였으며, 그 다음 주일에는 서상륜, 서경근 두 사람을 장로로 택하여 안수하였다.

1887년 10월 9일에는 첫 감리교회인 정동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 교회는 감리교회의 모체가 되었다.

교회가 급진적으로 발전할 때 가장 시급하게 요구되는 것은 자격있는 지도자의 양성 문제이다. 소수의 선교사들로서는 많은 교회를 돌볼 수 없기 때문에 지도자 양성을 위한 방안이 제기 되어야 했다.

1900년에 교역자를 양성하는 신학교를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평양에 설립하였다. 이것이 후에 평양 신학교가 되고, 해방 후에 그 전통을 계승한 것이 장로회 총회 신학교이다.

이 학교에 처음으로 입학한 사람은 평양 중앙교회 장로 2명이었으나 후에는 6명의 학생이 되었다. 학생들은 교회 일을 돌보며 공부하였기 때문에 1년에 3개월씩 5년간 공부하기로 하였고, 공부하지 않은 9개월간을 숙제를 주어 집에서 공부하도록 하는 제도를 채택하였다.

1905년 와서 이 신학교를 장로교회에서 정식으로 승인하여 평양 연합신학교라는 명칭으로 정식으로 신학 교육을 실시하였고, 1906년에는 3학급으로 40명의 학생이 되었다. 교수 과목은 성경과 신학과목이었다.

감리교회에서는 아직 신학교가 없었으나 여러 지방에서 교회 지도자 양성교육을 실시하였다.

한국 교회의 특성은 선교 초기부터 네비우스 방법대로 자급 정책을 사용하였는데 외부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개체 교회가 교역자의 생활비를 담당하였다.

교회의 운영이나 전도 사업이 각 교회 신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졌으니 만큼 교회의 활동도 자치적으로 전개되었다.

1893년부터 <장로회 정치를 채용하는 선교공의회>를 조직하여 하나의 제도아래서 4개 선교부(남, 북, 캐나다, 호주)가 공동 프로그램을 가졌다.

1900년까지는 공의회가 선교사들만으로 구성 되었으나 1901년부터는 한구인 대표들도 선교사 24명, 한국인 장로 3명, 조사 6명이 참석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직도 노회가 조직되기 전이며, 새로 자라는 교회에 대하여 공의회가 어떤 치리권을 행사하여도 장로교회의 헌법이 조직되기 이전이었고 선교사들의 우려도 내포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1907년에 독노회(獨老會)가 조직된 것이다.

1904년에는 감사절을 지키기로 하여 그 해 11월 11일을 감사절로 지켰다. 감사절 문제는 다른 교파와도 협력해야 하였다.

이 때부터 교회 회의의 의사록을 한국어로 기록하였으며,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고 교육하는 규칙등을 제정하였다.

1904년에는 장로교와 감리교가 협의하여 기독교를 예수교라 통칭하기로 하고, 장로회와 감리회라는 이름으로 두 교파를 구별하기로 하였다.

1905년에는 한국에 나와 있는 모든 장로교 선교부의 모교회루부터 한국에 자유 장로교회를 1907년의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조직할 것을 합의했다.

이와 같이하여 1907년에는 독노회를 조직할 준비를 하였으며, 그 동안 황해와 평북 위원대리부가 생겨 전국적으로 7개 위원대리부가 조직되고, 평양신학교는 전국적 규모의 신학교가 되었다.

이상이 조선 예수교장로회 조직을 위한 경과를 설명한 것이다.

1907년은 한국 교회 역사에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의 정세를 보면 1905년에 러일전쟁이 끝나자 을사보호조약을 통하여 일본의 통치 아래 있게 되었고, 1910년 한일합방 직전의 비극적 사태가 계속되었다.

1907년에는 민족의 비운을 안은 대부흥 운동이 일어났으며, 또 한국예수교장로회가 조직되는 역사적 시기였다.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4개 장로교 선교부가 합심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독노회를 조직키로 하고 1907년 9월 17일에 평양 장대현 교회당에서 선교사 38명, 한구인 장로 40명 계 78명이 모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노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전국적으로 하나의 노회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를 흔히 독노회(獨老會)라고 한다.

이 독노회에서 결의한 주요안건은 다음과 같다.

①신학졸업생 7명을 모사로 장립하였다. 평양신학교 제 1회 졸업생은 서경조(徐景祚), 한석진(韓錫晋), 양전백(梁甸伯), 길선주(吉善宙), 이기풍(李基豊), 송린서(宋麟瑞), 방기창(邦基昌) 등이다.

이들이 한국 최초의 신학사 목사들이다.

②제주도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를 결의하고 7명의 목사 중 한 사람인 이기풍 목사를 파송하였다.

독노회에서는 1908년 시베리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최관흘(崔寬屹) 목사를, 1909년에 한석진 목사를 일본 동경에 파송하여 교포와 유학생 전도에 노력하게 하였다.

이것은 한국 교회가 설립 당시부터 선교하는 교회로 나아간 한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 선교 20년의 교회가 그것도 처음으로 장립하는 7명의 목사 중 한 명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획기적인 사건을 통해 1907년 부흥 운동의 결과가 이같이 확장됨을 볼 수 있다.

③의사봉 제정이다.

의사봉을 제정하여 회의 전통을 세우는데 노력하였다.

④대리회의 조직이다.

전국을 한 개의 노회로 묶어 놓으니 그 지역이 너무 넓어 노회가 자주 모이기 곤란하므로 종전의 소회(小會) 대신에 경기, 충청, 평남, 함경, 경상 및 전라지방에 대리회(代理會)를 두어 노회의 위임 시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독노회는 출발부터 선교하는 교회의 모습을 보였는데, 1907년 첫 졸업생 가운데서 이기풍 목사를, 1908년에는 졸업생이 없었고, 1909년의 8명의 졸업생 중 최관흘 목사를 시베리아에 선교사로 파송한 것이 좋은 예이다.

1911년까지 독노회가 모이다가 1912년부터 총회로 모이기로 하였다. 지금까지의 7 대리회를 7노회로 조직키로 하고 독노회가 발전적으로 총회가 되도록 하였다.

1912년 9월 1일 여성경학원(女聖經學院)에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가 회집되었는데 회원은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 계 221명이 회집하였다.

이 때 선출된 임원은 회장 언더우드, 부회장 길선주, 서기 한석진, 부서기 김필수, 회계 방위량(W. N. Blair), 부회계 김석창 등이었다.

총회 설립 기념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하고 1913년에 선교사를 파송하여 1957년에 방지일 목사가 중공 치하에서 귀국하기까지 45년 동안 선교사업을 하였다.

역대 산동성 선교사는 김영훈(金永勳), 박태로(朴泰魯), 사병순(史秉淳), 박상순(朴商純), 홍응한(洪承漢), 방효원(方孝元), 이대영(李大榮), 방지일(方之日), 김호순(金好淳) 등이다.

이것을 보면 독노회 조직 기념으로 제주도선교를 실시하고 그 후 시베리아 선교, 일본 유학생 선교에 이어 중국 선교는 첫걸음을 딛는 한국 교회의 미래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쾌거이며, 안에서 일어나는 부흥의 불길을 밖으로 확산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한국에 주재하는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교파사이의 친선도모, 전도사업, 문서사업, 의료사업, 교육사업 등을 협의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1905년부터 시화하였고, 한 때에는 한국에서의 선교 정책을 결정하기도 하였다.

1911년부터는 선교사 대표들과 한국인 교회 대표자들로서 장감연합회를 조직하여 연합사업을 실시하였다.

한국에 여러 교파들이 들어오고 국제 관계가 긴밀해지자 장감연합회만으로 부족하여 한국에 있는 각 교파 대표자들과 선교사 대표자들로서 조직하였고, 김필수 목사를 초대 회장으로 뽑았다.

이 공의회에서는 국제 관계의 교량 역학을 하였는데, 세계적 대회에 대표들을 파송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전국적으로 전도 대회를 개최하였고, 1929년 서울에서 박람회가 개최되었을 때 박람회장 부근에 천막을 치고 연 100회의 집회를 개최하였다. 또한 이 기관에서는 일본에 있는 교포 전도를 위한 사업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의 한국 실정은 일본의 군국주의가 날로 팽창하여 감에 따라 소위 황민화 정책으로 민족성의 말살을 기도하는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은 대륙 점령이라는 그들의 야심을 성취하기 위한 첫 단계로 만주를 점령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 정부를 세우고 중국 황제의 후예인 부의를 명목상의 왕으로 앉혔다. 또한 1936년에는 노구교 사건을 일으켜서 중국을 침공하는 구실을 만들었다. 이러한 전쟁 준비 과정 속에서 일본은 국민정신의 일체감을 집약하기 위하여 그들의 종교인 신도를 강요하게 되었고, 이것을 한국의 기독교회에도 강요하여 수난의 바람이 불어왔으며 마침내는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의 씨가 되고 말았다.

1945년 민족의 해방을 맞을 때까지 이와 같은 비탄의 고통이 한국 교회에 주어졌는데, 수많은 순교자의 피를 흘리게 되었다.

1930년대에 와서는 교회 안에 소종파들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신자들의 내연된 신앙은 열광적 신비주의에 함몰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은 종파 운동에는 조선 총독 상부의 이간 정책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고 내적으로는 선교사들의 고압적 자세와 교회의 형식화가 큰 이유였다.

1930년대에 와서 한국 장로교의 징표들이 눈에 띄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지방색과 신학사상의 혼란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먼저 한국 장로교 안에 지방적 알력이 생기기 시작한 것은 대부분의 교인이나 지도자들이 북한쪽에 있었다는 것이다. 평양에는 평양 신학교가 있었고 평안도와 황해도 지방에는 보수적 사상들이 강하게 나타났으며 반대로 서울지방에 진취적 경향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점이다.

이와 같은 지방색은 1934년 총회에서 나타났는데 남부 지방에서 온 총대들을 <근대주의자>라고 비난하였고 남부지방 총대들은 북부지방이 교권을 장악하고 전채 정치를 한다며 총회에서 탈퇴하겠다고 위협한 일들이다.

다음으로 한국의 초기 선교사들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철저한 보수주의자들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하여 교육받은 한국인 목사들은 선교사들의 신앙과 사상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외국에 유학한 한국인 목사들이 귀국하자 이들은 세계 신학의 조류를 소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진보적 경향들이 한국에서도 나타내 보이기 시작하였다.

장로교 총회는 1917년 다른 신학교 출신자들이 장로교에서 일하려면 장로회 신학교를 이수하여야 한다고 결의하였는데, 이 결의가 오늘날까지 그 효력을 발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송창근, 김재준 목사 등이 진보적 사상을 대표하였다. 여기서 신학논쟁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평양 신학교의 박형룡 박사와 숭인 상업학교 교유인 김재준 목사 사이에 일어난 논쟁이다.

김재준 목사가 <신학지남>에 투고한 일련의 논문들이 성경의 축자영감설을 부인하고 고등비평을 시도하자 박형룡 박사는 이를 비판하였다.

이와 같은 사상적 대결의 근원은 박형룡 박사가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보수신학의 거두인 메첸 박사의 사상적 영향을 입고 전통적 기독교 신학을 강조한데 비하여 김재준 목사는 캐나다 선교부의 자유적 영향과 일본 청산학원에서의 자유적 신학 체험 등이 큰 이유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적 대결이 1934년과 1935년의 장로교 총회에서 신학적 분열을 노정시켰다.

1936년 제 25회 총회가 광주에서 회집되어 역대 총회 중에서 혼란과 불안을 주는 총회가 되었는데 여기서 다루어진 사건 2가지만 말하면 첫째 남북대결이다.

지금까지의 총회는 서북지방 인사들이 주도 되어 총회를 이끌고 나갔다. 여기에 대하여 남부지방 사람들의 반발이 매우 켰으며 자신의 문제를 지방색에 교묘히 이용하려는 일들이 일어났는데 그 하나가 마산 문창교회의 박승명 사건이다.

두 번째로 경중노회문제이다. 경중노회는 적극 신앙단이 서울에서 조직되었을 때 서울의 일부 목사들 즉 함태영, 전필순, 최석주, 이석진, 권영식 등이 보수적인 경성노회에서 분립하여 조직한 노회이다.

경성노회는 경중노회를 불법기관이라고 단정하고 가담자들을 제적하였는데 이로 인해 남북 감정대립과 아울러 총회 분립의 위기까지 생기게 되었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한국인의 정신적 와해와 교회의 붕괴를 위하여 여러 가지 교묘한 정책을 사용하였다. 그 중에 한국 전통의 창달을 이유로 하여 유교와 불교의 진흥을 꾀하였으나 교회를 붕괴시키지 못하자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되었다.

신사는 일본의 천황이나 무사들의 영을 섬기는 신도인데 여기에 한국인들을 참배케 하고 이를 통해 충성심을 시험하고 국민의례로 군국주의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참배형식의 가요가 교회에 시련을 주기 시작한 것은 한일합병 직후 일본 천황의 사진에 최경례를 하는데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별로 문제되지 않다가 1930년대에 와서는 그 양상을 달리하게 되었다.

1932년 9월 평양의 교회가 서기산에서 거행된 만주 출전 전몰 전사 위령제에 기독교 하교 학생들의 참례를 막았을 때 평안남도 지사는 이것을 종교행사가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여 참례를 강요하였다.

본격적인 강요는 1935년 평양의 기독학교에 대해서 정기적으로 참배를 강요한데서부터 시작되었다.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쿤 박사와 숭의 여학교 스누크 교장으로 하여금 학교대표로 신사에 참배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들이 신앙 양심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자 평안남도 지사는 60일간 여유를 주면서 그 때 대답하라고 하였다. 만약 거절하면 학교의 폐쇄와 선교사를 추방하겠다고 협박하였다.

맥쿤은 평양 시내의 27개 교회 목사들과 협의하였는데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사참배를 하나님의 계명에 위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교사들은 한국 교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평안남도 자사는 맥쿤을 교장직에서 면직시키고 미국으로 출국시켰으며 대대적인 신사 참배 강요를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하여 선교사들의 반응은 양분되었다. 신사는 국민의례이니 참배해도 좋다는 주장과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이니 참배하면 안 된다는 주장의 대립이었다. 소극론자들은 교회의 존립과 학교의 유지를 위하여 할 수 밖에 없지 않는냐는 논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반대하면 모진 박해나 검거가 뒤따르는 것이었다.

감리교에서는 일찍이 신사참배가 국민의례로 받아들이고 신사참배를 하고 있으나 장로교의 경우에는 그 양상이 달랐다. 1931년 9월 경난노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신사참배 강요가 계속되자 장로교 선교사들은 선교실행위원회를 1936년 초에 소집하고 미션 학교의 폐쇄를 원칙으로 정하며, 그해 10월의 위원회에서는 1938년까지 평양 내외의 학교 폐쇄를 단행하였고, 본국의 승인도 얻었다.

장로교회가 신사참배 강요의 고통을 겪고 1938년 제 27회 총회에서 강압적으로 참배 결의를 하는 비극을 초래하게 되었다.

1938년 적극적으로 노회가 모이기 시작하여 일본은 조직적으로 파괴 공작을 하기 시작하였고 반대자들에 대한 검속이 일어났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 27회 총회가 회집되었다. 일본 경찰 97명이 193명의 총대들 사이에 끼어앉아 회의를 감시하였다.

그 다음 날 오전 10시 박응률 목사가 신사참배는 국민의례이니 국민의 당연한 의무로 여겨 참배 결의와 성명서 발표 제안을 하였다. 이에 회장 홍택기 목사는 가만 묻고 부를 묻지 않은 채 가결을 선포하였다.

그러자 방위량 선교사와 한부선 선교사가 결의의 불법을 외치자 일본 경찰들의 폭력으로 밖으로 끌려 나갔다.

총회 폐회 후 부회장 김길창 목사가 각 노회장들을 인솔하고 평양 신사에 가서 참배하였다. 한국 교회의 신앙적 지조가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일본은 1939년 1월에 종교 단체법을 통과시켰다. 일본이 이 법을 활용하여 박해의 고삐를 더욱 죄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1940년까지 300여명의 목사와 신도들을 검거하였고, 이들을 교회의 교직에서 몰아내기가지 하는 박해를 계속하였다.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문을 닫고 보수적 선교사들이 퇴진하고 박형룡 박사가 만주로 망명하며 보수적인 저명한 목사들이 투옥되고 순교하자 새로운 신학교의 설립이 자유주의 신학계에서 일기 시작하였다.

채필근 목사의 제안으로 김영주, 차제명 목사와 김대현 장로 등이 주동이 되어 1939년 3월에 조선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조선신학교가 1939년 제 28회 종회에서 인준을 받았으나 평양신학교 재건운동이 일어나서 그것이 조선총독부 인가를 받자 조선신학교는 경성부의 강습소 인가를 받아 1940년 4월 19일 승동교회당 하층에서 개원하였다.

김대현 장로가 원장이 되고, 김영주, 함태영, 이정로, 윤인구, 김재준 목사 등이 교수로 취임하였는데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교의 본산지로서 오늘의 한국 신학대학이다.

일제의 박해 속에서도 이들은 자유주의 신학을 형성하기 위하여 신학교를 경영하였는데 제대로 그들의 교육이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며 한국 교회의 사상적 분열에 결정적 계기를 마련한 것이 되었다. 이들의 신학 교육은 일본의 강요라는 현실적인 문제에 부응하여 나아갔다.

8.15 해방과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신앙을 지키던 <수진성도>들은 감격적인 출옥을 하였다. 그러나 주기철 목사를 비롯한 50여명의 성도들은 순교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출옥 성도들은 평양 장대현 교회에 모여 한국교회 재건을 위하여 기도하고 의논하다가 1945년 9월 20일 다음과 같은 재건원칙을 발표하였다.

①교회의 지도자들은 신사참배를 하였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와 정화한 후 교역에 나갈 것.

②귄징은 자책이나 자숙을 방법으로 하되 목사는 최소한 2개월간은 통회 자복할 것.

③목사와 장로의 휴직 기간에는 집사와 평신도들이 예배를 인도할 것.

④교회 재건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실행하게 할 것.

⑤교역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재건 복구할 것.

그러나 출옥 성도들의 이러한 재건 방안은 일제하에서 교권을 가지고 일본과 타협하며 지냈던 일부 지도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쳤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45년 11월 평북노회 주최로 선천월곡동 교회에서 모인 교역자 회수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공박을 받은 신사참배 회개 문제는 각 사람이 하나님과 해결할 문제라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일제와 타협하고 배로한 자들의 자기 정당화 주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한국 교회의 현실은 한국 교회가 분열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을 보여 주고 있었으며 일제 치하에서 타협하며 지냈던 자들의 교권에의 집착이 신앙의 경건성을 주장하는 출옥 성도들의 의견을 압도하고 만 것이다.

장로교회는 해방과 함께 신학교 문제로 복잡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고려신학교, 조선신학교, 장로회 신학교 사이의 알력과 여기에 연결된 교권 문제 등으로 매우 복잡하였다.

고려신학교는 한상동 목사가 주남선 목사와 함께 설립한 학교로서 박형룡 박사의 귀국이 지연되자 박윤선 목사를 교장으로 하여 개교하였다.

경남노회와의 문제가 어려움 속에서 지탱되어 오다가 1949년 4월 제 35회 총회는 고려신학교가 총회와 관계가 없다는 결정을 하므로 고려파라는 새로운 교단이 형성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1950년 4월 대구에서 회집되었던 총회가 개회 벽두부터 고려신학교 문제와 조선신학교 문제로 소란하여 비상정회를 할 수 밖에 없었다.

1951년 5월 24일 피난지 부산에서 모인 제 36회 속회 총회는 고려신학교파를 정죄하고 이들을 잘라내었다. 그러자 출옥 성도들을 중심한 고려신학교파는 <경남 법동 노회>를 구성하고 분립하고 말았다.

이것이 한국 장로교회의 제 1차 분열이다. 신사참배 문제와 교회의 재건에 대한 견해 차이가 한국 장로교를 분열하는 사태로 몰아갔다.

고려신학교파의 분열은 신앙의 문제였으나 제 2차 분열인 조선신학교파 <기독교 장로회>의 분열은 신학이 문제였다. 지금까지 한국장로교회의 정통적 보수 신학에 도전하여 자유주의를 교육하는 김재준 교수 등의 신학 방법론에서 문제가 생겼다.

이것은 1930년대의 평양신학교 시대부터 오는 신학적 대립 양상이었는데 이것이 해방 후 서울에서의 혼란을 거쳐 피난지 부산에서 그리고 수복 서울 등을 전전하며 그 극에 이르게 되었다.

1951년의 제 36회 소회 총회는 조선신학교의 직영을 모두 취소하고 총회신학교를 직영키로 하였다. 이 결의는 조선신학교의 합법성을 자연 부인하는 것이 되었고, 그 결의에 따라 1951년 9월에 총회신학교가 대구에서 개교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조선신학교파의 분립은 불가피하였다. 1953년 6월 10일 서울의 한국 신학대학 강당에서 분립된 9개 노회 총대 47명이 모여서 스스로 한국 장로교의 법통 총회라고 선언하고 제 38회 총회를 선언하였다. 1954년 6월 10일 제 39회 총회를 열어 교파 명칭을 <한국기독교 장로교회>로 개칭하였다.

한국 장로교회는 1951년의 제1차 분열(고려파) 1953년의 제 2차 분열(기장측)의 상처를 안고 폐허에 싸인 6ㆍ25의 비극 속에 고통당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서도 1959년 제3차 분열의 비극을 겪게 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세칭 합동측과 통합측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지는 분열이다.

1959년 9월 24일 장로교 제44차 총회가 대전에서 회집되었다. 경기노회의 총대권 문제로 회의가 진행되지 못하다가 증경총회단의 제의대로 11월 24일까지 정회하기로 가결하고 선포하였다.

그러자 여기에 불만을 품은 인사들이 임원 불신임안을 긴급동의로 제안하고 기차를 대절하여 서울에 올라와 연동교회당에서 계속 회의를 한 후 총회를 구성하였는데 이 총회를 세칭연동파라고 부른다.

대전의 제44회 총회 제43회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결의한대로 1959년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제44회 속회 총회가 모여서 임원을 개선하고 회무를 진행하였는데 이것을 세칭 승동파라고 한다.

연동파는 1969년 2월 17일 서울 새문안교회당에서 모인 통합총회에서 흡수되었다. 이 총회는 노회장 연서로 소집되었으며 <총회 통합발기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개인 자격으로 회집되었다. 그래서 이 모임의 계파를 세칭 통합측이라고 한다.

승동측은 1960년 12월 고신측과 합동하여 세칭 합동측을 형성하여 나아오고 있다.

장로교 3차 분열은 여러 가지 측면으로 고찰 할 수 있으나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한 견해 차이가 가장 큰 요인이었다.

1960년 9월 24일부터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회집된 제 45회 총회에서는 정치부장 권연호씨의 보고 중 결의안 제1항 신앙노선이 같은 고려파와의 연합에 관한 것은 연합하기로 가결하고 합동 위원 9명을 선출하였다.

1951년 고려파의 분립 이후 10년 만에 이루어진 연합운동은 1954년 이후 몇몇 뜻있는 인사들의 계속적인 접촉과 노력으로 성취되었다.

1954년 3월 부산에서 회집된 고신측 총회에 몇몇 인사가 개인 자격으로 고신 총회의 의견을 타진하였다.

이때 고신측이 주장한 것은 첫째로 연합시기가 아직 이르다. 둘째로 고신 단절의 과오를 사과 성명하여야 한다. 셋째로 W.C.C와 미국 북장로회와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고신측의 주장은 시간이 감에 따라 다 해결되었다. 1964년 교회에 모인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취소하고, 통일총회로서 정당한 법적 절차를 취할 뿐아니라 출옥 성도 이원영(李源永) 목사를 총회장으로 추대하였고 1959년 11월 제 44회 속회 총회에서 W.C.C의 탈퇴와 아울러 미국 북장로회와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1960년 9월 20일에 부산에서 회집한 고신측 제 10회 총회에서는 승동측과 연합을 추진하기로 결의하고 위원을 선정한 후 정회하였다. 승동측에서도 연합 위원을 선정하고 정회하였다.

쌍방의 위원들은 1960년 10월 25~26일에 대전에서 회집하고 1960년 12월 12일에 서울에서 회집하여 연합안을 결정한 후 쌍방 총회가 서울에서 다시 회집하여 연합안을 채택하고 1960년 12월 13일 오후 6시반에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쌍방 총대들이 회집하여 연합 총회를 형성하였다.

승동측과 고신측의 합동으로 한국 장로교회에서의 보수적 기운이 농후하여 졌고 그 결과 개혁주의 신앙 형성에 큰 기대를 갖게 하였다.

연합기간 중에 국제 기독교 연합회(I.C.C.C)와 우호 관계를 단절하였고, 장로교의 단일교단 형성을 이한 재연합 운동이 추진되는 등 괄목할 만한 일들이 계속되었으나 1963년 9월 총회는 고신측의 <환원>이라는 기치아래 재분립(再分立)하고 말았다.

그러나 과거 고신측 교회 가운데서 약 200여 교회가 합동 총회에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468교회가 옛 고신측으로 환원하고 고려신학교를 복교하여 교단을 재정비하였다.

고신측의 환원에 대하여서는 여러 가지 이유를 열거할 수 있으나 신앙 생리와 교권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고려파 10년 동안의 경건주의 신앙 형태가 합동으로 말미암아 잠식당한다는 의식이 생기기 시작하였고 배타적 생리가 적응되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또 교권 문제가 크게 대두되어 직접적으로 분열의 불씨가 되었다.

환원한 고려파는 전 교단적으로 목사와 장로들이 1주일 동안 자숙하기로 결의하고 교단 재정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자 고려파의 환원은 한국에서의 개혁주의 운동을 약화 내지 분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나아가서 한국 장로교회의 분열을 더욱 가속화 시킨 결과를 초래하였다.

1969년의 제 3차 분열에 의하여 나누어진 양 교단에서 연합운동이 계속하여 일어났다. 특히 지방노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이 연합운동에는 평신도들이 호응하여 연합 분위기가 매우 성숙하여졌다.

1967년 7월 세계 장로회 연맹 제네바 본부 총무를 맡길 프라더반 목사가 기장과 통합특 초청으로 내한하였다.

1967년 7월에 통합측 전북노회 창립 50주년 기념 교육대회가 전주에서 모였을때 연합을 하자는데 의견을 모으고 합동측 전북노회 인사들과 접촉하여 쌍방이 이에 찬동하게 되었다.

또한 1967년 9월 합동측 경북노회에서는 통합측과 합동을 논의한 후 9명의 합동위원을 선정하였고 같은 기간에 모인 통합측 경북 노회에서도 합동 위원 7명을 선정하여 합동측 위원들과 협의케 하였다.

이와 같은 합동 운동이 경북지방의 각 노회를 비롯하여 여러 지방에서 일어났고 합동 기운이 매우 성숙하게 되었으며 부산, 대전 지방에서도 강하게 연합 운동이 일어났고 서울 지방에서도 연합 촉진회를 구성하여 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지방에서 일어난 상향식(上向式)연합 추진 운동은 1967년 9월에 모인 제52회 총회에서 양측 모두 합동위원을 선정하고 <정회>하여 연합의 실현을 위한 법적 조치를 하였다.

양측 대표들은 수 차례의 회의와 절충 끝에 합동 원칙과 세칙 및 절차에 합의를 보고 합동아 통과를 위하여 속회 총회를 1968년 4월 18일까지 각 노회에 수의하여 수의가 끝나는대로 1968년 4월 30일 오후 2시까지 서울에서 양측 총회장 명의로 합동 총회를 소집하도록 결의하였다.

이러한 과정속에서 양측 각 지방 노회에서는 합동 추진운동이 계속 일어났고 평신도들이 여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통합측 일부에서는 합동 저지 운동이 일어났으며 여기에 미국 연합장로교 선교부의 작용이 있었다. 이들은 W.C.C.와 N.C.C.관계에 대한 합동 조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고 그 결과 합동 저지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였다.

양측 합동 위원들의 합의대로 합동측 속회 총회가 1968년 3월 1일에 대전중앙교회에서 회집되어 합동 절차와 세칙을 많은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으며 합동을 추진하는 준비 작업을 완료하였다.

그러나 통합측에서는 합동위원들이 요청하는 총회 소집 요구를 당시 총회장 김윤식 목사가 거부하므로 속회 총회가 소집되지 못하고 합동 운동이 실패로 돌아갔다.

한국 교회는 1965년 김활란 박사를 중심으로 하여 전국 복음화운동을 발기하였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완수하는 것이었고 나아가서 전통교회의 자세를 더욱 분명히 한 쾌거였다.

전국 복음화 운동은 후에 민족 복음화 운동, 전국 신자화 운동 등으로 심화되어 각계 각층에서 복음 선교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한국 교회는 시대의 변화 앞에서 자신의 진로를 찾아야 했다. 1960년의 부정선거에 대하여 방조자 내지 협력자 노릇을 한 교회의 오명을 씻을 수 없었고, 4?19를 통하여 교회는 자성(自省)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었다.

1965년에 시작된 한일협정 회담과 삼선개헌 문제에 대하여 일부 교회 인사들은 반대 의사를 표시하고, 기도회와 데모 등을 하였으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교정분리원칙(敎政分離原則)에 따라 침묵을 지켰다.

이와 같은 양분화된 교회의 의견은 한국 교회의 진로에 대한 우려를 가지게 하여 신학 사상에서부터 현실관(現實觀)에 이르기까지 각 분야에 대한 양극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자유주의적 교회들이 현실 참여를 위해 정치적 발언을 강화하였으며 현실에서 주어지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하여 강력한 태도를 표명하였다.

또한 월남전 참전 문제에 대한 교회의 반응도 심각하였다. 찬반의 두가지 격론속에서 한국 교회는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켰다.

1960년대의 한국 교회는 자유주의적 인사들은 현실 참여를 주장하여 행동화하였고, 보수적이며 복음주의적 인사들은 민족복음화 운동을 구체화 시키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한국 교회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현실에 대응하는 교회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1970년대 말에 와서 한국 장로교회는 신학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보수측과 진보측으로 양분되었다. 이 양분의 흐름속에서 한국의 보수교단을 대표하는 합동측 총회가 1979년 대구동부교회에서 모인 총회를 깃점으로 일부 인사들의 이탈이 있었다.

이러한 이탈은 한국 보수교회의 크나 큰 손실인 동시에 하나의 치부를 노출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탈하여 나간 이들 사이에 교권문제로 인한 연쇄분열 작용이 일러나 수 많은 군소교동들이 생겼다. 또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합동측과 관련이 없는 사람들도 자칭<합동××측>이라고 하여 합동측 교단에서 분열한 듯한 인상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교회들이 복귀하였고, 또 이탈한 형제들은 영입하려는 노력이 교단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남으로 분열에서 단합으로 나아가는 조짐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위해서도 매우 바람직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특히 1979년 제64회 총회에서 예장총회와 예장개혁측이 분열된 후 26년 만인 2005년 9월 27일 제90회 총회(장소: 대전중앙교회)에서 극적으로 합동이 되었다. 이제 예장 합동 교단은 1만교회가 넘는 한국의 장자교단으로써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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